[ 금주의 독서 메모 ] 25권~ 3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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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독서 메모 025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3.21.

[ 그리스도인의 익살 (1) ] - '하느님도 농담을 하실까?'

- 지은이 : 구병진 신부
- 그리스도인의 익살 1권 (240가지 유머 수록)
- 지은이 프로필 : 1946년 경남 진해 출생, 1974년 사제 서품,
1979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 신학박사,
1979년~ 경남 의령본당 주임신부, 대구 가톨릭대학 교수 등

[ 표지의 글 ]
웃을 줄 아십니까? ‘하느님도 농담을 하실까?’에는 웃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꼬집는 익살이 있습니다. 꼬집는데 아프지 않고 시원합니다. 고리타분한 생각을
툭 터주는 가슴 후련한 웃음이 있습니다. 웃고 삽시다. 그리고 너그러워집시다.
웃음엔 여유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이 있습니다.


[ 책머리에서 ]
- 경향잡지에 ‘그리스도인의 유머’가 연재되고 있는 지가 5년이 되었다. 그 동안
제목은 ‘웃음으로 배우는 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유머’로 바뀌었다. 경향잡지에서
그 동안 연재된 분량을 묶어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판하게 되어 고맙고 기쁜 마음이다.

-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구원에 대한 다이내믹한 기쁨(복음)이 그 특징이다.
이 기쁨은 곧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그의 인격적인 삶(믿음, 희망,
사랑)에서 우러나오게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기쁨과 웃음과 여유를
상실한다면, 이는 우리가 복음의 진수를 살지 못하고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기쁨과
웃음, 유머와 여유가 사라지는 곳에 그리스도교도 사라진다고 하였던 어느 신부님의
글이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 “주님, 우리 교회가, 우리 성직자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게 보호하여 주소서. 오늘도 우리 모두가 기쁨과 인정으로 남을 대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 본 책(그리스도인의 익살/ 1권)에는 총 240가지 내용의 유머가 실려 있다.
이중 20여 가지만 비교적 짧은 내용의 유머들을 발췌하여 독서 메모로 하였다. #




<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 >
루드비히 14세 때의 일이다. 프랑스의 한 주교님이 어떤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다.
똑똑하게 생긴 여덟 살 난 그 집 아들에게 식탁 위에 있는 과일 바구니에서 오렌지
하나를 집어 들고서 주교님이 물었다. “아가, 이 오렌지를 줄 테니까,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말해 볼래?” 그랬더니 그 꼬마의 대답이 수준급이었다. “주교님!
그럼 저는 요, 이 오렌지 바구니 전체를 다 드릴 테니까요. 하느님께서 어디 안
계시는지를 알려 주실래요?”

< 다만 하느님의 별명이 죽었을 뿐 >
-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사랑하올 하느님”이 죽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주 하느님”이 죽었다. 그 훨씬 전에는 “찬미하올 하느님”과 “감미로운 하느님”이
이미 죽었다. 그러나 마냥 “하느님”은 여전히 살아 계신 것이다.

< 위로 >
- 성 목요일이다. 다섯 살 난 아들 녀석이 자기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제
예수님이 죽으시는 거지?” “그럼, 예수님은 이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단다!”
아들 녀석이 걱정이 되는 듯 엄마를 위로하며 하는 말이 “엄마, 너무 슬퍼하지 마!
우리 본당 신부님이 예수님을 주일에 다시 깨어나게 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

< 100살까지 >
- 교황 비오 9세는 32년간이나 재위한 교황으로 유명한데, 그 뒤를 이어 후임자인
레오 13세도 이미 22년이나 재임하였다. 1900년에 레오 13세가 90세의 생일을
맞았는데 어느 날 알현 왔던 귀부인 한 사람이 교황께 축하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인사하였다. “교황 성하, 저는 우리 교황 성하를 100살까지 살게 해 달라고 매일
저녁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사옵니다!” 그랬더니 레오 13세가 반가운 표정으로
빙긋이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기도는 좋지만 왜 당신은 하느님의
그 무한한 은총에 제한을 가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 하느님의 첫사랑 >
- 파리의 어떤 모임에서 교황 대사로 있던 롱칼리 추기경과 프랑스의 유다교 최고
랍비가 마침 일인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두 분이 한꺼번에 탈 수는
없고 해서 랍비가 점잖게 교황 대사보고 “먼저 타고 가십시오!”하며 권했다. 그랬더니
롱칼리 추기경이 “아닙니다. 랍비께서 먼저 타셔야지요!” 하며 또 양보하였다. 그리고
서로 입장이 곤란한 시간이 잠시 흘렀다. 드디어 롱칼리가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다. “랍비님 절대로 저보다 먼저 타고 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먼저고 그 다음에 신약이니까요!”

< 욕지거리 >
- 요셉이 새로 산 오토바이의 시동을 열심히 거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 번 시도를
했는데도 시동이 걸리지 않자, 연방 “집구석”, “미치겠구만”, “환장하겠구만”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본당 신부님, 이를 듣고 점잖게
훈계하신다. “요셉아, 화내고 욕지거리 해댄다고 일이 잘될 게 뭐 있니, 욕지거리
해대지 말고, 대신에 ‘하느님 저를 좀 도와주소서!’라고 하거라 그게 훨씬 낫느니라!”
본당 신부님 말씀대로 “하느님, 저를 좀 도와주소서!”하고 요셉이 외쳤더니,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순간 그렇게도 애를 먹이던 오토바이가 “부르릉.....”하며 시동이
걸렸다. 신이 난 요셉이 그걸 타고 쏜살같이 내빼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물끄러미
요셉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던 본당 신부님이 정말 자기도 놀랐다는 듯이
“집구석, 미치겠구만, 도대체 그렇게 빨리 효과가 나타날 줄이야.....”하는 것이었다.

< 보좌 신부 >
- 주일 학교 3학년 교리반 선생님이 ‘본당’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본당 신부’를
설명할 차례가 되었다. “‘본당 신부’는 원래 라틴어 ‘파스토르(Pastor)’에서 왔는데,
그 뜻은 양을 치는 사람,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본당
신부님이 본당의 목자라면 그럼 누가 양들이겠어요?” 그랬더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양들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만족한 표정을 짓게 된 교리반
선생님이 ‘보좌 신부’를 설명할 순서가 되어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그럼 보좌
신부님은 어떤 분일까요?” 언뜻 아무도 대답을 못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맨
앞줄에 있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는 대답을 하였다. “네, ‘보좌 신부’는 양떼를
지키는 개‘가 되겠지요!”

< 본당 신부의 논리 >
- 본당의 사제관 신축을 협의하기 위해 본당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본당 신부가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사제관을 지을 대지를 매입하는데 20%가 필요
하며, 사제관을 짓는 건축비가 85% 정도 들어갈 것 같으며, 내부 장식 및 가구비로
20%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한 간부가 본당 신부님의 말을 가로
지르며 이의를 제기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퍼센트를 전부 합치면 125%가
됩니다. 뭘 잘못 계산한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본당 신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네, 거 보세요! 그러니까 25%를 더 모금해야 한다, 그 말씀
입니다!” 간부들 : “.......??? ”

< 성서와 운명 >
- 바오로는 좀 미신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성서를 펼쳐 그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을 바로 그날의 자기 운명으로 삼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달 13일, 금요일 아침에 성서를 펼쳤더니 다음의 구절이 눈에 들어 왔다.
“유다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바오로는 그 구절을 안 본 것으로 하고
황급히 성서를 덮었다. 다시 한 번 그날의 운을 알아맞히기 위해 눈을 감고 조심조심
성서를 펼치니 아래의 구절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너는 가서 그것을 실행하여라!”
바오로의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는데 그날의 운명이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여겨 세 번째로 성서를 조심스레 펼쳤다. 그랬더니
설상가상이란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인가?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네가 하려는 바 그것을 속히 실천하여라!” 이 일이 있은 후 바오로는 다시는 그런
식으로 성서를 미신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매일매일 열심히 정독하는 신자가 되었다.

< 성서 해석 >
- 어느 날 개신교 신학생과 가톨릭 신학생이 성서 해석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개신교 신학생이 가톨릭 학생에게 뺨을 냅다 후려갈기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도대체 자네, 성서를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가? 마태오 5장 39절!” 마태오 5장
39절은 이렇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뼘마저 돌려 대어라.” 뺨을 한 대 얻어
맞은 가톨릭 신학생이 분을 참지 못하고 “그래, 난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루가
6장 38절, 이것만은 잘 알고 있지!” 하며 자기가 맞은 것보다 더 세게 개신교 신학생
따귀를 갈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루가 6장 38절은 이런 내용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혀를 차며
한마디씩 하였다. “쯧쯧, 요즘 신학생들은 성서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군!”

< 이의 제기 >
- 옛날 천주교 요리 문답에서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마지막 문제를 죽음,
심판, 천당, 지옥으로 구별하고 이 네 가지를 사말(四末)이라 하였다. 그런데 교리반
시간에 3학년짜리 요한이 이 사말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 생각에는 사말이 아니라 삼말(三末)이라야 맞을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
하니?” 하고 교리반 선생이 묻는다. “죽음이 오고 그 다음에 심판을 받고 나면,
천당 아니면 지옥, 이 둘 중의 하나에 가야 하니까요!”

< 장지에서의 강론 >
- 본당의 교우 한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집전하게 되었는데, 본당 신부는 그 죽은
교우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의사였고 아주
마음이 고운 분이었다는 것만 누가 귀띔해 줘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장지에서 강론을 통해 고인의 일생 동안 ‘형제들’의 건강을 위해 헌신해
왔음을 몇 번씩이나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참석자들의 표정이 퍽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떻든 예식이 다 끝났다. 장지를 떠나려는데 조객으로
참석한 어느 교우가 본당 신부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었다.“ 신부님,
돌아가신 의사는 수의사였습니다!”

< 애긍함 >
- 한스는 아빠와 엄마를 따라 난생 처음으로 성당에 가게 되었다. 지루한 미사가
끝나자 아빠가 동전 한 닢을 한스 손에 쥐어 주면서 애긍함에 넣으라는 손짓을 했다.
한스가 그 동전을 구멍에 넣고 나더니 그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뭔가를 찾는
것이었다. 아빠가 “가자, 가자!”하며 한스의 손을 붙잡고 나오려니까, 한스가
이상하고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아빠를 쳐다보며 “아무것도 나오지 않잖아! 아빠,
이건 진짜 사기꾼이잖아!” 하였다. 한스는 애긍함을 자동판매기로 착각한 것이다.

< 모금 >
- 옛날 어느 프랑스 성당에서 모금 바자회를 열었는데 금화 한 닢을 모금통에 넣게
되어 있었다. 바자회가 끝나 계산을 해보니, 분명히 모금통에 금화 한 닢을 넣은
사람은 50명이었는데 49개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인색하기로
소문난 구두쇠 영감을 지목하여 금화를 넣는 체하면서 안 넣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구두쇠 영감은 끝까지 분명히 자기는 금화 한 닢을 넣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따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본당 간부들이 본당 신부한테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본당 신부는 “ 나는 보지는 못했지만
그걸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는데, 본당 회장은 “나는 보긴 했지만 그걸 믿지
못하겠습니다.”하 는 것이었다.

< 착각은 금물 >
- 개신교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슬라이어마허 교수(1768-1834)에게 어떤 신사가
그의 설교가 너무 좋아 인기가 대단하며, 많은 청중들이 설교를 들으러 온다고 축하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슬라이어마허 교수가 그 칭찬에 대해 차분한 반응을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건 사실이지만, 제 설교가 좋아서는 아니올시다. 보십시오. 제 설교를 듣는 청중은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지요. 대학생들과 아가씨들과 군인장교들 말입니다. 학생들은
시험관인 나에게 잘 보이려고 오는 것이며, 아가씨들이 오는 것은 대학생들 때문이며,
장교들이 오는 것은 아가씨들 때문입니다.”하며 겸손해 하였다.

< 강론의 원칙 >
- 어느 본당에 보좌 신부가 새로 부임하여 주일 미사에 교우들에게 첫 강론을 하게
되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본당 신부님께 아래와 같이 조언을 구하였다. “본당 신부님,
제 강론에 혹시 특별히 주문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저를 위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 본당 신부님이 한바탕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보좌 신부님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의 사랑하는 보좌 신부님, 강론은 신부님 마음속에 든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뭐든지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단 한가지만은 절대로
어기지 마십시오. 10분을 초과하지 마십시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 시작은 좋은데 >
- 믿음이나 교회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는 냉담 교우인 농부가 하루는 명강론가인 손님
신부님의 강론을 듣기 위해 모처럼 성당엘 왔다. 그날의 강론은 돈에 관한 것이었는데,
제1부의 제목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많이 벌어라’였으며, 제2부의 제목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많이 절약하라’였다. 바로 이점이 농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정도면 성당에
다닐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제3부의 제목이 알려졌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많이 주어라!’ 그러자 너무도 실망한 그 농부가 내뱉는 말이 이러하였다. “아, 참 안됐군,
안됐어, 시작은 참 좋았는데, 끝이 형편없군!” 그리고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당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 보속의 효과 >
- 어느 부인이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자기 죄는 고백하지 않고 자기 남편의 잘못만
불평조로 애기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고해신부가 그녀의 고해가 끝난 다음, 다음과
같이 보속을 주었다. “당신 죄에 대한 보석으로는 ‘주의 기도’를 세 번(2~3분소요)
하시고, 당신 남편의 죄에 대한 보속으로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세 번(60분 소요)
하십시오!” 그 고해성사 뒤부터 부인은 꼬박꼬박 자기 죄만 고백하는 것이었다.

< 기도의 속셈 >
- ‘스탄베르그’ 호수 한가운데서 아들과 함께 그물질하던 ‘셈’이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셈’이 기도를 바친다. “위기 때 도움을 주시는 열네 분의
성인들이시여, 무사히 도착하게만 해주신다면 초 한 자루씩 봉헌하겠심더!” 그런대
폭풍이 더 세차게 몰아치니까. “아이고, 그라모 미사도 한 대 봉헌할게요!” 번개가
배 옆에 꽝하고 떨어진다. “어이구, 게다가 로마 순례도 갔다 오겠심더!”하고 기도하니
아들 녀석이 한다는 말이, “아부지, 정신 있능교, 없능교? 로마순례가모 돈이 무지무지
하게 안 들어 가능교?”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셈’이 내 뱉는 말이 “가만히 좀 있거라,
무사히 호수가에 도착하모 그때 가서 잘 생각해 보모 될거 아이가!”하는 것이었다.

< 아빠를 위한 기도 >
- 저녁 식사 때 아빠가 내일 아침 ‘초특급열차’를 타고 출장을 간다면서 그 열차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애기를 했다. 그러자 엄마가 기차가 너무 빠르면 위험하지
않느냐고 걱정하는 것을 다섯 살 된 딸아이가 듣고 있었다. 두어 시간 후 잠자리에
들기 전 저녁 기도를 바치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내용인즉슨,
“사랑하올 주님, 제발 우리 아빠가 탈선하지 않도록 해주셔요!”

< 과잉 기도 >
- 저녁 식사 준비가 다되었다. 그런데 실은 식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이 전에 먹다
남았던 것들을 모아 다시 내놓는 것이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식사 전 기도를
바칩시다!”하고 말하니 식탁위의 음식들을 한 번 훑어 본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
하는 것이었다. “여보, 여기 있는 음식들은 다 우리가 전에 몇 번씩이나 기도를 한
것들이잖소? 안 그렇소?”

< 오 행복한 죄여 ! >
- “어린이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했더니 꼬마 녀석 한 놈이 손을 번쩍
쳐들고 자신 있다는 듯이 큰소리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죄를 짓는 일입니다!”


< 거짓말 >
- 두 꼬마가 케이크 한 조각 때문에 다투고 있는 판에 본당 신부님이 다가 왔다.
“왜들 싸우고 그러니?”하고 신부님이 끼어들었다. “우리 둘 중에서 더 큰 거짓말을
한 사람이 이 케이크를 혼자 다 먹기로 약속을 했었어요!”하고 한 꼬마가 대답하였다.
“예끼 녀석들, 거짓말 하는 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아니?” 하면서 본당 신부님 왈
“나는 내 평생에 아직 단 한 번도 거짓말 해본 적이 없느니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다른 꼬마 녀석이 “야, 그 케이크를 신부님께 드려라!”하더라나.

< 노아의 홍수 >
-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잠시 후에 소나기가 퍼붓듯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병원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중년 부인 환자 한 분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한마디 하였다. “이건 노아의 홍수 같군요!” 그랬더니 그 병실에 있던 간호원이
노아의 홍수가 무슨 뜻인지를 못 알아듣고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환자가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 노아의 홍수말이예요. 그 왜 있잖아요?
거의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이 죽었다고 하는 그 홍수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간호원이 난처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워낙 바빠가지구, 요 며칠 동안 신문을 전혀 못 봤지 뭐예요.....“


 

금주의 독서 메모 026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3.27.

[ 그리스도인의 익살 (2) ] - ‘하늘나라의 웃음 잔치’

- 지은이 : 구병진 신부/ 157p
- 그리스도인의 익살 2권 (190여 가지 유머 수록)


[ 표지의 글에서 ]

봄비처럼 촉촉이 마음을 적셔 주는 웃음, 폭양 속에 쏟아지는 장대비 같은 시원한
웃음, 가을 들녘의 황금 햇살처럼 넉넉한 웃음, 엄동설한의 노송 같은 꼿꼿한 웃음,
‘하늘나라의 웃음 잔치’에는 이런 웃음이 있습니다. 이 웃음의 사전에서 당신의
행복을 찾아가십시오.


[ 책머리에 ]

- ‘경향잡지’에 연재하고 있던 ‘그리스도인의 유머’를 일부 모아 ‘하느님도 농담을
하실까?’라는 제목을 붙여 한권의 책(1권)으로 엮었다. 이번에 또 ‘경향잡지’에
연재하는 나머지 유머들을 모아 ‘하늘나라의 웃음 잔치’(2권)라는 제목으로 나오게
되었다. .... 우리도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깨끗한 사람이 되어 보자! 마음에서
나오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을 뒤로 하고 웃음과 여유, 조그만 기쁨과 행복을
되찾고 앞으로 나가 보자!

- 토마스 모어 성인의 기도를 날마다 바치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주님, 제게 유머
감각을 선물로 주소서! 저에게 농담을 이해하는 은총을 주시어 저로 하여금 삶속에서
조그만 행복을 깨닫고 이 행복을 남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 본 책(그리스도인의 익살/ 2권)에는 총 190가지 내용의 유머가 실려 있다.
이중 30여 가지의 비교적 짧은 내용의 유머 중에서 발췌하여 독서 메모로 하였다. #


< 개구쟁이들의 하느님 >
- 어느 시골 본당의 사제관에는 터가 넓어 여러 가지 과실수를 심어 놓았는데 이른
가을철만 되면 채 익지도 않은 감, 사과들을 몰래 따 먹으러 오는 동내 개구쟁이들
때문에 본당 신부가 크게 골치를 앓았다. 24시간 내내 지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채
익지도 않은 것을 그냥 따먹게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해서, 그 개구쟁이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로 마음을 먹은 본당 신부가 하루는 다음과 같은 팻말을 만들어 꽂아 놓았는데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하였다. “하느님께선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본당 신부가 ‘이젠 별일 없겠지!’하고 그곳에 가보았더니 과일은 과일대로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 팻말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태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절대로 비밀을 지켜주십니다!”

<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 보좌 신부가 주일 학교 1학년 반에 들어가 ‘가나안’ 땅을 설명하는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하였다. “어린이 여러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땅이
도대체 어떤 땅일 것이라고 상상합니까?” 똑똑하게 생긴 꼬마 마리아가 손을 번쩍
들더니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네, 신부님, 그 땅은 끈적끈적할
거라고 상상되는군요!”

< 상투적인 오해 >
- 열심한 교우가 경영하는 어느 시골의 조그만 식당에 여행 중이던 두 신부님이
찾아 왔다. 두 신부님은 음식을 시켜 서로 담소하며 맛있게 먹고 나서는 성서의 한
구절을 놓고서 조그만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결론이 나질 않자 그중 한 분이 음식점
주인을 불러 성서를 갖고 계시면 좀 보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참 뒤에 주인이 나타
났는데 부탁한 성서는 아예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 주인이 멋쩍은 모습으로, 그러나
정중하게 두 신부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두 분 신부님, 머할라꼬 그래쌓습니꺼?
저는 마, 다 알고 있슴더. 아주 멋진 성경 구절 찾아갖꼬 제한테 읽어 주실라꼬
그라능기지예? 그랄 필요가 머 있습니까? 저는 예, 성서를 갖다 달라꼬 하시기 전에
이미 맘속에서 돈 안 받을끼라꼬 결심하고 있었던기라예!” 두 신부들 : “ ........ ??? ”

< 저 위엣 양반 >
- 로마 교황청 국무성 장관 도미니코 타르디니 추기경은 교황 요한 23세를 가장
가까이 보필한 분인데, 처음에는 요한 23세의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장난기 섞인
행동에 잘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자신의 사무실은 1층에 있었고 교황의 집무실은
5층에 있었으므로 타르디니 추기경은 교황을 지칭할 때에 항상 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저 위엣 양반”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세상에 안 밝혀지는 비밀이 없는
법인데 좁은 바티칸 안에서 그 비밀이 오래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얼마 안 있어
이 비밀이 교황 귀에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들은 요한 23세가 하루는
타르디니 추기경을 불러 이렇게 충고하는 것이었다. “친애하는 추기경 전하, ‘저 위엣
양반’은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시지 않습니까? 본인은 그저 ‘5층의 위엣
양반’일 뿐이니 엄연하게 있는 순위를 헷갈리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하느님과 교황의 공통점 >
- 어느 익살맞은 가톨릭 신문 기자가 온 세계를 안 가는데 없이 여행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하느님의 속성(무량하심)에 빗대어 꼬집는 글을 쓰며 독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물었다. “하느님과 요한 바오로 2세, 이 두 분이 서로 다른 점이 무엇
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고(Deus est Ubique),
교황님은 어디에나 계셨다(Papa erat Ubique).” 그러니까 우리말로는 이렇게 하면
어떨지? “하느님께선 안 계시는 데가 없고, 교황님은 안 가 보신 데가 없도다!”

< 방문과 순찰의 차이 >
- “신부님, 무슨 큰 걱정이 있으세요?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성체
조배하러 성당에 온 글라라 씨가 밝지 못한 신부님의 얼굴을 보고 걱정이 되어 물었다.
“걱정은 무슨 걱정요. 뭐, 내일 주교님께서 사목 순찰을 나오시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 글라라 씨가 의아해 하면서 다시 묻는다. “신부님! 아니, 주교님께서 본당에
오시는 게 사목 ‘방문’이 아니고 ‘순찰’이예요?” 이 질문을 받은 본당 신부가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듯 좀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글라라 씨, 만일 글라라
씨의 시아버님이 댁에 오시면 그건 ‘방문’이라고 부를 만한 거지요. 그런데 글라라
씨의 시어머님이 댁에 오시면 그건 ‘방문’이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순찰’이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 보좌 신부들의 수칙 >
- 서품을 갓 받은 새 신부가 제2보좌 신부로 어느 본당에 부임해 왔다. 새로 온
제2보좌 신부보다 1년 먼저 본당에 와 있던 제1보좌 신부가 본당 신부님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보좌 신부님, 제 말을 잘 들어
주세요. 우리 본당 신부님은 가끔 웃기는 애기를 하십니다. 그럴 경우 그 애기를
듣고 너무 크게 웃지 마십시오. 본당 신부님은 크게 웃는 걸 싫어하십니다.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웃으면 본당 신부님은 그걸 자기를 비웃는 걸로 보시니까 조심하십시오.
만일 그렇다고 해서 전혀 웃지 않는다면 웃으라고 농담을 했는데도 웃지 않으니까
굉장히 기분이 상하십니다. 보좌신부님, 아시겠습니까? 명심하시고 실수 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 돌잔치 >
- 어느 젊은 부부가 고대하던 아들을 얻어 애지중지 길렀다. 시간이 흘러 가족들과
손님들을 초대하여 돌잔치를 하게 되었다. 돌잔치 순서 중에는 꼬마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를 알아보는 놀이가 있었는데, 상에다가 돈과 책과 포도주를 올려놓고
그 꼬마가 무엇을 손에 쥐느냐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주인공 꼬마가 상으로
기어가더니 조금만 손으로 당장에 세 가지를 다 움켜 안는 것이 아닌가?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 꼬마가 도대체 뭐가 될 것인가를 가늠할 수가 없어서
얼떨떨해 하는데 그 부모가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아이구, 애는 틀림없이
천주교 신부가 될 거예요!”

< 빌어먹을 공의회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많은 전례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가장 획기적인 것은
라틴어 대신 자기 나랏말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 사제들을
제대 위에 갑자기 많은 종류의 책들을 놓고 이것저것 보면서 미사를 바치게 되었다.
어느 날 나이가 많으신 어떤 본당 신부님이 주일 미사를 바치던 중 강론 대에서
강론을 마치고 ‘미사 독서’ 밑에 놓여 있던 ‘신자들의 기도’ 책을 빼내려다가 그 책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허리를 굽혀 그 책을 주어 들고 일어나다가 강론대를
들이받아 그 강론대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때 신부님의 목에 걸려 있던
마이크를 통해 조용한 성당에 신부님의 욕지거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에이, 빌어먹을 그놈의 공의회 때문에 .......”

< 아주 큰 사고 >
- 어느 본당에 에밀리오라는 열심한 교우 의사가 있었는데 본당 신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어서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저녁 병원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려 받아 드니 본당 신부가, 한 사람 모자라니 빨리 사제관으로 고스톱
치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곧 가겠다는 대답을 한 에밀리오 씨가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미안하구료! 또 나가 봐야 할 일이 생겼소! 아, 이 의사
이젠 못해 먹겠구려!” 연막작전을 쓰는 에밀리오씨가 외투를 입는 사이 부인이 걱정
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아주 큰 사고가 났나 보죠?” 빨리 집에서 빠져 나가려는
에밀리오 씨의 대답이 이러하였다. “아마 그런가 봐요! 벌써 그 현장에 신부님이
두 분씩이나 도착해 계신다니 말이요!”

< 여성의 사제 서품 >
- 보좌 신부가 주일학교 3학년 교리반에서 신품 성사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꼬마들이
여성의 사제 서품 허용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보려고 보좌 신부가 이렇게
물었다. “어린이 여러분, 왜 남자들만 신학교에 가고 또 사제가 될 수 있으며, 여자들은
왜 안 되는지,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 한번 애기해
보세요!” 그랬더니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깊이 생각하는 편인 토마스 군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신부님, 만일 여자가 사제가 된다면 강론을 너무 길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 교회법 해설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어느 대수도원 원장 수녀님은 주교님
처럼 반지와 십자가를 착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녀님들은 물론이려니와 많은 사람
들도 대원장 수녀님의 반지에 친구(입맞춤)를 하는데, 딱 한 사람만이 예외였다. 바로
그 수녀회에 새로 온 지도 신부였다. 대원장 수녀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반지에 친구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었다. 교회법상 강제로 그 신부님을 굴복시키려 로마에
있는 전례성성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얼마 후 로마로부터 기다리던 회신이 도착하여
개봉했는데, 그 지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구는 않더라도 오래된 성(聖)유골이나
유물에 대할 때처럼 가벼운 목례를 함이 옳도다”

< 신학생들의 유머 >
- 신학교에 들어와 맨 먼저 대하는 철학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한 신학생들이,
그래도 신학은 철학보다 쉽겠지 하고 기대를 했다가 실망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우스갯
소리를 만들어 냈다. “철학이란 깜깜한 방에서 눈을 가린 채 검은 고양이를 찾는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깜깜한 방에서 눈을 가린 채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이란 깜깜한 방에서 눈을 가린 채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다가 갑자기
‘야! 잡았다!'고 외치는 것이다.”

< 시험 문제가 정확해야 >
- 시험을 치러 온 한 학생에게 평소 자기 강의 시간에 충실히 나오지 않았음을 익히
아는 어느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 신부가 그를 처음부터 난처하게 만들 요량으로 이런
질문을 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할머니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 대답해 보게!” 아니,
이 세상 천지에 성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를 모를 신학생이 어디 있겠는
가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할머니가 누구인지 꿈에도 들어 본 적이
없으므로 대답해 낼 도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 신학생이 드디어 입을
열려 하므로 무슨 대답이 나올지 그 교수 신부의 온 신경이 거기로 쏠렸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러하였다. “신부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떤 할머니를
말씀하시는지요? 친할머니 말입니까? 외할머니 말입니까?”

< 독일인과 신학 >
- 독일인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사색적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국민적 기질이 독일
신학자들을 통해 신학계뿐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것만은
아니라고들 하는데, 이 사실을 독일 사람들 자신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어서 소개한다.
카이절링(1880-1946) 이라는 독일 철학자는 그의 저서에서 독일 신학자들을 비판
하며 이렇게 비꼬고 있다. “독일인 한 사람이 천국으로 왔다. 그런데 그의 앞에 천국
문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에 관한 강의실’
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독일 사람은 ‘천국에 관한 강의실’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 부고 (訃告) >
- 영국의 어느 지방 신문에 한 성공회 신부님의 부고가 이렇게 실렸다. “사무엘
스미스 신부님께서는 어제 저녁 7시 반에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다음날 그 신문사 편집실로 전보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이 이러하였다. “스미스
신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 기분이 어째 좀 불안함. 천국에서 베드로.”

< 화목한 비결 >
- 본당에 평협 간부로 있는 바오로 씨 부부가 결혼 25주년 그러니까 은혼식을
맞이하였는데, 이 부부는 항상 평화롭고 일치하는 가정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축하 미사가 끝난 후 조촐한 축하연에서 본당 신부가 바오로 씨에게 그 비결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이러하였다. “아, 신부님,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즉시 제가 집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지요. ‘모든 큰 결정은 내가 내릴 테니,
조그만 결정들은 당신이 다 알아서 처리하오! 그런데 이게 딱 적중한 것이지요.
그런데 신부님, 큰 결정을 내린 것이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요. 네!”

< 이민 >
- 본당 신부님이 어린이 미사 후에 주일 학교 꼬마들에게 다음 주 특별 헌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강조하였다. “어린이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프리카에는 도대체가 주일 학교도 없고, 종교 시간도 없고, 성당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에요. 다시 한 번 묻겠어요. 어린이 여러분, 다음 주일에는 무엇을 위해
모금을 하게 됩니까?” 제일 앞자리에서 열심히 듣고 있던 요세파가 큰소리로 대답
하였다. “네, 신부님. 주일 학교도 없고, 종교 시간도 없고, 성당도 없는 그런
아프리카로 이민 갈 수 있도록 모금하면 좋겠어요!”

< 헌금과 절약 >
-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런지는 둘째로 치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절약하는 사람들로
정평이 나 있다. 하루는 세 명의 스코틀랜드 사람이 외국으로 가서 주일에 미사
참례를 하였다. 강론이 끝나고 헌금 순서가 되어 자기들 차례가 왔을 때, 갑자기
그 중 한 사람이 기절하여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나머지 두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성당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었다.

< 그런 담배라면.... >
- 미국 뉴욕의 어느 개신교 목사가 주일 예배 설교중에 술과 담배가 영육 간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담배
한 개비의 위험성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바로 그 담배 한 개비가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담배 한 개비 후에 어김없이 따라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한 잔의 위스키가 아닙니까? 바로 그 한 잔의 위스키 다음에
확실하게 따라오는 것이 여러분,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담배 한 개비가 여러분을 죄악의 쾌락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 이때 그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던 한 중년 신사가 자기 옆에 있던
사람에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이구, 저렇게 기가 막힌 담배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그 담배 한 개비, 멋지지 않습니까?”

< 뛰는 놈 위에 나는 분 >
- 성서에 보면 하느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시편 90, 2베드 3,8 등). 이 구절을 열심히 묵상하던 한 젊은이가 어느 날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 앞에서는 천년도 하루와 같사옵니다. 아니
천년도 일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100만 달라 같은 거금도 당신
앞에서는 1달러밖에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오니 아버지 하느님이시여, 간절히
청하오니 이 불쌍한 종에게 단돈 1달러만 내려 주시옵소서!” 그 젊은이가 잠시 후
기도 중에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겠노라! 1분만 기다려라, 단 1분만!”

< 선교사의 기도 >
-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신부님 한 분이 어느 날 혼자서 밀림을
지나 공소로 가는 길에 갑자기 두 마리의 사자를 만났다. 사자의 포효에 그만 공포에
질린 그 신부님이 최후의 수단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무릎을 꿇어 하느님께 마지막
기도를 바쳤다. “자.....자....자비하신 하.... 하느님, 처....청하옵건데 이 사자들을
그....그리스도 신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잠시 후 눈을 살짝 떠서 바라보니,
그 사자 두 마리가 자기 앞에 바짝 다가앉아서 두 앞발을 하늘로 향해 들어 모은 채
이렇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주여,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거짓말 죄 >
- 어느 주일 시골 본당에서 본당 신부가 강론을 이렇게 시작하였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지난 주일에 미리 공지한 드린 것처럼 오늘은 ‘거짓말 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난번 강론 때 부탁드린 대로 마르코 복음 17장을 읽고 오신
분은 손 좀 들어 주십시오! ” 그랬더니 과연 본당 신부의 충고를 잘 따르는 착한 교우들
답게 거의 모든 교우들이 점잖게 손을 다 드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본당 신부는 강론을
계속하였다. “교우 여러분, 감사합니다. 손을 내려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금방 보신
것처럼 ‘거짓말 죄’를 오늘의 강론 주제로 삼은 것은 대단히 시의 적절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마르코 복음은 16장까지밖에 없습니다!”

< 고해 신부의 동정심 >
-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고해실에서 신부님께 자신의 죄를 겸손되이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신부님예, 제가예, 아들네 집에 다니러 왔는데예 우리 며느리가
주는 밥만 가지고는예 배가 너무 고파 못살겠능기라예. 그래서 하루는 며느리 몰래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 살짝 훔치 묵어 버렸심더예. 그리고예......” 이때 이를 듣고
있던 고해 신부가 말을 가로막으며 그 할머니의 배고픔에 동정심을 금치 못해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다음번엔 두 개 꺼내 잡수세요!”

< 사제 독신제에 관한 추기경의 생각 >
- 제2차 비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사제 독신제에 관하여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의 일이다. 10분 동안의 휴회 시간을 이용해 잠시 복도로 나온
두 분의 추기경이 담소하면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두 분 모두 물론 연세가
지긋하시고 또 그에 걸맞게 보수적인 분들이었다. 한 분이 이렇게 운을 떼었다.
“추기경님, 그러니까 우리도 새 공의회를 기회로 미래를 위해 좀 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야겠소. 나도 이제는 사제들이 결혼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소.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긴 하지만 말이오!”. “ 그 두 가지 조건이 도대체 어떤
건데요?”. “첫째 조건은, 사제 결혼의 최저 연령을 일흔 살로 할 것. 둘째 조건은,
부모님의 동의서를 제출할 것. 이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야 뭐 굳이 반대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제아이어디가요?” 이말을 들은 다른 추기경의
대답이 또 걸작이었다. “추기경님께서 그렇게 개방적인 분이신 줄 예전에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그려!!!”

< 사제와 성무일도 >
-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저녁 본당 신부가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제관
마당의 그늘에서 산책 겸 성무일도서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날씨와 싸우느라 이미 피곤한 몸이었고 그날따라 임종하시는
분이 두 분이나 있어서 병자성사를 주로 다녀왔으니,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이 실은
커다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성무일도서
한 장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조금 더 있으니까 좀 더 센 바람이 불어와 서너 장을
한꺼번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때 그 본당 신부의 입에서 저녁기도 끝 기도문
외에 다음 기도가 즉석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주님,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감사하옵니다. 인자하신 주님, 찬미와 영광을 영원무궁토록 받으옵소서. 아멘.”

< 대단히 친절한 고해 신부 >
- 마리아 씨가 순교자 성지에 순례 가서 고해성사를 보고 본당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대단히 친절한 고해 신부를 찾았노라고 자랑하였다. “고해성사 중에 그 신부님은
아주 친절하셨어요. 구시렁거리지도 않으셨고요. 뭘 캐물으려 하지도 않으셨어요.
노래로 하는 기도 소리에 신부님이 주시는 보속이 먼지 잘 들을 수가 없었다고요.
그래서 혼자 알아서 주의 기도 한 번을 바쳤어요. 이다음에도 그 성지로 가서 성사를
봐야겠어요!” 친구들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마리아 씨에게 물었다. “ 그 고해 신부님
성함이 어떻게 되신대요? 우리도 한 번 찾아가고 싶은데요!” “부 신부님이라고 알고
있어요. 제가 자세히 봐뒀지요. 고해소 문패에 ‘고해신부 : 부재중’이라고 돼 있었거든요!”

< 건망증이 심한 학자 >
-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드레 마리 앙페르(1775-1836)는 우리가 요즘 전류의
세기를 젤 때 쓰는 ‘암페어’를 발견한 장본인인데, 대단히 건망증이 심한 것으로 유명
하다. 한번은 그가 어느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가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음식이 별로
맛이 없자 냅다 소리를 지르면서 불평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님은 뭘 하고
있는거요? 요리를 제대로 하는 요리사 좀 못 구해 와요?” 또 한 번은 다른 친구 집에
초대 받아 가서 실컷 대접 잘 받고 잘 놀고 나서는 화를 마구 내는 것이었다. 화내는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이렇게 시간이 늦었는데도 사람들이 도대체 자기 집으로 갈
생각들을 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닌가!

< 아무것도 아닌 것 >
- 데레사 씨가 밤이 꽤 깊었는데 남편이 부엌에서 뒤적이며 뭘 찾는 소리를 듣고서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거기서 뭘 찾으시능교?” 그랬더니 남편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요!” 이 대답을 들은 데레사 씨의 대답이 걸작
이었다. “여보, 그 옆 창고실에 가보몬 선반 위에 ‘아무것도 아닌 거’ 한 병이 아직 남아
있심더!”

< 자랑 >
- 꼬마 셋이서 자랑을 늘어놓으며 다투고 있었다. 셋 중에서 제일 키가 큰 시몬 군이
이렇게 뽐내었다. “야, 니들, 몬시뇰이 뭔질 아니? 우리 삼촌이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
있는데, 요번에 몬시뇰이 되셨다. 모두들 우리 삼촌 보고 ’공경하올 몬시뇰‘이라고
부른댄다!” 그랬더니 두 번째 꼬마 다두가 뒤질세라 한마디 한다. “아, 그래? 우리
삼촌은 파푸아 뉴기니의 주교님이시란다. 사람들이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이라고
부른댄다!” 이 자랑을 잠자코 듣고 있던 요셉이 자기도 질 수 없다는 듯 이렇게 큰
소리치는 것이었다. “뭔시뇰이 뭐고, 주교가 다 뭐니. 야 시시하다. 우리 삼촌은
요 건너 마을에 보통 본당 신부로 있는데, 몸무게가 160kg이나 나가시는 분이야.
우리 삼촌 신부님이 시내에 나가실 때 나도 한번 따라가 보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다
‘오 하느님!’ 이라고 외치더라고. 그리고 ‘맙소사!’하고 덧붙이기도 하구 말이야!”

< 텅 빈 마음에는 >
- 대문으로 들어오는 믿음을 막으면, 창문으로 미신이 기어 들어온다. 하느님을 집에서
내쫓으면, 마귀가 그 집으로 기어 들어온다.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27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4.04.

[ 그리스도인의 익살 (3) ] - ‘아하하! 하느님’

- 지은이 : 구병진 신부/ 149p
- 그리스도인의 익살 3권 (210가지 유머 수록)

[ 표지의 글에서 ]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타고 났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유일하게 웃을 줄
안다고 하니, 이 웃음도 결국 하느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는가? 하느님도
우리처럼 웃으시는 존재가 아닐까?

[ 책머리에 ]
- 경향잡지에 십 년째 연재되고 있는 졸문 ‘그리스도의 유머’ 중에서 일부를 두 권의
책으로 묶어 한 권은 ‘하느님도 농담을 하실까?’(1990년)로, 다른 한권의 책은
‘하늘나라의 웃음 잔치’(1991년)로 펴낸지도 어언 4, 5년의 세월이 흘렀다. 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아하하! 하느님’이란 제목을 달아 본다.

-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타고 났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유일하게 웃을 줄
안다고 하니, 이 웃음도 결국 하느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는가? 하느님도
우리처럼 웃으시는 존재가 아닐까? 혹시 하느님도 우리가 머리로만 그리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가깝게 느껴지는
친숙한, ‘인간적인 하느님’이시리라. 그리스도인의 유머는 바로 이러한 신념의 바탕과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러한 ‘인간미 넘치는 인간적 하느님’을 닮으려는 그리스도
인들의 시도들이다.

# 본 책(그리스도인의 익살/ 3권)에는 총 210여 가지의 유머가 실려 있다. 이중 30여
가지의 비교적 짧은 내용의 유머 중에서 발췌하여 독서 메모로 하였다. #

* “인생은 엄숙하면 할수록 그만큼 유머가 필요하다” - 빅토르 위고
* “훌륭한 농담은 비판될 수 없는, 하나의 궁극적이고 신성한 것이다” - G.K 체스터톤
* “전연 새로운 농담이란 없다” - W.S 길버트
* “농담은 가장 재미있는 대목에서 끝난다” - 영국 속담


< 어떤 몬시뇰 >
- 어떤 몬시뇰(고위 성직자) 한 분이, 서품 50주년을 맞아 금경축 잔치가 벌어진 자리
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몬시뇰‘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몬시뇰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몬시뇰이란 맥주를 부을 때
생기는 거품 같은 것이지요. 항상 맨 윗자리에 있고 굉장히 멋지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별로 쓸데도 없고 또 맛도 없는 거니까요!”

< 누가 주교가 되고 싶은가? >
- 견진성사를 준비해 온 어느 대도시의 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주교님이 집전하는 견진
미사에 참석하려 주교좌성당에 모였다. 그리고 그 도시의 모든 본당 주임 신부와 보좌
신부들도 주교님과 함께 미사를 집전하였다. 주교님이 강론 때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가운데 나중에 커서 신부님이 되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세요?”
대여섯 명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진 주교님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주교가 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 말씀에는 아무도 손을 드는
학생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당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는 것이었다. 당황한 주교님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머뭇거리다가 뒤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져 돌아보니, 공동 집전
하는 신부님들이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있지 않은가!

< 낙서 >
- 어느 시골의 순례자 성당 정문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걸려 있다. “화장실을 이용하실
분은 본당 신부님께 열쇠를 받아 가세요!” 그런데 어는 장난꾸러기 순례객이 그 안내문
밑에다 연필로 이렇게 덧붙여 써놓았다. “더 급한 볼일은 로마로 직접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보상 >
- 어느 본당신부가 시골길을 서튼 운전솜씨로 가다가 무리지어 길을 건너는 닭 가운데서
수탉 한 마리를 치었다. 그 순간 닭주인이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거름 치는 삽이 들려
있었다. 잔뜩 화가 난 농부를 달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적으로
다 보상하겠습니다!” 이말을 듣자 농부는 거름 삽을 땅에 내리 꽂으며 말하였다.
“전적으로 보상을 하신다, 이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어떻게든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소리쳤다. “그럼 좋습니다.
내일부터 새벽 다섯 시에 우리 농장 거름더미 위에 올라 앉아 ‘꼬끼오’하고 울어보십시오!”

< 성무일도 >
- 어떤 신부가 자동차를 타고 먼 길을 가고 있었다. 자정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날의 성무일도를 다 바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신부는
차를 멈추어 길옆에 대놓고 ‘헤드라이트’를 켜고 그 불빛으로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화물차 한 대가 그 신부의 차 옆에 와서 서더니 혹 무슨 일이 있느냐,
도와드릴 것이 있느냐며 친절히 물어왔다. 그 신부는 “고맙소. 아무것도 아니요!”하며
도움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성무일도서를 손에 들고 기도를 계속
바치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그 화물차 운전기사가 혀를 차며 한마디 내뱉고는 휑하니
떠났다. “허, 거참. 엄청나게 스릴있는 추리소설인 모양이군. 계속 재미 많이 보슈!”

< 군종 신부의 신바람 >
- 군인성당에서 주일미사를 집전한 군종신부가 오늘은 도대체 몇 명이나 참석했나 하며
호기심에 참 얼굴로 교우를 바라보았더니 성당이 군인들로 꽉 찬 게 아니가! 주일마다
교우들이 적게 와서 사기가 죽은 이 군종신부가 그 주일만은 신바람이 나서 기도도 강론도
자기 마음에 쏙 들게 잘되었다. 미사를 마치고 제의를 입은 채로 군종병에게 달려가
물어 보았다. “김 일병, 오늘 성당이 꽉 찼는데 도대체 웬일인가?” 사제 지망생인 군종병
김 일병이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신부님, 탱크 부대 병사들이 탱크를 깨끗이
닦지 못해서 그 기합으로 성당 가는 벌을 받았기 때문이랍니닷!” 군종신부 : “....???”

< 재능이 다르다니까요! >
- 어느 도시본당의 주임신부가 그 본당구역에 교우들이 많이 불어난 관계로 보좌신부를
얻게 되었는데, 주임신부는 이 새 신부를 단단히 교육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본당신부는 보좌신부에게 매주 금요일 오전까지 주일 강론 원고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리고서 첫 금요일이 되었다. 보좌신부의 강론 원고를 받아든 본당신부가 대충 흩어보고
난 다음 보좌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이 강론 초안을 만드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보좌신부가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한 세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본당
신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야단을 쳤다. “나는 사제 생활한 지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강론 준비에 적어도 12시간은 걸린단 말이오. 알아듣겠소?” 이 애기를 들은 보좌
신부가 본당신부로부터 두어 걸음 정도 물러서더니 나지막하게 아주 단호한 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주임신부님, 주 하느님께옵서는 각 사람에게 재능을 각각 다르게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성서 구절 대기 >
- 각각 다른 수도회 소속 수사 세 사람이 오랜 여행 끝에 지친 몸을 이끌고 밤늦게 어느
수도원에 당도해 보니 먹을 것이라곤 삶은 달걀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간에 기별도
가질 않을 달걀 하나를 셋이 나눠먹기도 그렇고 서로 양보하자니 배가 너무 고프고 해서
세 수사가 합의를 보았다. 즉 이 달걀을 두고 제일 멋진 성서구절을 대는 사람이 통째로
혼자 다 먹기로 한 것이다. 제일 먼저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달걀을 집어 들고 껍데기를
벗기며 이렇게 말하였다. “열려라”(마르 7,34) 그 다음에 도미니코회 수사가 그 벗긴
달걀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소금을 치며 말하였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마르 9,50)
이때 예수회 수사가 소금을 친 달걀을 받아들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3) 그리고선 다른 두 수사에게 빼앗길세라, 날쌔게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 것이었다.

< 원 조 >
- 아프리카의 한 본당으로부터 독일의 어느 본당에 원조를 청하는 급한 전보가 도착
하였다. “기근이 심하게 들었음. 속히 식량 송부 바람!”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지,
10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달라기만 하는 심보가 미워서 본당의 간부들이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아프리카 원조가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의존심만
키우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어 이번에는 거절 전보를 띄우기로 하였다. “앞으로는
더 이상 식량을 송부할 수 없음. 허리띠를 졸라매시오!” 얼마 후 아프리카의 그 본당에서
회답 전보가 날아 왔다. “ 허리띠를 송부 바람!”

< 기도가 너무 셌나? >
- 아프리카 어느 시골본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선교사로 시골에서 20년 간 사목하고
있는 연세 지긋하신 본당신부가 본당교우 야고버 씨의 연락을 받았다. 암소 한 마리가
병이 들어 다 죽게 되었으니 빨리 와서 강복해 달라는 것이었다. 본당신부는 급히 성수와
영대를 챙겨서 야고버 씨 집으로 달려갔다. 본당신부가 야고버 씨의 안내를 받아 병든
암소에 가서 성수를 뿌리고 기도문을 외우고 있는데 그 암소가 비실비실 쓰러져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입장이 난처해진 신부가 멋쩍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야고버 씨,
내가 그만 다른 강복 기도문을 외었나 보오. 그 강복 기도문은 암소가 아닌 힘센 황소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게 당신 소한테는 너무 센나 보오. 정말 미안하오!” 야고버 씨 :
“아이구 신부님도, 단~디(조심스럽게) 좀 안하시고.... 에이 참...!!!”

< 과장법 >
- 북극 잉글랜드에서 선교사로 있던 알프레드 수사가 휴가차 고향에 돌아와 그곳의
삶과 풍습, 만년설, 개가 끄는 썰매, 에스키모와 이글루(얼음집) 등을 전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교우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마 믿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이건 사실입니다. 딱 한 번 밤을 새니까 제 수염이 십오 센티미터나 자랐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알프레드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때 수염이 텁수룩한 알프레드 수사가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우 여러분, 그곳은 북극지방이라 밤이 넉 달 동안이나 계속되기 때문
이지요.” 교우들 : “그러면 그렇지...”

< 교육은 어려워 >
- 탄자니아에서 선교사 겸 중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아벨 수녀가 하루는 그곳 학생
들에게 음주의 해악성을 가르치기 위해 교탁 위에 잔을 두 개 올려놓고, 한잔은 술로
채우고 다른 한잔은 물로 채웠다. 그리곤 꿈틀거리는 구더기를 그 두 잔에 집어넣었다.
술에 빠진 구더기는 얼마간 발버둥치는 것 같더니 몇 초 지나자 가라앉아 버렸다.
그런데 물 잔에 빠진 구더기는 아주 편안 듯 한참이 지난 뒤에도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아벨 수녀가 결론을 내리려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이 실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키다리 소년 구루구루가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예, 수녀님.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술을 마시는 사람은 몸에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속이 비었군요! >
- 아프리카의 어느 교회 자선병원에 흑인 노인 환자가 속이 쓰리고 아프다며 치료를
받으러 왔다. 간호사가 그 노인의 증상을 듣고 난 뒤 그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잡수셨지요? 음식을 드셔야 해요. 속이 비어서 그렇거든요.
속이 든든하면 아프고 쓰린 것도 없어져요. 아셨지요?” 간호사 말대로 음식을 먹고
나니 통증이 사라져 기분이 좋아졌다. 한 달 뒤에 본당신부가 이 노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날따라 이 신부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 애기를 들은 노인이 신부
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신부님, 제 생각엔 틀림없이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머릿속을 채우시면 금방 아픈 게 사라질 것입니다.”

< 하느님두, 참! >
- 남미의 한 밀림지역에 사는 어느 청년이 필요한 물건을 사러 멀리 떨어진 장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한바탕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다. 숲속에서 잠시 비를 피하다가
날씨가 개어 갈 길을 재촉하는데, 조그만 개울에 걸쳐 있던 외나무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었다. 뛰어서라도 건너야 할 형편이나, 개울의 넓이가 그리 쉽게 건너뛸 만큼 호락
호락하지가 않았다. 청년은 뜀박질하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고 화살기도를 바쳤다.
“주님, 무사히 이 개울을 건너뛰게 해주소서!” 그리곤 냅다 개울을 향해 달려가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군. 괜히 화살기도까지 바쳤잖아!” 그와 동시에 청년이 디뎠던
둑이 물살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청년은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아이구
하느님두 참, 농담도 못합니까?”

< 경처가의 센스 >
- 경처가(驚妻家)로 소문난 마지아 씨의 부인은 오랫동안 병석에 누어있어야만 하는
중병을 앓고 있어서 대단히 신경질을 많이 부렸다. 그럼에도 오죽하면 그러겠나 싶어
참을성 많은 마지아 씨는 아내의 온갖 신경질을 다 받아주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좋은 남편이었다. 얼마 후, 오랜 고생 끝에 그 부인이 병자성사를 받고 죽었다.
마지아 씨가 모든 장례 절차를 다 잘 치르고 집으로 들어오려는데 마침 지붕위에서
기와 한 장이 머리 위로 탁 떨어졌다. 참 이상도 하다는 듯 위를 쳐다본 마지아 씨가
잠시 후 혹이 부풀어 오른 머리를 만지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보 알았소! 그러니까
당신이 천국에 잘 도착했다는 표시지. 그렇지?”

< 고집불통 >
- 바오로라는 영세명을 가졌지만 성당에 도통 나오지 않던 냉담교우 노인 한 분이
돌아갈 날이 다 되었다. 그의 부인이 본당신부를 자기 집에 청하여 마지막으로 병자성사,
고해성사를 받게 하려 했지만 고집불통인 그 노인은 한사코 거절했다. 본당신부가
보다 못해 이렇게 말해 보았다. “바오로 씨,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거절하신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도 바오로 노인의
심중에 변화가 없었다. 본당 신부가 마지막으로 그를 설득시키려 애쓰며 말하였다.
“바오로 씨, 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느님을 거부하신다면 반드시 엄청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 알아서 하십시오! 그럼 ...” 바로 이 순간 바오로 씨가 마지막 힘을 다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본당신부를 향해 소리쳤다. “좋습니다. 내가 벌을 받나 안 받나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요!”

< 백 살까지 사는 비결 >
- 아우구스티노 씨가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백 살까지 사는 비결’이라는 책 어디다
치웠소? 암만 찾아도 없구려!” 아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제가 그 책을 아궁이에
집어넣어 불살라버렸어요!” 이 말에 아우구스티노 씨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아내에게
묻는다. “뭐라구요? 도대체 그 좋은 책을 태워 버린 이유가 머요?” 그랬더니 아내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 어머니(시어머니)가 그 책을 읽어 볼까 봐...”

< 종말론 >
- 일곱 살 된 마리아가 주일학교에서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돌아와 엄마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엄마, 엄만 언제 죽게 될는지 아세요?” 엄마가 대답한다. “하느님께서
날 부르시면 가는 거지, 다른 도리가 없잖니?” 엄마의 대답을 듣고 마음이 놓였는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만 죽지 않아도 돼! 하느님이 부르실 때 엄만 딱
못 들은 척하는 거야, 알았지?”

< 모범 신자 >
- 어떤 신자가 자신의 요즘 삶을 이렇게 자랑(?)한다. “저는 요즘 고해성사 거리가 없을
정도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저녁 여덟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지요. 제가 술을 마십
니까, 외출이나 외박을 합니까? 남의 것을 훔치기를 합니까, 남을 못살게 합니까? 게다가
주일마다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니 이만하면 모범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석방
되기만 하면 완전히 싹 달라질 걸요?” 이 말은 바로 교도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대꾸였다.

< 육적인 죄는 없소? >
- 고해신부가 어떤 젊은이가 고백하는 죄를 쭉 다 듣고 난 뒤 이렇게 물어 보았다.
“다 고했습니까? 그 외에 혹시 육적(肉的)인 죄는 없소?” 그 젊은이의 즉각적인 대답은
이러하였다.. “없습니다, 신부님! 저는 채식주의자인 걸요1” 고해신부 : “ ???”

< 강론의 길이 >
- 강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의 교수신부가 천주교 신부의 강론은 항상 간단명료한
것이어야 한다며 강의시간에 부제들에게 이렇게 역설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십오 분 정도 강론한다면 그 강론은 우리 주 하느님을 위한 것이 되네! 그러나 만일
그대들이 삼십분 간 강론한다면 그것은 고양이를 위한 것이 되어버리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강론한다면 그 강론은 마귀를 위한 것이야! 그대들은 이 원칙을 명심하렷다!”

< 설교와 헌금 >
- 설교의 길이와 헌금의 액수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알려준 적이 있다. “그날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지방에 복음을 전하자는 멋진 설교를 듣는 주일이었지. 설교가 시작된 지 오 분
후에 나는 그 설교가 구구절절이 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 오십 달러를
헌금하기로 작정하였지. 그런데 설교가 이십분이 넘어서니까 사십 달러도 아주 큰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심이 흔들이더라구. 그런데 말이야 사십 분이 경과하니 이젠 한 푼도
안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더니 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설교가 끝이 났는데, 그날 나는
화가 나서 헌금은커녕 오히려 헌금 바구니에서 오 달러를 헌금하는 척하면서 훔쳐
버렸다구!”

< 화재 보험 >
- 전교주일에 안나 씨가 데레사 씨에게 자랑삼아 이렇게 말하였다. “데레사 씨, 저는
매년 전교비로 십만 원을 따로 내고 있어요! 전교비를 내는 사람은 최소한 지옥불은
면한다고 해서 살림이 좀 궁하긴 하지만 매년 전교비를 꼬박꼬박, 열심히 내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데레사 씨가 한마디 톡 쏘아붙인다. “아, 그러세요? 흠 - ‘지옥불을
면한다’ 그것 참, 아하, 그러니까 안나 씨는 일종의 화재보험에 드신 거로군요!”
안나 씨 : “!!! .....???”

< 떡 본 김에 제사까지 >
- 뉴질랜드의 어느 본당신부가 성탄을 맞아 성당이 터져나갈 듯 빽빽이 들어선 교우
들을 보고 대단히 흐뭇해하였다. 그러나 그 교우들 가운데 몇몇은 일 년에 딱 한번
성탄미사 때나 나오는 교우들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본당 신부가 자정미사를 끝내고
교우들을 향해 이렇게 인사를 하였다. “교우 여러분, 예수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내년 성탄미사 때에 가서나 다시 뵙게 될 교우 여러분에겐 이
자리를 빌려 새해 인사와 예수 부활 대축일, 주의 승천 대축일 그리고 성령 강림
대축일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 기발한 비유 >
- 어느 시골 본당신부가 남편들의 외도를 나무라는 강론을 하면서 이런 기발한 비유를
하였단다. “교우 여러분, 외도를 하는 남편들은 마치 아무데나 그어도 불이 붙는, 미국
서부 영화에 나오는 딱성냥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착실한 남편들은 독일제 성냥
같은 사람들입니다. 독일제 성냥은 자기 성냥갑에 그어야만 불이 붙으니까 말입니다!”
남편들 : “...!!!...???”

< 너무나 정직한 대답 >
-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신랑 신부가 적어도 보름 전에 본당신부님에게
와서 ‘혼인 전 진술서’를 작성하고 서명 날인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언젠가 상처(喪妻)
한 지 1년쯤 지나 재혼을 하게 된 신랑이 사제관에 와서 혼인 전 진술서를 작성하던 중
‘전(前) 부인의 현주소’를 대라는 질문에 몇 번씩이나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렇게
써넣은 것이었다. “공동묘지‘

< 벌을 키우는 이유 >
- 본당사무장인 요셉 씨가 집 앞뜰에서 벌통을 손질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교우 한
사람이 요셉 씨를 향해 물었다. “사무장님, 집에서 벌을 키우시는 모양이군요?” “예,
두 통을 키우고 있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집에서 벌을 키워 경제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큰 도움이 되구말구요. 해마다 여러 차례 오시는 장모님이 내가
벌을 키우기 시작한 뒤론 지난여름 딱 한 번밖에 안 오셨고, 그것도 겨우 이틀 머물다
가셨지 뭡니까? 그 외의 다른 처가 식구들은 아예 우리 집에 올 생각을 안하더라구요!”

< 천당에 가고 싶지 않은 까닭은 ... >
- 본당신부님이 주일학교 1학년 반에 들어가서 한 꼬마에게 물었다. “너 혹시 지옥에
가고 싶니?” “아뇨!” “그럼 연옥에 갈래?” “아뇨” “그럼 천당에 가고 싶지?” 그런데
꼬마의 대답은 주임신부님의 기대에 크게 어긋났다. “아뇨!” 그래서 본당 신부님이
다시 물었다. “천당에 왜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이니?” “왜냐믄요, 저는 요.... 이 세상에
더 오래 살고 싶걸랑요!”

< 사제의 결혼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사제 독신제에 관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이다. 주일학교 교리반 선생이 3학년 어린이한테 ‘사제 결혼’이란 제목으로
작문을 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그 가운데 한 어린이가 이런 글을 써 왔다. “제목 :
사제 결혼 - 지금까지 신부님들은 잘살아 오셨다. 그분들은 별로 큰 고생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부님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앞으로는 문제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신부님들한테 가장 큰 짐이 되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신부님들은 아마도 부인들한테 이 짐을 떠맡기고 자기들은 더 쓸모 있는
일에 더 많은 힘을 기울일 것이다.”

< 무신론자라기보다는 >
- 우연히 같은 기차를 타고 가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천주교 신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칭 ‘무신론자’였다. 그 무신론자가 입을 열어 자기를 소개하였다. “저는
무신론자올시다!” 이말은 들은 신부가 그에게 점잖게 물어본다. “혹시 성서를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어린이들한테나 어울릴 그런 책을 뭣
하러 읽겠습니까?” 신부가 다시 그에게 묻는다. “그러면 혹시 종교나 신학에 관한
책을 읽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가 언짢다는 듯이 대답한다. “없습니다. 뭣 때문에
제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때 신부님이 고삐를 쥐듯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선생님이 그러셨지요? ‘나는 무신론자’라고.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을 이렇게 부른답니다. ’무신론자‘이기보다는 ’무식론자‘
라구요!”

< 식사 전 감사기도 >
- 필립보 씨는 식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다섯 살짜리 아들 바오로로 하여금 식사 전후
기도를 바치게 하는 열심한 교우다. 하루는 필립보 씨가 가족 모두와 함께 시내 음식점
에서 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앞에 받아 든 바오로가 기도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맛보는 것이 아닌가? 필립보 씨가 아들 바오로에게 말했다. “바오로야,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바치고 나서 식사를 해야지!” 그랬더니 바오로가 아빠에게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 오늘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어요! 오늘
여기서 먹는 건 다 돈을 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28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4.11.



[ 내가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

- 지은이 : 유경철, 그림 : 정미연 /207p
-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 지은이 프로필 : 1988년 독일 뷔르츠부르크/프랑크푸루트 유학(신학박사),
1992년 사제서품,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통합사목연구소장,
명일동 본당 주임 등, 2013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 표지의 글에서 ]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정화와 준비의
시간의 시간이고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일생에 걸친 정화와 준비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도록
'영적 광야'로 부르시는 그분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하느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말끔히 치우고 그분만을 위한 자리와 시간을 더 많이
마련하도록 결심하고 은총을 구해야겠습니다.


[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

* 올 사순절을 지내면서 특별히 얻고자 하는 은혜를 청하고,그와 관련된 내용으로
주결심을 세운다. 아래 예에서 선택하거나 나에게 적절한 것을 찾아 본다.

- 사순절 동안 날마다 평일미사에 참석한다.
-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매일(매주) 바친다.
- 매일 아침, 저녁기도를 바친다.
-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 가사 도우미를 쓰지 않고 그 비용으로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 사순절 동안 온 가족이 절약하여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 잠자리에 들기 전 다음날 복음을 읽는다.
-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인사한다.
- 삼종기도를 충실히 바친다.

* 사순절에 청하는 은혜 :
* 나의 주결심 :


1. 재의 수요일 – 하느님 앞에서

- “자산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감추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 6,3-4)

-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사순절 생활 정신의 요약이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이고,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상호보완적이어서, 셋 중에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해진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제가 드리는 기도와 단식이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소중한
선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여정을 추복해 주십시오.


2.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함께 짊어진 사람들

-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
(루가 9,23)

-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 고통 속에 죽게 될 것을 예고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 운명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은 그 점에서 모두 고통을
감수하고 죽을 운명을 함께 짊어진 사람들이다. 그래야 살 것이라는 것이 그분이
주시는 역설적 교훈이다. * 나의 실천 :

# 제가 선택한 길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길임을 오늘 새로 깨닫습니다. 크고 작은
일상의 십자가들이 구원의 십자가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3.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잔치의 추억


-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마태 9,15)

- 제자들은 신랑의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시다. 그들은 신랑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기쁨과 평회를
체험한다. 매일의 기도와 전례, 침묵은 우리를 위해서 그분이 마련하신 영적 잔치이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영적 잔치에 우리를 부르신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제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있지 못할 때면
참으로 슬퍼하게 하소서.


4.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예수님 따라 나서기

-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 5,32)

- 레위는 사람들에게 기피 인물이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며 그분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 레위와 마침가지로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의 회개와 변화였다. 우리도 레위처럼 정말‘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 나의 실천 :

# 주님! 감사의 잔치를 베푼 세리처럼 저도 오늘 아니면 앞으로 일주일 안에 받은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 예물을 바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1주 – 사랑의 길 ]

* 앞으로 1주일에 매일 실천할 바를 다음의 예에서 선택하여 그날 기록하도록 한다.

- 가족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하루에 한 번 전화한다.
- 불평하고 투정부리고 싶을 때 인내한다.
- 경쟁자가 잘 되기를 바라며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 화해를 청한다.
- 아이들에게 사랑이 담긴 간식을 마들어 준다.
-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말하며 칭찬해 준다.
- 얄미운 직장 상사를 위해 주모경을 세 번 바친다.
-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 끼 단식하고 봉헌한다.
- 음식을 적당히 준비하여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한다.
- 내가 가진 많은 것을 생각해 보고 감사드린다.


5. 사순 제1주일 – 신앙의 방패


-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하시지 않았느냐?”(마태 4,10)

-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서 40일 동안 단식한 후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물질과 명예, 권력과 같은 우상숭배의 유혹이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힌다. 이 세 가지
유혹은 현대인과 교회가 언제라도 걸려 넘어질 수 있는 함정을 상징한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런 유혹을 극복해야 함을 예수님은 당신의 모범을 통해
보여주셨다. 성서에서 광야와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와 준비를 상징한다. 사순절은
일생에 걸친 정화의 준비를 더욱 집중적으로 체험하도록 ‘영적 광야’로 부르시는
그분의 초대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저를 비추어 인정과 의리를 따라 살도록 도와주시고 정당치 못한 일들을 과감
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6. 사순 제1주간 월요일 – 조건 없는 나눔

-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간단명료하다. 조건 없이 이웃에게 사랑과 나눔을 실천했는가
하는 것이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 곧 예수께 드리는 봉헌이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신앙의 깊이를 재는 척도 역시 나눔과 헌신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특별히 가장 가까운 저의 가족들을 기억합니다.
제가 온전히 마음을 비워 그들의 깊은 갈망을 알아차리고 그에 응답할 수 잇도록
도와주십시오.


7. 사순 제1주간 화요일 – 너희는 기도할 때에

-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마태 6,8)

- 주님의 기도는 가장 빈번하게 바치는 기도 중의 하나이다. 거창하게 기도할 줄
몰라도 누구나 쉽게 바칠 수 있는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보이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뜻보다 그분의 뜻이 먼저임을 알려준다.
그런 다음 후반부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청하게 한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나를 알고 나와 함께 현존하시는 그분께 마음을 열어 최상의 경배를 드리도록
주님께서 손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 나의 실천 :

# 구하기도 전에 저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저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
하느님! 아빠,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오늘 만나는 이들에게 전하렵니다.
도와주세요.


8. 사순 제1주간 수요일 – 다시 살려주시는 분

-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요나 3,8)-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달아난 요나가 느낀 것은 절망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고래를 시켜 다시 살려주신다. 하느님께 대한 배신을 은혜로 갚아주신
셈이다. 요나의 이야기는 부활의 기적을 암시한다. 우리도 요나처럼 절망의 끝에
설지라도 하느님을 볼 희망을 얻었다. 십자가의 부활로써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 점을 가르쳐 주셨다. * 나의 실천 :

# 주님, 그렇습니다. 제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께
의지하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배워나가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9.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 7,8)

-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영적 갈증을 더욱 강하게 느낀다.
우리는 영적 목마름을 달래 줄 진정한 위로이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는 하는데 그 대상이 올바르지 못해 그런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될까
두렵다. 내 영혼의 목마름을 적셔줄 수 있는 진정한 영적 양식을 찾고 구하고 두드릴
수 있도록 그분께 분별의 지혜와 올바른 갈망을 청해야겠다. * 나의 실천 :

# 진리의 성령님! 제가 주님께 기도드릴 때 당신의 빛으로 제 마음과 생각을 비추어
참되게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10.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5,23-24)- 오늘 복음은 ‘혀가 날카로운 칼날과 같아서 피를 흘리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옛 속담과 일맥상통한다. 스스로의 화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상대방에게 심한 말을 하면서 미움을 드러낸 경우가 많다. 그런 마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혀를 부리는 우리의 마음결을 더욱 경계하고 잘
다스리라고 예수께서는 엄하게 일깨워 주신다. * 나의 실천 :

# 뜻하지 않게 서로 상처를 입히고 서먹해진 저희를 주님 찾아주소서. 오늘 저희
모든 삶을 그를 위해 봉헌하오니 제가 먼저 다가가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어 축복해 주소서.


11. 사순 제1주간 토요일 – 하느님 맘 닮기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싫은 사람을 멀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것은 인간의 한계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내 마음을 고집해서는 하느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을 닮기 위해 우리 마음 씀씀이를 잘 살피고 성찰하는 일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수련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제가 호감이 가는 사람이나 잘난 사람, 제게 이로운 사람 또는 좋아하는
것만 따라 살았다면 용서해 주시고 그러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 2주 믿음의 길 ]

* 앞으로 1주일에 매일 실천할 바를 다음의 예에서 선택하여 그날 기록하도록 한다.

- 미사 시작 20분 전에 성당에 도착하여 마음의 준비를 한다.
- 운전 중에 신호를 정확하게 지킨다.
- 이웃에 혼자 사는 노인을 찾아가 도와드린다.
-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한 권 정해서 읽기 시작한다.
- 매일 저녁 가족을 위해 묵주기도 1단씩 바친다.
- 부패한 정치인들을 위해 주모경을 세 번 바친다.
- 오늘 하루 이기적인 행동이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 인터넷을 사용할 때 에티켓을 지키도록 노력한다.
- 자녀에게 책을 선물한다.
- 오늘 복은ㅁ을 읽고 침묵 가운데 5분 동안 묵상한다.
- 오늘 하루는 나이를 불문하고 존댓말을 쓴다.


12. 사순 제2주일 – 얼마나 좋겠습니까!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 17,5)

- ‘초막을 지어 거기서 살고 싶다’는 베드로의 바람에 대해, ‘그의 말을 잘 들으라’는
소리는 인간의 연약한 안주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린다. 수고하지도 않고 영광을
누리려 하지 말고, 그런 허황된 생각의 초막을 헐어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비록 그 길이 현실적으로 죽음의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수난의 고통 없이 부활의 영광은 없기 때문이다.

# 주님, 허황된 생각으로 엮어진 저의 초막들을 헐어주십시오. 당신과 함께 묵묵히
제게 주어진 이 길을 걷겠습니다.


13. 사순 제2주일 월요일 – 남에게 되어주는 그만큼


- “너희는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마태 6,36)

-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시니까 내가 잘못해도 대충 넘어갈 수 있으리라는 핑계
때문인지 부지불식간에 남을 비판하고 단죄하는 일에 쉽게 빠져든다. 나는 용서받고
싶어 하고 또 당연히 용서받을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막상 남을 용서할 마음의 여유를
갖기 힘들다. 예수님은 우리가 남에게 되어주는 그만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남에게 되어 주는 그만큼이 바로 내가 받을 선물의 크기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오늘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겠습니다. 제 마음의 그릇을 당신께서
손수 펼쳐주십시오.


14.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나의 고백

-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분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변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내 이해와 체험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묻고 찾는다면 시몬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느님 친히 당신을
열어 보요주실 것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은 제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아멘


15.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주님과의 약속

-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의미도 잘 모른 채 덥석 대답한다. 주님이 마실 잔을 자기들도
마실 수 있노라고. 그 잔은 고통과 모욕, 천대와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것을 의미했다. * 나의 실천 :

# 주님, 오늘 그저 “예”라고 대답하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십시오.


16.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삶의 끝에서 바라보기

-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 16,31)

-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만큼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부자는
생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세상의 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굴레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주시어 이웃에게 자신을 개방하게 하셨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제가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사랑으로 나누어 당신을 맞이하게 해주소서.


17.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회개의 기회

-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마태 21,42)

-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이다.
우리도 비유에서 나오는 소작인들처럼,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하느님께 배은망덕하면 안 된다. 신앙생활은 분명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
누리라는 그분의 초대이지만, 동시에 ‘도조(賭租/賭地)’를 잘 바치지 못하면
포도밭을 잃을 수 있다는 긴장과 두려움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긴장과
두려움이란 무조건 하느님을 무서워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과 죄스러움을 자각하는 겸손이다. 내 처지를 망각하고 회개의 때를
놓친다면 악한 소작인들처럼 결국 포도밭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의 기회가 바로‘지금’이라고 복음은 우리를 재촉한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저의 친절로 하느님의 집을 짓는 작은 돌이 되겠습니다.


18. 사순 제2주일 토요일 – 참사랑에 눈뜨기


-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루가 15,24)

- 두 아들 모두 아버지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둘의 모습이 다 내 안에 있다. 나도 작은 아들처럼 자주 하느님께 등을 돌리지만, 큰아들처럼 하느님의 사랑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철없이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안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내가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을 느낀다. 지금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고향은 새롭게 시작할 희망과 용기를 준다. * 나의 실천 :

# 주님,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 3주 희망의 길 ]

* 앞으로 1주일에 매일 실천할 바를 다음의 예에서 선택하여 그날 기록하도록 한다.

-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 담긴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낸다.
- 거울을 보고 자신을 격려하며 용기를 준다.
- 소박한 음식이지만 이웃과 나눈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한다.
- 길을 묻는 이나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 “제가 할게요”라고 먼저 말한다.
- 입지 않은 옷, 쓰지 않은 문구, 참고서 등을 정리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
-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상처 입은 야생동물과 자연을 생각하며 기도한다.
-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노인을 도와주거나 이웃의 짐을 들어준다.
-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19. 사순 제3주일 – 마르지 않는 샘물


-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한 4,14)

-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찾아 보이지 않는 샘을 파면서 살고 있다. 돈이나 지식,
명예나 권력의 샘을 파기도 하고, 아름다움이나 건강, 능력이나 사랑의 샘을 찾아
일생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궁극적 갈망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근원적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을 만났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신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총의
샘물은 무한하여 우리가 파 내려가면 갈수록, 바라면 바랄수록 더 열렬히 목말라하면
할수록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다.*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시니 제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소서.


20.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30)

-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차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예수께서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이것은 나자렛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오류에 자주 빠지곤 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나를 비추어 보기보다 나의 잣대로
예수님 말씀을 재단하려하기 때문이다. 기도와 묵상 안에서, 이웃과 자연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과 함께 당당히 나의 삶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를 비추어 주십시오.


21. 사순 제3주간 – 한없이 용서하기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18,22)

- 주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고 결코 단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남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일곱 번은 고사하고 단 한 번 용서하는 일도 너무
힘들다. 상처 받은 자존심이 어떤 관용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곱 번도
모자란다고 하시니 너무 비현실적인 말씀처럼 들린다. 용서하는 횟수가 신앙의 깊이를
말해준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직 멀기만 할뿐이다. 무한히 용서하기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니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 나의 실천 :

# 당신이 저를 용서하신 그 마음으로 저도 오늘 이웃과 화해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십시오.


22.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마음 살피기

-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19)

-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
하는데 있다고 하셨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도저히 율법이 완성될 수
없다. 겉으로 들어난 행위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이 제게 주신 그 눈길로, 그 마음으로 오늘 모든 이들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23. 사순 제3주간 목요일 – 예수님의 작은 치유


-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 구원에 이르는 길이 좁은 길이라면, 세상은 넓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 유혹은 돈.섹스.권력과 명예욕일 수도 있고 약물이나 술.도박일 수도
있다. 우리(내) 의지와는 반대로 자꾸 이런 것들에 집착하고 중독된다면 분명 우리는
해방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런 유혹을 물리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이뤄지는
예수님의 구마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나쁜 습관 한 가지, 집착 한 가지 떨쳐내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치유를 확인할 수 있다. *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 편에 선다 함은 작은 십자가이지만 기꺼이 지고 나서는 것임을 오늘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24. 사순 제3주간 금요일 – 한결같은 사랑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30)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계명의 양면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들어날 수밖에 없고, 이웃을 미워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앎이 아니라 실천인데, 막상 사랑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것이 먼저이다. 특별히 내적 침묵과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고, 그분한테서 오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감수성을 열어준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제 안에 당신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오늘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25.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마음을 보시는 분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루가 18,14)

- 바리사이의 선행 자체는 옳았지만, 그걸 내세우려는 그의 마음자세가 문제였다.
예수님도 세리나 죄인들의 행위 자체를 두둔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스스로를 낮추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에게 하느님은 당신 모습을 감추시지만, 우리가 스스로 낮출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신다. 세리는‘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할 만큼’ 진심으로 통회하고 뉘우쳤다. * 나의 실천 :

# 주님, 누군가 판단하는 마음을 들 때 얼른 그 잣대를 제 마음에, 제 모습에
가져가게 해주십시오.


[ 4주 가난의 길 ]

* 앞으로 1주일에 매일 실천할 바를 다음의 예에서 선택하여 그날 기록하도록 한다.

-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 싫어하는 반찬이 있어도 맛있게 먹는다.
- 오늘 하루는 컴퓨터를 30분만 사용한다.
- 냉담하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그와 신앙에 대해 대화한다.
- 오늘은 친구와 술을 마시는 대신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신다.
- 만나는 사람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한다.
-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사랑으로 용서한다.
- 외출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 오늘은 시끄러운 곳에 가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지낸다.
- 오늘 하루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 내 마음이 교만한지 생각해 보고 반성한다.


26. 사순 제4주일 – 거저 받은 사랑

-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 예수께서는 태생소경을 고쳐주셨다. 그가 눈을 뜰만한 무슨 공덕을 쌓은 것은
아니였다.순전히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공생활 3년 동안
한 일은 오직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소경을 치유해 주신 것도 그
사랑선포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뭔가 사랑받을 만한 업적을 쌓아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처럼 무상으로 거져 받는다. 신앙생활을
통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오늘 하루 가운데 제게 보내시는 선물을 바라보며 감사하게 하소서.


27. 사순 제4주간 월요일 – 조건 없는 신뢰


- “그래도 그 고관은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 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다.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49)

- 아들을 살려 달라는 고관에게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적이나 신기한 일 없이는
믿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
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를 믿고
집으로 향했다. 그에게서 믿음이 어떻게 자라고 깊어질 수 있는지 배운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조건 없는 신뢰이다. 예수님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 자체가
나의 갈망을 채워준다고 믿는 것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을 선택하고 믿고 맡겨야 하는 순간들이 삶의 회피처럼 보여질까 봐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당신의 말씀을 믿고 맡깁니다.


28. 사순 제4주간 – 낫고 싶습니다.

-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요한 5,8)

- 낫기를 워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38년 동안이나 앓아온 병자를 향해 던져졌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물으시기에 좀 엉뚱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연못가 생활을 해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남의 도움만을 바라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치유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말씀으로
들린다. 직접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라는 것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을 닮고자 하는 제 간절함이 혹 다른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위선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런 저의 위선까지도 낫기를 원합니다.


29. 사순 제4주간 – 하느님 보여주기

-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요한 5,20)
-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분의 생각과 말씀과
행동은 그대로 하느님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일생을
살면서 찾아나서야 할 일도 바로 하느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미 세례 때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죽고 하느님의 뜻만을 따라 살기 위하여 새로 태어났다. * 나의 실천 :

#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세운 결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당신께 마음을 엽니다.
주님, 이렇게 늘 함께 하시니 감사합니다.


30. 사순 제4주간 목요일 – 원본이신 예수님 알아보기

- “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요한 5,46)

- 세례자 요한과 모세는 예수님을 증언한 예언자들이었다. 예수님이 원본이라면
그들은 복사본이다. 누구라도 원본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대론자들은 복사본을 보면서도 원본을 몰라본다. 빛 자체이신 분은
몰라보고 빛이 반사된 거울만 섬기는 형국이다. 성서나 교리, 순교자들과 영성가들의
교훈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복사본에 열광하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 나의 실천 :

# 예수님, 가끔 원본이신 당신보다 복사본이 주는 기쁨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오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오래오래 삶의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은
당신임을 압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31. 사순 제4주간 금요일 -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정녕 따로 계신다.”
(요한 7,28)
- 유다인들이 죽이려고 찾은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분이 대중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손대지 못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누구신지 더욱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도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우리도 불확실한 믿음 때문에 방황하기도
한다.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야 할지, 혹시 그분에 대한 믿음이 헛된 것은
아닐지 의심하기도 한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심이 우리를 괴롭힌다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삶을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분이
누구신지 온전히 알 수 있다. * 나의 실천 :

# 예수님, 당신을 저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32.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진짜 예수님 만나기


-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7,46)

-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부류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
처럼 아는 것이 병이 된 사람들이고, 둘째 부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 체험한 사람들로
성전 경비병들과 니고데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물음은 지식으로만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는 어느 방식을 택하고 잇는가? 죽은 지식인가, 아니면 생생한 만남인가?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어 오늘도 나를 기도와 성사에 초대한다. * 나의 실천 :

# 주님, 당신을 알고 싶고 만나고 싶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기도와 성사를 통한
당신의 초대에 오늘은 제 마음을 다해 응답하고 싶습니다.


[ 5주 순명의 길 ]

* 앞으로 1주일에 매일 실천할 바를 다음의 다음 예에서 선택하여 그날 기록하도록 한다.

- 길을 걸을 때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없는 장애인들을 생각하며 화실기도를 바친다.
- 오늘 하루는 텔레비전을 끈다.
- 소외되거나 고통 받는 이웃을 방문하거나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 은혜를 입은 고마운 분께 감사의 편지를 쓴다.
-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매일 한 공기씩 헌미 한다.
- 남편은 아내의, 아내는 남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서로 안마해 준다.
-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양보한다.
- 현관에 어지럽게 널려 잇는 신발을 정리한다.
- 온 가족이 함께 가정의 성화와 일치를 위해 저녁기도를 바친다.
- 시부모님. 장인. 장모님에게 안부전화를 한다.
- 가족끼리 나들이 간다.


33. 사순 제5주일 – 영원히 사는 비결


-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 11,43)

- 죽었던 라자로가 살아났지만 그도 언젠가는 다시 죽어야만 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운명이다. 그렇다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 그대로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 무한히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이란 말은 시간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연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차원을 말한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영원과 하느님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고 그분과 일치된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삶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서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비결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산다는 것이 요원하게 느껴지나 낙심하지 않는다.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는 나를 죄의 무덤에서 불러내 해방시켜
주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이다. * 나의 실천 :

# 죄의 무덤에서 저를 소생시켜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 당신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당신과 함께하는 희망을 가지며 영원히 사는 삶의 지혜를 청합니다.


34. 사순 제5주간 월요일 – 자비의 잣대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

-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께 데려와 단죄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예수는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신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씩 모두 자리를 떠났다. 남의 잘못을 보면 즉시
비난의 돌을 집어 든다. 적어도 같은 잣대를 적용한다면 그리 쉽게 남을 단죄하는
칼날 같은 잣대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죄인에게 자비로운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 나의 실천 :

# 저의 허물과 약함을 발견할 때 이웃에게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자주 봅니다.
저희 모두는 주님의 자비로 새로워지고 기쁘게 살아가는 같은 처지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3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 예수님을 만나는 십자가

-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당연
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완전하시나 우리는 불안전하다. 그분이 구세주로
오셨지만 우리는 자칫 그분을 놓칠지도 모른다. 그분이 누구신지 극명하게
들어난 것은 십자가상에서이다. 내 삶의 여정에도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수히
많다. 내 인생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사순절이다. 내가 지는 십자가에 예수께서
나와 함께 못 박히신다. 아니, 나를 대신해서 못 박히신다. 그래서 나의 십자가는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구원의 십자가이다. * 나의 실천 :

# 제 십자가에 저와 함께 못 박히시는 주님, 그 신비를 깨달아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36. 사순 제5주간 수요일 – 마음에 새겨진 말씀


-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요한 8,31)

- 제자 됨의 기준은 그분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내 마음에 그분의 말씀을 새겨두지 않았다면 나는
그분의 제자가 아니다. 오늘 독서의 불가마 속 세 청년에게서 제자 됨의 모습을 본다.
그들은 어떤 시련의 불길도 마음에 새겨진 하느님의 말씀을 지울 수 없다고 증언한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그 말씀의 의미와 실천방안을
고민하는지, 또 말씀대로 잘 살지 못하는 나 자신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
생각해 본다. 이번 사순절엔 한마디라도 더 마음 깊이깊이 새겨 두고 싶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더불어,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당신은 저의 길.진리.생명이십니다.


3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 하느님의 권위

-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대단히 권위 있는 존재였다. 하느님 말씀만 믿고 미지의
길에 자신의 삶을 다 걸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조상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예수님 말씀은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독이고 동시에 신성모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하느님
이신 예수께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돌을 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의 권위는 하느님의 권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 저를 비우고 또 비워 당신의 참된 권위 앞에 머리 숙이게 해주십시오.
그것만이 생명을 얻는 길임을 나날이 깨우쳐 주소서.


3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육화의 신비


-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 주셨다.”(요한 10,36)

- 예수님이 하느님 행세를 하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유다인들은 또 돌을 집어 들었다.
당시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아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육화의
신비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놀라운 업적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다. 바로 다름 사람들 앞에서 그 믿음을 행실로 증거하는 것이다.
* 나의 실천 :

# 든든한 바위 위에 집을 지으라고 오늘도 저를 초대하시는 주님,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할 수 있도록 함께하여 축복해 주십시오.


39. 한국 교회의 순교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 묵묵히 따른 삶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요셉의 믿음은 대단했다. 마리아의 순종도 요셉의 협조가
없었다면 허사였을지 모른다. 꿈에서 천사가 전해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믿고 현실의
엄청난 짐을 지기엔 모든 것이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요셉은 성가정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묵묵히 따랐다. 빛나는 삶은 아니었지만 전적으로 예수님을 위해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오늘 축일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 나의 실천 :

# 주님,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닥쳐오더라도 평화와 기쁨을 누림은
제 마음이 당신께 향해 있기 때문임을 압니다. 감사합니다.


[ 6주 부활의 길 ]


* 앞으로 1주일에 매일 실천할 바를 다음의 다음 예에서 선택하여 그날 기록하도록 한다.

- “고마워요”라고 자주 인사한다.
- 일찍 귀가하여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 운전하면서 화가 날 때 욕 대신 기도를 한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안을 청소한다.
- 온 가족이 성삼일 전례에 함께 참여한다.
-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친다.
-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편지를 쓴다.
- 부부가 함께 산책한다.
- 함께 사는 이웃들에게 친절하게 인사한다.
-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 오늘 하루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준다.
- 사랑하는 사람의 발을 씻어 준다.


40. 주님 수난 성지주일 – 깨달음의 눈물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전날 밤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그때만 해도 결코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장담했다.
예수께서 쏟아주신 그간의 사랑을 생각하고 더 가슴이 아팠다. 신앙의 연륜이란
단순히 시간 문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 가는
체험의 과정이다. 실로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을
보고 놀란다. 그러면서도 자주 다시 철부지가 되어 주님의 뜻을 거역하곤 한다.
베드로는 세 번 배반하고 깊은 통회로 새 사람이 되었지만, 나의 배반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잘못을 눈물로 뉘우치고
훗날 죽음으로써 주님을 증명한 베드로처럼 나도 그렇게 새로워지길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를 기다려 주시는 주님, 당신의 그 사랑에 힘입어 한걸음
작게나마 새로워지고자 합니다. 축복해 주십시오.


41. 성주간 월요일 – 고난을 감수하는 사랑


-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3)

-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십자가에서 잘 드러난다. 동시에 십자가는 그 사랑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이다. 예수님이 살리신
라자로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는 그분의 사랑을 특별하게 체험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 또한 각별했다. 그래서 죽음의 위협과 비난을 감수한다.
그들의 처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운명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고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주님을 사랑할 힘을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서 얻을 수 있다.
그분이 우리 마음을 알고 힘이 되어 주신다.

#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저의 관심을 온전히 주님께 드립니다.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 사랑에 제 몸과 마음이 흠뻑 젖어들게 해주십시오.


42. 성주간 화요일 – 아버지와의 일치


-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요한 13,36)

-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 담담하다. 당신을
팔아넘기고 부인하고 달아나 버릴 제자들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훗날 어떻게 당신을 따르게 될지 아셨겠지만, 그것이
당장의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를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육체적
고통보다 제자들과 군중들로부터 받은 배신과 조롱이 그분을 더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이룬 깊은 일치로 철저한 고독과 육체적 고통
까지도 이길 수 있었다.

# 사랑의 주님, 제가 오늘 만난 어려움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려 하오니 당신께 작은 위로가 되게 하소서.


43. 성주간 수요일 – 기다리시는 분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3)

- 유다는 이미 스승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았다. 그러고도 예수께서
배반을 예고하실 때 자기는 아니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예수는 유다의 음모와 속임수,
거짓을 다 알면서도 그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죄인을 구하러 오신 분인데
유다의 멸망을 바라셨을 리도 없다. 적어도 최후의 순간에는 유다도 베드로처럼
용서받았으리라고 믿고 싶다. 주님께서는 나의 어리석음과 죄를 다 알고 계시지만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뉘우쳐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 나의 실천:

# 기댈 곳이 있다는 믿음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도 애틋한 사랑과 연민으로
팔을 벌리게 하시고 이웃의 의지가 되게 하소서.


44. 주님 만찬 성목요일 –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요한 13,14)

- 예수님은 3년 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에게 마지막 요점 정리를 해주신다. 그것은
감동적이게도 예수께서 손수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이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는 그분의 말씀 그대로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 인간을 섬기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거기서 드러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당부하신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용서와 사랑, 봉사의 상징적 표현이다. * 나의 실천

# 섬김의 아름다움과 모범을 보여주신 주님,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무치는 사랑을
저도 실천하게 하소서.


45. 주님 수난 성금요일 – 십자가를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

-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 우리 인생길은 예수님의 십자가길을 닮았다.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고 그분의
뜻을 외면할 때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고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할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때로는 병정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신을 보기도 한다. 크고 작은
일상의 수고와 어려움은 내가 짊어져야할 십자가이다. 주님은 나를 깨닫게 하려고
미사성제가 거행될 때마다 오늘도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다. 2천 년 전
골고타에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 * 나의 실천 :

# 주님과 함께, 주님을 쫓아서 40일을 달려왔습니다만, 주님, 여전히 십자가를
외면하는 제 모습을 봅니다. 성체성사로 그 신비를 깨달아 살아가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46. 부활 성야 – 참된 죽음

-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마태 28,5)

-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이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운명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몸소 무덤에 묻히셨다. 그래서 이제 ‘죽으면 살리라’는 당신
말씀의 참됨이 드러나게 되었다. * 나의 실천 :

#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픈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지 몸소 보여 주시는 주님, 무덤에
묻힌 당신의 죽음이 저를 살리는 힘임을 믿고 깨닫게 하소서.


47. 예수 부활 대축일 – 상상도 못한 일


- “무덤에 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제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일이 현실이 되었다. 주님은
이제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고 말씀하신대로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 부활은 돌아
가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변화가 그대로 제자들에게도
일어났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빈 무덤으로 달려갈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덤에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제자들이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제자들의 이 깨달음은 우리의 희망인
동신에 우리의 변화를 위한 요청이기도 하다.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며 우리도 머리에
재를 얹고 40여일을 달려 왔다. 기도와 단식으로 정성 들여온 지난 사순절은 부활하신
그분을 내 안에서 알아 뵙고 느끼기 위한‘마음의 밭갈이’였다. 부활의 신비를 지금 다
알아들을 수 없다 하여 실망하지 말자. 제자들에게 그러하셨듯이 당신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를 기다리며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영원한 선물이 되어 주신 주님, 당신의 부활로 저의 눈과 마음이 열려 더욱 새로워진
영으로 영광의 주님을 찬미하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29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4.18.



[ 신비를 만나는 사람들 ]

- 지은이 : 손희송, 127p
-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현장에서 있었던 성서속의 사람들 이야기

- 지은이 프로필 : 1986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교 석사학위, 사제서품
1992년 용산성당 주임, 1996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학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저서 '신앙인' 등 집필

[ 표지의 글에서 ]

하느님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간직하고 계셨던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 특히 병들고 약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심지어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심오하고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표현합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신비로까지 말합니다.


[ 1. 오늘도 십자가를 세우는 사람들 ]

가톨릭 신자들은 공식적으로 1년에 두 번, 즉 예수님의 입성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듣는다. 에 그리스도의 수난기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데 한 몫을 했던 인물들은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사람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의
사람들 아니,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


< 1. 율법에 얽매이는 사람 – 바리사이파 사람들 >

- 성서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주 위선자들의 대명사처럼 비난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그들을 아주 나쁜 사람들로 간주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성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충실하고 정확
하게 지킨다면, 메시아가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확신 속에서 율법을 엄밀
하게 준수하려고 노력하였다.

- 이들은 십일조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한편, 백성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두 번 단식했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자선을 많이 했으며,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를 정확하게 이행하였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처럼 율법을 충실히
준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고 경멸하였다.

- 이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던 것이다. 자신들의 선행과 업적을 내세워 하느님에게 그에
상당한 보답을 당연히 요구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또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자구에 매달리고 집착해서,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람을 위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런 점은 안식일 준수
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안식일이 이스라엘의 고유성을 지키는 제도로 중요시되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각종 규정들이 생겨났다. 예수님 시대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39가지로 규정해 놓았다. 예를 들면 불을 때거나 식사를 준비하거나 치료하는 행위
등이 모두 금지되었다.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율법주의적 태도를 바로잡기 위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 2,27)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 주시는 등 필요 이상
으로 사람을 얽어매는 정결례와 단식, 금지 규정 등을 지키지 않으셨다.

-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을 절대시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불경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자주 논쟁을 벌이면서
그분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였고 결국에는 죽이려고 작정하였다. 경건하고 열심하다는
이들의 자만심과 자구(문자)에 얽매여서 본래의 정신을 보지 못하는 율법주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 현재의 가톨릭교회에도 지켜야 할 계명과 규정이 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주일과
대축일에 미사에 참여해야 하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해야 하고, 교회 유지를 위해 교무금을 내야 한다는 규정, 정한 날에 단식제와 금육제를
지켜야 한다는 규정 등등. 물론 이런 계명이나 규정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바리사이와 같이 계명대로 사는 것만을 중요시한 나머지,
자구에 매여서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율법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는가 살펴 볼 일이다.
하느님 앞에 정말 소중한 것은 얼마만큼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느냐는 것이다.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만하거나 계명의 이름으로 다른 이를 단죄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바리사이파 정신이다. 바리사이파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율법주의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2. 자신의 편안함과 안정만을 추구하는 구하는 사람 – 대사제 가야파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막강한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로마가 허용한 제한된 자치권을 조심스럽게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운 행적을 보고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게 되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두려워졌다. 로마인들은 집단적인 움직임을 눈여겨 볼 것 이고 여차하면
군사적으로 개입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당시 이스라엘 조교지도자들의 으뜸인 대사제 가야파가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
해결책이란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요한 11,50)라는
것이다. 즉 위험은 초기에 그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가야파는 자신과 자신의 백성이 누리고 있는 안정된 삶이 방해받지 않도록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타인의 목숨을 강요하는 비열한 태도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은연중에 가야파처럼 남에게 억지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정,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것이 두려워서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 안에서 가야파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 3. 선입관과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 – 이스가리옷 >

-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유다
이스가리옷이 그들에게 스승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한다.(마르14,10-11).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다. 유다는 정작 예수님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으시는 것을 보자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은전
삼십 냥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유다가 단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 같지는 않다.

- 유다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현세적 메시아로 여겼다. 그래서 그분이
언젠가는 로마 제국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는 조국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서,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절처럼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이런 기대는 어긋나기만
했다. 그분은 원수를 미워하고 싸우는 대신 사랑하기를, 죄인을 심판하고 벌하는
대신 용서하기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분이었다.

- 제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정말 자신들이 기다려 왔던 메시아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 생겨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심지어 그분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요한6,66). 하지만 베드로는 열두 제자들을 대표해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유다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유다는 스승에 대한 선입관과 자신의 주관적 기대에 철저히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고,
그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서 결국 스승을 그분의 적대자들에게 넘겨준다.

- 유다는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기대와 상상을 더 추종하였고, 그 결과로 스승을
배반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도 상대방에게 갖고 있는 기대와 상상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대한다면 유다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유다는 자신의 선입관과 기대에 집착하여 스승을 배반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
하지만 그의 결정적인 잘못은 다른 데에 있었다. 바로 용서와 자비가 충만하신
하느님에게 희망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엄청난 죄의 무게에 눌린 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 우리가 진실로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에 신뢰를 둔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아무리 큰 좌중에 있더라도 좌절할 까닭이 있겠는가. 정말 큰 죄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믿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 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데, 인간이 그 용서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 4. 시련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 – 베드로 >

-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뢰를 받던 제자였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열두 사도 중
으뜸으로 삼으셨고,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까지 하셨으며
(마태16,18),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그를 곁에 두셨다. 베드로 또한 자신을
신뢰하시는 스승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다. 예수님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을 때도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명백하게 대답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신이 당하실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 모두가 당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막상 상황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심각하게
돌아가자 그 충성의 다짐은 힘없이 무너졌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체포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키려고 칼을 휘두르지만, 결국 그분을
버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을 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대사제 집 마당에서
곁에 있던 여종과 하인들이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닙니까?”하고 계속 추궁
하자 ‘아니오’라고 세 번씩이나 발뺌을 한 것이다.

- 베드로는 예수님을 굳건히 따르겠다고 맹세했지만 막상 심각한 위기가 닥치자
스승을 배반한다. 이런 베드로는 2천 년 전 인물로 끝나지 않는다. 베드로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풀릴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가금 특별한 신앙 체험이라도 하게 되면 마치
자신이 영적으로 크게 진보하거나 대단한 신앙을 갖게 된 듯이 당당하게 나선다.
그러나 조그만 시련이나 어려움이라도 닥칠라치면 그 자신감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약해져 버리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에서 스승을 배반한 베드로 사도가
되살아나는 것을 본다.


< 5.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 – 빌라도 총독 >

-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문하고서 빌라도에게 넘겨 처형해 달라고
청한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루기
까다로운 유다인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파견된 것을 보면, 빌라도는 유능한
정치가였던 것 같다. 그런 만큼 통찰력도 남달랐을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범죄자도 아니고 로마에 대한 반란을 부추기는 선동가나 위험천만한 반국가주의자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 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이 유지되고 나라가 겉보기에 큰 소란 없이 돌아 갈 수
있다면 죄 없는 사람 몇 명 정도 죽는 것에는 개의치 않을 인물이다. 진실이 무엇
이든 자신과 자신의 권력이 무사하면 그만이다. 세상에서 진리를 따르자면 저항에
부닥치고 그래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 경력을 통해서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진리와 진실 때문에 어려움을 겪거나 자신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다인들이
원하는 대로 그분을 사형에 처한다.

- 우리나라의 경우도 과거 독재 정권 시절, 적지 않은 검사와 판사들이 권력의
압력에 못 이겨 무고한 이들을 고발하거나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내란
음모죄, 이적행위죄, 간첩죄 등등. 부당한 권력의 압력에 굴복해서 진실을 저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결백한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거나 자리가 흔들릴
위험, 또는 불이익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가 죄인 취급받는 것을 그대로
묵과한다면, 빌라도 총독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 6. 쉽게 마음을 바꾸는 사람 – 군중 >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고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면서 그분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
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마르11,10) 바로 이 군중이 며칠 만에 돌변해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폭도인 바라빠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강요한다. 죄지은 사람은 석방되고 죄 없는 분이 무참하게 죽는 것을 원한다.

- 군중은 쉽게 흥분할 뿐 아니라 변덕스럽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기대를 채워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열렬히 환영하다가도 기대에 어긋나면 매정하게 돌아서는 것이
군중이다. “백성은 배를 뜨게도 하지만 엎기도 하는 물과 같다.”라는 옛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 우리는 변덕스러운 군중처럼 내 기분대로 하느님을 찾고 버리지 않았는가? 내가
기대하고 원하던 바가 이루어지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 받으소서.”를 연발하다가,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느님 너무합니다.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하고 원망을
늘어놓거나 심지어는 냉담으로 빠져 들지 않았는가? 그랬다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다가 단 며칠 만에 돌변해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 지르던 군중 속에 나도
서 있는 것이다.


< 7. 이웃에 무관심한 사람 – 예수님을 매질하고 못 박은 병사들 >

- 빌라도는 병사들을 시켜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유다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넘겨준다. 무참하게 매질을 당하신 예수님은 병사들에게
끌려가서 조롱을 받으시고, 성 밖으로 끌려 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예수님을
매질하고 조롱했던 병사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가지를 나누어 가지려고
주사위를 던진다. (마르 15-24) 한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으며 처절하게
죽어 가는데, 바로 그 밑에서는 천 한 조각을 얻기 위해 태평스럽게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 이들의 몰인정과 무관심함에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나머지 미라처럼 바짝 말라 버린
아프리카나 북한 등지의 사람들을 수없이 본다. 우리 주변에도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이런 이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청나게 비싼 외제 가구와 물품, 고급 의류를 사들이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고 편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그들에게서,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
그 아래에서 주사위를 던지던 병사들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 8.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 –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던 이들 >

- 십자가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조롱한다.
“하하,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는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 보아라”(마르 15,29). 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계시는 예수님을 조롱한다.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살리지
못하는구나!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느냐?”(마르 15,31)

- 종교적 열성과 신념으로 가득 찬 이들 중에서 인간적인 따뜻함이 전혀 없이 냉랭함이
감도는 이들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와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모욕하고 경멸하면서 스스로는 신앙심이 돈독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다. 불교를 우상 숭배의 종교라고 경멸하는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절에 불을 지르고 불상을 훼손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다. 같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종파가 다르다 하여 상대방이 이단이라고 비방하며 멸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 인간에 대한 연민이 결여된 그리스도교, 따뜻한 가슴을 지니지 못한 그리스도교인은
광신으로 흘러 사람을 해치기 쉽고, 그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리어 욕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힌두교도였던 간디가 했던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싫어한다.”라는 말을 가슴속에 늘 간직
해야 한다.


[ 2. 수난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

- 예수님은 게세마니 동산에서 체포 되시는 순간에도 제자들을 보호해 주신다.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요한 18,8). 그분은
제자들의 나약함과 배반을 보시면서도 그들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으신다. 체포되신
예수님은 당시의 실력자였던 대사제 아나스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 대사제가 예수님
에게 그동안의 가르침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요한 18,21). 이어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으신다. 자신의 생살권을 쥐고 있는 빌라도 앞에서 결코 비굴한 태도를 보이시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당당히 밝히신다.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진리를 증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으시다.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도 아버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24). 이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
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하셨던 당시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신 것이다.

- 성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셨다고 전한다. 여기서 이 물음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통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46).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 자신의 나약함, 죄의 잘못, 고통과 괴로움의 무게에 짓눌린 나머지 주저앉아
일어설 기운이 없을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며 간청하자.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분명 그분은 손을 내밀어
우리를 일으켜 주시면서 다시 걸어갈 힘을 주실 것이다.



[ 3.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 ]

- 부활초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부활시키시어 세상의 빛으로
삼으셨다. 하느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전적으로 옳으셨음을
부활을 통해서 만천하에 공개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분이 가신
길이 옳다고 인준하시고, 우리 삶의 영원한 기준이 된다고 선포하셨다.

-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예수님 한분에게만 일어난 신비한 ‘기적’으로 그치지 않는다.
성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이 만남을 통해서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로, 그리고 오늘 우리의 부활로 이어
진다고 하겠다.


< 1.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 – 베드로 >

-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서야 비로소 무거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단지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는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는 당부만 하신다.
이 당부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모른다고 했던 것을 새삼 애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잇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잇다. 이제부터는 자책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목숨을 바쳐 아끼던 내 양떼
들을 잘 돌보아라.’

-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결국 그분의 양 떼를 위해서
순교까지 하게 된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은 스승을 배반한 부당한 사람
이기에 스승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한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과 저ㅣ 때문에 괴로워할 때, 주님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그리고 “내가 용서해 줄 테니
과거의 잘못 때문에 자포자기 하거나 자학하지 말고 이웃 사랑에 힘을 쏟아라.‘하고
당부하신다. 이런 주님의 요서와 당부에 힘입어 우리는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 2. 회의를 넘어서서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 – 토마스 >

-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자기들
끼리 모여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겁에 질려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시자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요한 20,19-20). 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 예수님은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그가 원하던 대로 하라고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다. 마침내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자신의 의심을 극복한
토마스는 주님을 증거하는 데에 일생을 바친다. 전설에 의하면 토마스 사도는 멀리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다 순교했다고 한다.

-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회의를 넘어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과연 선하고 전능하신 분인가?’, ‘그 분이 과연 존재하시는가?’ 하는
의심이 들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이렇게 기도해 보자.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을 믿게 하소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사랑을 믿게 하소서.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을
믿게 하소서.’


< 3. 다시 일어서는 사람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 루가복음 24장에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철석같이 믿어 왔는데, 그분이
너무도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는 크나큰 실망과 좌절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 한 때 가슴 벅차게 했지만
이제는 깨어진 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나그네 하나가 그들
곁에 다가서서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고는, ‘성서에 예언된 메시아도
결국 그런 길을 가야만 했다.’, ‘고통을 거쳐야만 비로소 영광에 이를 수 있다.’라는
깨우침의 말을 들려준다.

- 나그네는 그들의 청에 응하여 집으로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된다. 나그네가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빵을 나눌 때 비로소 두 제자는 눈이 열려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에게 깨우침을 주어 가슴을 뜨겁게 했던 나그네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
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
하게 된다. 그리고 길을 떠 날 때의 실망과 좌절을 털어 버리고 기쁨에 가득 차서
형제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 우리 역시, 두 제자와 비슷하게, 인생의 길을 가면서 많은 실망과 좌절을 경험한다.
두 제자처럼 망가진 계획과 깨어진 희망을 뒤로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조용히 말씀하신다. ‘십자가와 부활은 뗄 수 없다. 나 역시 부활을 거쳐서 영광에
이르렀다.’, ‘실망과 좌절을 겪더라도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 4. 절망 속에 희망을 심는 사람 – 막달라 여자 마리아 >

- 요한복음 20장에서 전해지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애절하고 극적이다. 우리는 이 여자가 어떤 인물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던 사람이라고도 하고(루가 8,2),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어 죽을 뻔한 것을 살려 주셨던 사람이라고도 한다(요한8,1-11).
확실한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큰 은혜를 입은 후에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완전히 전환되는 은혜를 받았기에, 그분의 비참한 죽음은 어느 누구보다 더 큰
슬픔으로 다가 왔을 것이며,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싸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무덤에 찾아가서 슬피
운다. 이런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 오신다.

- 무덤은 죽음을 의미하고, 사람들은 죽음으로서 모든 희망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황을
상징한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에 잠길 것이다. 이런 슬픔과 절망,
아픔을 겪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다. 하지만 이런 슬픔과 아픔을 이겨 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2천 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의
도움으로 큰 슬픔에서 해방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연유에서든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당하였다가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 4.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 ]

- 모든 일의 시작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이유는 교회의 시작 자체가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곁에는 그분을 따르던 제자가
있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러다 성령이 오시자 비로소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구세주
이심을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 성령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계속 이어 나가도록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 1. 진리와 자유 안에서 사는 사람 >

- 성령은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닫게 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인 성서를 자주
읽지만 그저 건성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옳은 말씀, 좋은 말씀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가슴이 와 닿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말씀이 화살처럼 가슴에 와
꽂혀서 생각과 삶을 바꾸어 놓는 때가 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의 은혜다.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충실하도록 이끄시는 성령은 동시에 자유의 영이시다.
사람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것에 매이기 쉽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정은
이와 비슷한 경우였다. 모세가 전해 준 하느님의 율법을 그분의 선물로 알고 애지중지
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이 지나치자 율법 자구에만 매여 그 근본정신을 보지
못하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에게 충실하도록 이끄시지,
그분 말씀의 자구에만 매달려 율법주의에 빠지도록 하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바오로는, 성령은 율법에서의 자유,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신다고
강조한다.

- 오늘날에도 성서의 자구에 매여서 도리어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피를 먹지 말라는 성서 말씀(레위 17,10-16)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 수혈을 거부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하셨고, 몸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데 자신을 헌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2. 담대히 세상과 맞서는 사람 >

-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많은 유다인들이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공개적
으로는 그분의 편에 서기를 꺼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광보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보다 사람의 이목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사람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스승을 배반하였고, 같은 이유에서 다른 제자들도 수난의
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 제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게 되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 만천하에 담대히
증거한다.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도 성령 강림 직후에 공개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바로 성령으로 인한
것이다. 성령은 제자들의 내면 깊은 곳을 변화시키시어 그들이 두려움 없이 세상과
대결할 수 있도록 확신을 주셨던 것이다.

- 사도들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언하고
이 때문에 박해를 당한다. 스테파노는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담대함의 은혜를 주시는 성령은 담대함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의
협조자이시기도 하다. 성령은 제자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도우시는 협조자이며,
신앙 때문에 박해 받는 이들 편에 서 계시면서 그들이 박해받는 때에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시는 분이시다.


< 3. 다양함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 >

- 사도행전 2장에는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군중에게 설교를 하는데,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나라말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당시에 열두 사도는 모두 갈릴레아 사람들로서
히브리어의 사투리인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런데도 그리스 사람은 그리스 말로
알아듣고 로마 사람은 그들의 언어인 라틴 말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통역 없이 직접 자기네 나라 말로 알아들었다는 차원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
즉 겉보기에는 전혀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로 한마음이
됐다는 것이다.

- 성령이 이루시는 일치란 단조로움이나 획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살리는 일치를 뜻한다. 바오로 사도도 성령이 여러 가지 은총의 선물을 선사하신
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갖가지 은총의 선물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강조
한다. 그리스도 신비체인 교회도 각기 고유한 사명을 지닌 여러 지체로 나뉘어
있으면서도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령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드러내야 한다.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은
성령의 여러 은사 중의 하나다. 하지만 모든 성령의 은사가 그러하듯이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공동 이익을 위한 것”, “교회를 돕는 것”이 되어야 한다.


< 4.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

- 성령의 여러 가지 작용들이 추구하는 오직 하나의 목표는 평화다. 즉 죄로 인해
손상된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평화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거의 모든 편지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 석상에서 자제들에게 협조자로서
오실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평화를 주고 간다고 말씀하신다. 바오로 사도도 성령이
힘쓰시는 바는 생명과 평화라고 서술한다. 하느님은 평화의 하느님으로서, 당신
사랑과 평화를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가슴 속에 쏟아 주신다.

-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일치가 회복되면 평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가 왜
깨지는가? 인간이 하느님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또는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하느님을 저버린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죄와 나약함으로 인해
당신에게 등을 돌린다 할지라도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또한 죄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평화가 깨어진다. 그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에서 돌아서
야만 한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증오심,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협함이 인간들 사이의 평화를 해치는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
-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은 나 자신과의 평화이다. 사람은 모두들 이기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제 몸을 더 받들고 산다. 하지만 묘하게도 자기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싫어할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운 기대치에 실제 자신의 모습이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이런 것을 빨리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세상에 내신 데에는 우리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 하느님은 분명 우리 각자에게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좋은 점, 고유한 점을
하나씩은 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좋은 점은 무엇인지,
나의 특성과 재능은 무엇인지를 찾아서 가꾸어야 한다. 하느님이 주신 특성과 재능은
나름대로 다 가치가 있다. 각자 자신만이 지니는 고유함을 소중히 여기고 또 그로써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자신과의
평화도 바로 성령의 은혜다.


< 5. 복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 >

- 바오로 사도는 마지막에는 결국 생명이 죽음을 이길 것인데, 이를 마련해 주신
분이 하느님이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말한다. 성령은 우리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생이 있다는 것,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살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수많은 역경과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방에 선포하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갈 수 있었다.

-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과 삶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이렇게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기초가 되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고, 우리는 그 은혜 속에서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도 사랑할 힘을 얻게 된다.

- 우리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체험하는 아름답고 보람 있는 시간은 순간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자신이 세상에 살아가며
체험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되살아나서 영원히 존속될 것을 희망하고 믿는다.

-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에는 억울하고 슬픔일이 수없이 많다. 어떤 때는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크나큰 슬픔을 삭여야 한다. 하지만 신앙인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이 친히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고통도 슬픔도 울부
짖음도 없는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희망한다. 우리는 이런 복된 희망 때문에
바다와 같이 깊고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절망과 자포자기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 부록 : 예수님 부활의 이해를 돕는 말 ]

-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구세주로 세상에 선포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그리스교
신앙은 예수님 부활을 빼 놓고는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을 존경하면서도 그분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부활은 역사에서 선례가 없던 사건이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
이기 때문일 것이다.

- 예수님 부활은 하느님 아버지의 업적으로서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
이다. 이 신비는 궁극적으로 신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성을 요구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관련
해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으려는 노력은
정당하다고 하겠다.


< 1. 예수님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 >

-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고백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완전히 헛된 것으로 끝난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을까? 유감
스럽게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해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과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뿐이다.

- 우리는 예수님 부활 사건 자체를 역사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고, 단지 그 전후의
두 가지 사실만을 통하여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는 예수님이 반대자들에게
체포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분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 후에 흩어 졌던 그분의 제자들이 다시 모여 수고와 저항,
죽음조차도 꺼리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한 것이다.

- 그토록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짧은 시간 내에 목숨을 바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에 틀림이 없다. 성서는 ‘그 무슨 일’이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증언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졌다가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선포한 것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
이성으로는 여기까지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무언인가 특별한 일’ 즉 제자들이
변화하게 된 원인인 예수님 부활 자체는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단지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업적인 예수님 부활 역시 신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 2. 부활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 부활 신앙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로 전능하신 하느님은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시라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 부활을 통해서 종말에 있을 모든 이의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잠든 이들의 맏물”
(1고린 15,20), “죽은 자들 가운데 맏이”(골로 1,18)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날에
모든 이가 부활하리라는 신앙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기원전 2세기경에 형성되었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어 왔고, 신앙 때문에 박해 받고 죽어 가는 이들을 보면서 바로 이
하느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마련해 주실 것임을 믿게 되었다. 실제로
하느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써 이런 믿음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응답해
주셨다.

- 예수님 부활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끝장 난 곳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행위다. 세상과 인간을 무에서 창조하신 하느님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세력인 죽음을 이기시고 새로운 생명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귀결은 부활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다.


< 3. 육신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세상 마지막 날에 육신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즉 지금의 우리 육신 그대로
부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예로 들어 늙은이, 장애인들에게는
육신의 부활이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과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은 지금의 육신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다.

- 바오로 사도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
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4).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육신의 부활이란 지금의 몸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현재의
육신이 달라지고 완성된 모습으로 살아난다는 것이다.

-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할 우리 육신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 나의 육신과 어떤
관계에 있게 될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세상 이치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씨앗은 땅에 묻혀서 썩지만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 큰 나무가
된다. 또한 과실수의 경우, 꽃이 지면서 작은 열매가 맺히고 그것이 자라나 탐스런
과일이 된다. 그리고 애벌레는 죽은 듯이 고치에 갇혀 있다가 때가 되면 아름다운
나비로 변한다. 씨앗과 큰 나무, 꽃과 열매, 애벌레와 나비는 하나이면서도 서로
다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썩을 육신과 마지막 날에 부활한 육신은 하나이면서도
서로 다를 것이다. 부활한 육신은 변화되고 완성된 육신으로써,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아름답고 좋은 모습을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마지막도 아름답게 꾸밀 것이기 때문이다.


[ 글을 맺으며 ]

-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새롭게 변화된 인간의 모습에서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보고, 이 변화는 성령이 힘차게 작용하신 덕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각자가 새로워지면 세상도 조금씩 변합니다. 우리 각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초대에 흔쾌하게 대답하는 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0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4.25.


[ 고해 성사 ]

- 지은이 : 안셀름 그린, 옮긴이 : 김주현 / 84p
- 고해성사의 이해와 구성, 화해하는 삶 이야기/ 화해의 축제

- 지은이 프로필 : 1945년 독일 출생, 1964년 성베네딕도회 입회,
1965-1974년 성 오틸리엔과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공부,
신학박사 학위, 1970년부터 각종 영성 및 심리학 강좌, 1991년부터
수도자들을 위한 영성 지도신부 등

[ 표지의 글에서 ]
- 안셀름 그륀 신부는 고해를 “치유의 능력을 지닌, 그리고 실제로 치유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해한다. 고해 중에 행해지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죄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하여 자신의 참 모습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과의 화해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길이 바로 고해다.

[ 머리말 ]

- 고해성사는 우리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치유하는, 하느님의 은총
이란 점이다. 고해는, 우리가 우리 죄와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해를 통해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을 경험한다. 고해
성사만큼 뚜렷하게 치유의 성격을 가진 성사도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죄의식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고해성사,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침투
하는 예식을 통해 죄의 용서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낸다. 고해성사를 관련된 이론과
실제를 살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해성사가 떤 의미를 지니는지 짚어볼
때, 비로소 고해가 지닌 치유와 해방의 기능이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낼 것이다.


[ 1장. 고해성사의 이해 ]


< 말 뜻 >

- 일반인들이 ‘고해’라고 부르는 말을 신학에서는 ‘고해성사’로 표현한다. ‘고해’라는
말 속에는 고해성사의 본질적인 한 부분인 참회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죄에
대한 참회로서의 고해는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신과의
관계를 훼손한 사람들이 참회를 통해 그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통례적이다. 많은 종교에서 공개적인 고해 예식이 행해졌다. 누군가가 죄를 지음으로써
공동체의 질서가 교란되었을 때, 죄 지은 이의 공개적인 고해를 통해 질서를 회복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미 2세기부터 구도의 길을 정화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승려들의
고해 예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 모든 사람은 속죄 욕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못을 반복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잘못을 극복하고 새롭게 시작할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가 이 새로운 시작을 일정한 예식을 통해 표현한다. 이러한 예식은 ‘개인
속죄 예식’과 ‘공개 속죄 예식’으로 구분된다. 성서, 특히 신약성서는 ‘속죄’보다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metanoia)’에 해당하는 ‘회개’에 더 주목하고 있다. ‘메타노니아’는 ‘
생각을 바꾸다’, ‘달리 생각하다’, ‘이면을 살펴보다’ 등의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 때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회개
하라고 촉구한다. 나자렛 예수 또한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그분은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는 신앙 고백이다. 회개한 자는 세례를
통해 용서받고, 성령을 맞아들이게 된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과거가 씻겨 나감
으로써 성령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채워진다. 성령의 힘으로 사람을 치유하셨던 예수임처럼 진정한 삶을 향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화해는 신약성서의 중심개념 중의 하나다. ‘화해하다’의
의미를 지닌 독일어 ‘페어죄넨’는 ‘평온하게 하다, 가라앉히다, 진정시키다. 입 맞추다’
등의 의미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화해’를 의미하는 라틴어 ‘레콘칠리아시오’는 ‘다시
하나 됨’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진다. 화해는 불화와 분열의 상태에 놓인 개인이나
혹은 집단에게 다시금 평화와 공동체의식을 선사한다.

- ‘속죄’라는 의미의 라틴어 ‘페니텐시아(poenitensia)’는 ‘처벌’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속죄’ 라는 말은 ‘죄의 탕감’과 관계있다. 죄 지은자는 처벌받아야 하며, 그 처벌을
통해 죄를 탕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속죄는 감옥살이로 죄를 탕감하는 것과 유사하며,
그 탕감 행위를 통해 비로소 처벌에서 자유로워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 역사적 개관 >

- 속죄 예식은 초기 교회부터 행해졌다. 2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가는 즈음에 교회
공동체에서 멀어진 죄인들, 예컨대 신앙을 버린 사람들 혹은 살인이나 간음처럼
사회적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속죄 예식이
생겨났다. 공동체에서 멀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공동체와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이 속죄 예식이 바로 오늘날 고해성사의 시작이었다.

< 1. 화해로서의 고해 >

-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뒤 신앙을 버렸거나, 살인이나 간음 같은 대죄를
지은 그리스도인들이 ‘화해’로서의 고해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재 편입될 수 있었다.
죄인이 주교 앞에서 죄를 고백하면 그는 통회기간을 거쳐 다시 교회와 하나 될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통회 기간 중에는 성찬전례에 참가할 수 없었다. 통회
기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행해야 할 몇 가지 보속이 주어졌다. 금식, 기도, 봉사
등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죄를 인해 생 긴 상처를 치유해야 했던 것이다.
서방 교회의 통회기간은 대체로 사순시기와 맞물려 있다. 재의 수요일에 통회 기간이
시작되었고, 성목요일에 교회로의 재편입 예식이 거행되었다. 통회 예식이 시작되었던
초기에 이 예식의 대상은 교회에서 멀어진 죄인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모든
신자들로 확대되었다.

< 2. 경건행위로서의 고해 >

- 교회에서 행한 공개 통회 예식은 중세 초기 이래로 점차 ‘개인적인 형태의 속죄’에
의해 침식되었다. 초기 교회에서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먼저 통회 예식을
행해야 했다면, ‘개인 속죄’에서는 예식 행위 전에 이미 죄를 용서 받는다. 따라서
예식 행위는 상징적으로 이해되었다. ‘개인 속죄’는 언제 어느 때건, 얼마든지 되풀이
해서 행해질 수 있었다.

-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고해는 가급적 자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고, 이로
부터 ‘경건행위로서의 고해’가 생겨났다. 자주 고해할수록 더 많이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경건주위로 인해 고해는 성찬례와 긴밀히 결합되었으며,
고해를 한 뒤의 영성체만이 의미를 지닌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경건주의로 20세기
전반의 고해 빈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경건 주의적
이해는 고해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학적 이해에서 현격히 벗어난 것이었다.

< 3. 영성 지도로서의 고해 >

-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약을 가지고, 죄악으로 상처 입은 환자를 돌보는 영적 의사가
바로 영성 지도자이다. “고해는 질병의 치료과정과 유사하다”. 영성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따뜻한 마음과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로서의
기도능력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죄를 고해한 자를 위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영성지도자로서의 고해’는 수도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모든 수도자에게는
‘아빠스(Abbas)’라 부르는 영적 아버지, ‘암마(Amma)’라 부르는 영적 어머니가 있었다.
수도자들은 영적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의 생각들을 애기하고 상의했다. 죄책감을
포함하여 그들의 정서나 심리 상태, 그들의 열정과 욕망, 간밤의 꿈, 육체적 질병과
고통 등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영적 아버지와 어머니는
젊은 수도자가 올바른 수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성 지도자다, 즉 영적
후견인 역할을 했다.

- 수도공동체에서 점점 많은 사제들이 배출되면서 ‘영적 지도로서의 고해’는 점차 성사화
되었고, 아울러 이 과정을 통해 수도자들의 고해 역시 ‘경건 행위로서의 고해’로 그 성격이
변해 갔다. 이전 수도자들이 보여 주었던 영성 지도라는 목적의식은 변질되어 버렸다.
성사화된 고해의 목적은 죄의 용서에 있었기 때문에, ‘영성 지도로서의 고해’에서 애기
되었던 주제들이 성사화된 고해에서는 죄악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다. 사소한 불완전
함들이 죄악이 되었고, 이미 용서된 잘못들이 다시금 용서받아야만 하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영성 지도로서의 고해’는 ‘경건 행위로서의 고해’로 변질되어 갔다.

< 4. 고해는 무엇인가 ? >

- 오늘날의 고해 형태에는 일찍이 교회가 부여했던 ‘화해의 성사’라는 의미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하느님의 따뜻한 은총으로서의 고해성사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고해성사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종종 고해성사를 통해 위로받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속 깊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때때로 고해성사 과정에서 고해자의 영혼이 학대당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처가
사람들의 마음에 고해성사에 대한 두려움을 싹틔웠고, 사람들을 고해성사에서 멀어지게
했다.

- 많은 이들이, 고해는 신자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해의 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해해도 좋다고 허락받았을 따름이다. 고해를 통해 하느님 사랑과 용서를 경험
해도 좋다고 허락받았을 따름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반드시 고해해야 하는 죄는
대죄(大罪)밖에 없다. 대죄란 우리가 명확하고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하느님께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적으로 대죄를 짓는 경우란 거의
없다. 우리 죄의 대부분은 나약함에 기인한다. 우리를 짓누르는 대부분의 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과거 ‘영성 지도자로서의 고해’에서
다루어 졌던 주제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죄지은 자신을 아무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져 괴로워하는 사람이 고해로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예식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고해 예식이란 재화합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고해 예식은 영성 지도의 성격도 지녀야 한다는 점
역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고해 행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죄란 무엇이며 죄의식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죄와 죄의식에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

< 5. 평신도를 통한 고해와 사제를 통한 고해 >

- 초기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꼭 사제에게 고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신도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용서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의 고해는
더욱 확산되어 중세까지 계속되었다. 영국의 수도자였던 교부 ‘베다 존슨(+735년)’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라고 한 야고버의
서간 5장 16절의 말씀은, 사제 앞에서 고해할 정도로 큰 죄가 아니라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고해하고 죄의 용서를 위한 도움이 기도를 부탁할 수 있음을 뜻한다.”
‘평신도를 통한 고해’는 16세기로 접어 들 때까지도 통상적이었다.

- 고해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사제로 제한되기 시작한 것은 스콜라 학파의 신학 체계
에서 비롯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사와 관련된 그의 신학 이론을 통해 그리스도와
성령은 성사 속에서 오직 사제만 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부터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와 같은 직설적이고 선언적인 용서의 전달자가 되었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권능을 대리함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언적으로 확언함으로써
고해자는 용서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피렌체 공의회
(1439년)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공인했다. 이는 고해의 본래 의미와 그다지
상응하지 않는다 것을 보여 준다.

- 고해의 본질적인 의미는 죄인이 다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다. 죄를 지음으로써 공동체에서 멀어진 자가 신앙의 형제자매와의 대회를 통해
고해하고, 그들은 그의 죄 사함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했다. 죄인을 위해 함께 바쳤던
이 공동체의 기도야 말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고,
자신의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느끼게 한다. ‘평신도를 통한 교회’를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키는 일은 오늘날 매우 의미 있어 보인다.

- 영성지도자든, 심리치료사든,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위해,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실제로 그의 죄를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믿어도
좋으며, 또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죄를 지은 경우라면 사제를 찾아가 용서를
청해야 한다. 교회법에 따르면 대죄에 대한 사면 선언은 사제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만
대죄의 의미는 하나밖에 없다. 완전한 자유의지 속에서 분명하게 하느님을 부정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 사제만이 집행할 수 있는 교회 예식을 통해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한 까닭은 대죄를
지은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심리학적
해석 역시 가능할 것이다. 고해 예식은 죄인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자신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녹여 버린다. 고해 예식은 마음속 깊이
용서받았다고 느끼게 하여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를, 교회의 온전한 일원이 되었음을
진정으로 실감케 한다.

< 죄에 관하여 >

- 현대인들은 자기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죄의식의 결여가 바로 오늘날
고해성사의 퇴조와 관계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가 제시한 이른바 ‘고해 목록’,
다시 말해 고해를 위해 점검해 봐야 할 목록가운데 몇몇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죄의식을
심어 주지 못한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죄의식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고해 목록’ 보다는 오히려 현대문학 작품에서 현대인이 지닌 죄의식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열심인 작가들에게서 ‘고해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문학은 현대인들이 언제 죄의식을
느끼는지 낱낱이 밝히고 있다. 기업화된 세계, 그리고 능력과 성과에 대한 평가는 왜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현대인들을 죄의식 속으로 몰아넣는다.

< 1. 죄와 죄의식 >

-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면과 사소한
잘못에도 지나치게 죄의식을 확대하려는 면이 공존한다고 지적한다. 이 말이 사실라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지은 죄와 우리 스스로 확대한 죄의식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 죄의식이 곧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종종 자신감의 결여나 부정확한 상황인식에 기인한다.

- 자신이 지은 죄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존재로서의 본질, 자신의 고유성,
자유 그리고 책임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죄를 의식이 포착하지 못할 때, 우리
속의 사악함은 양심의 가책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명료한 불안과 우울 혹은
위축감으로 표현된다.

- 죄란,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에 위배되는 것들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린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정당화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과장하여 회한에 빠지기도 한다. 자신이 지은
죄를 직시하고 속죄하는 대신 그 회한을 즐기기까지 한다.

< 2. 기회로서의 죄 >

- 우리가 왜 죄를 저질렀는가를 밝혀주는 심리학처럼, 자기 죄를 직시할 때 우리의 죄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우리 내면의 심연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나아가 우리 삶의 토대인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기회가 될 것이다.
자신이 지은 죄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용기는 우리에게 도덕적 성장이라는 좋은
선물을 안겨 준다. 이 선물로 우리는 삶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 무의식 속에서
고착되어 있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의식의 수면위로 떠올라야 비로소 교정과
발전이 가능해진다. 자신이 지은 죄를 의식 속에서 포착하는 것은 엄청난 도덕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유감스럽지만 죄 없이는 영혼의 성숙도, 정신적 지평의 확대도 없다.

< 3. 악행 >

- 우리 행위 중에서 무엇이 어디까지 죄악인가를 객관적으로 구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내면 속으로 사악함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가 틈을 마련해
주었을 때, 우리가 과거의 잘못을 고치려는 노력을 거부할 때, 아무런 저항이나 대항
없이 사악함에 동조해 버릴 때, 이때 우리는 악을 행한다고 말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악행이란, 특정한 목적 없이 저질러지는 반사회적 행위를 의미한다. 극도의
좌절감과 과도한 부담감으로 우리의 본능적 욕구가 ‘공동체의 삶을 깨뜨리는 형식’과
결합될 때 악행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악행이란, 결코 후회하지 않는 악의가 즐거움을 위해 저지르는 그 무엇이 아니다.
악행이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상처와 극심한 결핍에 시달리는 사람이 상황에
떠밀려 그러나 두려움에 떨면서 저지르는 것이다. 심리학은 우리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단선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것을 일깨운다. 또한 영혼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전제가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용서라는 점도 함께 일깨운다.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을 용서할 때 악한 마음이 변화하고 극복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우리 자신에게
잘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 우리 사회에 대한 잘못이기도 하다. 용서가 없다면 우리
사회는 암세포처럼 번진 악행으로 가득 차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4. 과장하지도, 부인하지도 말라 >

-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의 경향이 있다. 자신의
죄를 지나치게 확대하려는 경향과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모두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죄를 극화시키고 확대시킬 때 우리는 자신이 지은
좌와는 무관한, 지나치게 확대된 죄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사실 대부분의 자기멸시는 실제로 일어난 그 무엇과는 상관없는 과장의 결과이기
십상이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죄와 죄의식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반성과 책임을 저해한다.

- 죄와 관련된 또 다른 위험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부인함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가 죄인이 아닌 이유를
수없이 제시한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의심, 즉 자신이 죄인이란 혐의는
커져만 간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부인은 결과적으로 활동의 위축과 평온의 상실을
야기한다.

< 5. 대화를 통해 얻은 자유 >

-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자유에 대한
표현이다.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거나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행동은 결국
자신에게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임을 알게 된다. 대화를 통해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고 자신이 지은 죄와 개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도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규율들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된다.

- 고해 상대자는 고해자의 죄책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비록 고해자가 자신이
지은 죄의 실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몰아
세워서는 안 된다. 모든 죄의식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해자의 죄의식이 매우 복잡
다단해 보여도 고해 상대자는 진지하고 명쾌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고해 상대자는
고해자의 처지가 되어 그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해자 스스로가 자신이 지닌
죄의식의 정체를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고해 상대자는 고해자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고해자가 느끼는 죄의식 저변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억압된 성적 욕구, 표현되지 못한 분노, 자학적 경향 등과 만날지도 모른다.
고해의 참된 의미는, 왜곡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아가 우리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그 모습과 화해하는 것이다. 고해의 이러한 의미가 실현되었을 때 고해자는,
그의 진짜 죄는 고해한 죄목들의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거부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2장. 고해 성사의 구성 ]

- 고해소에서 경험하는 것은, 고해자들의 고백이라는 것이 대부분 몇 분을 채 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고해 내용이라는 것도 극히 형식적인 것이 불과할 때가
다반사다. 상황이 이쯤 되면 사제에게나 고해자에게나, 고해 시간이 의미와 가치로 충만해
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그들은 배운 대로 고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고해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그저 원칙적인 말뿐이다.

- 다음은 고해소에서 행하는 고해성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제의 방이든, 고해자의
방이든,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고해자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보다 실적적인 예식의 구성을 살펴본다.

< 1. 인사 >

- 고해는 짧은 인사로 시작된다. 먼저 사제와 고해자는 성호를 그음으로써 성호의 십자
속에서 빛을 발하시는 은혜로운 하느님의 사랑 아래 서게 된다. 사제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기도를 준비한다.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의 죄를 바르게
통찰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다른
기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기도에 이어 사제는 고해자에게 도움이 될 성서 한 구절을 읽는다. 다음은 속죄 예식과
관련된 성서 구절이다. 로마서 3,22-26. 5,6-11. 6,2-13. 12,1 & 9-19. 13,8-14/
요한의 첫째 서간 1,5-10, 3,1-24, 4,16-21/ 마태오복음 3,1-12, 4,12-17, 9,9-13/
루카복음 15,1-10, 15,11-32, 17,1-4, 18,9-14.
여기에서 1요한 1,1-10의 성서
구절은 고해자로 하여금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움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면 그는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다. 이렇듯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외면도 부인도 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마음을 열고 고해할 용기를 붇돋아 준다.

< 2. 성찰 >

- 도대체 무엇을 고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그들은 신자들에게
참고용으로 제시하는 고해목록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하는 고해
내용은 고해 목록의 항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해를 위해 살펴보아야 할 것들을 크게
셋으로 나누면 이렇다. 첫째,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둘째,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셋째,
나와 타인과의 관계이다. 고해자는 이 세 관계를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이 그 관계 속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떤 관계가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하는지 혹은 어떤 관계에서 자신이
죄책감을 가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뉘우쳐야 할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따라서 고해해야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해는 단지 죄를 고백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고해 행위는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그 성찰의 내용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그 결과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언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고해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느끼는 문제점, 즉 무엇을 어떻게 고해하는가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 우선 하느님의 관계에 관해서는 이렇게 자문해 보자. 하느님은 나의 삶에서 어떤 존재
인가? 나는 하느님을 내 삶에 받아들이는가? 나는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곁에 계신 하느님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가? 나는 하루 중 어떤 행위로 하느님의 현존을
깨우치는가? 나는 아침마다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가? 아니면 하느님과
무관한 아침을 맞고, 하느님과 무관한 하루를 보내는가?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공허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나를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나 자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을 내 삶의 원천이자 목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일견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질문들을 토대로 대화가 진행될수록 고해자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는지 보다 민감하고, 분명하게 느끼지 시작한다. 누군가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 앞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 관련된 질문은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의 문제로
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지고 있을 뿐인가? 나는
내면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가, 아니면 나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얽매어 있는가? 건강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건강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는가? 하루를 계획해서 살아가는가,
아니면 하루라는 시간을 때울 뿐인가? 나는 나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어떤 상상들을 하는가, 그 상상들은 어디로
부터 온 것인가? 그 상상들에 나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나는 우울에 빠져 있지 않은가?
혹은 자기 연민에 끊임없이 스스로 동정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추락시키지는 않는가?

- 이제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 할 마지막 범주의 질문들은 타인과의 갈등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그와 나 둘 중 어느 한쪽만 과도한 부담을 진 관계는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갈등상황을 나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왜 그렇게 되었
는가? 그는 나에게 무엇을 연상하게 하는가?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내게는 왜 그렇게 힘이
드는가? 그는 내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가? .... 만약 고해자가 주위의 누군가와 갈들을
겪고 있다면, 자신을 혹은 그 누군가를 탓하거나 용서하기 전에 먼저 그 갈등 양상을 설득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갈등에 대한 설명이 진행되면 될수록 아마도
고해자는 갈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점점 또렷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타인과의 관계가 비록 갈등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성찰은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해 어떤 말들을 하는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 나는 그를
존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멸시하고 있는가? 마음속으로 그를 끊임없이 판단하고 심지어
심판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나는 그 위에 서 있지는 않는가? 나는 그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 나는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는가? 나는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마음을 쓰고 있는가, 아니면 오직 나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는가?

< 3. 사제의 권고 >

- 사제는 고해자의 고통을 위로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사제는 고해자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 영적 지도자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고해하는 동안 고해자가
자신의 문제 상황을 부적절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사제는 고해자가 자신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말은, 사제가 준엄한 질책으로 고해자를 몰아세우는
엄격한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제는 권고를 통해 고해자가 자신의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그러나 놓쳐 버리고 있는 중요한 정보에 주의를 기울
이도록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 고해가 끝난 후 사제가 고해를 들으면서 느꼈던 점들을 애기한다면 더욱 의미 있는
고해성사가 될 것이다. 고해자의 어떤 말이 자신을 감동시켰는지, 고해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말이다. 사제가 자신이 받았던 인상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또 다른
대화가 이루어 질수도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대화가 길지 않아야 한다는
점, 무엇보다도 고해 내용과 관계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 4. 실천 계획 >

- 고해의 속죄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잘못에 대한 청산이 아니라, 고해자의 영적 성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해자에게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계획을 실행하고 싶은지를 질문해야 한다. 사제는 또한 그 계획들이, 지켜질
수 있고 고해자의 영적성장으로 직결되는 구체적인 것들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반복해서 고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씩
이라도 변화해야 한다. 비록 온전한 선한 모습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조금씩이나마 변해야 되고, 또 그것을 위해 작은 것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사제는,
고해자가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5. 잘못에 대한 책임 >

- 고해자의 고백이 끝나면 으레 짧은 통회기도가 뒤따른 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한다. “저는 선을 소홀히 하고 악을 행했나이다. 이를 통회하오니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통회(참회)는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분석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통회
(참회)를 의미하는 독일어 ‘로이에’는 슬픔. 영적고통. 고뇌 등에 그 어원적 의미를 두고
있다. 물론 슬픔이나 아픔 혹은 괴로움을 통회 과정에 수반되는 정서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상태가 곧 통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의
뜻에, 동료들과의 화합에, 그리고 원하는 진실에 상응한 행위를 하지 않는 데 대한 성찰이다.

- 안토니오 교부의 금언(혀와 배를 절제하라)은 우리가 통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하느님께
내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진정으로 뉘우쳤다고 할 것이다.
진정으로 통회하는 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하느님께서 밝혀 주실 것을 기도하는
자이며, 하느님께서 밝혀 주시는 그 길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 그리고 활기가 가득 차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 자이다. 진심 어린 통회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면 이렇게 기도하자.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6. 용 서 >

- 고해자가 고백을 마치고 사제와 고해자가 대화를 나눈 다음, 사제는 사죄의 은사를
베푼다. 사죄란 문제의 해결을,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자유와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제는 고해자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약속하며
고해자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사제의 안수는 하느님의 용서가 가시적으로 표현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죄인이 자신은 물론 자기 죄까지 하느님께서 감싸 안으셨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예식이다. 고해성사에서 사제는 사죄경을 외운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아멘.”

< 7. 하느님 은총 속에서 떠나는 길 >

-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고해자가 다시 활기차게 살아가기 위해
세상 속으로 떠나는 것과, 함께 마무리 된다. 마침기도는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의
형식을 띤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바로 이 짧은
기도를 통해, 고해자가 다시 하느님과 공동체의 품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졌음을 선포
하는 것이다. 이제 불화와 분열의 어둠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나는 그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빌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을 향한 그 길을 도중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며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 3. 화해하는 삶 ]


< 1. 자신과의 화해 >

-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그래,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인의 길은 자신의 삶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
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과 화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평생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자신의 결함과 직면하게 되면 화가 치미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소망이 강렬하면 할수록 더욱 더 민감하게 자신의 결함을 감지하게 된다.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결함이 노출된다고 판단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 자책이 심해지면 질수록 어두운 분노와 질투는 강해질 뿐이다. 해결책은
겸손이다. 자신에게 겸손을 요청해야 한다. 겸손은 용기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불행
속으로, 우리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결점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용기다. 우리의
불행과 결점을 바라보기 위하여 겸손이라는 용기가 필요하다. 겸손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살아가며 부딪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선사한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
하신 길을 신중하게, 확신에 차서 걸어갈 수 있게 한다. 그 활기찬 걸음 속에서 우리는,
겸손이 우리에게 준 자신과의 화해, 마음의 평화라는 또 하나의 값진 선물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2. 공동체와의 화해 >

- 타인과 화해하는 첫걸음은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는 것, 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포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가 저지른 일은 그의 문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의 행위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의 상처가 더 이상 확대도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벗어나, 그에게서 받은 상처를 그와 상관없이 당당하게 살겠다는
의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 화해로 가는 둘째 걸음은 다시 그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와의 관계를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는 나뿐만이 아니라
그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화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달려있다. 그가 대화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화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화를 거부한 그를 비난하지 않음
으로써,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그와 화해할 수 있다. 그를 내버려
두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처받은 나를 나 자신과, 내가 겪은 지난날들과 화해시키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과 화해했을 때 비로소, 언젠가 내게 돌아올 그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잘못을 저질러 공동체의 화합이 훼손되었다면 공동체를 대표하는
누군가가 그의 잘못에 대해 그와 애기(대화)해야 한다. 죄지은 그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 애기해야 한다. 대화의 목적은 그가 왜 죄를 짓게 되었는지,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데 목적이 있다. 아울러 공동체는 어떠한 경우라도
그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 기울일 때 화해가 이루어지 진다.
-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제에게 면죄부를 받으러 가는 것이 고해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이제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 고해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또한 고해는 집으로 돌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과 화해하라는
하느님의 권고다.

< 3. 회 개 >

- 회개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가까이 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떼 내어 하느님께로 향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너의 삶을 생명으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죽음으로
이끌 것인가? 공허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결실로 이끌 것인가? 참된 너희 모습을 찾아
나설 것인가, 아니면 거짓 모습만을 맴돌고 있을 것인가? 회개란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할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회개란 예수님
께서 선포하신 복음, 우리를 사랑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와 계시다는 기쁜
소식을 믿는 것이다.

- 회개의 핵심은 숨겨져 있는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많은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의 이면을 들추어,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셨다.
회개는 하느님을 통찰했던 예수님의 시선을 연습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나의 생각과 타인의 말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곁에서 말을 건네시며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 4.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 예수 >

- 구약성서에서 그려진 하느님의 여러 모습들 중 예수님께서는 특히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 인내하시는 하느님, 죄인들을 향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강조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하느님은 언제 어느 때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해 주신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신다. 우리가 우리를 단죄할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단죄
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종종 냉혹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끊임없이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 내부의 심판자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 놓을 수 잇도록, 그
심판자의 권력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복종을 우리가 거절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를 억누르는 자율적인
규율과 율법이 아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계율
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 그리고 그분께서 주신 계율의 의미를 우리 앞에
새롭게 펼쳐 보여 주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마르 2,27). 계율이 참된 가치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선량함 속에서
서로서로 화목하게 살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율이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스럽고 완전하게 되기를, 인간 본연의 모습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 그분은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보증이다. 참된 자신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 스스로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 맺는 말 ]

- 고해를 통해 우리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사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치게 된다.
고해를 통해 우리는,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 성사의 은총을
통해 자신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와 조우하게 된다. 나도
즐겨 고해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에게 고해가 얼마나 유익한지는 알고 잇다. 때때로
나는, 일상을 접고 내 삶을 들여다보며 내 잘잘못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를 느끼곤
한다. 내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말이다.

- 고해를 통해 때때로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되풀이 하는 잘못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한 고해를 통한 용서의 경험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어, 과거의 잘못들은
다 묻혀 버린 거야. 그것들을 묻힌 채 그렇게 놓아두어도 괜찮다고 허락받은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 고해는 우리로 하여금 용서의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끌어안는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는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는 공간이다. 고해성사를 담당하는
신부인 나에게, 죄책감에 억눌려 움츠러들었던 이들이 고해를 한 후 어깨를 펴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언제나 하나의 기적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화해의 공간인
고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1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5.02.


[ 네 신부님의 어머니 ]

- 지은이 : 이춘선(마리아) / 223p
- 한국 교회사상 최초로 네 명의 아들을 봉헌한 어머니의 일기와 편지와 기도시 모음

- 지은이 프로필 : 1921년 북간도 육도포 출생, 1936년 결혼, 1950년 강릉 정착,
11명 남매 출산(이중 3명 사망), 1971-1996년 사이에 아들 4형제 서품,
1997년 딸 종신서원, 2006년 손자 사제 서품, 2015년 선종

[ 표지의 글에서 ]

" 나 같은 주제에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신부를 몇 씩이나 낸단 건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네 명의 아들, 한 명의 딸을 신부와 수녀로 봉헌한 어머니의 절절한 신앙고백.
열악하고 힘겨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자식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길러냈던
한 신앙인이자 엄마의 모습이 일기와 편지글로 담담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춘선 마리아 생애 (1921.5.8~2015.3.11) ]

1921년 5월 8일 한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인 북간도 육포도에서 태어났다.
열심인 교우 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어려운 형편에도 신앙을 중요시한 농사꾼 아버지
덕분에 교회에서 신앙생활과 함께 글을 배웠다. 1936년 오병선 타대오와 결혼하여
11남매를 두었으나 그중 셋은 어려서 잃었다. 1946년 공산주의가 세력을 넓히고
있던 북쪽에서 신앙생활이 여의치 않아지자 양양으로 왔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피난 온 강릉에서 평생을 살았다. 양양에 있을 때는 교리도 배우지 못해 첫영성체를
하지 못하던 아이들을 위해 교리교사가 되어 첫영성체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가난하고 여유 없는 살림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신앙을 가르쳐 1971년에
첫째(오상철/토마스 신부), 1981년에 셋째(오상현/요한 보스코 신부), 1994년에
일곱째(오세호/클레멘스 신부), 1996년에 막내(오세민/루도비코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어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4형제를 신부로 봉헌한 어머니가 되었다. 또한
1997년에 넷째(오진복/젬마 수녀)가 종신서원을 했고, 2006년에는 손자(오대석/
바오로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영적인 구원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장례미사에서 부를 성가를 미리 선곡해
두고 틈틈이 자식들과 함께 부르는 등 열심히 죽음에 임할 준비를 하던 이춘선 마리아는
2015년 3월11일 온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평소에 염원하던 대로 하느님께 돌아갔다.
‘이춘선 마리아의 생애(1921.5.8.~2015.3.11)’는 춘천교구 70년사 ‘우리 선조
우리 터전’에도 실려 있다.

[ 추천사 ]에서

이 책에는 자매님의 생생한 신앙체험들이 담겨있습니다. 열악하고 힘겨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자식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길러 낸 한 신앙인이자 엄마의 모습이
일기, 편지글과 자녀들의 회고글로 담담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일을 우선시한 자매님의 신앙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무너지다시피 한 우리의 현실에서 되새김질해 보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 부디 이 책이 물신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많은 이에게 따뜻한 위로와 작은 지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 천주교 춘천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


# 이 책은 이춘선(마리아)의 일기, 편지, 사진, 기도시와 막내인 오세민(루도비코)
신부가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회고)로 구성되어 있다. 독서 메모량이 많아 일기와
편지 그리고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님이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 중 두 가지씩만
메모하고 기도시는 모두 모아 기록해 두기로 하였다. - 메모자


[ 일기 ] 중에서

< 나는 본래부터 허무인 것을/ 1984.5.20. >

누가 나를 밟으면 어떠냐 무시하면 어떠냐, 나는 본래부터 허무인 것을.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도 내 것이 아닌 것을. 하느님이 지어주신 그대로 맡겨주신 그 일을
심어주신 그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며, 잎새가 나오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이지. ...조물주께서 정해주신 법칙대로 태양열로 몸을 녹이며 훈훈한 훈풍을
기다리는 것이지. 작열하는 폭양 아래서 그늘을 찾아 하느님을 찬미하며, 대지 위에
쏟아지는 태양 빛은 너무나도 아름다워라. 초목들은 그 화려한 잎새들을 펄럭거리며
태양빛이 보내주는 자양분을 섭취하느라 여념이 없구나. 나도 한없이 좋은 조물주의
품 안에서, 대지의 품 안에서 조물주의 발자취를 찾으며 그분의 모습을 찾으며,
그분의 재주를 칭찬하고 감탄하며, 평화와 기쁨으로 살아가자. 그분을 찬미하며
사랑하며...


<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겠습니다/ 1995.3.7 >

아, 혼자 사는데도 왜 이렇게 힘듭니까?아버지~ 나는 정말 아무 데도 쓸모없는
종입니다.그래도 나는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이 부푼 인간인데 왜 이렇게 무기력
합니까.아버지~ 평화와 사랑을 부어주소서.병들고 가냘픈 어린 딸이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를 부릅니다.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아버지. 허무에서 끌어내신 내 존재를 아버지께 드립니다.몽땅 드립니다.
영원히 가지소서.


[ 편지 ] 중에서

< 어쩐지 허전한 가슴/ 1964.5> - 사제 서품전

토마스(1남), 엄마도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조용히 부르며 언제
봐도 싫증이 안 나는 그 모습을 그린다. 토마스도 이제는 다 커서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 어쩐지 엄마 가슴이 허전하구나.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엄마 품을
떠나겠지. 천주님의 정하신 법칙대로. 그러나 이렇게 애쓰게 낳고 기르고 교육해서
세속에게 주기는 싫다. 아름답고 생활한 희생으로 영원하신 천주님의 사랑의 제단
위에 바치고 싶어. 그러나 이것은 천주님의 성의를 따르고자 하는 어미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의 심리일 뿐이다. 뒷일은 예수성심께 맡겨 드린다. 토마스, 엄마를
이해하는 너의 마음 한없이 고맙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천주님의 강복이 네 위에
풍성히 내리시기를 축원한다. 철학과 일동 앞에 답사를 써놓고 보니 참 부족한 게
많다만 엄마는 공부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고, 창피하거든 5월 16일 날 네게 쓴
편지를 보여주어라.

< 편애와 은근한 자만/ 1978.6.15. > - 사제 서품후

토마스 신부, 그동안 소식은 항상 듣습니다만은 쉴 사이 없는 일들로 남몰래 건강
이라도 해치지 않는지, 또 외적인 일들로 인해 내적 생활에 방해나 없을까 하고
걱정하는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본당 일은 잘되어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협동조합이 잘된 다구요. 부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영광과 성교회의 유익으로 돌아
가도록 지혜롭게 처리하시고, 교우들에게는 드러나게 편애할까 극히 주의하시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결과가 좋을 때 은근한 자만심이나 자랑을 조금이라도 나타
내시지 않고 모든 좋은 결과를 하느님의 영광에 돌리시어 교우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시고, 항상 겸손과 사랑의 반석위에 꿋꿋이 사시기를 기도드리며, 고해소에서
인자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대신하시기를 빌며, 제대상에서, 강론대에서, 사사로운
장소에서 항상 거룩하고 성실한 사제 상을 잃지 않으시기를 특별히 기도합니다.


[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님이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 ] 중에서


<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셨나요? >

여러 날 동안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중요한 행사를 마친 어느 날 저녁, 그 행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내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고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마지막까지 유심히 들으시던 어머니가 한 말씀 하셨다. “그래서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셨나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일의 성공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고 일했는가가
중요한 것이었다. 멍하니 있는 나에게 덧붙이셨다. “하느님께 사랑 받는 사제가
되셔요. 부탁입니다.”

< 엄마의 유언 >

어머니에게는 영적인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이 관심사였고 당신의 마지막에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무척 염려하셨다. 그래서 매일 오후 3시에 자비심의
묵주기도를 정말 열심히 바치셨다. 그 기도를 하는 영혼에게 주님께서 임종 때에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어머니는 임종
당일 오후 3시경에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에게 이 세상의
문을 열어주셨으니 이제 제가 어머니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편안히 가세요.” 어머니는 또한 살아계실 때부터 당신의
장례미사를 준비하셨다. 시작성가를 비롯하여 모든 성가를 선곡하셨고 틈틈이 자식
들과 그 성가를 부르시기도 했다. 장례미사에는 4명의 아들 사제와 손주 신부, 딸
수녀가 함께 자리해 그 성가들을 불렀다.

묘비에는 ‘더 힘써 사랑하지 못했음을 서러워하노라’고 새겨달라고 부탁하셨고,
화장하지 말고 묻어달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장례미사 때 강론시간에 신자들을
한바탕 웃겨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세상에서의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
곁으로 가는 기쁜 날인데 신자들을 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사
시간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강론을 했다. 많은 신자들이 웃었다. 나는 어머니의
유언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지금도 어머니의 낭랑한 음성이 귓전에 맴돈다.
“야훼~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 이춘선 마리아의 기도시 모음 ]

< 내 영은 고요히 >

내 영은 고요히 당신을 향하여 날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내 영은 고요히 당신을 향하여 날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죄와 허물이라는 무게가 꼼짝도 못하게 하옵니다.
내 영은 고요히 당신을 향하여 날고 싶습니다.
날개를 주옵소서. 용서를 주옵소서. 사랑을 주옵소서.


< 피곤하고 슬퍼서 눈물 나는 날 >

어머니, 어머니 아, 마리아여!
나는 당신의 작은 딸입니다. 굽어보소서.
이 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손길로 치료해 주시지 않으시면
이 작은 딸은 죽습니다. 살아나지 못합니다.
어머니, 나를 안아 가소서.


< 성모님 봉헌문 >

성모님, 저 자신과 자녀들과
부모, 형제, 친척들과 친구들, 은인들, 이웃들,
내 재산 소유물을 전체로 봉헌하오며,
내가 아는 모든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을, 신자 전체와
온 세계 인류를 몽땅 봉헌하나이다.
온 세상 성교회와 조국과 모든 나라와
온 세상 가득 찬 죄인들을 전부 봉헌하나이다.
내가 기도해 준다고 약속한 사람들도 다 봉헌하나이다.
하느님께 교황님을 특별히 봉헌 드리오며,
모든 성직자, 수도자를 몽땅 봉헌하나이다.
하느님께 몽땅 감사하나이다.
끝으로 저의 모든 죄와 모든 고통과 모든 은총
선행을 봉헌하옵고, 제 앞날을 다 봉헌하나이다.
우리 아들 신부들, 수녀도 봉헌하오며,
모든 것을 다 전부 봉헌하오니 성모님,
부족한 저의 봉헌을 인자로이 받아주시옵소서.
죄인 이 마리아 봉헌하옵니다.


< 내 허약함과 무력 >

오 사랑의 하느님,
내 기억력의 모든 추억을 가지시고
내 지능을 가지시어
그것이 당신의 더 큰 영광에만 사용되게 하소서.
내 의지를 온전히 가지소서.
나는 그것을 당신 뜻 안에 영원히 없애버리나이다.
내 하느님, 당신은 내 허약함과 크나큰 무력의
무한한 심연을 아시나이다.


< 한뉘 > - 한평생의 우리말

다시없는 한생을 후회 없이 살게 하소서.
고통은 천국 가는 길임을 명백히 깨닫게 하소서.
주어진 소명을 목숨을 걸고 매진하게 하소서.
그 눈물과 한숨, 고뇌와 번민, 권태와 환멸을
평화와 사랑으로 바꾸어 주소서.


< 신비 묵상 >

- 환희 2단 :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복중에 모시고
엘리사뱃 집을 방문하시니 그 집에 만복이 내리셨다.
성모님 우리 집에도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오시옵소서.

- 환희 3단 :
사천 년 기다리던 메시아께서 어떻게 이렇게 비천하게,
가난하게, 외롭게, 조용하게 탄생하셨을까?
우리에게도 가난을 사랑하는 덕을 주소서.

- 통고 1단 :
제자들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다가가셔서 땅에 얼굴을 대고 같은 기도를 하셨다.
너무나 극심한 고통이기에 심장과 혈관이
미처 피를 돌리지 못하고
모공을 통해 피가 박으로 새어 나왔다.
그 비명 허우적거리시는 그 손을 누가 잡아드리며
넘어지시는 그 어깨를 누가 받쳐드릴까?
흐르시는 눈물과 피땀을 누가 닦아드릴 터인가?
내가, 바로 내가 …….

- 통고 4단 :
악담, 저주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고
어데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 지고
예수님을 좀 쉽게 가시게 할까.

- 통고 5단 :
예수님이 겨우 겨우 골고타산에 오르시니
군인들이 십자가를 내려놓고
초와 쓸개를 마시라고 강요하니
예수님은 조금 마시고는 더 마시지 않았다.
아무리 사형수라 할지라도 마지막 냉수 한 사발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빈 옥수숫대 >

옥수수를 따내고 난 빈 옥수숫대는
반백이 되어 몹시 초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성당에 갔다가
대문을 열고 막 들어서며 바라보니
빈 옥수수는 찬란하게 되었다.
밑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던 진분홍색 나팔꽃이
빈 옥수숫대를 살살 감아 올라가며
순순히 피어있지 않은가.
아, 빈 옥수수 깡대도 쓸모가 있구나.
나팔꽃 넝쿨이 자유롭게 기어 올라가며,
진분호응 꽃잎은 너울거린다.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있다.
마치 하느님께 감사 찬미 드리는 듯.
아, 빈 옥수숫대야. 너는 꽃들과 함께 어울릴 수가 있구나.
나는 네가 부럽다. 나는 많이 늙어서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해.
그런대도 왜 준비를 안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떠날 근심만 하고 있어, 빈 옥수숫대야.


< 골고타의 언덕길 >

골고타의 언덕길
꾸불꾸불 언덕길에 힘겹게 오시는 예수님.
염치도 없어라. 마리아야.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데
너는 손가락 끝으로도 거들지 않고
작디작은 십자가도 무겁다고 비틀거리며
벗어놓지 못해 애를 쓰니
어찌 주님을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어느 입으로 말하랴.

그래서 주님, 제 키에 맞추어 주신 십자가
이제부터는 사랑으로 지고 가오리다.
아무 말 없이 지고 가오리다.
가다가 넘어지거든 붙잡아 일으켜 주소서.
자관의 가시가 머릿속 깊이 박히고
온몸의 상처에서 계속 선혈이 흐르는데
눈물과 땀이 흐르는데
넘어지실 때마다
먼지와 모래알이 가득 붙어 있는데
내 영혼아, 너 언제 부드러운 수건으로
주님의 얼굴을 닦아 드린 적이 있더냐.
사랑을 받을 생각만 하고 .

어느 누가 시원한 물 한잔 들고 와서
예수님의 목을 축여 드릴까?
목이 타다 못해 가슴까지 타들어 오는데 내 영혼아,
너 언제 시원한 물 한잔 들고 가서
예수님의 목을 축여드린 적이 있더냐.
어쩌다가 한두 번은 드렸겠지만
일생동안 달라는 기도만 하고
감사기도는 너무 적게 하지 않았더냐.
어느 누가 예수님 얼굴을 닦아드릴까.
그것은 바로 내가, 나부터 해드려야지.


< 못난이 >

못난이, 못난이, 못난이
낳으면 좋은 줄 알고 자꾸만 낳았네.
낳다보니 아들 일곱이나 낳았네, 딸 넷하고.
그래 많이 낳아서 관청에도 보내고,
성당에도 보내고 학교에도 보내고,
세무서에도 보내고 판사도 보내고,
국회에도 보내고, 똑똑한 엄마 같으면…….

따지지도 않고 그저 낳으면 좋은 줄 알고
자꾸만 낳았네.
그러다 보니 맏아들부터 하느님이 데려가시겠대.
그래서 보내면 좋은 줄 알고 자꾸 보냈어.
하나, 둘, 셋, 넷, 다섯.처음에는 하느님 다 데려가시오
하고 좋더니 이젠 겁이나.
저것들이 잘못 살면 어떻게 하나…….

아이고 못난이.똑똑한 엄마 같으면 요것저것 따지기나 하지.
그저 주는 대로 낳고 보내라는 대로 보내고
그러니 하느님이 마음 놓고 주셨다가 빼앗으셨겠지.
아이고 하느님 제가 뭘 압니까. 알아서 하셔요.
영광 찬미 받으세요. 하느님.


< 가을바람 >

어슬렁 어슬렁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아야 가을바람아, 좀 있다가 불어라.
못다 익은 곡식들과 과일들마저 익혀야지.
대기 중에 오염된 공기들을 말끔히 날려 보내고
드높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송이를
둥둥 띄우는 가을바람아
마음속까지 시원히 불어주는 가을바람아
내 근심 걱정 모두 다 싣고
훨훨 날아가려마.


< 하느님의 가정방문 >

따뜻한 가정 -
아이고, 이 가정은 따스하구나.
아랫목에 펴놓은 이불 밑에
발을 넣으시며 하느님은 기뻐하신다.
아이고, 요것 봐, 오목조목 재미나게 차려놓았네.
기도서도 잇고, 성경도 있고, 묵주도 있고, 십자가도 벽에 모시고,
성심 상본도 있고, 부엌도 깨끗하게 정리됐네.
사랑의 기운이 감돈다. 나는 이런 가장이 참 좋거든.. .
내 이 가정에 풍성한 강복을 내려주리라.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건강을 풍부하게 주리라.
귀여운 아들딸도 내려주리라.

썰렁한 가정 -
아니, 이 가정은 왜 이렇게 썰렁하냐.
구들이라고 발이 시리고, 찬바람이 맴을 도네.
따뜻한 데라고는 없구나.
서로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지.
정리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이렇게 사랑의 기운이 없는 가정도 있나.
아이고, 살벌해라. 으스스하다.이것들아, 이럴 수 있느냐.
내가 준 사랑의 계명을 무엇으로 알고 있느냐.
서로 참고 서로 도우면서 오순도순 살라고 짝 맞춰주었는데
내가 주었던 복도 거두어 가리라.
회개하고 돌아오기 전에는 축복받을 생각을 하지도 말아라.


< 주님은 나의 목자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 나의 심신이 새로워지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의 한평생 축복하시고
선하심과 자비하심 은총으로 주님 궁에서 삶으오리다.

주님은 나의 아빠시니 나를 만들어
금방 천국에 들여 놓지 않으시고,
세상을 띠 두른 야훼 계명의 길에서 올곧게 걸어
나 아빠에게로 다시 돌아오너라 하시네.

주님은 나의 아빠시니 아빠의 말씀을 꼭 껴안고
세상을 옳게 돌고 돌아 아빠께로,
아빠께로 다시 돌아 가리이다. 정녕 다시 돌아 가리이다.


< 사랑의 구걸자 >

오! 사랑의 구걸자 당신은 불쌍하십니다.
인간들 사랑이 그리워
날마다 밤마다 그 좁은 감실 안에서
빵 형상을 뒤집어쓰고
누가 나한테 사랑과 위로를 가지고 오나
문소리만 삐걱 나도 고개를 드시고 내다보시겠지요.
너희들이 와서 청하기만 하면
내 사랑과 은혜를 얼마든지 줄 터인데 하시고
하루에도 몇백 번 몇천 번을 탄식하시겠지요.
오, 예수여.
언제나 온 세상에 모든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평신자들이
당신이 세우신 이 성체의 신비 앞에
자기의 전 생애를 다 바쳐도 좋다는 깨달음과
뜨거운 사랑을 가지게 되오리까?
당신 앞에 이 크 사랑이 빨리빨리 이루어지기를
두 손 모아 비옵니다.


< 사랑하는 딸 젬마에게 >

딸아, 엄마의 애기를 들어보렴.
자정이 되어 천지가 고요한 밤 기도를 마치고 뜨락에 내려서니
옥잠화 향기가 그윽한데 이름 모를 가을벌레들이 스르륵, 쉭 찍찍
이상한 언어들이 한데 모여서 구성진 음악회가 열린다.

하늘은 푸르청청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초승달이 서남쪽 하늘에 걸려있는데 나무들과 각색 꽃들이
별빛 달빛을 받아서 한들한들 그림자를 드리우고
가로등이 나무 사이로 간간이 빛을 보내준다.
엄마는 이 벌레들의 음악회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무 사이를 감돌면서 눈으로는 별들의 회의를 구경하고
귀로는 벌레들의 음악회를 감상하며
각색 초목들이 뿜어 주는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마신다.

딸아, 영육이 또 마음이 몹시 괴롭거든
창문을 열어젖히고 밤하늘을 쳐다보며
거대한 우주공간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찌꺼기를 모두 날려 보내거라.
마음속에 새 공기를 바꿔 넣으렴.





- end.







금주의 독서 031

[ 독후감 ]

도서명 : 네 신부님의 어머니
지은이 : 이춘선(마리아)
펴낸 곳 : 바오로딸



평화 함께!

이 책을 접하면서 ‘네 신부님의 어머니’이신 이춘선 마리아 자매님의 신앙체험
이야기를 통해 신앙생활에 영적 도움을 주셨음에 감사드린다. 책의 내용에서
마음에 와 닿거나 중요하고 생각되는 부분은 발췌하여 메모해 두어 개인 홈페이지
(원베드로)의 ‘금주의 독서 메모’ 메뉴에 남기며, 먼 훗날에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간단히 독후감(독서 후기)으로 남겨두려 한다.

(책의 구성) ‘네 신부님의 어머니’ 의 책은 한국 교회사상 최초로 네 명의 아들을
신부로 봉헌한 이춘선 마리아의 자서전 겸 유고집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2015년에
이미 선종하셨으며, 출판은 2017년 7월에 교회인가를 받아 첫 판을 그해 9월에
발행하였다. 이 책은 이춘선(마리아)의 일기와 편지와 가족사진 그리고 기도시와
막내아들인 오세민(루도비코) 신부가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회고)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는 1983년~2012년까지로 55편, 기도시는 13편, 편지는 1963년~2014년
까지로 55편, ‘오세민(루도비코) 신부님이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는 10편 그리고
이춘선 마리아가 들려주는 유년 시절 이야기, 성가정 이야기, 성경 이야기 등의
자료들을 ‘바오로딸’(펴낸 곳)에서 엮어서 만들어 졌다.

(이춘선 마리아의 생애/1921.5.8.~2015.3.11.) 이 마리아의 생애는 ‘우리
선조 우리 터전’이라는 천주교 춘천교구 사목국 2010년 자료에도 실려 있다.
이 마리아 자매는 1921년 5월 8일 한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인 육포도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영세를 받았고, 1928년 연길교구의 설립 이후에는 베네딕토회
사제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 신앙은 이 마리아 자매의
삶의 전부였다. 열여섯이 되던 해에 부모의 주선으로 강원도 양양 출신의 오병섭
타대오와 혼인(1936년)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38선이 인접한 양양으로 남하하여 양양본당의 싸리재(도문)
공소에서 교리교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신앙생활이 어려워지자
시부모님의 허락 하에 남편과 함께 어린 자녀들을 업고 성모님께 의지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38선을 통과하여 남한으로 내려와 강릉에 정착하였다. 대부분의
삶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일생을 하느님을 믿고 믿음을 실천하는 일에 전념했다.
이춘선 마리아 자매는 슬하에 11남매(7남 4녀)를 두었는데 딸 셋은 어려서 세상을
떠나 8남매(7남 1녀)만을 두게 되었다. 1, 2남은 한국전쟁(1950년)이전에 출생
하였고, 6남매는 이후(1953년~1968년)에 출생했다. 이 8남매 중에서 네 아들은
신부로 서품 받아 사제가 되었으며, 딸은 종신서원을 하여 수녀가 되었다.

이춘선 마리아는 남편을 여의고 강릉의 교동 집에서 홀로 사시다가 후에 막내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사셨다. 이 자매님은 영원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미리
준비하셨다. 매일 오후 3시에 자비심의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장례미사에서 부를
성가를 미리 선곡해 두고 틈틈이 자식들과 함께 부르기도 하였는데 놀랍게도 임종
당일 오후 3시경에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열심히 죽음의 준비를 하던 이춘선 마리아는
2015년 3월11일 온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평소에 염원하던 대로 하느님께 돌아갔다.

(서품 상황) 사회적으로 모두 어렵던 시기에 자녀도 많았기에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남편은 매일 노동을 해야 했고, 이 마리아 자매도 시장에서 장사를 해야 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신앙밖에
없었다. 가난하고 여유 없는 살림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신앙을 가르쳐
1971년에 첫째(오상철/토마스 신부), 1981년에 셋째(오상현/요한 보스코 신부),
1994년에 일곱째(오세호/클레멘스 신부), 1996년에 막내(오세민/루도비코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어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4형제를 신부로 봉헌한 어머니가 되었다.
또한 1997년에 넷째(오진복/젬마 수녀)가 종신서원을 했고, 2006년에는 손자
(오대석/바오로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2021년 3월 기준
1, 3, 7, 8남 아들 신부들은 각각 원로사제, 모곡 피정의집 원장, 교포사목 주임,
포천 주임으로 사목하고 계시며 4여 딸 수녀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서 의료봉사
사도직으로 봉사하고 계시다. 그리고 2, 5, 6남 아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둘째 손주 오대석(바오로) 신부 서품식(2006년 9월) 때 온 가족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50여 명이나 되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았던 내용 일부를 메모해 둔다. >

- 책 읽는 습관을 들인 어머니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읽으셨다. 95세 된
노인이 안경을 쓰지도 않고 성경책을 읽으시고 편지를 쓰시는 모습은 참 놀라운
광경이었다.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도 놀랍도록 침착하고 지혜로우신 모습은 그
엄청난 독서량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것은 신앙
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든 자녀들이 매일미사에 참여하도록 했다. 겨울이 되어서
손발이 얼어도 미사에 가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다. 영혼은 굶어 죽는데 육신이
배부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 삶의 영역에서 십자가를 떠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우리 생활에서 참아 받는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을 수가 없다.

- 예수님, 세상 병원에 저를 보내지 마시고 예수님 병원에서 저를 고쳐주소서.
세상 의사들은 저의 육신의 병만 조금 치료해 줄뿐 영혼의 병, 마음의 병, 정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나이다.

- 성모님, 제 마음에는 한없는 갈등과 피로와 권태가 밀려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아니시면 저는 벌써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생활을 잘 참고
잘 마치게 해주소서. 그리고 엄마 품에 안겨 가게 해주소서.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아버지. 허무에서 끌어내신 내 존재를 아버지께 드립니다. 몽땅 드립니다.
영원히 가지소서.

- 오세민(루도비코)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첫 부임지로 떠나던 날 이춘선
마리아는 아기 때 입었던 옷을 편지와 함께 선물로 주었다.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신부님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 (편지에서) 미사 전에 또 후에 단 2~3분이라도 성체 대전에 무릎을 꿇고
묵상에 잠긴 사제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장시간 동안 아름다운 설교하는 것보다
더욱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 제대의 오른편에 조용히 끓는 사제의 옆모습은
엄청난 웅변으로 열변을 토하는 것보다도 더 깊이 영혼을 끌어당길 수 있다고
항상 느끼는 바입니다.

- 나는 세상에서 못다 한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하다가도 내 힘이 모자라는
모든 것을 다 성체께 맡깁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복되신 마리아,
그리스도의 모친이신 성모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탁드립니다.

- 성경은 우리의 양식이며,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는 따스한 손길이다.

- 하느님 손에서 지음 받고 하느님 품에서 살다가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인간이기에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을 체험하고, 대면하고, 깊은 대화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성체에 대한 깊은 신심을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 같은 주제에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신부를 몇씩이나 낸단 건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 주님께 받은 소명을 다 마친 종은 명하신 일을 다 하였사오니, 이제 저는
쓸데없는 종이로소이다 하고 조용히 물러갑니다.

- 사제는 세속 안에 살면서도 결코 세속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신자도 마찬가지로 세속(마귀의 권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 모든 일들 주님의 손에 맡기고 나는 따라가야만 합니다.

(독서후 소회)

이 책의 지은이인 이춘선 마리아 자매님의 <못난이> 라는 기도시의 일부이다.

“못난이, 못난이, 못난이
낳으면 좋은 줄 알고 자꾸만 낳았네.
낳다보니 아들 일곱이나 낳았네, 딸 넷하고.................
따지지도 않고 그저 낳으면 좋은 줄 알고 자꾸만 낳았네.
그러다 보니 맏아들부터 하느님이 데려가시겠대.
그래서 보내면 좋은 줄 알고 자꾸 보냈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처음에는 하느님 다 데려가시오 하고 좋더니
이젠 겁이나.저것들이 잘못 살면 어떻게 하나. ..........

슬하에 11남매(7남 4녀)를 두었는데 딸 셋은 어려서 세상을 떠나 8남매(7남 1녀)
만을 두게 되었다. 1, 2남은 한국전쟁(1950년)이전에 출생하였고, 6남매는 이후
(1953년~1968년)에 출생했다. 이 8남매 중에서 네 아들은 신부로 서품 받아
사제가 되었으며, 4녀 딸은 종신서원을 하여 수녀가 되었다. 당시 여러 가지로
열악했던 환경 속에서도 한국 교회사상 최초로 네 명의 아들을 신부로 봉헌하였다는
이야기 속에서 주님께서는 참으로 오묘하신 분이심을 새삼 느끼게 한다.
세속적으로는 못난이일지 모르나 신앙적으로 잘난이였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하느님의 부르심(聖召)이다. 한 가정에서 한 분의 성직자나
수도자로 부르심 받기도 쉽지가 않은데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녀들 중에서
네 분의 성직자와 한 분의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놀랍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하다. 예전의 집안에서는 경제적, 사회적 여건에 관계없이 대부분 다산을
한 상태였다. 현재 나와 배우자 가족도 4남매와 7남매(잃은 아이 제외)나 된다.
이 마리아 자매님은 태어나면 세례를 받는 유아 세례를 받았다. 해방 전후와 한국
전쟁(1950년)을 치르던 이 시대에는 열악하고 힘겨운 가정 형편으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마리아는 학교에서의 공부보다는 교리공부로 대신해야 했고,
교리 및 성경 등 여러 신앙서적을 접하면서 신심이 돈독해진 것으로 보인다.

글 쓰는 문인도 아닌 평범한 한 어머니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으로 쓰신 일기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기도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신앙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내용에 있어서는 신앙적이고 신심에 찬 기도의 모습들이 보이기도 한다. 이 자매님은
신앙 활동의 실천으로 평일미사 참례, 성체조배, 묵주기도 그리고 성모신심과
예수성심 공경, 기도 등을 생활화 하면서 신앙을 다지셨으며, 일기 등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점차 영적 성장을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하였다. 네 신부의 어머니로서
축복을 받은 반면에 자녀들이 혹시나 잘못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영적
성장을 위한 자녀를 위한 기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쳤을 것이다.

편지내용에서 마무리 인사를 어떻게 하시는지 유심히 보았다.
성심, 사랑, 평화, 성체, 품속 등의 단어들이 돋보인다.

편지의 끝 인사말들을 일부 모아 보았다.
- 예수 마리아 성심께서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길 빈다.
- 항상 예수 성심의 사랑 안에 자리를 마련하여 주시기를 빌며.
- 예수 성심의 사랑 속에 잘 있거라
- 예수 마리아 성심의 품속에 잘 있거라
- 항상 천주님의 사랑 속에 있기를
- 예수 성심 안에 안녕히.
- 예수 마리아 성심 안에 안녕히
- 만사에 하느님 강복을 충만히 받으시기를.
- 주님의 성체 안에 안녕히.
- 주님의 평화 속에 안녕.
- 주 성모님 품에 잘 있거라.
- 하느님 품에 잘 있거라 ......

막내인 오세민(루도비코) 신부님이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에서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던 내용이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에게 이 세상의 문을 열어주셨으니 이제 제가 어머니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편안히 가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주님, 이 마리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wonpetro.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2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5.09.


[ 무지개 원리 ] -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 지은이 : 차동엽 / 360p
- 전인적 자기 계발의 원리 가이드
꿈과 희망, 지혜와 용기를 심어주는 아름답고 따뜻한 지침서
- 지은이 프로필 : 1981년 서울대 공대 졸업, 서울가톨릭대학교/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미국 보스톤 대학교(박사학위 취득)등에서 수학, 1991년 사제 서품,
2006년 미래사목연구소 소장겸 인천교구 기획관,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등 봉직

[ 표지의 글에서 ]

이제 우리에게는 전인적(全人的)인 자기 계발 원리가 필요하다. 그 원리는 각 분야에서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인 유다인이 매일 두 번씩 암송해야 하는 ‘셰미 이스라엘’
속에 숨어 있었다. 이는 무엇을 하든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임하는 자세를 훈련시킨다. 그리고 이를 ‘거듭 거듭’가르치고 행동하도록 하게 한다.
이 네 어귀에서 세계적인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유다인 교육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무지개의 원리’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무지개 원리는 희망의 원리이다.
둘째, 무지개 원리는 일곱 가지 실천의 원리이다.
셋째, 무지개 원리는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통합의 원리이다.


[ 머리말 ] 에서

- 우리에게는 전인적(全人的)인 자기 계발 원리가 필요하다. 그 원리는 각 분야에서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인 유다인이 매일 두 번씩 암송해야 하는 ‘셰미 이스라엘’
속에 숨어 있었다. 이는 무엇을 하든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임하는 자세를 훈련시킨다. 그리고 이를 ‘거듭 거듭’가르치고 행동하도록 하게 한다.
이 네 어귀에서 세계적인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유다인 교육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 ‘마음을 다하여’는 감성 계발을 의미한다. 목숨을 다하여‘는 의지 계발을 의미한다.
’힘을 다하여‘는 지성계발을 의미한다. ’거듭 거듭‘은 교육(훈련)의 반복성, 지속성,
성취성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이 어구들이 전인적 자기 계발의 원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 두뇌 연구의 성과와도 크게 일치한다. 이 책에 소개되는 ’무지개
원리‘는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이 무지개 원리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희망의 원리이다. 둘째, 일곱 가지 실천의 원리이다.
셋째,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통합의 원리이다. 이 무지개 원리가 완성되기까지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 Ⅰ부 ] 달인을 만드는 2%

- ‘생활의 달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달인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단지
2%가 다를 뿐이다. 각 분야에서 크게 또는 작게 성공한 사람들 아니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2%가 있다. 체념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다람쥐 쳇바퀴이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의 지대이다.
성공에서건 행복에서건 달인과 범인의 차이는 2%이다.


[ 제 1장 : 그들은 달랐다 ]

< 행복 가이드 >
-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 습관화되면 어느 분야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것이
우리를 성공한 사람들과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는 마지막 2%이다.
우리의 라이벌은 우리 자신이다.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내용 메모 >
- 사람 속에는 8가지 종류의 지능이 함께 존재한다. 이 다중지능은 언어, 음악, 논리
수학, 공간, 신체운동, 인간친화, 자기성찰, 자연친화 지능을 말한다.
- 성공한 사람들의 2%의 예 : 마음을 다하는 정신, 지성을 다하는 플러스 사고(능동적
인식), 결연한 의지 ('거듭 거듭'의 정신), 자원봉사...
- 탈무드 교육의 중추적인 정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척정신이다. 둘째, 민족의
연대감이다. 셋째, 정신적 자산이다.
- 고금(古今)과 지혜의 통합은 지성 계발(힘을 다하여/좌뇌), 감성 계발(마음을 다하여
/우뇌), 의지 계발(목숨을 다하여/ 뇌량), 인격화(거듭 거듭)이다. 무지개의 원리 7가지
(만사형통의 7법칙)는 다음과 같다. 1.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2. 지혜의 씨앗을 뿌려라
3. 꿈을 품으라 4. 성취를 믿으라 5. 말을 다스리라 6. 습관을 길들이라. 7.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 1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세계적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저서 ‘의미에 의지’/ 서울대 ‘문용린’ 교수의 저서
‘지력 혁명’/ 하버드 대학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과 교수 ‘하워드 가드너’의 이론 ‘다중
지능’(언어, 음악, 논리수학, 공간, 신체운동, 인간친화, 자기성찰, 자연친화 기능)/
해학과 지혜가 담겨 있는 유다인들의 ‘탈무드’ 책/ 이스라엘 국립대학 교수 ‘류태영’
박사의 저서 ‘지혜의 삶-탈무드에서 배우는 자녀 교육법’/ 탈무드 교육의 중추적 정신 :
개척정신, 민족의 연대감, 정신적 자산)/ ‘셰미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 -
신명기 6장/ 코미디 달인 ‘채플린’/ 물리학 부문의 달인 일본인 ‘코시바 마사토시’ 교수
200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화장품 업계의 달인 ‘케빈 로버츠’-‘사치&사치’사의 회장/
외식산업계의 달인 일본인 ‘와타나베 미키’ (와타미 주식회사 창업자)/ 인도의 ‘데레사’
수녀 봉사활동

< 실천 가이드 : I can do it /나는 할 수 있어! >
-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이 현재하고 있는 일에 ‘마음’(情)과 ‘목숨’(意)과
‘힘’(知)을 다하자. 그 안에 성공과 희망이 있다.
-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나만의 강점을 부각하자. 그리고 그것을 전문화하자.
-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즐기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성공한다.


[ 제 2장 : 팔자(八字)는 없다 ]

< 행복 가이드 >
- 운명적으로 정해진 팔자는 없다. 팔자에 대한 집착이 팔자를 만든다. 자아상이 바뀌면
팔자가 변한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버리고 자신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설계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행운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 내용 메모 >
- 가치 없고 거짓된 예언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으로
남아서 우리를 속박한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선천적인 운명이 좋다고 하면 교만해지고,
나쁘다 고 하면 낙심하기 쉬운 법이다. 그리고 교만이나 낙심,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좋지 않다.
- 사주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해 명을 예측하는 일종의 학(學)이다. 이는 한 사람이 태어난
연(年), 월(月),일 (日),시 (時)의 4개의 기둥(四柱)에 각각 두 자로 된 간지를 붙여 만든
여덟 글자(八字)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생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 첨단과학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에 한국인이 점을 보러 가고 점술에 열광하는 이유는
여러 사회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1. 불확실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다. 2. 쏟아지는 정보속, 선택의 문제다. 3. 속전속결(速戰速決)주의 코드다 4. 운명론
(숙명론)에 대한 믿음이다. 5. 고민을 나눌 상대의 부재다.

< 2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팔자(八字)/ 리리위(李一子)가 쓴 책 ‘세치 혀가 백만 군사보다 강하다’/ 명종 때 소문난
점술가 ‘홍계관’/ 남아메리카의 강에 사는 육식어 ‘피라니아’/ 자아 이미지 심리학의 선구자
‘프레스코트 레키’ 박사의 실험/ ‘맥스웰 몰츠’의 저서 ‘성공의 법칙’/ 유다인 사회의 ‘바리
사이’와 ‘율법학자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1985년생)/ 스웨덴이 낳은 세계
적인 가스펠 가수 중증 장애우 ‘레나 마리아’

< 실천 가이드 >
- ‘팔자타령’의 굴레를 벗어나자. 긍정적인 자아 이미지로 나 자신의 ‘자아상’을 새롭게 만들자.
-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 ‘나는 할 수 있어!’, ‘누군가가 나를 돕고 있어’라고 말하자.


[ 제 3장 : 뇌 속에 성공이 있다 ]


< 행복 가이드 >
- 뇌가 ‘나’이며, 뇌가 ‘인생’이다. 우리의 인생도 행복도 두뇌를 어떻게 쓰며 사느냐에
달려 있다. 실현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서 성취감을 즐기도록 해야 한다. 승리가 승리를
가져오고 성공은 성공위에 지어진다. 작은 성공 경험이 더 큰 성공을 불러온다.

< 내용 메모 >
- 뇌는 인간의 모든 행동과 의식, 무의식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생리작용의 중추이며
정서와 느낌의 중추이다. 즉, 뇌는 하느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으로서 인간의 고귀한
정신과 창조활동의 본산이며, 인격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과 감정을 주관한다.
- 일반적으로 좌뇌는 언어적, 수리적, 분석적, 논리적, 이성적 분야를 담당한다. 즉,
좌뇌는 논리적인 사고에 능해서 숫자나 기호를 잘 인식하고 읽기와 쓰기, 그리고 계산
하는 능력이 강하다. 반면 우뇌는 비언어적, 시공간적, 직관적, 감성적 분야를 담당한다.
우뇌는 공간 인식의 기능을 담당하고, 시각적 정보를 종합적으로 파악한다.

< 3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뇌의 구조(뇌간, 변연계, 대뇌피질, 소뇌/대뇌, 우뇌, 뇌량)/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킴 피크’(영화 ‘레인맨’의 실제 주인공)/ 세계적인 갑부를 만든 특허품 ‘클립(clip)’/
‘포스트잇’ 개발 (3M 직원 ‘아서프라이’)/ ‘하루야마 시게’의 저서 ‘뇌내 혁명’ - ‘플러스
발상’/ 인간의 유전자 정보지도 DNA/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서 ‘뇌를 단련하다’/
에이텐(A10)-쾌감신경/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박사의 이론 ‘욕구 단계설’/
지고경험(至高經驗)/ 힐튼호텔 창업자 ‘콘라드 힐튼’/ GIGO/ 인쇄업계 최고의 샐러리맨
‘맥스웰 몰츠’/ 적극적인 사고 훈련가 ‘지그 지글러’

< 실천 가이드 >
- 생각(좌뇌)과 상상력(우뇌)을 활용하여 행복해지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미소를 띠면
엔돌핀이 솟아 행복감을 느낀다.
- 일상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하는 습관으로 귀중한 아이디어를 놓치지 말자
- 뇌 속에 성공의 패턴을 입력하자. 성공하는 습관이나 성공의 리듬을 타는 법을 학습하자.
우선 자신이 있고, 재미있는 일부터 시작하자.



[ Ⅱ부 ] 힘을 다하여 : 지성 계발

- 힘에는 물리적인 힘이 있고 정신적인 힘이 있다. 어느 힘이 더 센가. 물론 후자이다.
지성 계발은 바로 도전하는 삶을 위한 힘을 키우는 일이다. 경쟁이 치열한 핏빛 바다.
바로 그 곁에 무한 가능성의 바다 블루오션이 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언제나 위기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매 순간이 기회다. 불현 듯
자신의 생각 속으로 두려움, 걱정, 낙심 등의 먹구름이 몰려 올 때 기억 속의 지혜
한마디가 자신을 지켜 준다.


[ 제 4장 : 좌뇌에 숨은 블루오션을 찾아라 ]

< 행복 가이드 >
- 좌뇌는 ‘생각’을 관장한다. 생각은 우리의 감정과 몸에 영향을 끼치고 행동을 이끌어
낸다. 또한 좌뇌에 집적된 정보가 바로 힘이고 건강이다. 좌뇌에 숨은 무한한 가능성의
기회(블루오션)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발상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 내용 메모 >
- 좌뇌는 드넓은 생각의 바다이다. 이 바다에는 아직 아무도 그물을 드리우지 않은
블루오션(Blue Ocean) 곧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이 있다. 이 블루오션을 활용하여
‘하는 일마다 잘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지개 원리’ 두 가지가 배당되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지혜의 씨앗을 뿌려라.

< 4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블루오션/ 고장난 냉동 차안에서 동사한 ‘닉(Nick’/ 대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노만 빈센트 필’ 박사/ 플라시보 효과(가짜약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기대 효과)/ ‘풀 하비’의 말(정보의 힘)/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창립자 ‘빌 게이츠’
-독서광/ 홍콩 최고의 갑부 ‘리자청’(지식이 운명을 바꾼다)/ 철학자 ‘카를 포퍼’/
시카고의 한 오피스 빌딩 주인

< 실천 가이드 >
-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생각을 하자.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 새로운 정보를 주저 없이 받아들이자. 더 넓은 세상을 만날 것이다.
- 고정관념을 깨자. 막혔던 담이 뚫릴 것이다.


[ 제 5장 :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 무지개 원리 1 ]

< 행복 가이드 >
- 행복과 성공은 ‘생각의 길’에 따라 정해져 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고를 버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갖는다면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미래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도전하는 자의 몫이다.

< 내용 메모 >
- 행복과 성공은 이미 그 ‘생각의 길’에 따라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생각의 길’을 다시 내야 한다. 잡초가 무성한 지대에 길을 내려면 길을 닦고 자주
왕래해야 한다.

< 5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베스트셀러 작가 ‘델마 톰슨’ 의 책 ‘빛나는 성벽’/ 골리앗과 다윗/ 21세기의 감성
소설가 ‘이외수’의 산문집 ‘날다 타조’/ 이소룡의 절친한 친구 ‘척 노리스’의 책 -‘우리
안에 있는 비밀스런 힘’/ 미식축구 MVP이었던 ‘하인즈 워드’와 미키마우스/ 중국인 말을
잘 그리는 화가/ 15세기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와 희망봉/ ‘메뚜기’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한 마리의 쥐/ ‘엘리 휘트니’의 조면기(목화씨를 빼내는 기계)/
‘모(르)스 부호’의 창시자 ‘모스’의 전신기/ TYK 그룹의 총수 김태연 사장-“He can do it,
She can do it, Why not me?”/ 1980년대 ‘슈퍼맨’역 ‘크리스토퍼 리브’와 아내 ‘데이나’

< 실천 가이드 >
- 변화를 원한다면 긍정적, 적극적 사고로 ‘생각의 길’을 다시 내자.
-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자. 걱정과 근심은 진취적 사고를 막는다.
- 끊임없이 도전하자.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 제 6장 : 지혜의 씨앗을 뿌리라 : 무지개 원리 2 ]

< 행복 가이드 >
- 지혜의 말씀은 우리 내면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되어준다. 지혜의 말씀을 암송하여
머리에 담아두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해 주고, 고난 속에서 희망과 인내를 갖게 하고,
평화를 누리게 하며, 대화 능력을 향상시켜 준다.

< 내용 메모 >
- 누구든지 인생에서 좌절을 벗어나고자 하면 말씀을 붙들라. 누구든지 인생에서 삶의
이정표를 발견하고자 하면 말씀을 붙들라. 누구든지 행복과 평화를 누리고자 하면 말씀을
붙들라.
-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혜다. 지혜는 세상의 어떤 복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식에서 지혜를 건져 올릴 줄 알아야 한다. 인류에게는 많은
지혜의 샘이 있다. 문화와 종교, 속담과 격언에도 지혜의 샘이 있다.

< 6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강을 건너는 한 선비와 사공/ 독서백편 의자견(讀書百遍 義自見) - ‘글을 백번 읽으면
그 뜻이 절로 드러난다’/ 유다인 지혜의 보고 ‘세마 이스라엘’/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사람’ 미국의 ‘페이스 팝콘’/ 시편 23편/ 세계를 움직였던 사람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생 말엽 심혈 작품 ‘죄와 벌’

< 실천 가이드 >
- 인생의 좌표가 될 명언이나 말씀 구절을 보이는 곳에 붙여 두고 수시로 암송하자.
- 나의 삶에 절망, 두려움, 우울증 등이 밀려 올 때 지혜의 말씀을 빛으로 삼아 몰아내자.
- 곤경에 직면한 이웃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며 위로하자.



[ Ⅲ 부 ] 가슴을 다하여 : 감성 계발

- 마음은 감성의 처소이다. 마음에서 꿈의 세계가 펼쳐진다. 감성 계발은 창조적인 인생의
열쇠이다. 감각, 직관, 상상의 영역 우뇌. 우뇌에 숨어 있는 블루오션을 찾으라.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다. 꾸는 것을 넘어 품을 때 꿈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 제 7장 : 우뇌에 숨은 블루오션을 찾으라 ]

< 행복 가이드 >
- 우뇌는 감정(정서)을 관장하며 상상력의 보고이다. 죄뇌가 의식 속에서 논리회로를
거쳐서 작동하는데 반하여 우뇌는 잠재의식 내지 무의식에 입력된 이미지들의 영향으로
급한 상황에서 결재 없이 바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우뇌가 지닌 가능성을 살리는 길은
상상력을 통한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 내용 메모 >
- 우뇌는 드넓은 상상력의 바다이다. 이 바다에는 아직 아무도 그물을 드리우지 않은
블루오션(Blue Ocean), 곧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이 있다. 이 블루오션을 활용하여
‘하는 일마다 잘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다음의 ‘무지개 원리’ 두 가지가 배당되었다.
꿈을 품어라, 성취를 믿어라.

< 7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도파민(행복 호르몬)/ 기분 일치 가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발명왕 ‘에디슨’/ 독일의 화학자 ‘케글레’/ 원자 모형 고안 ‘톰슨’/
미국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 ‘맥스웰 모츠’/ 맹모삼천지교/ 미국 의학전문지 ‘정서장애
저널’/ 이미지 트레이닝(상상 훈련)/ 달 표면에 최초로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

< 실천 가이드 >
- 일상에서 우뇌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노력하자. 이로써 불편한
것을 개선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자.
- 우뇌의 상상력으로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하여 행복하게 살자. 곧 좋은 사람, 아름다운
경치, 감동적인 추억을 떠올리며 현재의 만족감을 고조 시켜보자.
-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먼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자. 곧 우선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낸
자신을 상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자.


[ 제 8장 : 꿈을 품어라 – 무지개 원리 3 ]

< 행복 가이드 >
- 꿈은 누구나 꾼다. 꿈을 꾸는 것과 품는 것은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꿈을 지속적
으로 품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위업을 달성한 사람들은 모두가 꿈을 집요하게 품어 왔던
사람들이다. 꿈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꿈을 글로 써놓고, 그 꿈에서 눈을 떼지 말며,
이룰 수 있는 자신을 떠올리라. 또한 그 과정을 즐기라.

< 내용 메모 >
- 꿈을 현실화시키려면 상상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 진 것을 자주 바라보는 것이 필수적
이다. 이를 우리는 상상력 훈련이라 부른다.
- 혼자 있거나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골라서 매일 30분 정도 투자하라. 그리고 가능하면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런 다음 눈을 감고 상상력을 훈련해 보자.
우리는 상상 속에서 우리의 정신적 이미지를 가능한 한 실제 경험에 근접시켜야 한다.
그리고 적절하고 성공적이고 이상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자신을 상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꿈을 이루려면 그 과정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꿈을 이루려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싶은 놀이’로 만들어야 한다.

< 8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아브라함, 야곱, 요셉/ 에디슨/마틴 루터 킹/ 시각장애인 백악관 보좌관 강영우 박사/
하버드 대학의 연구 -“꿈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 ‘바라봄의 법칙’ / ‘Boys, be ambitious!’/
관상어 ‘고이’/ 맥스웰 몰츠의 저서 ‘성공의 법칙’/ 알버드 그레이의 ‘성공의 공통분모’/
철강 왕 ‘카네기

< 실천 가이드 >
- 자신의 잠재력에 한계를 두지 말고 높은 목표를 세우자.
- 자신의 꿈(목표)을 수치나 글로 적어 단계별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상황을 자주
체크하자.
- 성공한 사람이나 위인중 한 명을 역할 모델로 선정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


[ 제 9장 : 성취를 믿으라 – 무지개 원리 4 ]

< 행복 가이드 >
- 꿈을 품고 있어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성취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그 꿈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믿음은 우리에게 꿈을 주는 것에 ‘플러스알파’ 효과를 가져온다.
믿음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고, 성취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준다.

< 내용 메모 >
- 뭔가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다’는
믿음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재능을 갖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아무리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믿음은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그 안정감은 우리를 불안과 공포로부터 보호해 준다.
-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꿈에 사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그 사다리의 첫 번째 단은
인내이며, 두 번째 단은 헌신이고, 세 번째 단은 훈련이며, 네 번째 단은 믿음이다.
목표를 정하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실 거라고 믿는다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 찰리 패독

< 9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의 ‘자성예언(自成豫言)’/ 미국 센프란시스코의 ‘금문교’ /
미국의 유명한 육상선수 ‘찰리 패독’/ 베를린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딴 ‘제시
오헨즈’/ 21세기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 3층에서 던진 아기를 받아 살린 ‘펠릭스
바스케스’/ 미국 코카콜라 회장 ‘아사 캔들러’/ 심리학자 ‘몰턴 마스턴’ - ‘리허설
훈련법’ 제창/ 심장 전문의 ‘카도 히데야키’ - 수술 성공률 98%

< 실천 가이드 >
- 품고 있는 꿈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말로 선언하자.
- 내가 가진 재능을 믿고 스스로를 격려하자. 그 믿음은 성공에 필요한 가장 큰
도구이다.
-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면 백만장자처럼 행동하자. 삶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을 우리에게 준다.



[ Ⅳ 부 ] 목숨을 다하여 : 의지 계발

- 목숨을 다하여 사는 인생은 바로 의지 계발로 결실의 기쁨을 누리는 비결이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시키는 다리는 소통, 통합, 결단의 영역인 뇌량이다. 말은 속에 든 것의
발로로서 그 자체가 씨앗이 되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습관은
속에 든 것의 결정으로서 그것이 쌓여 인격이 되고 마침내 인생이 된다.


[ 제 10장 : 뇌량에 숨은 블루오션을 찾으라 ]

< 행복 가이드 >
- 뇌량은 지성을 관장하는 좌뇌와 감성을 관장하는 우뇌를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선택과 결단을 내리는 의지와 연동된다. 뇌량은 뇌기능의 통합을 이루는 역할을
하면서 꿈을 이루는 과정을 돕는다. 뇌량의 블루오션을 발견하려면 언어를 다스리고
태도를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 내용 메모 >
- 우울증은 대체로 슬픔의 호르몬이 많이 발생해서 의욕이 저하되는 증상이다.
- 뇌량은 좌, 우 대뇌를 잇는 다리이며 여기서 상호 정보교환이 이루어진다.
- 여성은 언어 구사 능력이 남성에 비해 더 풍부하다고 볼 수 있으며, 다양한 감정으로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하여 남성보다 장수하는 확률이 높다. (야마모토 다이스케)
-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 성공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다. 성급하게 가려하지 말고, 우리의 의지를 키우자.
- 스스로 할 수 있거나 꿈꾸는 일이 있거든 당장 추진하라. 대담함 속에는 재능과 힘과
신비함이 모두 깃들어 있다. (괴테)
-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라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 내가 나 자신을 반복해서 흉내 낼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과거는 더 이상 내게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피카소)
- 실패야 말로, 최고로 멋진 추억이 된다. - 에토 노부유키
-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토마스 칼라일)
- 당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가 현재의 당신을 만든다. (지그 지글러)
- 성공의 네 가지 요소 : 머리(IQ), 지식(knowledge), 기술(technique), 태도(attitude)
(커밍 워크)

< 10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엔돌핀/ ‘야마모토 다이스케’ - ‘3일만에 읽는 뇌의 신비’/ 미국 스탠버드 대학의
월터 미셸박사 -‘마시멜로 시험’/ ‘지력혁명’의 저자 문용린 교수/ ‘하워드 가드너’
박사의 ‘자기성찰지능’/ 카네기의 성공철학을 엮은 책 -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황무지’의 작가 ‘T.S. 엘리엇’/ 피카소/ 중국산 대나무/ 일본의 심리학자 ‘에토
노부유끼’/ 텍사스 출신 동기부여 강사 ‘지그 지글러’/ ‘커밍 워크’ - 성공요인 4가지/
‘빅터 플랭크’의 책 ‘의미를 찾는 인간’/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

< 실천 가이드 >
-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고 이를 통합하여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자. 나의 행복과 성장은 이 의지력에 달려 있다.
- 꿈꾸는 일이 있거든 당장 추진하자. 대담함 속에는 재능과 힘과 기대가 깃들어 있다.
- 어떤 일도 대번에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불굴의 집념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


[ 제 11장 : 말을 다스리라 – 무지개 원리 5 ]

< 행복 가이드 >
- 말은 살아서 움직인다. 우리의 뇌는 사실 관계와 주어를 구분하지 못하고 우리가
하는 말에 반응한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평범한 말이든 우리가 자주 쓰는 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절제된 말, 격려의 말, 행복의 말, 승리의 말,
매력의 말을 해야 한다.

< 내용 메모 >
- 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수 도 있다.
- ‘나는 맹인입니다(I am blind)’ -> ‘Spring’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
(앙드레 불톤)
- 나는 말한다. 말은 바로 그 날 살기 시작한다고. (에밀리 디킨슨)
-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열쇠가 우리가 평소 던지는 말 한마디에 달려 있다.
- 언어가 인간의 삶(행동)을 지배한다.
- 모든 사람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과 말이다.
- 상대를 칭찬하는 말은 곧 자신을 축복하는 말이다.
- 우리는 말을 먹고 자란다. 우리는 늘 희망적인 말을 습관화해야 한다.
- 오늘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쏠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
-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이해인 수녀)

< 11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유다인의 지혜서 ‘탈무드’(혀)/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불톤’/ ‘에밀리 디킨슨’ (말)/
데일 카네기/ 언어 치료법/ LSA 대표 칼럼니스트 ‘이내화’/ ‘크게 생각하라’의 저자
미국 존스 홉킨스병원 ‘벤 카슨’/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스피치의 명수 미국
대통령 ‘레이건’/ 이해인 수녀의 시 ‘나를 키우는 말’

< 실천 가이드 >
- 남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말을 자주 쓰자. 내뱉은 말은 모두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온다.
- 긍정적인 말을 자주 쓰자. 내가 쓰는 말에서 미래의 행복과 성공이 예측된다.
- 가족들, 특히 자녀들에게 희망의 말과 격려의 말을 자주 해주자. 그들은 말을 먹고
쑥쑥 자라날 것이다.


[ 제 12장 : 말을 다스리라 – 무지개 원리 6 ]

< 행복 가이드 >
- 타고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습관이다. 작은 실천들은 습관을 형성하며 습관은
덕을 쌓고 덕은 인격을 변화시킨다. 오늘날 유다인이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물을
배출한 것은 성공하도록 되어 있는 습관을 어려서부터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노력하면 새롭게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다.

< 내용 메모 >
- 사람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에 따라 판명된 존재다. 따라서 우수성이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잠언 22,6)
- 10년 법칙 :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과와 성취에 도달하려면 최소 10년
정도는 집중적인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엔더스 에릭슨)
- 습관은 우리의 인격이 입고 있는 의복과 같다.
- 실패는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인생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중요한 일을 미루지
않으려면 먼저 실패할 가능성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 12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아리스토텔레스’/ 건축가이며 화가인 ‘미켈란젤로’/ ‘엔더스 에릭슨’ - 10년 법칙/
유다인 ‘루스 실로’ 여사 저서 -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이영희
박사 저서 – ‘유대인의 밥상머리 자녀교육’/‘토마스 만’/ 세계 최초 프랜차이즈 방식
‘던킨 도너츠’의 창업자 - ‘젠버그’/ 폴로(POLO)의 창업자 ‘랄프 로렌’/ ‘성공을
부르는 긍정의 힘’ 저자 - ‘사토 도미오’/ 영화계 이물 - ‘스필버그’/ 심리학자 ‘이민규’
박사 – ‘1%만 바꿔도 인생이 달라진다’/ 역설적인 지도자의 십계명- ‘켄트 케이스’

< 실천 가이드 >
- 고쳐야 할 습관이라면 훈련을 통해 고치면서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어 가자. 10년
법칙을 믿고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열매가 맺어진다.
- 자신과 자녀들에게 성공하는 습관을 들이자. 무엇을 하건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임하는 습관이 배면 그는 이미 승리자이다.
- 완벽한 상황을 기다리지 말고 일단 시작하자. 일단 미루는 습관에서 벗어나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 제 13장 : 상처의 치유 ]

< 행복 가이드 >
- 인간의 모든 문제는 환경, 행동, 능력 등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우리의 신념(가치관)과 자아상(아이덴티티)이 상처를 입었을 때 표출된다. 이 상처는
우리를 과거의 운명론에 묶어두려 한다. 그러므로 운명을 벗어나서 희망찬 미래를
맞이하려면, 먼저 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 내용 메모 >
- 운명론은 자신을 과거에 묶어버리고 그것에 얽매어 인간의 이상이니, 꿈이니 하는
것들을 말살시켜 버린다.
- 역사는 운명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는 자유인들의 의지가 결정론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길을 여는 순간들이다. (샤를르 드골)
- 인간의 의식 6단계 : 환경, 행동, 능력, 신념/가치관, 아이덴티티, 스피리츄얼 레벨
(로버트 딜츠)
- 자동사고(自動思考)는 특정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일순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생각인데, 의외로 우리의 성공과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을 치유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함이다.
- 실패로 인해 상처받지 말라. 실패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라. 그래야 실패를 딪고
일어설 수 있다.

< 13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뉴로로지컬 레벨 이론’ - ‘로버트 딜츠’/ ‘공병호의 초콜릿’-‘공병호’ 박사/
‘크리스 터만’ 박사의 책 -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거짓말들’/ 로마 정부의
세관장이었던 ‘자캐오’/ 개인 심리학 창시자-‘알프레드 아들러’ 박사/ 미국 프로야구
홈런왕(714개 홈런)-‘베이브 루스’/ 배우 ‘마이클 케인’의 자서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마르코 폰 뮌히하우젠’-‘네 안의 적들을 길들여라’

< 실천 가이드 >
-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거짓 확신과 잘못된 자화상을 바로 잡자.
- ‘능력 부족’이라는 열등감에서 깨어나자.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자.
- 자기를 먼저 사랑하자. 자기에게 친절하고 자기의 실수를 용서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 제 14장 : 영혼의 치유 ]

< 행복 가이드 >
- 삶의 문제들이 신념과 자아상의 상처를 치유해도 해결되지 않을 때는 영적 차원,
곧 스피리츄얼 레벨의 치유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좋다. 영혼의 치유는 절대자와 나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함을 의미한다. 영혼은 삶의 의미, 지평확장, 희망, 말씀,
회심을 통해 치유되고 성장한다.

< 내용 메모 글들 >
- 진정한 의미의 휴식, 그것은 영혼의 휴식이다. 우리의 영혼은 오히려 육신보다 더 많은
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 ‘토마스 키팅’ 신부)
- ‘스페이스 클리어링’ : 공간과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정화시키는 것
- 영혼은 신(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기에 밝고 아름다운 것이며, 이성과 기억을
동원하여 하느님을 이해하고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노)
- 나와 신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우리는 죄라고 부른다. 따라서 영혼의 치유는
절대자와 나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함’을 뜻한다.
-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이사40,29)
-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말아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 43,18)

< 14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토마스 키팅’ 신부/ 디즈니랜드 청소 스태프 ‘카스토디알’/ ‘스페이스 클리어링’/
신학자 ‘아우구스티노’/ 정신과 의사 ‘나까이 히사오’ 교수-‘정신 건강의 기준’/
‘베드로’와 ‘유다’/ ‘빅터 프랭클’-‘의미요법’/ ‘적극적 사고방식’의 저자 - ‘노먼 빈센트 필’/
알코올 중독자 사목 - ‘허근’ 신부/ ‘간디’ 자백의 글

< 실천 가이드 >
- 영혼의 휴식과 정화를 위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자. 영혼이 정화되고 충전되면
삶 전체의 질서가 회복된다.
- 지나친 자책감을 버리고 실수한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복음의 핵심은 용서다.
- 여러 가지 치유의 길을 걸어보자. 의미, 지평확장, 희망, 말씀, 회심 가운데 자신에게
적합한 길을 택해 보자.


[ 제 15장 : 관계의 치유 ]

< 행복 가이드 >
- 상처의 치유와 영혼의 치유는 관계의 치유로 인도한다. 관계 치유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은 용서이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먼저 자신을 속박에서
해방시켜 준다. 용서는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분노와 미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용서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 할 일이 필요 없도록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 내용 메모 >
- 우리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치유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은 용서이다.
-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분노와
불평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용서하며 생활해야 한다.
-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어떤 커다란 존재, 사랑, 그리고 뜨거운 감동 등을 경험할 때,
인간의 상처는 치유된다. 용서의 힘이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 ‘베드로’의 용서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는 용서’였지만 예수의 용서는 ‘분노 자체도
남기지 않는 자발적 용서’였다.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
하여라’(마태 18,22)
- 용서는 ‘forgive’ 또는 ‘pardon’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위한다’, ‘주다’, ‘선물’을
의미한다. 이는 거저 베푸는 것이 용서라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정신이기도 하다.
- 화를 내는 것은 생명의 단축을 가져온다.
- 용서하기 전에는, 두 개의 무거운 짐이 존재한다. 즉, 한사람은 ‘죄인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한 사람은 ‘원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용서는 그 두 사람을 모두
자유롭게 한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친절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제마무리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도 친절 앞에서는 마음을 열게 되어 있다.

< 15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영화 ‘벤허’의 명장면/ ‘베드로’와 ‘예수’의 용서 횟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시인이자 구도자인 ‘칼릴 지브린’/ 폴란드의 기적 – 공산당 정부의 몰락

< 실천 가이드 >
-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서둘러 용서하자. 내가 먼저 치유 받을 것이다.
- 상대방이 실수를 하면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도록
노력하자. 그러면 용서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 남을 판단하지 말자.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란 이 세상에 없다.



[ Ⅵ 부 ] 인생 비전

- 무엇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한평생 추구해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그런 인생
비전은 없을까? 세상에 있는 것들은 저마다 존재이유가 있다. 나의 인생에도 필경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 목적을 일찌감치 깨닫는 사람은 그만큼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않는
셈이다. 고난의 때가 있다. 절망과 체념의 유혹에 온통 에워싸일 때가 있다. 굴복하는
순간, 우리의 인생이 죽는 순간이다. 포기하지 말라. 성공이건 행복이건 나누면 두 배
세 배가 된다. 목적이나 목표에 도달한 다음에 나누려 하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라.


[ 제 16장 : 생의 목적을 추구하라 ]

< 행복 가이드 >
- 목적을 가진 사람은 그 목적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게
되며 삶의 보람까지 느끼게 된다. 목적을 세울 때에는 정의, 평화, 행복, 의미 등
‘목적 가치’를 최종 목적으로 삼고 명예, 권력, 부 등 ‘도구 가치’를 그 수단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목적을 이루려면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성취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내용 메모 >
-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여정의 길잡이가
될 ‘북극성’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삶의 목표가 그런 역할을 한다.
-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한 엄청난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요인이 된다.
- 목적은 어려운 때일수록 빛이 난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목적이 방치된다면 그것은
목적이 아니다.
- 목적을 가진 사람은 첫째,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된다. 둘째,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게 된다.
셋째,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 가치에는 ‘목적 가치’와 ‘도구 가치’가 있다. ‘목적 가치’란 평등, 사회 정의, 평화처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가치이다. ‘도구 가치’란 이럼 목적을 추구하는 데 도구가 되는
가치로서 정직, 책임, 용서 같은 것들이 있다.
-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것을
천직(天職), 곧 하느님이 주신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 우리가 목표를 정확히 인식하면 자동 성공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이 장치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도록 자신의 본성에 맡기라. 신뢰하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 단번에 최고가 되려는 욕심을 갖기보다는 작은 목표를 세워 나가자. 작은 일이라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기쁨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되찾는 지름길이다.

< 16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기적을 통과한 네 사람’/ 북극성의 존재/ ‘선택적 주의’ 현상/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분석 심리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 ‘알프레드 아들러’ - ‘권력에의 의지’/ ‘빅터 프랭클’ - ‘의미에의 의지’
/ 영국의 대분호 ‘셰익스피어’와 종업원/ 일본 최고의 경영 컨설턴트 - ‘간다 마사노리’/
심리학자 ‘이민규’ 박사의 목표 관련 ‘SMART 규칙’ / 미국 외식업계 마케팅 담당이사
‘스테이시 가델라’

< 실천 가이드 >
- 자기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세우자.
무엇을 위해 한평생을 살 것인지 사명 선언서를 작성해 보자.
- 목적 달성을 위해 과정적인 목표들을 세워보자.
단계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자.
- 목적과 목표를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추구하자.
그 일은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즐기면서 하자.


[ 제 17장 :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 무지개 원리 7 ]

< 행복 가이드 >
- 비관론자는 매번 기회가 찾아와도 고난을 본다. 낙관론자는 매번 고난이 찾아와도
기회를 본다. 고난은 성장의 기회이다.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 보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 내용 메모 >
- 살아남기 어려운 곳에서 자란 소나무가 명품이 된다. 쉽게 이루는 일보다 힘들게
이루는 일이 더 가치가 있다.
- 하느님의 사랑은 어미 독수리의 사랑과 같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훈련의 때가 되면 갑자기 보금자리를 어지럽힌다. 그래야 새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일을 통하여
더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기대할 줄 알아야 한다.
- 가능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말부터 하자. ‘잘 풀린다’는 한마디로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다. 낙천적인 말로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면 뇌는 차차 긍정적인 말을 찾으
려고 한다.
- 우리가 꼭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이 있다. 빛이신 그분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 17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윈스턴 처칠’의 말 –비관론자와 낙관론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바이스’ 청바지
생산 –유다인 ‘레비 스트라우스’/ 미국 농구선수 MVP ‘마이클 조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책 1천만 부 판매/ 애플 컴퓨터의 CEO ‘스티브 잡스’/ 영화 ‘록키’
주인공역 ‘실베스터 스탤론’/‘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 프랑스산 포도주/ 독수리
새끼의 훈련/ NBC 심포니 교향악단 이탈리아 지휘자 ‘토스카니니’/ 구약성경의 요셉/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 실험실의 화재/ 1860년 미합중국의 대통령 ‘링컨’/ 미국
슈퍼마켓 체인점 2000개 소유자 ‘페니’/ 포로수용소에 켜진 촛불/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Never give up!)-‘처칠’/ 음악가 ‘헨델’의 작곡 ‘메시아’

< 실천 가이드 >
- 고난 뒤에 숨은 은총을 보고 역경을 두려워하지 말자. 위기는 진정한 기회이고,
실패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
- 모든 것을 잃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려는 용기를 갖자.
- 언제나 ‘선한 결과’가 오리라는 희망을 갖고 자신 있게 밀고 나가자. 기약된 미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이의 몫이다.


[ 제 18장 : 축복을 유통시켜라 ]

< 행복 가이드 >
- 누구나 ‘참 소중한 당신’이다. 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축복의 말, 선행
등을 유통하면 기적을 낳는다. 스스로 축복의 말, 선행 등의 주인공이 되어 이웃에게
나누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나눌 것이 너무 많다. 선행은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 내용 메모 >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6,33).
-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11,9-13).
- 좋은 것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유통해 보자. 그러면 반복이 기적을 낳는다.
나쁜 반복은 나쁜 결과를 낳지만, 좋은 반복은 좋은 기적을 낳는다.
-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8).

< 18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세계 최고의 갑부 ‘록펠러’/ 남은 신발 한 짝을 창밖으로 던진 ‘간디’/ 프로 야구
선수 ‘래리 도비’와 ‘조 고든’/ 구약성경의 ‘야베츠’의 기도/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에릭 호퍼’/ ‘빌게이츠’와 ‘버핏’/ ‘제임스 메리트’의 저서 ‘성령의 열매가 당신을
리더로 만든다’

< 실천 가이드 >
- 스스로 자신의 소중함과 복됨을 확인해 보자. 세상에 생명처럼 소중하고 복된 것은 없다.
- 복을 유통하는 사람이 되자. 우리가 베푸는 선행은 기적을 낳는다.
- 가진 것,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자. 무엇이든 머물러 있으면 썩지만 나누면
기쁨이 배가 된다.



[ Ⅶ 부 ] 무지개 원리

- 법칙은 어디서나 통하고 원리는 변덕이 없다. 그 조건만 충족시키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희망의 원리, 전인 계발의 원리, 무지개 원리를 따라 훈련에 돌입해 보자.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인생을 살면 반드시 만사형통한다. 희망의 원리, 일곱 가지
원리, 전인 계발의 원리. 그래서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는 무지개 원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여기(here)이고, 최고의 순간은 지금(now)이다. 지금 행복하라. 감사하는
인생에게 운이 따르고 축복이 내려진다. 무슨 일이든 감사하라.


[ 제 19장 :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는 무지개 원리 ]

< 내용 메모 >
- ‘무지개 원리’는 지· 정· 의의 모든 영역에 관련된 성공적인 인생의 생활지침 7가지를
통합적으로 묶은 원리를 말한다.

< 지성 계발(힘을 다하여 : 좌뇌) >
* 무지개 원리 1 :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 원리 2 : 지혜의 씨앗을 뿌려라.

< 감성 계발(마음을 다하여 : 우뇌) >
* 무지개 원리 3 : 꿈을 품어라. * 원리 4 : 성취를 믿어라.

< 의지 계발(목숨을 다하여 : 뇌량) >
* 무지개 원리 5 : 말을 다스리라. * 원리 6 : 습관을 길들이라.

< 인격화 (거듭 거듭 : 전인) >
* 무지개 원리 7 :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 의식이 바뀌면 실천이 생기고, 작은 실천들은 습관을 형성하며 습관은 덕을 쌓고
그 덕은 인격을 변화시킨다.

< 19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존 포웰’신부 -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 ‘성인 원숭이 피질에서의 신경 세포 형성’
논문/ 세계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 원 밖의 세계/ 도산 ‘안창호’- 인격 혁명/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 연습(practice)/ 다섯 장으로 된 짧은 자서전 -
‘포르티아 넬슨’


[ 제 20장 :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는 무지개 원리 ]

< 행복 가이드 >
- 행복은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부유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손안에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가 나의 행복을 결정짓는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 내용 메모 >
- 첫인상은 언어적인 요소(말하는 내용)가 7%, 외모·표정·태도 등 시각적인 요인이 55%,
그리고 목소리 등 청각적인 요인이 38%를 차지한다 - ‘알버트 메라비안’ 교수/ 웃음의
측면에서 보면 웃는 얼굴과 웃음소리가 첫 만남의 93%를 지배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 미국 갤럽연구소가 18개국을 대상으로 한 실시한 조사에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표정을 가졌다고 발표했다.
-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위해 살지 않는다. ‘지금’이 바로 행복의 순간이다. ‘여기’가
바로 행복의 장소다. ‘지금 여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 당신의 ‘오늘’은 당신이 살아온 과거의 총결산이며 당신이 맞이할 미래의 담보다.
당신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당신의 과거와 미래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 사랑하거나 사랑받고 있을 때는 몸 안에 유쾌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긴장과 스트레스,
불안이 사라지고 기분 좋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 얼굴에 미소가 돌고 표정이 밝아진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 봉사는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다. 봉사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봉사하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 나눔은 비단 물질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시간을 나누고 능력을 나누는 것도 포함된다.
나누면 상대가 기뻐하고, 기뻐하는 상대를 보게 되면 당신도 행복해질 것이다.

< 20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소설가 ‘안영’의 수필집 ‘하늘을 꿈꾸며’/ 세계적인 긍정심리학자 ‘마틴 샐리그만’ 박사 -
‘바닐라 아이스크림’ / 호주 시드니 동쪽의 외딴 섬나라 ‘바누아투’/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알버트 메라비안’ - 첫인상에 대한 연구/ ‘얼굴’의 저자 미국 과학 저널
리스트 ‘대니얼 맥닐’/ 웃음 연구가 ‘홀덴’/ ‘질병의 해부’ 저자 ‘노만 커전스’/ ‘J.모리스’의
‘잠깐만요’에 ‘살림(Salim)’에 대한 전설/ 가톨릭 영성 상담가 ‘존 포웰’/ 소록도 국립
병원의 ‘마가렛’ 수녀/ 미국 카네기 멜론대학의 ‘코헨’ 교수-건강과 인간관계에 대한
실험/ ‘당신의 말이 행복을 만든다’ - ‘박필’/ MBC다큐 ‘행복’에서 ‘열 가지 행복 실천법’

< 실천 가이드 >
- 웃자. 웃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생각도 밝아진다. 또 웃는 얼굴과
웃음소리는 첫 만남을 좌우한다.
- 봉사, 선행 등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 거울에 ‘당신은 오늘 당신의 행복을 책임질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다’라고 써 붙이고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에게 읽어주자. 행복의 열쇠는 당신이 쥐고 있다.


[ 제 21장 : 무슨 일이든 감사하라 ]

< 행복 가이드 >
- 감사할 줄 아는 삶, 그것을 입술로 표현할 줄 아는 삶의 모습은 아름답다. 감사는
기적을 부르고, 웃음을 유발하며, 성취의 담보가 된다. 사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다. 감사의 마음을 품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감사가 성공을 부르고 행복을 보장해 준다.

< 내용 메모 >
-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라는 말들이 전 국민의 일상어가 될 때 우리나라는 1등
국민, 3만 불 소득의 꿈을 이루게 될 것이다.
- 최고 품질의 ‘다마고 보로’를 만들기 위해 ‘다께다’ 씨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공장에서 직원들이 과자를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 감사는 바로 비를 달라고 기도할 때 ‘우산’을 가져오는 소녀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구하는 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사는 성취의 담보라고 할 수 있다. 꿈, 소망, 소원의 성취를 확실히 보장해 주는 것이
감사인 것이다.
- 자신의 인생을 다스릴 주도권을 쥐고 싶다면 ‘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이라고
생각하라. 이러한 생각은 당신의 생활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과 당신 주위
사람들에게도 변화의 기회를 선물한다.
-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는 ‘그저 감사드리는 것’이다.

< 21장에서 나오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
-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 1970년 노벨 문학상 수상/ 미국 28대 대통령 ‘윌슨’ -
민족 자결주의 제창, 노벨 평화상 수상/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 ‘파월’/ ‘다마고 보로’
과자로 유명한 ‘다케다제과’의 경영자 ‘다케다’/ 행복전도사 ‘이 요셉’/ ‘성찬경’
시인의 시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 실천 가이드 >
-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를 생활화하자.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행운을 부른다.
- 사소한 일에 감사하자.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감사할 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무조건 감사하자. 감사해야 할 일이 저절로 떠오르거나 생겨날 것이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3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5.16.


[ 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

- 지은이 : 박재순/ 167p
- 구약성경 욥기 묵상
- 지은이 프로필 : 서울대 철학과 졸업, 한신대학 학사, 석사, 박사과정 수료,
신학박사.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 연구소 연구실장, 한신대,
이화여대 등 신학 강의. 인터넷 '열린 교회'를 통해 '삶의 씨앗'을 나누고 있다.
'한국생명사상의 뿌리' 등 저서 다수

[ 표지의 글에서 ]

월간 '야곱의 우물'에 연재되면서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글이 단행본으로
나온다니 반갑다. 이 책에는 욥기의 중심주제를 담고 있는 주요 구절들이, 실제 생활을
배경으로 깊이있게 해설되어 있다. 필자의 삶이 녹아있으며, 욥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연속적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담겨 있다. 복음의
빛을 받은 지혜가 잠언같이 짤막짤막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곳곳에서 반짝인다.
- 김영남 신부(가톨릭대학교수)

[ 머리말 ]에서

욥은 인생의 나락 속에서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고, 혹독한 시련과 고난을 도덕과 종교로
정당화하려는 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생명의 숨줄을 붙잡고 상처받은
삶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하느님을 만나려 몸부림쳤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을 만났고
다시 일어섰다. 삶도 사랑도 믿음도 모험이다.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힘찬 삶을 살 수 없다.
삶의 바닥에서 서서 하느님을 향해 솟아올라야 한다. 욥과 함께 하느님을 향해 힘차게
솟아오르자.

< 1. 어둠 속에서 얻은 깨달음 >

- 건강하고 성숙한 삶은 아픔과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그리고 아픔을 두려워해서는
진실하고 활달한 삶을 살 수도 없고 아픔과 시련을 모르는 사람은 삶의 기쁨과 환희도
모른다. 필립비서는 바오로 사도가 옥중에서 쓴 편지인데, 기쁨이란 말이 자주 나와서
인지 기쁨의 서신이라고도 한다.

- 감방 쇠창살 밖으로 짹짹거리며 날아가는 참새를 보거나 풀잎과 나뭇잎을 보면서
기쁨이 가득차 올랐다. 그때 나는 ‘아! 생명은 기쁜 것이로구나!’하고 깨달았다. 생명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기쁨이 가득하구나! 그래서 어린이에게는 기쁨이 가득하고 어린
아이를 가까이하면 기쁨이 샘솟는구나! 그래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기쁨이 충만해
지는구나! 그래서 예수께 가까이 가면 기쁜 것이구나! 고난 속에서 생명의 본질, 순수한
생명이 드러나고 순수한 생명에서 기쁨이 솟아나는구나! 고난의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 꽃이 피는구나!

- 삶의 본질은 일어섬이고 믿음도 죄와 죽음의 세력을 떨치고 일어서는 것이다. 부활
이란 말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불어, 독일어는 모두 ‘일어섬’을 뜻한다.
예수님도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일어나셨음으로 우리의 믿음도 함께 날마다
일어나야 한다.


[ 욥의 시련 : 욥기 1~2장 ]

< 2.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


-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던 것,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1,21)

- 욥은 의롭고 경건한 부자요, 축복받은 명망가였다. 자신은 물론 자식들이 몸과 마음
으로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이유 없이 재산을 빼앗기고
자식들은 죽고 몸뚱이 하나만 남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그 많은 재산을 잃은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한꺼
번에 잃었으니 가슴이 무너지고 피가 마르고 살과 뼈가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 욥기는 기원전 6세기와 4세기 사이에 씌었는데 욥의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은,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했고 그 후에도 페르시아와 시리아 침탈과 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
이처럼 억울한 고난을 끊임없이 겪어야 하는 걸까? 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이며 성서의 말씀이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삶의 밑바닥에서
온몸으로 고난을 겪고 깨달은 진리를 기록한 책이다.

- 생명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가나? 회개하는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모든 것을 떨쳐 버린,
있는 그대로의 삶’을 뜻한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알몸으로 돌아가리라.”는 욥의
말은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첫 마음’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악마가 어떻게 하지 못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 늘 푸르게 사는 이다.


[ 욥과 독백과 친구들과의 대화 : 욥기 3장~37장 ] -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 엘리후


< 3.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 >


-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내가 어찌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
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는가?”(욥 3,11)

- 욥은 재산과 자녀와 명예를 다 잃고 나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자세를 지켰다.
아내가 악담을 퍼부었을 때에도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요”하고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하느님께 철저히
승복하며 믿음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욥이 왜 갑자기 저주와 고통의 비명을 질렀을까?
상처받은 마음과 학대받은 몸이 침묵을 깨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는 비명과 탄식을
쏟아낸다.

- 고난과 저주,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인간을 예수가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자신이
밑바닥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과 함께 짊어졌고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 고난과
저주의 쓴 잔을 마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 삶을 저주하는 모든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삶을 긍정하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말할 수 있었다.

< 4. 콩 심은 데 콩이 날까? >

-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욥4,8)

- 욥의 친구 엘리파즈(엘리바즈)는 “곰곰이 생각해 보게. 죄 없이 망한 이가 어디 있으며,
마음을 바로 쓰고 비명에 죽은 이가 어디 있는가?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하고 말한다.

- 만일 의롭고 어질게 사는 일이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라면, 악하고 모진 놈만 잘되는
세상이라면 종교도 도덕도 헛된 것이고, 하느님도 역사도 미래도 없다. 의로운 하느님이
계시다면 마땅히 콩 심은 데 콩이 나야 된다.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고 곧은 사람의
영혼은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푸르게 자라고, 거짓과 미움으로 사는 사람의 영혼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말라버린다.

- 믿음과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거두고, 미움과 탐욕의 씨를
뿌리면 죄와 죽음의 열매를 거둔다. 믿음과 사랑, 영혼과 사랑의 세계는 정직하다.
우리의 영혼과 몸도 정직하므로 심은 대로 거둔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믿음의
진리요 생명의 진리다. 이 진리는 믿음을 키우고 생명을 살리고 정의를 세우는 원리다.

< 5. 숨 결 >

- “잊지 마십시오. 이 목숨은 한낱 숨결(르아흐)일 뿐입니다.”(욥 7,7)
- 욥의 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미약했고, 꺼져가는 심지처럼 희미했다. 그러나 그는
삶의 허무와 진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결코 종교적 관점이나 감정 속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욥은 불합리하고 억울한 현상 앞에서 침묵할 수 없었고, 불의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승인할 수 없었다.

- 하느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삶을 내맡기는 욥은 삶과 죽음을 넘어 서 있다. 죽음도
무섭지 않고 삶에 대한 애착도 끊어진 자리에 욥은 서 있다. 그는 주어진 삶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고통의 잔을 마지막까지 다 마셨다. 그런 점에서 욥은 삶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끝까지 하느님에게 매달리고 삶의 주권을 하느님께 맡겼다는
점에서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삶의 나락에서 욥은 자신의 목숨이 한낱 숨결임을
깨닫는다. 그는 지금의 삶이 죽은 다음에도 이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 숨은 몸과 영혼을 잇는다. 숨은 우주의 생명 중심과 통한다. 맨 처음에 하느님이
사람을 지어 코에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사람의 숨은 하느님의 숨이다.
날숨은 나를 비움이고 버림은 죽음이다. 들숨은 하느님의 영과 생명을 받아들임이다.
들이쉬고 내쉼으로써 내 몸과 영의 생명은 자란다. ‘나’의 ‘가운데’를 비우면 하느님의
생명 바람이 불어온다. 죽음의 나락에서도 생명의 숨을 쉬는 사람은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죽음을 이길 수 있다.

< 6.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

- 욥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끝없는 고난과 비극적 운명을 성찰하고 믿음으로 깨친
지혜를 모은 책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과 고난을 여러 면에서 관찰하고 삶의 지혜를
이야기한다.

-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말한다. “처음에는 보잘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욥 8,7). 이 말이 고통과 죽음의 나락에서 버둥거리는 욥에게는 공허하고
따분한 교훈이 될 수 있다. 지금 죽겠는데, 지금 억울하고 분한데, 나중에 잘될 거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그러나 함께 고통과 죽음의 자리에 서서 손잡고 생명의
길을 헤쳐가는 사람이 이 말을 한다면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다.

- 이 말에는 깊고 큰 진리가 담겨 있다. 모든 생명의 싹은 작다.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가 나오고 작은 아이가 자라 큰 어른이 된다. 작게 시작해서 크게 되는 것이
생명의 원리이다. 생명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도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자라는 씨앗으로 비유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게 조용히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크게 자라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된다.

- 생명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긴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어린이처럼 자기를 적게
여기고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사귈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사귈
수 있다. 큰 것 쫓는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불행해지기 쉽다. 삶의 희망과 구원은
작은 것에 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족하며 기쁘게 산다. 하느님은
사람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 계시지 않고 ‘작은 것’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 7. 아픈 마음을 쏟아놓을 것 >

- “숨 쉬는 일이 이다지도 괴로워서 나의 슬픔을 하느님께 아뢰고 아픈 마음을
쏟아놓지 않을 수 없구나.”

- 마음을 쏟을 곳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다. 아무리 생활조건이 풍족하고 편해
보여도 마음을 열고 마음을 담을 데 없는 사람은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없다.
상처받고 시련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마음마저 막히면 영혼은 말라 죽는다.
숨통이 막히면 죽듯이. 마음이 막히면 영혼은 숨 막혀 죽는다.

- 죽고 싶은 처지에서도 욥은 하느님께 마음을 쏟아 놓는다.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놓는다. 그래서 욥은 믿는 사람의 모범이다.
아무리 경건한 체해도 마음이 닫힌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사람은 삶과 사랑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한,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욥에게는 하느님의 미래가 있고 영원한 삶이 있다.

< 8. 강도의 장막에 평화가 깃들고 >

- “강도의 장막에 도리어 평안이 깃들고 하느님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자가
오히려 태평하다네.”(욥 12,6)

- 욥과 초바르(소바르) 사이에 삶과 믿음에 대하여 중요한 토론이 벌어진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무한하며 인간은 연약하고 유한하다.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는
상처받기 쉽고 자연과 물질의 법칙에 따라 생겨났다가 허망하게 소멸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과 지혜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다고 초바르는 말한다.

- 하느님은 전능하고 인간은 무력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욥과 초바르의 견해가
같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대응하는 두 사람의 자세는 전혀 다르다. 초바르는
하느님께 무조건 복종하라고 가르치는데, 욥은 하느님께 대들며 따진다. 초바르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하느님의 법도에 따라 바르게 살면 복을 받아 잘살게 되고
하느님의 법도에 순종하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초바르 생각은
도덕적, 율법적인 인생관에 머물러 있다. 그의 생각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일
뿐 죄와 죽음의 나락에 고통당하는 인간 영혼을 해방하는 복음적인 인생관에는
이르지 못한다.

- 초바르의 반듯하고 경건한 훈계에 맞서서 욥은 삐딱하게 대꾸한다. “ 태평무사한
자의 눈에는 재난에 빠진 자가 천더기로 보이고 미끄러지는 자는 밀쳐도 괜찮은 자로
보이는 법이지” (욥 12,5). 한마디로 욥은 사람의 비뚤어진 마음을 꿰뚫는다. 자신은
안락하게 살면서 엄격한 도덕률과 율법을 앞세우는 이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착하고 경건하다는 사람들이 이른바 ‘죄인’이라는 사람
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미워하고 학대하며 정죄한다. 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비리와 모순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강도의 장막에 도리어 평안이 깃들고
하느님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자가 오히려 태평하다네.”(욥 12,6) 초바르와 같은
도덕주의자나 율법주의자에게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가 보이지 않는다.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

< 9. 들풀에게 물어보게 >

- “들풀에게 물어보게, 가르쳐 주지 않나. 바다의 고기들도 알려줄 것일세. 이런 일을
한 것이 주님의 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에 그 누가 이것을 모르랴?”(욥 12,9).

- (감옥생활중에) 우연히 쇠창살 밖으로 새싹들이 추운 바람 속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던가. 저 새싹들은 몸 하나로 홀로 저렇게 힘 있게 살아가는
구나! 하느님은 저 어린 새싹들도 살게 하시는구나. 못 생명을 살라는 명령을 하느님으로
부터 받았구나. 삶은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 사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새삼 다가 왔다.

-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도덕적·율법적 훈계를 일삼는 초바르에게 욥은
들풀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피조물인 생명체들이 연약한 존재임을 공중의 새들도 알고
들풀도 알고 바다의 고기도 안다는 것이다. 말이나 생각으로는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러나 삶은 생각이나 지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의욕과 힘이 없는데 그렇듯한
훈계를 늘어놓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씨앗은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과 어우러져 푸른 잎새와 붉은 꽃과 달콤한 열매를
만든다. 꽃과 나무들은 나비와 벌, 온갖 곤충과 짐승들에게 달콤한 꿀과 맛난 열매를
내어주고 제 씨들을 퍼뜨린다.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열매는 서로 살리는 생명 의지의
표현이며, 남을 먹이고 살림으로써 나도 살자는 상생의 의지이고 부름이다.

- 사람은 들풀과 달리 깊은 죄에 빠져 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미움을 안고 살며 깊은
허무와 두려움에 싸여 있다. 사람은 들꽃처럼 아름다울 수도 없고 들꽃처럼 성실할
수도 없다. 그러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과 초월을 꿈꾼다. 욥은 흙바닥에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참으로 통사정을 나누고 싶은 이는 전능하신 분”이라며 하느님을
찾는다. 인생의 나락에 빠진 욥은 들풀처럼 강인한 삶의 의지를 불태우면서도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 10. 어떤 일이든 오려거든 오너라 >

- “어떤 일이든 오려거든 오너라. 나 이를 악물고 목숨을 내걸고 맞서리라.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 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 나의 걸어온 발자취를 그의 앞에 낱낱이
밝히리라.”(욥 13,13-15)

- 욥은 땅바닥에 쓰러졌지만 운명의 진흙구덩이에 처박혀 있지 않고, 하늘을 향해
다시 우뚝 일어선다. 욥은 운명을 거스르고 감히 하느님에게 맞서려 한다. 운명과
시련에 만신창이가 된 욥이 어찌 이렇게 꼿꼿한가! 사람은 본래 두 발로 곧게 서는
존재가 아닌가! 몸으로 기거나 네 발로 기는 짐승들과 사람이 다른 것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설 수 있다는 것이리라. 사람은 땅과 하늘을 잇는 존재다. 흙으로 지어지고
하느님의 숨으로 채워진 사람 안에서 땅과 하늘이 서로 울리고 통해야 한다.

- 영적 감동은 하늘과 땅의 울림이자 ‘흙으로 지어진’ 몸과 ‘하늘 숨’인 영의 울림이다.
몸은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며, 흙의 세계에 속한다. 영은 하늘 숨을 먹고 살며
하늘의 세계에 속한다.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도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이 온전히 울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예수 안에서 하늘(하느님)과 땅(사람)이
온전히 크게 울리기 때문에 예수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욥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작고 유한한 피조물’임을 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과 떳떳이 말하고 싶어 한다. 지금 죽더라도 하느님과 통하고서야
죽겠다는 것이다. 죽음의 운명을 무릅쓰고 하느님과 말하려는 믿음과 삶의 자세가
욥으로 하여금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게 했다.

< 11. 나의 마음을 알아줄 이 >

- “땅이여, 나의 피를 덮지 말아다오. 나의 부르짖는 소리가 쉴 곳을 마련하지
말려무나. 보아라. 지금 나의 증인은 하늘에 있다.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데
있다.”(욥 16,18)

- 사랑하는 아내도 저주를 남기고 떠나 갔다. 자식도 잃고, 몸마저 병들고 아프기만
하다. 이런 참에 친구란 것들이 떼로 몰려와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비난
한다. ‘하느님’마저 자기를 괴롭히고 외면하는 것 같다. 그러니 욥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렸을까! 이 세상에는 욥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사는 게
부끄럽고 괴롭기만 한 이들 말이다.

-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적막강산의 처지에서 욥은 부르짖는다.
그는 자신의 소리가 누구에겐가 들리기를 원했다. 이 적막하고 공허한 우주공간에
누가 욥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욥은 단호하게 말한다. “보아라, 지금 나의
증인은 하늘에 있다.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데 있다” ‘나의 증인’은 법정에서 공개적
으로 ‘나’의 편에 서서 ‘나’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이다. 세상이 다 나를 미워하고
비난해도 나의 속을 알아주고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 나의 고통스런 운명과 고달픈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기쁘게 살려면,
내가 나를 참으로 사랑하려면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는
운명도 없고 저주와 죽음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상처받은 사람을
하느님 앞에 세우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선언함으로써 죄와 저주의 운명에서 해방
시키셨다.

< 12. 나의 육체가 썩어 문드러진 후에도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

-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욥19,26)

-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절망적인 순간에도 욥은 친구들의 경건한 바른말에서
도무지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친구들이 아무리 그렇듯한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말이었다. 욥은 삶의 문제를 스스로 파고들어 자신의
괴로움과 비참함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 결코 자신을 증오하거나 학대하거나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욥은 삶의 나락에 빠진 자신을 똑바로
보고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는다. 그에게는 친구도 가족도 없으며 오직 자신과
하느님만 있다.

- 삶은 ‘나’의 문제임으로 남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다. 거직없이 나를 소중하고 예쁘게 보면 나는 행복할
수 있고, 내가 행복하면 남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자기를 긍정하고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거짓된 자아를 고집하는
것이 바로 불신앙이고 죄의 뿌리이며, 이런 짓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 믿음
이다. 사람은 스스로 서야 하는 존재이면서 홀로 살 수 없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
이다.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영혼은 죽고 정신은 썩는다. 하느님만이 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 욥이 “육체가 썩어 문드러진 후에도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고 외친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준다. 욥의 간절한 믿음과 바람에 맞추어 예수가
왔다. 그리고 예수는 마치 욥의 마음과 몸속에서 나온 이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예수는
결코 세리나 창녀에게 도덕적, 종교적 훈계를 늘어놓은 법이 없었다. 그는 그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함께 일으켜 세우며 그들의 삶이
살아나게 했다. 예수는 함께 일어서는 이, 함께 살아나는 이였다.

< 13. 악한 자들이 오래 산다 >

- “악한 자들이 오래 살며 늙을수록 점점 더 건강하니 어찌된 일인가?”(욥 21,7)

-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의 초점은 분명하다. “악하고 못된 인간들은
심판받고 멸망하지만, 선하고 경건한 이들은 복을 누리며 오래도록 잘 살게 된다”고
친구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욥은 “악한 자들이 오래 살며 늙을수록 점점 더 건강하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묻는다. 친구들의 말이 맞는다면 지금 고난당하고 불행한 욥과
같은 이들은 ‘악하고 못된 인간들’이 되고 만다. 사회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흔히
약자이거나 불의한 세력의 피해자다. 그런데 불의한 가해자가 억울한 피해자에게
도덕적, 사회적 비난을 퍼붓기 일쑤이다.

- 하느님은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하느님이 아니라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하느님이다. 생명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넘어서 있다. 옳은 사람만 사는 세상도
아니고 선한 사람만 사는 세상도 아니다. 그른 사람, 악한 사람도 함께 사는 세상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여 살아야 마땅하지만 그 구별에 매이면 삶은 메마르고
공동체는 깨진다. 정의와 선의 잣대를 남에게 엄격히 적용해서 괴롭히다 보면 자기도
삶의 자유로움과 평안을 잃게 된다. 선과 악을 너무 따지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다.

- 악한 사람들이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잘 먹고
편안하니까 오래 살고 건강하다. 또 제 성질대로 사니까 내적 번민이나 갈등 없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갈등하고 번민하는
양심적 인간은 병들기 쉽고 오래 살기 어렵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은 마음이 여리고,
남에게 당하고도 화를 낼 줄 모르고 속으로 삭이기만 한다. 그러다 보면 노여움과 화가
속으로 쌓이고 그것이 병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화도 내고 속의 응어리를 풀면서
사는 것도 좋다.

< 14. 쓰라린 가슴을 안고 숨을 거두는 사람 >

- “모두 티끌 위에 누우면 하나같이 구더기가 득실거릴 터인데.”(욥 21,26)

-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의로운 하느님은 안 계신 것 같다. 어째서 의로운
사람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고 악당들은 잘 먹고 잘사는가? 욥은 하느님이 없는 것
같은 불의한 현실을 보고 있다. 악당들뿐 아이라 그들의 자손들도 잘살고 심지어
가축마저도 잘 된다. 의롭고 착하게 산다고 실컷 고생을 하다가 죽는 사람이나
악하고 모질게 살면서 부귀와 복락을 누리는 사람이나 죽을 때는 똑같이 죽는다.
“기운이 뻗쳐 태평무사한 나날을 보내며 뱃가죽에는 기름이 돌고 뼛골이 싱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라린 가슴을 안고 숨을 거두는 사람, 행복이란 맛도 보지 못한
사람이 또한 있지 아니한가? 모두 티끌 위에 누우면 하나같이 구더기가 득실거릴
터인데”

- 욥은 부귀와 복락을 누려본 사람으로서 지금 처절한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다.
아마 그가 행복한 삶만 누렸다면 ‘행복이란 맛도 보지 못한 사람’, ‘쓰라린 가슴을
안고 숨을 거두는 사람’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그늘진
곳에서 홀로 ‘쓰라린 가슴을 안고 숨을 거두는 사람’을 하느님은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십자가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절규한
어린양 예수를 죽음의 나락에 버려두지 않고 생명의 세계로 살려내신 하느님은 모든
인간, 모든 생물의 한숨과 눈물, 비명과 신음소리에 공감하고 공명(共鳴)하는 분이다.
이런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만을 바라보지 말고 실패하고 버림
받은 보통사람도 볼 수 있어야 한다.

- 예수도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 했다. 모두가 ‘사람의 아들딸들’이다. 평범한
산골 나자렛의 평범한 사람 예수는 평범했기 때문에 삶의 중심을 볼 수 있었다. 게으른
특권의식을 버리고, 공허한 관념의 세계도 버리고 예수는 평범한 삶 속에서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볼 수 있었다.

< 15. 부자는 다 악당인가? >

- “ 자네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도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지 않은가?”(욥 22,5~)

- 욥의 친구들은 욥이 불의한 짓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엘리파즈는 부유한 지주가 흔히 그렇듯이 욥도 불법적이고 완고하며 무자비하게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부자는 다 악당이다. 그러니 너도 악한 짓을 했음에 틀림없다.
아니 너 욥은 악하고 잔인한 짓을 했다. 그래서 네가 지금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엘리파즈의 말을 들으면 욥도 말도 못할 악당이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욥에게는 억울한 것이다. ‘너는 부자였으니까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엘리파즈의
비난과 ‘나는 의롭고 자비하게 처신했다’는 ‘의로운’ 부자 욥의 항변이 맞서고 있다.

-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벽이 아무리 높고 부자들이 가난한 자에게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하느님 앞에서 이분법적 흑백논리나 결정론은 성립될
수 없다.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고 절망적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서 불가능은 없다.
창조자 하느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자를 비판할 수 있지만 부자가
구원될 가능성마저 차단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바람이 스며들지 못할 곳이 없고,
하느님이 이루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하느님 나라의 무지개를 펼치기 위해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다. 십자가는 부자가 높은 벽과 심연을 넘어서 가난한 자에게 이를 수 있는 다리
이다.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미움과 분노,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와 무관심을 뚫고,
탐욕의 깊은 심연과 불신의 높은 벽을 넘어서 하느님 나라의 싹이 움트게 하자.

< 16. 오빌의 정금을 냇가의 돌틈에 버리라 >

- “금을 땅에 내버리고 오빌의 정금을 냇가의 돌틈에 버린다면, 전능하신 분께서
금처럼 귀중하게 보이고 순은처럼 빛나 보일 것일세. 전능하신 분께서 자네의
즐거움이 되어 하느님께 얼굴을 쳐들게 될 것일세.”(욥 22,24-26)
* 오빌은 금을 생산하는 지역

- 욥은 의인이고 그의 말이 다 옳으며 욥의 친구들은 악인이고 그들의 말은 다
그르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크게 보아 욥이 옳다고 해도 욥이 하느님의 선과 의를
독점할 수 없다. 예수도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에게 “선한 이는 하느님
한 분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니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귀를 열고 있어야 한다.

- 엘리파즈는 금을 냇가의 돌멩이처럼 버리면 하느님이 “금처럼 귀중하게 보이고
순은처럼 빛나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금을 탐내는 마음을 찌르고 믿음과
생명의 진리를 확인한다. 누구나 귀중하게 여기는 금을 버리면 하느님이 금처럼
소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금에 눈멀고 금에 미치면 하느님도 보이지 않고 가족이나
벗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보다 금을 더 사랑하면 자기를 잃는다.

< 17. 하느님은 계신가 ? >

- “오늘 또 이 억울한 마음 털어놓지 않을 수 없고 그의 육중한 손에 눌려 신음소리
조차 내지 못하겠구나.” (욥 23,2)

- 욥은 억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친구들하고 애기를 나눌수록 더 답답하기만
하다. 친구들이 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맞장구를 쳐준다고 해도 답답하기는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애타게 부르며 찾는다. 하느님께 억울한
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의 정당함을 밝히고 싶은 것이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 왜 까닭 없이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를 썼는데 왜 이렇게 모진 고난을 겪어야 하나?
하느님을 모르는 불의한 이방 백성들은 잘 먹고 잘살며 거들먹거리는데 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는 신세가 되었을까? 이스라엘 백성은
이 물음을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으로서 혹독한 시련을 당한 욥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끈질기게 묻고 있다.

- 예언자들이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놓고 하느님 앞에서 몸부림쳤듯이, 예수가
게쎄마니 동산에서 하느님께 호소하고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절규했듯이 성서의 신앙은
꿈틀거리는 신앙이고 몸부림치는 신앙이고 싸우는 신앙이다. 욥이 자신의 고통스런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죽음, 절망과 좌절의 자리인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본 것이다. 하느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좌절을 승리로 바꾸는 분이다. 그러니 그 하느님은 고난 받고 죽어가는 그 자리에
계시다. 하느님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하느님은 밖에 있지 않고,
고난 받고 죽어가는 사람의 몸과 영혼 속에서 함께 고난 받고 죽어가는 분이다. 이것이
고난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 몸부림쳤던 욥의 결론이고 성서적 신앙의 결론이다.

< 18. 빈창자를 움켜잡고 >

-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나들이를 해야 하고 빈창자를 움켜잡고 남의 곡식단을
날라야 하는 신세” (욥 24,10~)

- 욥은 세상의 비리와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배가 고파 창자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등에는 무거운 곡식단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보라. 자기가 짊어진 곡식
으로 자신의 빈창자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의 한숨과 눈물이 보이는 것 같다. 목이
타는 사람이 포도 짜는 술틀을 밟으면서도 포도주를 마실 수 없다. 곡식을 손에
들고도 먹을 수가 없고, 포도주 속에서 포도주를 마실 수 없다. 이 비극은 욥의
시대나 오늘의 시대나 낯설지가 않다. 집을 짓는 사람에게는 집이 없고,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자동차가 없다.

- 하느님 나라는 더불어 먹고 마시는 곳이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열린 곳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굶주린 이와 밥을 나눔은 마음과 영혼을 나눔이다.
시련 속에서 함께 밥을 나눔은 삶을 나눔이며 희망을 나눔이다. 예수는 지상생활의
끝에서 성만찬을 제정함으로써 밥과 포도주가 되었다. 이제 예수는 우리에게 영원히
밥과 포도주다. 굶주린 사람에게 하느님은 밥으로 나타난다고 간디는 말했다. 영혼과
육신이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는 밥이다.

- 밥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라도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배고픔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영적 축복이다. 늘 포만감에 사로잡히면 몸도 비만으로 병들고 탄력을
잃지만 배고플 때는 몸을 절절히 느끼고 내가 피조물임을 깨닫는다. 밥이 소중하고
가족이 소중하고 정의와 사랑이 소중함을 알게 된다.

< 19. 바다를 잠잠케 하신 하느님 >

-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면 하늘을 받친 기둥들이 놀라 흔들거리니 그의 힘은 바다를
잠잠케 하셨고 그의 슬기는 라합을 쳐부쉈네.”(욥 26,11)

- 욥의 친구 빌닷은 하느님의 위엄 앞에 하잖은 인간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의 권능과 의로움으로 오늘의 부당한 현실을
정당화한다. 지금 고통을 당하고 불행한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의 창조자적 권능과 위엄을 말하면서도
친구들과는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욥이 불의한 현실과 부당한 운명에 맞서는 근거는
창조자 하느님의 전능하심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움직이는 분이 선하고 의로운
세상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이 욥에게는 있다.

- 하느님이 지으신 세계 곳곳에 하느님의 신령한 숨결이 스며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손길이 닿아 있다. 하늘과 땅이 신령하고 신비하나 하늘과 땅을 짓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다. 욥은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말한다. “하느님이 꾸짖으시니 그의
힘은 바다를 잠잠케 하셨고, 그의 슬기는 라합(혼돈의 악의 세력)을 쳐부쉈네”

-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거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인생의
바다 위를 걷고 있다. 인생의 바다에 순간순간 거센 풍랑이 일어나지만, 바다를 잠잠케
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인생의 바다를 헤쳐 나간다.

< 20. 진주를 제쳐놓고 진주를 캐겠는가? >

- “지혜는 찾을 길 없고 슬기는 만날 길이 없구나.”(욥28,12)

- 욥이 보기에 지혜는 금은보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값진 것이지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땅위에도 없고, 물속에도 바다에도 없다. 지혜는 금은
보화로 살 수도 없다. 욥은 애타게 지혜를 찾는다. 부유하고 고귀한 신분에서 인생의
비참한 나락에 떨어진 욥은 알 수 없는 삶의 신비와 운명 앞에서 지혜를 목말라했다.
욥뿐 아니라 옛사람들은 자연생명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역사와 사회의 모순과
갈등의 깊이, 헤아릴 수 없는 운명의 힘 앞에서 지혜를 갈구했다.

- 삶의 지혜는 금은보석보다 귀하고 돈보다 소중하다. 지혜는 더불어 사는 길로 이끌어
주며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주기 때문이다. 돈과 보석은 영혼을 오염시키고 더불어 사는
이들의 사귐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지혜가 있어야 돈과 보석을 바르게 쓴다. 지혜
없는 부자는 자기 영혼을 오염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삶의 지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 있다. 삶만이 삶을 살릴 수 있다. 삶은 삶과 서로 울리고
(共鳴), 서로 느낀다. 서로 울리고 서로 느낄 때 함께 살 수 있고 서로 살릴 수 있다.
믿음과 사랑의 씨앗이 삶의 바닥에서 싹틀 때 삶의 잔치가 벌어진다.

(조로아스터 선생이 페르시아의 어진 임금에게 전한 씨앗 하나의 의미) - ‘씨앗 한 알
속에 우주 생명의 신비와 조화가 담겨 있고 이 씨앗 한 알 속에 수억만 년 이어온 생명이
들어 있으며 이 생명이 또한 앞으로도 끝없이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 씨앗은
흙 속에 들어가야 싹이 트고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21. 주를 두려워하고 악을 싫어하는 삶 >

-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을 싫어하는 것이 곧 슬기다.”(욥 28,28)

- 욥은 세상 어디서도 지혜를 찾을 수 없었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 지혜를 알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느님 한 분만이 지혜를 알고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그 지혜가 너무나 소박하고 단순하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을
싫어하는 것이 곧 슬기다.” 너무 쉽고 평범하다. 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 자기가 늘 꼭대기에 앉아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삶의 중심을 비우고
꼭대기를 남겨둔다. 마지막 말은 늘 하느님을 위해 남겨둔다.

- 욥이 ‘악을 싫어하는 것이 곧 슬기’라고 한 것은 악을 멀리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말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선이나 악에 집착하지 않는다. 남의
약점이나 자신의 결함에 집착하지 말자. 나쁜 일, 불행한일, 잘못된 일, 안타까운 일을
자꾸 생각하고 말하지 말자. 인관관계가 복잡하고 세상일이 꼬일수록 나쁜 생각이나
일들을 멀리하고 좋은 일, 좋은 생각을 자꾸 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다. 악을
피하고 싫어하고는 슬기로운 사람은 좋은 일, 좋은 생각을 많이 하고 좋고 기쁘고
축하할 일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축하한다. 그러다 보면 미운 사람도
고와 보이고 싫은 사람도 좋아지고 꼬인 일들도 잘 풀어지기 마련이다.

< 22. 하느님이 나의 종과 나를 평등하게 만드셨다 >

- “내가 만일 남종의 인권을 짓밟았다든가 여종의 불평을 묵살해 버렸다면 하느님께서
일어나실 때 어떻게 하며 그가 심문하실 때 무엇이라고 답변하겠는가? 나를 모태에
생기게 하신 바로 그분이 그들도 내시지 않으셨던가?” (욥 31,13-15)

- 성서는 종이란 말을 존귀하게 쓴다. 대제사장, 왕, 예언자는 하느님의 종이다. 메시아
예수도 하느님의 고난 받는 종이며, 남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인지 서양에서는 성직자와 장관을 지금도 Minister(종)라 부른다. 성서의 전통
속에 사는 욥은 종을 학대하나 무시하고는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다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서 종과 자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같은 하느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욥의 이러한 신앙고백과 선언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고통의 역사를 통해 확인하고
깨달은 진리이다.

- 욥은 인간 평등의 근거를 하느님에게서 찾는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차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 나의 종을
그의 어머니 뱃속에서 지어낸 하느님이 나를 나의 어머니 뱃속에서 지어내셨다. 나와
나의 종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서로 하나로 이어지고 통해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
만이 인간 평등의 참된 근거다. 생명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 23. 무덤에서 건진 생명 >

- “병상에서 신음하는 괴로움, 뼈 마디마디 쑤셔대는 아픔이 그의 징계가 되는
수도 있다오.” (욥 33, 19~)

- 엘리후의 말은 욥의 다른 친구들의 주장을 넘어선다. 다른 친구들은 고난을 죄에
악에 대한 심판이나 징벌로 보지만, 엘리후는 고난을 하느님의 단련으로 보고, 고난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을 좋은 길로 이끄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른 친구들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가까이서 보지 못하고 고난을 교리나 도덕적 원리로 설명하려고 한다. 엘리후는
고난당하는 사람을 가까이서 보고 그 아픈 소리를 듣는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
서려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 남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고 아픈 사람에게 종교적 도덕적
훈계를 오만하게 늘어놓은 사람은 아픈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모독하는 것이다.

- 십자가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부르짖은 예수의
외침이 허망하게 끝나지 않고 무궁한 부활생명으로 이어진 것은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말해 준다. 생명이신 하느님은 이 비명에 사랑과 자비로 응답
하신다. 이 우주 생명세계, 비명과 신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도 있다.
비명과 신음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손길을 볼 수 있다. 이 광막한 우주에는
생명을 돌보는 엄마 같은 마음과 손길이 있다.


[ 주님의 말씀과 욥의 회복 : 욥기 38~42장 ]


< 24. 대장부답게 나서라 >


-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욥 38,2)

- 이제까지 욥은 억울하다고만 호소하고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하느님으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으려 했다.
하느님의 응답이 없자 옳고 그름을 따지자며 하느님께 대들었다. 그러니 욥에게는
평안도 기쁨도 없었다. 제아무리 억울하고 정당하다고 해도 탄식하고 노여워하며
싸우는 동안에는 행복할 수 없다. 억울한 고난을 겪고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무거운
짐을 지면서 불평과 짜증을 내는 사람은 패배자, 낙오자가 되기 쉽다.

- 욥은 하느님을 만나기만 하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기에게 그런 불의한 운명을
허락한 하느님이 틀렸음을 지적하려고 벌렸다. 욥이 비록 의로운 피해자요, 억울한
희생자라 해도 남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으면 독선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만다. 남은 그르고 나는 옳다는 생각에 매인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고,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지도 못한다.

-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하느님이 이제 폭풍 속에서 욥에게 나타나신다.
하느님은 욥에게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앞에 서는
일은 참으로 장부다운 일이다. 탄식이나 불평을 떨쳐버리고 하느님 앞에 곧게 서야
한다.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욥에게 묻는다. “동이 틀 것을 명령해 본 일이 있느냐?”
이 물음이 욥의 뒤통수를 쳤다. 이 물음을 듣고 욥의 환상과 독선은 깨졌다. 하느님은
자기 운명과 고통에 사로잡혀 분노하고 탄식하는 욥의 눈을 열어 현실 세계를 보여준다.
아무리 의롭고 의욕이 넘친 다해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만용
이다. 세상에는 사람이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있다.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일과 부정하고 바꿀 수 있는 일을 구별하는 것이 삶의 지혜다.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몸과 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참 자유인이고 장부이다.

< 25. 네가 자연의 주인이 되려느냐? >

-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리비아단이) 너와 계약을 맺고 종신토록
너의 종이 될 듯싶으냐?” (욥 40, 25.28)

- 인간은 자연세계의 원초적 생명력을 길들이고 지배하고 정복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정복자가
될 수 없고,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은 겸허하게 피조물의
자리를 지켜야 하며 자연의 품안에서 자연을 돌보고 가꾸며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며 동료인 다른 인간을 심판하고 짓밟을 자격이 없다.

- 레비아단은 신화적인 바다 괴물(용)인데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력의 대명사이다.
레비아단은 자연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위력을 나타내기도 하고, 이집트나 바빌론처럼
강대국을 나타내기도 한다. 레비아단을 낚을 수도 없고 종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씀은
인간이 자연을 길들일 수 없고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인류는
끊임없이 자연을 길들이고 자연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 생명의 본질과 신비에 개입하는 사람(생명을 창조하고 갱신하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째, 자신이 피조물임을 고백하고 하느님과
자연생명을 섬기고 돌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둘째, 자신 속에 있는 자연적 본능,
욕심과 충동에서 자유로워져서 생명의 자리에서 생명을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영적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생명을 섬기는 자로서
자연생명을 위해서 자연생명의 신비에 개입할 수 있다.

< 26.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

-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
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 2.6)

- 욥은 그 동안 밖에서 문제를 보고 밖에서 문제 해결을 찾았다. 세 친구와 끝까지
논쟁을 벌이며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느님께 맞서고 하느님을 비난하기도 했다.
욥은 독침을 맞고 버둥거리는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듯이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욥의 영혼은 안식을 누릴 수 없었다.

-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욥은 부질없는 말로 하느님의 뜻을
가렸다는 것을 고백하고 참회한다. 이제는 문제를 자기에게서 찾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욥이 하느님에 대해서 남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끝없는 논쟁과 불평을 일삼았는데 제 눈으로 하느님을 보니 모든 의문이 풀리고 불만과
짜증이 사라졌다.

-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삶 속에서 몸으로 느끼고 깨달았다는 말이다. 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말에서는 본다는 말이 이해하고 인식하는 일의 바탕을 이룬다. 먹어보고, 들어보고,
만져보고, 읽어보고, 생각해본다. 보는 것은 전체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몸으로 본다. 성서에서 ‘하느님을 보았다’거나 불교
에서 ‘진리를 보았다’는 것은 몸으로 본 것을 뜻한다. 몸으로 본다는 것은 대상과 몸이
하나가 되는 경지이고 대상을 일그러뜨리거나 한쪽만 보지 않고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 십자가에 달려도
살고 돌무덤에 갇혀도 산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가 지배할 수 없다.
욥은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참회한다. 자신이 유한하고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티끌과
잿더미가 날리는 현실 세계로 들어온다. 하느님 앞에서 참회하는 인간은 지나온 삶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 삶을 시작한다. 참회는 새 역사를 짓는 시작이다.


< 책에 등장하는 용어(어구), 인물, 사건들 모음 1~26>

- 1. 8시간의 척추수술, 1974년 민청학련, 1980년 광주사태(민중항쟁)/ 2. 바빌론 포로생활, 페르시아와 시리아 침탈, 로마의 지배, 아브라함과 아들 이사악, 유영모의 시 ‘우리가 아는 예수’/ 3. 세친구, 고문, 실업자, 노숙자/ 4. (욥의 친구) 엘리파즈, 맨발로 다니는 기인, 친일파, 군사독재, 인도의 불가촉천민과 아리안족, 힌두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5. 날숨과 들숨/ 6. 수아 사람 빌닷, ‘맹자’의 어리석은 농부, 독일의 여류 소설가 ‘루이제 린저’/ 7. 함석헌, 아우구스티노의 ‘고백’, 참회와 고백, 독일 ‘도로테죌레’의 책 ‘상처받을 수 있는 창문’/ 8. (욥의 친구) 초바르, TV프로 ‘칭찬합시다’의 지방대학 교수부부 이야기/ 9. ‘한울모임’/ 10. 민족종교 경전 ‘천부경’사상(人中天地一),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부활/ 11. 홀로 지내는 이의 고독,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 ‘사르트르’ - “지옥은 서로 싫은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할 곳”/ 12. 감옥을 자주 드나드는 불량한 소년수의 말/ 13. 중국의 노나라(패배자)와 주나라(정복자),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종살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의 건강/ 14. 영화 ‘박하사탕’과 ‘허리케인’, 인터넷, 김구 선생, 김재준 목사 자서전 ‘범용기(凡庸記)’/ 15. 욥의 친구 엘리바즈,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 고대교회의 교부 ‘바실리오’, ‘파라오’와 가난한 히브리 백성/ 16. 고려말의 충신 최영 장군, 주운 황금 덩어리를 같이 버린 형제들, 그리스-로마 신화의 ‘마이다스’ 왕자/ 17. 야곱과 모세,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들/ 18. 인도의 불가촉천민(달릿), 서울의 쪽방 사람들/ 19. (욥의 친구) 빌닷, 일본의 백정인 부라쿠민, 라합(혼돈의 세력)과 레비아단(제국주의), 용(강대한 제국)/ 20. 인터넷, 생명과학기술, 페르시아 어진 임금과 조로아스터 선생/ 21. 선거 결선시 제비뽑기 22. 미국의 독립선언서, 프랑스 혁명,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 23. (욥의 친구) 엘리후/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살아난 사람들, 마르틴 루터/ 24. 함석헌 선생, 적극적 사고방식(하면 된다), 떳떳하고 자유롭게 산 인물들/ 24.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선구자 데카르트와 베이컨,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 26. 미국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신학교수의 사직, 신학자 ‘선순화’, ‘소리를 보는’ 보살.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4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5.23


[ 사랑하는 이의 기도 ]

- 지은이 : 르네바르트코프스키, 옮긴이 : 한정옥, 펴낸곳 : 바오로딸/ 173p
- 부부를 위한 기도 모음
- 지은이 소개 : 저자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여러권 썼다. 자기 부부를 위해 이책을 썼다는 저자는 오랫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해왔지만 아직도 부부가 함께 규칙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다.

[ 표지의 글에서 ]

- 기도하는 부부는 기도가 단순히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에게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됨을 종종 발견한다. 기도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희망, 관심, 꿈을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 두 사람이 각각 고유한 존재이며 서로 다른 인격체라는 것을,
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방법도 아주 다르다는 것을 저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 주님, 상대방이 택한 삶의 방법을 좀더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소서.

 

[ 머리말 ]에서

- 기도하는 부부는 기도가 단순히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 이상임을 종종 발견한다.
기도는 부부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알 수 있는 창문과 같다. 기도는 서로의 희망, 관심, 꿈을 나누는 것이다.

- 이 책에 실려 있는 기도문이 시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시는 아니다.이 기도문은
깊은 숙고와 묵상에서 나온 하느님과의 대화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기도를 자신의
고유한 삶에 적용시키거나 개인 기도를 성장시키는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1. 결혼

( 기도의 주제들 )
- 결혼서약 갱신/ 결혼은 함께 완성해 가는 것/ 받은 것을 잘 간수하기/
저희 가정을 축복하소서/ 회계원이 되지 않게 하소서

< 저희 가정을 축복하소서 >
주님, 저희 가정을 축복하시어
당신 사랑과 현존으로 충만케 하소서.
저희와 함께 머무시어 서로를 돌보게 하시고
성장할 수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사랑하올 주님, 저희와 함께 하시어
이 가정이 따뜻하고 힘을 얻는 곳,
생기를 되찾는 안식처가 되게 하소서.
근심을 잊고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곳,
너그럽고 자유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가게 하소서.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어 친구들과 친지들,
외로운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우정과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게 하소서.
저희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손을 내밀어 주며 감싸 안아 주는 곳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희 가정이 언제나 당신의 현존을 느끼며
당신의 사랑을 받는 곳이 되게 하소서.

2. 서로 사랑하기

( 기도의 주제들 )
-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당신께서 사랑하듯이/
사랑의 행위를 축복하소서/ 사랑의 표현

<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
주님,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 사랑은 더없이 강렬했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이란 언제나 그런 상태로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아주 가끔씩이라도 처음 사랑에 빠졌던 때의
그 소중한 느낌과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주님, 저희의 결혼생활을 당연시하지 않게 하소서.
때때로 상대방의 답답함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
우리 삶을 생기 있고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의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참으로 자신이 필요하고 고맙고 특별한 존재라는 느낌을 주는 것,
칭찬하고 격려해 주며 참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줄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소서.
주님, 저희의 사랑이 다시 붙타오르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 사랑의 불꽃이 더욱 밝아지게 하소서.

3. 함께 맞이하는 인생

( 기도의 주제들 )
- 인생의 동업자/ 평범한 일들/ 인생의 굴곡/ 초점을 잃었을 때/
올바른 태도 선택/ 불평할 때/ 인생의 사계절

< 인생의 사계절 >
세월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주님,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시간을 좀 늦췄으면,
이 삶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그러나 주님, 이승의 삶은 영원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시간은 귀중하나 지나가 버리는 것.
주님, 하루도 단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게 하소서.
매일매일을 귀한 선물로 인생이라는 축제의
값진 한 부분으로 여기게 하시고
매순간을 충만하게 즐기며 사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새로운 체험을, 인생이 가져다주는 각기 다른 새로운 순간들을
맛보고 간직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주님, 봄같이 희망에 찬 젊은 시절에서 인생의 가을에 이르기까지
매순간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게 하시어 추수할 때가 다가왔을 때
후회 없이 뒤돌아볼 수 있게 하시고 서로의 삶과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더 행복하고 부유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4. 정답게 살아가기

( 기도의 주제들 )
-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기분 좋은 날/ 힘든 하루/ 용서가 어려울 때/
서로를 받아들임/ ‘그럴 줄 알았어’/ 자신을 위한 시간

<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
우리 두 사람이 각각 고유한 존재이며
서로 다른 인격체라는 것을,
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을
저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리하여 각자가 일하는 방법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고
자기 식대로 해주길 바랍니다.
때때로 제 방법만 옳다고 믿으려는 유혹도 받습니다.
주님, 상대방이 택한 삶의 방법을
좀 더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방법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허용함과
정직함과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 단순히 지혜롭고 효과적인 타협 기술뿐만 아니라
이해와 사랑이라는 너그러움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5. 동반자이신 하느님

( 기도의 주제들 )
-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함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쁨니다. 주님/ 문제 대면하기/ 당신을 믿습니다

< 함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주님, 괴로울 때 달려가 매달릴 수 있는
삶의 보호자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약하고 무력하다고 느낄 때 기댈 수 있는
의지처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해결하기 힘든 문제로
허우적거릴 때 힘이 되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삶이 혼란스럽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결혼생활을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사랑의 모범이 되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쁨이 되어주심에 감사합니다.주님,
저희와 함께 사시어 평안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6. 함께 기도하기

( 기도의 주제들 )
- 함께 기도하러 왔습니다/ 삶을 기도로/ 기도의 응답/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말씀하소서, 주님

< 말씀하소서, 주님 >
주님, 기도할 때는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갖가지 필요와 원의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에 대한 응답은커녕
당신의 조언과 지도의 말씀도 듣지 못하고 맙니다.
주님, 기도란 혼자서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이나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은 저희가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도 보여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야고 1,5)라고 말씀하신 주님,
침묵 가운데서 당신이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저희가 바라는 것만 청하지 말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하소서.

7. 사는 법 배우기

( 기도의 주제들 )
- 인생에서 의미있는 것들/ 실패를 받아들임/ 걱정 이겨내기/
재산 관리/ 두려움 앞에서/ 나누는 삶/ 작은 것들을 도와주소서

<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들 >
주님, 저희가 막 결혼했을 때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치품들이
마치 필수품처럼 되어버려 마치 그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수많은 소유물을 관리할 뿐 아니라
하나라도 더 끌어모우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힘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주님, 바른 시각을 되찾게 하시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제자리를 찾게 하소서.
물질적인 욕심보다는 인생의 중요한 것들,
곧 우리가 나누는 관계와 만나게 되는 도전,
누군가에게 도움과 위로와 기쁨을 선사해 줄 수 있는
기회와 능력에 관심을 두게 하소서.
저희 가정과 이웃과 세상이 더 큰 사랑과 연민을 지닌 곳,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도록 저희의 시간과
가진 것을 관대하게 내놓을 수 있게 하소서.

8.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

( 기도의 주제들 )
- 아이들의 기쁨/ 함께하는 교육/ 가치에 대한 교육/ 아이들을 위해 시간내기/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추억이라는 선물/ 영성을 심어줌

<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
사랑하올 주님, 저희는 아이들을 저희가 바라는 대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령하며
고쳐주고 훈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소서.
주님, 아이들을 생긴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소서.
아이들에게 자긍심과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게 도와주시고
그들의 개성과 유일함을 존중하고 성공이 승리뿐 아니라
힘겨운 투쟁과 노력 또한 인정하고 칭찬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하올 주님, 아이들이 자신을 소중하고 특별하며
진정 사랑스런 존재라는 것을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9. 특별한 때를 위한 기도

( 기도의 주제들 )
- 휴가를 맞아/ 생일을 축복하소서/ 축하의 날/ 결혼 기념일에/
잊지 못할 소풍/ 가족 모임/ 아기를 기다리며/ 아기의 출생과 세례

< 결혼 기념일에 >
주님, 지난해 저희가 겼었던 모든 일,
좋았던 일, 나빴던 일, 행복과 불행,
낙담과 기분 좋았던 일 그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이 되어주시고
좋은 일에 기쁨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다툼으로 기분이 언짢아질 때 사랑과 웃음으로
불쾌함을 날려버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당신께 비오니 실수를 통해 지혜를,
견뎌야 할 슬픔에서 인내를,
실망 앞에서 다시 일어나는 노력을,
대면해야 할 시험에서 힘을,
즐거움에서 기쁨을 길어낼 수 있게 하소서.
저희와 함께 걸으시어 사랑과 연민,
이해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서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결혼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도
활기찬 사랑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는
새로운 한 해를 살게 하소서.

10. 특별 청원 기도

( 기도의 주제들 )
-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결정하도록 도와주소서/
어려울 때 드리는 기도/ 잉태를 바라는 이의 기도/ 병들어 아플 때/ 청원기도

< 병들어 아플 때 >
주님, 이렇게 당신 앞에 나온 것은
당신 치유의 능력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병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
받아들여야만 하고 그것을 통해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막상 병에 걸리게 되면
진저리치며 용기를 잃습니다.
툭하면 불평하고 슬퍼합니다.
주님, 저희를 위로해 주시고
병고를 참아 받을 줄 알게 하소서.
실망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 않고
잘 받아들이며 인내심을 기르는 기회로 삼게 하소서.
사랑하올 주님, 지혜를 주시고 의지와 결단력을 주시어
당신의 치유하시는 힘에 전력을 다해 협력하게 하소서.
주님, 저희에게 다시 힘을 주시고
건강을 되찾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언제나 위로와 치유로 축복해 주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11. 이웃과 함께 살아감

( 기도의 주제들 )
- 친구/ 이웃/ 배우자의 가족/ 세상

< 이 웃 >
친절하게 도와주는 이웃을 주심에 주님, 감사합니다.
때로는 곤란한 때도 있고 저희가 바라는 만큼 친절하거나
유쾌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주님, 그들이 유쾌하게 대하거나 불쾌하게 대하거나
상냥하거나 무뚝뚝하거나 사랑스럽거나 그렇지 않거나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저희와 가까이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기는 쉽습니다.
그들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단지 그들이 저희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무시하거나 피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사랑하올 주님, 친절을 베풀고 존중하며
모든 이웃과 친밀하게 지내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시간을 내어 도움과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있게 하소서.

12. 매일의 기도

( 기도의 주제들 )
- 감사기도/ 식사기도/ 아침기도/ 양심성찰

< 감사 기도 >
손을 잡고 마음을 모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저희에게 건강과 직업을 주시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게 해주신
그 모든 축복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을 주심에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의 고유함과
특별한 재능 그 가능성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친척과 친구들의 우정과 도움,
그들이 우리 삶에 가져다 주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가정과 편안함과 안정, 그 속에서 함께
나누는 기쁨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당신의 사랑과 영광을 엿볼 수 있는
이 세상을 주심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끊임없이 저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다함없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심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사랑하올 주님, 당신께서 주시는 이 귀중한 선물에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 양심성찰 >
주님, 때때로 시간을 내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 볼 수 있게 하소서.
양심성찰을 잘하고 싶습니다.
과연 저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결혼할 때 가졌던 목적과 희망과 꿈을 이뤘는지?
첫마음 그대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거기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교류하고 있는지, 마음을 닫은 채 가책 속에서 살고 있는지?
투덜거리거나 불평하지 않고 결혼생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고 있는지?
이기적인 목적추구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관심조차 없지 않았는지?
배우자를 잘 대했는지? 마음을 열고 대했는지?
이해하려고 했는지? 사려 깊게 행동했는지?
존중해 주었는지? 지나친 요구는 하지 않았는지? 잘 참았는지?
질투하지는 않았는지? 지나치게 고집 부리지는 않았는지?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는지? 자기중심적이지는 않았는지?
자기연민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독선적이지는 않았는지?
상대방의 말을 경청했는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했는지?
상대방의 필요에 민감했는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지?
“사랑해요”, “함께 있어서 좋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방법이 마음에 들어요”,
“당신과 결혼해서 정말 행복해요” 라고 말한 것은 언제인지?
배우자를 칭찬하고 가족들을 보듬어주고 격려하고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애써본 것은 언제였는지?
만일 우리 부부가 서로의 역할을 바꿔본다면
우리 삶이 더 즐겁고 만족스러울지, 아니면 더 어렵고 실망스러울지?
주님, 자주 멈춰 서서 배우자와 함께 매일의 삶을 진정으로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소서.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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