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주의 독서 메모 ] 35권~ 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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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독서 메모 035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5.30


[ 부활의 기쁨 100배 맛보기 ]

- 지은이 : 안셀름 그린, 옮긴이 : 정하돈, 펴낸곳 : 분도출판사/ 193p
- 예수부활대축일부터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 동안, 부활 성서 한 구절씩 매일 묵상하기
- 지은이 프로필 : 1945년 뢴의 융커하우젠 출생, 1964년 성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입소, 1965~1974년 철학과 신학공부, 신학박사 학위 받음,
그 후 3년간 뉘른베르크에서 경영학 공부, 1975년부터 수도승 전통의 원류를 심도
있게 규명하여 이를 융의 심리학과 비교하는 작업에 몰두, 다채로운 영성강좌와 강연
그리고 저술에 힘을 쏟아 80여권에 달하는 책을 씀.

[ 표지의 글에서 ]

- 부활의 힘을 믿으십시오! 경직과 억압을 털어버리십시오! 남들이 그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그대의 길을 걸어 가십시오!

어떤 문제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면 "일어아 너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대의 두려움을 껴않고 문제를 향해 걸어가십시오!
그것을 움켜잡으십시오! 그러면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 안에 부활의 힘이
있습니다. 굳이 일어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도 이루고
싶어하시는 부활을, 그저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 들어가는 말에서 ]

- 초기교회에서 부활시기는 전례력의 중심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50일 동안 주님의
부활을 경축했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 부활의 알렐루야를 노래했다.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가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그들은
노래로 표현했다.

- 부활시기 50일 동안 걷는 부활의 길은 더 큰 활기와 자유와 기쁨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반기는 사람됨의 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경축함으로써
하느님이 주신 가능성에 한층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부활의 길을 간다는 것은 삶의
온갖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삶의 너름새와 자유를 체험하기 위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미망에서 깨어나 참 삶을 채비하는 것이다.
* 너름새 : 일을 멋있고 능란하게 해내는 재주, 미망 : 헤맴

- 삶이 위협당할 때, 우울과 좌절에 시달릴 때, 실망과 체념이 엄습할 때면 늘 부활의
길을 묵상하라. 그러면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일어나며 내면의 경직을 깨치고 부활의
너름새와 자유에로 인도해 주는 삶을 새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매주일 예수 부활을
경축하면 우리는 주일마다 부활의 길을 걷는 것이다.

- 매주당 부활 복음 하나씩을 골랐다. 나는 이 복음들에서 그날그날 맞는 상황이나
형상을 우리 삶의 상황 속으로 끌어들여 해석하려 했다. 그리하여 나날의 삶을 다른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그림’을 그려 볼 것이다. 그림 하나하나에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빛으로 부활의 신비를 드러낼 것이다.

# 본문에는 50일간 매일의 부활 복음의 주제와 묵상이 있으나 주일에 해당하는 부분만
발췌하여 메모하였음.



[ 1. 부활을 경축하다 : 부활 제1주간 ]


< 주일 : 무덤가의 여인들 >

-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마태 28,1).

- 마태오 복음서에서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고 이튿날 동틀 무렵 무덤을 “보러” 갔다.

- 마르코와 루가는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이른 아침 무덤으로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분께 마지막으로 사랑스런 일을 해드리고 싶었으므로, 여러
가지 향료로 향기 좋은 기름을 직접 만들었다. 예수께 대한 여인들의 사랑은 그분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여성은 그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을 만난다. 예수는 살아 계시다. 이렇듯
여인들의 사랑은 헛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사랑하시는 분께로 향하고 있다.

< 묵상 > 여성은 우리 안에서 생명을 일깨울 수 있는 민감한 직감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복음은 오늘 특별히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혹은 개별적인 만남에서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주의 깊게 들으라고 권합니다. ‘여성성’(여성의 본성)은 영혼을,
우리 마음의 내적인 예감을 대변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고요한 동요가 일 때 부활을
체험합니다. 그대는 오늘 고요한 내면의 소리에 의식적으로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 소리는 부활이 오늘 그대에게도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압니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 월 : 부활을 알리는 천사(마태 28, 2 이하) >
< 화 : 삶을 방해하는 돌(마태 28, 2) >
< 수 : 죽음의 파수꾼(마태 28,4) >
< 목 : 공포와 체험의 무덤(사도 3장) >
< 금 : 참으로 부활하셨다(사도 2,23 이하) >
< 토 : 부활은 해방(사도 16장) >


[ 2.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 : 부활 제2주간 ]

< 주일 : 일상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봄(마태 28,7) >

-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
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마태 28,7)

-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서 천사는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이른다.
제자들은 갈릴래아를 향해 귀향길에 오른다. 성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고향에서, 그들이
살고 일하는 곳에서, 일상 속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혼합민족’,
잡다한 것들이 뒤섞인 우리네 삶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갈릴래아다. 우리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우러져 함께 살고 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 신앙과
불신, 사랑과 미움, 생명력과 마비,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우리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거북한 사람, 이들 모두와 어울려 살아간다.

-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데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기쁨
으로 하여 고통이 사라지고 희망과 신뢰로 빛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본다.
어떻게 갈등이 해소되는지, 어떻게 대화를 통해 분위기가 편안해지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화해하는지를 유심히 살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다.

< 묵상 > 오늘 그대 주위에 피어나는 자연을 유심히 살피면서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힘을 알아내십시오! 그대 삶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그대를
앞질러 가셨습니다. 그분은 벌써 그대의 삶 속에, 그대의 갈릴래아에 계십니다. 삶의
어지러움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찾으려면 깨어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분을 보면
그대의 갈릴래아는 변화될 것이며 그대의 삶에도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 월 : 생명에로 되돌아감(루가 24,5 이하) >
< 화 :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다(루가 24,13 이하) >
< 수 : 내가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가 24,26) >
< 목 : 빵을 쪼갬(루가 24,30 이하) >
< 금 : 부활 이야기를 함께 나눈 공동체(루가 24,34 이하) >
< 토 : 의심과 믿음(루가 24,36-49) >


[ 3. 막달라 마리아 : 부활 제3주간 ]

< 주일 : 죽음을 넘은 사랑의 승리 >

-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 (요한 20,1 이하)

- 요한은 부활사화의 중심에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시킨다. 마르코와 루가는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일곱 귀신을 내쫓으셨다 한다. 그녀는 분명 예수를 따라다녔고
그분 가까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와 만남으로써 여인으로서의 품위를 되찾았다.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중심을 되찾았다. 그녀의 중심은 큰 사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예수 덕분이라 여겼다.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 태어난 것이다. 순간,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자기 안에 굳어 있던 모든 것이 새 생명으로 되살아남을 체험했다.

- 부활은 죽음을 넘은 사랑의 승리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다. 그분과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생명과 품위를 되찾았다. 그녀가 아직 어두운 꼭두새벽에 무덤으로
간 것은 사랑이었다. 그녀가 부활하신 주님을 찾는 사연은 이를테면 ‘러브 스토리’다.
슬픔이 마음을 온톤 어둠으로 덮어버린 그날 밤, 그녀는 영혼이 사랑하는 분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분의 육신은 찾지 못했으므로 너무 슬퍼 울어야 했다.

< 묵상 >
그대의 깊은 갈망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그대를 어디로 인도합니까? 그대
영혼이 찾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대의 갈망을 신뢰하고 끝까지 사랑을 따를 때 그대도
마리아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대의 영혼이 사랑하는 분을 찾으려면 마리아처럼 마음의 어둠
한가운데서 그저 길 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 월 : 사랑하며 믿는 마음(요한 20,3-10) >
< 화 : 이름을 부르시다 (요한 20,11-16) >
< 수 : 나를 만지지 말라(요한 20,17) >
< 목 :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짐(요한 20,17) >
< 금 : 나는 주님을 보았다!(요한 20,18) >
< 토 : 사람들에게 보내졌다(사도 8,26-40) >


[ 4. 토마의 학원에서 : 부활 제4주간 ]

< 주일 : 내 마음의 닫힌 문 >

-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든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 부활하신 분이 닫힌 문으로 들어오신다. 제자들의 두려움도 닫힌 문으로 들어와
평화를 비는 그분을 막을 수 없었다. 이는 몹시 아름다운 부활의 한 장면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고 우리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자물쇠와 빗장이 막을 수는
없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다.

- 예수께서는 우리의 닫힌 문으로 들어오시기만 할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에 이르는
문이기도 하다. 문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이행, 이를테면 현세에서 내세로,
속(俗)에서 성(聖)으로의 이행을 상징한다. 중세 주교좌 성당의 문은 대개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생명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중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참된 문 그리스도, 이는 부활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우리가 문을 굳게 닫아건다 해도
생명의 문 그리스도께서는 닫힌 문을 부수고 활보하실 것이다. 그분이 닫힌 문으로 우리
에게 오시면 우리도 우리 자신한테로 새롭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 묵상 >
오늘, 그대가 드나드는 문을 깨인 의식으로 바라보십시오! 멋들어지게 장식된
문도 있을 것입니다. 문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질식할 것 같은 사무실을 한 번 떠나
보십시오. 크고 안온하고 아름다운 방, 밝은 빛 넘실대는 방, 운치 있는 방으로 향하는
문은 따로 있습니다. 이 방들이 그대가 사는 집의 모든 방을 상징한다고 여기십시오.
부활하신 분을 그대 집의 모든 방으로 맞아들여, 모든 닫힌 것들이 열리고 막힌 것들과
억압된 것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대가 열어줄 때를 기다리는
문은 어디에 있습니까?

< 월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20,19-21) >
< 화 : 예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불어 넣으셨다(요한 2,22 이하) >
< 수 : 체험을 찾다(요한 20,24-27) >
< 목 : 개인적인 신앙고백(요한 20,28) >
< 금 : 보지 않고도 믿는다(요한 20,29) >
< 토 : 해방시키는 기도의 힘(사도 12,6-17) >


[ 5. 부활하신 주님과의 아침식사 : 부활 제5주간 ]

< 주일 : 헛수고한 밤 >

-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
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요한 21,1-5)

-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나타나신 예수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는 부활사화다.
제자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일곱이었다. 7은 변화의 숫자다. 7은 지상과
천상의 결합, 하늘과 땅의 만남을 뜻한다. 일곱 제자들이 함께 있었던 것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은 거룩한 공동체가 되었고 예수
께서는 친히 그 공동체의 신비스런 중심이 되셨다. 그들 위로 하늘이 열리는 듯, 돌연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때였다. 모여 있긴 했지만 처음에는 헛일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다 헛일이라 괴롭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이들을 괴롭히는 체험이다. 전부 헛된
일이고 쓰잘 데 없는 짓 같다. 좌절하고 실망한다. 아무 의미가 없다.

-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했을 때 제자들은 신이 나서 “우리도 같이 가겠소”
하고 나섰다. 그들은 삶에서 어떻게 ‘대박’이 터지는지 베드로가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요한 21,3). 모든 것이 헛되다. 캄캄한 밤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둡고 무의미하다. 배는 그들을 점점 더 깊은 밤으로 몰고
갔다. 헛수고와 절망의 잿빛 아침에 예수께서 나타나신다. “어느덧 새벽이 되었는데
예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요한 21,4) 간밤의 헛수고에 괴로운 자는 아침을 애타게
기다린다.

- 제자들은 아직 호수 위 배 안에 있다. 무의식과 악몽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예수께서
다른 세계에서 그들의 삶으로 들어오신다.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과
관계를 터신 분은 예수였다. 그분은 “ 애들아, 뭘 좀 잡았느냐?”하고 물으신다. 그들은
아직 아둔하다. 노련한 어부들이긴 하지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고 주님의 ‘학교’로 데려가신다.

< 묵상 > 그대는 살면서 언제 헛되다는 경험을 하게 됩니까? 언제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헛되다 느끼십니까? 자녀들을 위해 부질없는 수고를 너무 많이 하셨는지도 모르겠군요.
그 아이들은 생판 딴 길로 갑니다. 그 길이 그대에게는 어긋진 길처럼 보이겠지요.
그대 하는 일이 허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은 막막합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보지만 그것도 헛일입니다. 늘 제자리걸음입니다. 만사가 헛될 때는
“애들아, 먹을 것이 없느냐”하신 예수의 말씀에 기대십시오. 정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잿빛 아침, 호숫가의 예수께서는 그대 삶이 헛되지 않도록 그대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오늘 그대 삶은 이루어질 것이며 허망하지 않고 온전할 것이라고.

< 월 : 저분이 주님이시다!(요한 21,6 이하) >
< 화 : 우리 삶의 변화(요한 21,7-11) >
< 수 :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요한 21,12-14) >
< 목 : 우리의 사랑을 물으심(요한 21,15-17) >
< 금 :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요한 21,18-23) >
< 토 : 넓은 마음(사도 10,9-48) >


[ 6. 부활과 승천 : 부활 제6주간 ]


< 주일 : 작별과 위로 >


-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에게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18-20)

- 부활 제6주는 그리스도의 승천 대축일이다. 이 주간의 복음들은 예수의 이른바
‘고별사’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께서 죽으러 가실 때나, 하늘로 올라가실 때나 제자
들을 버려두지 않겠노라고 위로하신다. 이제 아버지께 가시더라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에게처럼 만지고, 보고, 들을 수 있게끔 우리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다른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깨닫는 데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 우리 안에서도 삶이 죽음을 이길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된다. 이것이 작별에 즈음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남기신 위로의 복음이다. 이제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또한 그분 안에 있다. 승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새로이 가까워지셨다.
겉으로는 보고 들을 수 없지만 그분 친히 우리 안에서 우리의 가장 내밀한 모습이 되셨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영혼의 근저에서 내적 평화를 느낄 때 그분이 보인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엄청난 상심을 이해하시면서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해산을 앞두고 걱정하는 여자에 비유하셨다. “정작 아기를
낳으면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진통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그대
들도 지금은 슬픔에 잠겨 있지만, 내가 다시 그대들을 보게 되면 그대들의 마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요한 16,21-22)예수께서 죽음과 승천을 통해
아버지께 가실 때 우리에게도 탄생이 이루어진다.

< 묵상 >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눈 이별은 그대가 살면서 많은 이별들을 연상시킬 테지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살기 좋았던 곳은 떠나야 했습니다. 헤어질 때마다 아팠
겠지만, 이별 속에는 새로운 뭔가에 대한 기회도 숨어 있는 법이지요. 오늘은 무엇과 헤어
져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그대 안에 새로운 삶을 꽃피우시
렵니까? 산책할 때, 의식적으로 신세계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사람, 장소, 습관, 상처,
실망을 어찌들 버려야 할지 한 발짝씩 뗄 때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가 쉬이 이별할
수 있음은, 그대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그대와 함께 가시고 그대 안에
계심이 위안인 줄을 아는 까닭입니다.

< 월 : 네 마음 깊은 곳 위로 하늘이 열린다(루가 24,50 이하) >
< 화 : 하늘은 네 안에 있다(사도 1,10 이하) >
< 수 : 내면의 스승(루가 24,51) >
< 목 : 우리 자신을 넘어서 높이 들어올려지다(시편 68,19) >
< 금 : 일상 속 부활의 기쁨(루가 24,52 이하) >
< 토 :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사도 17,29) >



[ 7. 성령을 기다림 : 부활 제7주간 ]

< 주일 : 오소서 성령이여! >

-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성전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
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 ” (사도 1,12-14)

- 주님 승천부터 성령강림까지 교회는 성령께 9일 기도를 드린다. 그것은 예수께서 승천
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도들이 다락방에서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사도 1,14) 기도에만 힘썼던 데서 유래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대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 1,8) 라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 성령은 우리의 동반자요 위로자며 아버지의 선물이다. 또한 생명의 샘이요 불이며,
빛이요 사랑이며 또한 기름받음이다. 성령은 생명의 샘이다. 이 샘은 하늘스런 것이므로
퍼내도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다. 성령은 마음에 내리는 사랑이다.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
받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성령은 사랑할 능력을 준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흘러드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몸과 마음에 흘러든다.

< 묵상 > 성령강림 9일 기도중에는 성령강림을 기다리던 다락방의 그들과 함께하십시오.
제자들이 기도하던 이 시점에, 장차 온 세상을 뒤흔들 새로움이 예비되었습니다. 다락방은
교회 탄생의 모태이자 그대가 새사람으로 태어날 모태입니다. ‘마우루스’의 찬미가
(임하소서 성령이여)를 묵상하면서 그 상징들을 그대 안에 깊이 새기십시오. 그대 안에
성령의 샘이 다시 솟고 그분의 사랑이 새롭게 타오름을 느낄 것입니다.

< 월 : 세찬 바람이신 성령(사도 2,2) >
< 화 : 불이신 성령(사도 2,3) >
< 수 : 성령과 새로운 언어(사도 2,4-13) >
< 목 : 협조자이신 성령(요한 14-16장) >
< 금 : 성령의 은사(1고린 12,8-11) >
< 토 : 신도들에게 내린 성령강림의 기적(사도 4,23-31) >


[ 8. 성령강림 : 50일째 ]

< 성령과 인간의 완성 >


- 성령강림절(오순절)이란 이름은 50을 뜻하는 ‘펜테코스테(pentekoste)’에서 왔다.
그 날은 부활 후 50일째다. 부활절은 성령강림절에서 완성된다. 두 축일은 절기 축제에
기원을 둔다. 부활절은 봄 축제, 성령강림절은 밀 수확 축제다. 유대인들은 이 두 축제를
구원사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부활절은 이집트 탈출을, 성령강림절은 사나이 산에서
계명을 받은 것을 각각 기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절은 예수 부활의 축제고,
성령강림절은 성령이 오심을 기리는 축제다. 어떤 축제라도 인간의 자기완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성령강림절에 우리는 사람됨의 완성을 경축한다.

- 50이라는 수를 보자. 사람 나이 50이면 노년의 문턱에 선다. 고대 로마의 병역 면제
연령은 50세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50을 상징적으로 해석했다. “이 50일째 날은 또
다른 신비를 지닌다. 7에 7을 곱하면 49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첫째 날이기도 한 8일을
더하면 날수 50이 꽉 찬다. 주님 부활 후 이 50일째 날은 더 이상 노고의 상징이 아니라
평온과 기쁨의 상징으로 축하 할 날이다” 50은 말하자면 평온과 기쁨의 상징이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사람은 쉰에 이르러서야 현명하고 영적인 인간이 된다고 했다.

- 이스라엘에서는 오십 년이 되는 해를 희년으로 지낸다. “오십 년이 되는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낼 해이니, 씨를 심지도 말고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도 말라. 이 해가 희년
이니,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레위 25,11 이하) 동시에 모든 빚을 탕감 받고
종들은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을 아름답게 상징한다.
쉰 번째 해는 자각과 안식의 해여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이 올바르지 않았으며
무엇이 자기의 본성과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으며 무엇이 자기의 본성과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는지 잠시 쉬며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도 50이 완성되면 우리도 본래적인 모습, 평온과
기쁨을 획득하고 ‘거룩한 그릇을 지키는 자’ 말하자면 타인의 인도자,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부활에서 성령강림까지의 50일은 우리에게 사람 되기를 연마시킨다. 부활 복음과
부활 사화들, 그리스도 승천과 성령강림 때의 성령 파견은, 인간의 자기완성의 길, 무덤을
떨치고 일어나는 길, 우리 일상의 한가운데서 부활하는 길, 자신의 인성으로 내려오고
우리 안의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그리고 있다. 그 길은 부활하신 분의 길이다.

- 우리의 자기완성은 성령강림 대축일에 파견되어 오시는 성령을 기다리는데서 시작된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온전히 우리 자신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이 잠깨어
일어나고 우리 안의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봉오리가 터지고 삶이 꽃을 피운다. 성령
강림은 생명의 축제다. 태초에 피조물 위를 휘돌던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스미면 우리는
새로이 창조되어 자신의 근원과 하느님이 만드신 대로의 우리 본래 면목을 만난다.

- 성령강림은 교회의 탄생이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을 모우시고, 찾는 이 묻는 이 모두
에게 열린 공동체를 이루신다. 사람은 공동체에 투신하여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부여
하신 사업에 동참할 때 비로소 기 완성을 이룩할 수 있다. 그 사업이란, 이 세상을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꾸려가며, 이 세상에
하느님의 영을 깊이 새기는 것이다. 교회는 서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다.

< 성령강림 전례 >

- 성령강림 대축일에 함께 전원을 산책하며 꽃이 만발한 자연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훌륭한 성령강림 전례가 될 수 있다. 샘물을 찾아 나서서, 샘물이 멈추지 않고
솟아나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자연 속의 샘물은 우리 안에
솟는 샘, 신적인 것이라 마르지 않고 솟는 내면의 샘을 상징한다. 아니면 시내나 강가에
앉아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은 관례가 되겠다. 성령이
우리 안의 굳은 것을 흐르게 하고 메마르고 시든 것을 소생케 할 때, 우리 안에도 다시
생명이 흐름을 거기서 느끼지 않겠는가. 한 번쯤 작정하고 바람 속에 서 보라. 때로는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고 때로는 아주 거세게 희몰아치면서, 성령이 우리 안의 케케묵은
것들을 전부 날려버림을 느낄 것이다. 성령강림 미사 때 성령의 은사가 하나씩 적힌
카드를 준비하는 것도 좋은 성령강림 전례가 되겠다. 성령의 일곱 은사의 특은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능력들이 다 은사다. 이를테면 화해,
확신, 치유, 지도력, 평화, 신중, 신뢰, 개방, 위로, 이해, 현명의 은사 등등이 있다.

[ 맺는 말 ]

- 전례력의 각 시기는 자기완성의 도야 과정이다. 대림과 성탄시기는 새로운 시작을
뜻하며 우리는 이를 예수 탄생과 더불어 경축한다. 사순시기는 내적 자유를 단련시키고
삶의 일부이기도 한 고통과 화해하는 시기다. 부활시기는 새 삶을 발전시킬 때다. 그것은
예수부활에서 시작하고 성령강림에서 완성된다.

- 부활의 길을 의식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그리스도 승천과 성령 파견의 신비를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 자아
완성의 신비 속으로 인도될 것이다. 사람됨의 길은, 일어서고 넘어지고 땅에 묻히고 다시
일어서고 떠나고 작별하는 과정을 격어야 하며, 우리 안의 하늘과 내적 스승의 경험과
성령을 거쳐 지나가야 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 쏟아져 내면의 삶을 꽃피우며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발전시킨다. 부활의 길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고 부활시기에 교회가 기리는
생명의 풍성함으로 그대를 인도하기를! ....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6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6.06


[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 -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

- 지은이 : 정규한, 펴낸곳 : 성서와함께/ 161p
- 기도의 의미, 대상, 방법 안내서
- 지은이 프로필 : 1988년 서강대 물리학과 졸업, 1989년 예수회 입회,
1998년 미국 웨스톤 예수회 신학교 졸업, 1998년 사제 서품

[ 표지의 글에서 ]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정으로 먼 곳은 '밖'이 아니라 '안'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은 '머리에서 가슴 사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도달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걸려서 도달하고,
어떤 사람은 깨달음을 얻어 얼마 안가서 도달합니다.
그만큼 가슴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가슴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입니다.

[ 책머리에 ]

-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만큼 열심히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기도를 해냐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않고 기도를
깊이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자기 자신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결코 깊은 기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지지 못하면서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은 욕심이다. 그것은 마치 피아노를 한두 번 치고 나서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것과
같은 것이고,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일 것이다.

- 우리가 보다 깊이 하느님과 만나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
즉, 하느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대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하고, 황금 같은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며, 기도 안에서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고, 자기의 욕망에
항거할 수 있는 노력도 필요하고, 육체적인 고통도 이겨내야 한다.

- 이 책의 목적은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알려 드리는 것이지, 여러분 대신에
기도해 주는 책이 아니다. 즉, 신앙생활을 깊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해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깊은 기도에 젖어들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 머리말 ]

- 기도는 욕심과 이기심 같은 좋지 않은 것들로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순수한 사랑
으로 변모시켜준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내면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이 섞인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수정처럼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욕심이나 이기심으로
가득한 우리가 계속 그것을 없애려는 노력 속에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기도를 배우게
되고 진실한 기도를 하게 된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느님 안에서 기쁨이나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행복과 기쁨이 이 기도를
통해서 커지게 된다.

- 우리는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에, 알게 모르게 떠오르는 생각이나 사람이나 대상
속에 숨어서 말씀하고 계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는
존재 자체이신 하느님의 소리이다. 오직 내 안에서 나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며 나를
일깨우는 이의 소리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소리이다. 존재의 뿌리에 이르는 소리를
듣게 될 때, 하느님과 나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 당신을 칭찬하고 갈채를 보내줄 때의 느낌과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의 느낌을 비교해
보자. 이 둘이 똑같은 기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자는 인기, 성공, 권력에 대한
욕구 표현의 느낌이고, 후자는 내면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소리에서 오는 영혼의 느낌이다.
이렇듯 이 둘은 분명히 다르다. 가슴 속에서 “나를 만나러 오라”는 하느님의 초대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계속 우리 가슴 속을 두드리시는 하느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그분을 맞아들이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


[ 제1장. 가슴(내면)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찾아서 ]

-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 3,20).
이와 같이 하느님은 항상 우리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가슴속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머릿속의 생각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머리에 가득 차 있는 관념들을 비울 때, 그 빈 공감을 하느님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 기도할 때의 나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자신이 내면에 계신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머리로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머리로 찾고 있다면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리이다. 정리
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에 있는 하느님, 가슴 속의 하느님을 찾는 것이 진정한 기도이다.

- 우리가 빈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버려야 한다. 머리로 생각을 하면서
빈 마음이 될 수는 없다.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다 가질 수 없고 둘 다 커질 수도 없다.
곧 머리와 가슴은 동시에 움직일 수 없고 동시에 자신을 주도할 수도 없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가슴이 커지게 될 때 우리는 빈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 때 바로 내면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마나게 된다.

- 예수님도 내면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위해 일찍 일어나 기도하시고(마르 1,35), 홀로
기도하시고(마태 14,23),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시고(마르 1,35), 밤늦도록 기도
하시고(마태 14,23),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기도하시고(루가 9,28), 내면과의 싸움이
있었을 때는 피땀을 흘려가면서까지 기도를 하셨다(루가 22,44). 결국 기도는 내면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찍, 자주, 오래도록, 어떤 때는 피땀을 흘려 가며
기도를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가슴 깊숙이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 제2장. 어떻게 내면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

- 우리는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점점 닮아가게 된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험한
만큼 느끼게 된다. 하느님 체험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체험한 만큼 하느님을 알게
되고 사랑을 느낀 만큼 사랑을 하게 된다. 그때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전의 사랑
보다 더 깊은 사랑이다. 내면의 소리는, 계속적으로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는 노력 가운
데서 듣게 된다.

-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 산책, 조깅 등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신체를 단련한다.
그렇듯이, 영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사욕편정(邪慾偏情)을 없애고, 자기의 생활을 개선
하는데 있어 예리한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기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에는 지름길이 없다. 계속 끊임없이 해야 기도에 깊어지고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퇴보하고 만다.

-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면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나서 아무런 사욕편정에도
좌우됨이 없이 자신을 이기고, 자신을 하느님과 일치시키기 위함이다. 즉, 내면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찾아서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다.


[ 제3장. 기도란 무엇인가? ]


-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대화에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다른 한
쪽은 일방적으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독백은 대화라 할 수
없다. 대화는 상호적인 것이다. 진정한 대화는 서로를 존중해 주고,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서로가 통하는 대화,
이해하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하느님과 깊게 대화할 수 있게 되면 하느님을 더 깊이 알아 가게 된다.

-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를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 채 기도하게
된다면 일방적인 대화나 독백이 되기 쉽다.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인식
하지 못하면 우리는 독백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
이전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 사랑
체험 또는 현존 체험’이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길게 말하면 ‘하느님 현존 체험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놓고 기다리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자, 그분의 사랑을 받아
들이는 것이며, 이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사랑이 꽃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 최상의 기도
이다. 기도는 바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
하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며, 자기 자신에 깊숙이 숨어 있는 ‘사랑이 없는 형편
없고, 더러운 것’들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되면서 정화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것들이 하느님 안에서 정화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 온전히, 그리고 더 깊게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은 ‘밖’이 아니라 ‘안(내면)’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머리에서 가슴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걸려서 겨우 도달하고, 깨달음을
얻은 어떤 사람은 얼마 안가서 그곳에 도달한다. 그만큼 가슴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가슴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상호적인 대화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기에, 이 사랑을 잘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우리의 내적인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 1. 사랑을 배우기 위한 우리의 내적 태도 >

* ‘아라비안나이트’의 등잔 이야기 – 수도승/ 큰 다이아몬드/ 부요한 마음 *
- 우리가 기도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 인생에서 귀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고,
그 귀중한 것을 깨달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도 선뜻 내어주는
그 부요한 마음”을 기꺼이 선택한다면 부부가 하나 되듯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기도할 때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태도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도 선뜻 다 내어줄 수 있는 그런 부유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 2. 부요한 마음을 갖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 >

* 원숭이를 잡는 이야기 – 야자열매인 코코넛/ 움켜쥐고 놓지 않는 원숭이 / 원주민 *
- 우리에게 소유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것, 즉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물질
이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욕심’이다. 이 욕심이 사라질 때 우리가 가진 귀중한 것도
선뜻 내어줄 수 있는 그 ‘부요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 3. 우리가 끊어 버려야 할 욕심 >

* 하느님의 인간 창조 이야기 – 흙(육신)과 입김(영혼/얼), 물과 기름 *
- 섞인 물과 기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력장에 의해 분리가 되듯, 진정 하나로
섞이고 싶지만 자기중심적이고도 물질 중심적인 중력장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분리되는 현상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끊을 때만이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하느님을 모실 수 있고,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섞일 수 있다.
중력을 끊어 물과 기름을 섞듯이, 욕심을 끊고 귀중한 것도 선뜻 내어주는 그 부요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하느님과 내가 하느님 안에서 제대로 섞여 하나가 될 수 있다.


[ 제4장.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 ]

< 1. 하느님 현존 체험으로서의 기도 >

(1. 가장 좋은 기도는?) 기도의 종류는 다양하다. 감사기도, 청원기도, 화살기도,
성무일도, 묵주기도, 관상기도, 묵상기도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기도가 있다. 이중에서 좋은 기도란, 자기 자신이 하느님과 가장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기도일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의식하고 느끼며 삶으로 체험
하면서 살아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느님을 의식할 수 있고, 내면으로 느낄
수 있으며, 하느님을 가장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기도라면, 그것은 자신에게 좋은
기도가 된다.

-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각 한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내면의 땅이 있다. 우리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어떤 사람은 진흙땅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기름진 땅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모래땅일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늘지고 습한 땅일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이러한 좋고 나쁨은 없다. 왜냐하면, 벼에게는 진흙땅이 알맞고, 땅콩에게는 모래땅이
알맞고, 버섯에게는 습하고 그늘진 땅이 알맞고, 배추에게는 기름진 땅이 알맞듯이
우리 각자에게는 알맞은 고유한 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땅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고, 그 땅에 알맞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잘 키우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 하느님은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우리 각자를 초대하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마리아가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말, 어투, 억양으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기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우리의 성향, 자질, 능력
등등을 잘 알아서 하느님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

(2. 어떻게 기도를 심화시킬 수 있는가?) 우리가 각자 자신에게 알맞은 기도 방법을
찾게 된다면 이제는 그것을 심화시켜야 한다.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기도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리듬을 찾아 그것을 심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리듬이 그대로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에 베어야 한다. 기도가 ‘하느님의 현존 체험 또는 사랑 체험’이라고 했듯이
기도를 통해 이 사랑을 배우고, 깊이 심화시켜야 한다. 기도를 심화시키는데 성서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성서를 통하여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의 빛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성서는 영혼이
올바른 기도를 하도록 영양분을 제공해 준다.

- 어떻게 기도했는지는 여러 측면이 있으나 다음 세 가지 측면만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는
머리로 정리하는 식의 기도(생각으로 하는 기도, 즉 개념적인 기도)이고, 두 번째는
가슴(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무의식에 갇혔던 과거의 경험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기도이다.

- 기도에서 깨달은 것들을 지속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기도 중에 어떤 느낌이 왔을 때
‘푹 머무르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럴 때 깨달은 것이 나와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 되어 지속적으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
으로 알 수 있으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 가슴 중심적인 기도를 넘어서 >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알지도 못하고, 사랑받은 것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사랑은
타인중심적인 사랑이기에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죄는 뒤로 감추게 된다. 하지만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남에게 준 것만을 기억하는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은 내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 자체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단계> 사랑은 ‘아는 것’과 사랑을 ‘행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머리는 사랑에
대한 말로 가득 차지만, 가슴은 말로 채울 수가 없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의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보다 못한 만큼만 사랑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은 상대방이 나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사랑이다. 세 번째 단계의 사랑은 내가 상대방을 위하여 밥이
되고,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사랑이다.


< 2. 자기 정화 차원으로서의 기도 >

- 과거의 경험들아 현재를 지배하게 되고 미래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치유할 때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해방된다. 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대상)을 보다 더 사랑스럽게 받아들이고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을 ‘자기 정화 차원으로서의 기도’라고 한다. 성숙하고 영적인 사람이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거나 적어도 과거의 경험을 기꺼이 맞아들일 채비를 갖춘
사람이다.

( 1. 과거의 경험을 찾아서 ) 우리는 고통스러운 사건이나 체험을 알아내고, 정화시켜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과거의 경험이 의식이 올라오도록 과거 경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2. 고통의 의미 )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통은 거부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다.
인생사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화시켜느냐에 따라서
영적으로 퇴보하거나 성숙해진다. * 가나한 농부, 나비, 장미에 대한 이야기 *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은 하느님을 더 잘 알게하고, 우리 자신을 잘 아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 안에
있는 고통과 갈등이나 많은 어려움은 바로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질서 잡는 좋은
도구가 된다. 우리는 고통을 고통으로 끝낼 수 있지만 거룩한 고통으로 끝낼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조개가 돌멩이를 생산해 낼 수도 있고 진주를 생산해 낼 수도 있듯이, 진주가
되고 돌멩이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3.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
영신수련에서 기도는 자신 안에 있는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 속으로 끌어 올리는 기도도 포함된다. 무의식속에 눌러놓았던 것들인 고통,
슬픔, 미움, 한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쁨, 사랑, 행복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의식의
수준으로 다시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들은 정화시키고, 긍정적인
것들은 심회시키고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렇듯 무의식 속에 가두어 두었던 과거를 의식
속으로 끌어 올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정화 차원으로서의 기도’이다.

(4. 용서 ) 용서란 ‘과거의 경험을 없었던 일로 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 상대방을 대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란
쉽지 않고, 또 용서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 3. 요약 >
-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자, 자기 자신의 과거를 체험들을 정화
하는 것이다. 기도는 종(縱)과 횡(橫)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즉,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종이라 하면 자신의 과거 체험들을 정화하면서 이루어지는 사람들 간의 관계는
횡이기에 기도는 종횡의 만남이고 십자가의 만남이다. 이 십자가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고, 나아가 하느님을 더 깊이 느끼고 사랑하게 된다.



[ 제5장. 기타 ]

< 1. 식별과 선택 >

- 식별과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잘 정화시켜야 한다. 과거의 경험을
정화시키지 않으면 현재나 미래는 계속해서 과거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이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영들의 움직임이나 느낌, 위안, 고독 등을 깨닫고 잘 진단하여 그것의 원천을 성찰하여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 한다.

-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생각함이 있는데 첫째는, “나 자신의 생각이다” 이것은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오는 충동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악신으로부터 오는
충동이다. 악신은 사람을 유혹하거나 거짓 평화를 주며, 교만한 사람에게 나타나거나
실망으로 오기도 한다. 악으로 기울어지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악신은 피상적 향락과
쾌락을 느끼도록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셋째는 하느님(성령)을 통해서 오는 충동이다.
선을 지향하고 착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선신은 용기와 힘, 위안과 평화 등 좋은
느낌을 주어 선행과 덕에 더욱 정진하도록 감도한다. 이때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하느님을 맞이해야 한다.

- 우리의 삶 안에서 영들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이다. 식별을 위해서는 양심성찰이
큰 도움이 된다. 양심성찰은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셨는지,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지, 그리고 삶 속에서 악신들이 어떻게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영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식별을 해 나갈 때 우리는 매순간 좀 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식별을 할 수 있다.

- < 참고 > 식별에 도움이 되는 성서 구절 1) 에페 6,10-18(영적 투쟁) 2) 갈라 5,22.
3) 1고린 6,12. 4) 로마 12,2. 5) 필립 1, 9-10. 6) 마태 7,17.

< 2. 역할 혼동 >

- 역할에는 나의 역할과 하느님의 역할이 있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고,
무엇이 나오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역할이다. 우리가 각각의 역할을 혼동하게 될 때
혼란이 생기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것이 바로 이 역할의 혼동이다. 하느님의
역할까지 자신들이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초연해 있다는 것은 슬픔이나 기쁨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초연하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역할 혼돈에 빠지지 않는
태도이다. 이로서 우리의 생활은 혼란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질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

- 용서도 마찬가지이다. 용서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으로 된다.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서가 가능하다. 나의 역할은 용서하고 싶은
원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나의 역할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께서 당신의 원의대로 하시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제대로 용서할 수 있고 올바로 기도할 수 있다.

< 3. 활동 중의 관상 >


- 성서에서 예수께서는 “깨어 기도하시오”(마태 26,41). “언제나 기도하시오”(루가 18,1)
하고 당부하신다. 우리는 각자의 생활에서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항상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대상이, 이웃이, 그리고 하느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기도,
즉 예수님이 지니신 가엾고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매순간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되므로 항상 깨어 기도하게 된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어, 실패와 성공,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에서도 모든 것을
기꺼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 우리의 삶은 전존재로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활동 중의 관상’이며 살아 있는 기도이고,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기도이다.


[ 부록 : 기도 방법 안내 ]


- 우리는 당신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주위에 보이는 많은 피조물
들을 통하여, 삶의 여러 경험과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그분이 현존하시는 성서 안에서
그분과 친밀히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은 계속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가
당신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도록 초대하고 계신다. 우리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지
마음을 열고 경청하는 자세가 기도를 하려는 우리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태도이다. 잘 듣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열렬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

-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하느님의 음성을 더 잘 듣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성실한 기도준비와 성실한 기도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기도는 보통으로 기도 준비, 기도 그리고 묵상 성찰로 구성된다.

< 1. 기도 준비 >

- 기도 준비는 기도할 주제, 기도할 장소, 기도하는 자세, 기도의 시기, 기도의 길이를
설정하는 것으로 약 1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 첫 번째로는 기도의 주제를 정하는 것이다. 매일의 복음이 될 수도 있고, 매일의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염경기도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고, 피정 때는 피정 지도자가 주는 성서
구절도 될 수 있다. 이렇게 성서구절을 선택하고 기도를 더 잘하기 위해서 몇 가지 기억
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성령께 성서 구절의 메시지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성서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알기 위하여 천천히 반복해서
두세 번 읽는다. /마지막으로는 나 자신이 실제로 감명 받은 구절, 또는 나와 관계된다고
생각되는 말씀이나 구절을 세 가지 정도 (세 개의 요점 잡기)기록한다. 여기서 요점을 꼭
세 개만을 잡으라는 말은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네다섯 개도 잡을 수 있으나 기도를 배우
려는 이들에게는 세 개가 적당하다. 세 개를 잡고 첫 번째에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두 번째로
넘어가고 두 번째에서도 아무 느낌이 없다면 세 번째로 넘어가서 기도를 한다. 그래도 아무
느낌이 없다면 첫 번째부터 다시 반복하면 된다.

- 두 번째로는 기도할 장소를 정하는 것이다. 기도를 깊이 잘할 수 있는 곳으로, 조용한
장소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혹은 방해받지 않을 곳이면 된다. 편한 자세를 취해도 좋은
장소를 선택한다. 예를 들면 빈방이나, 성당, 성체 앞, 기도방, 성모상 앞, 십자가 앞 등등
여러 곳이 있지만, 내가 기도할 시기에 기도를 잘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한다. 그리고 기도
할 때 방해가 되는 것(전화 등)은 제거해 두면 좋다.

- 세 번째는 기도하는 자세이다. 의자에 앉아서 할 수도 있고, 무릎을 꿇고 할 수도 있고,
가부좌를 틀고 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고 안온하면서도 기도를 보다 쉽고 깊게 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한 번 자세를 결정 한 후에는 되도록 바꾸지 않도록 노력하고,
기도는 고행이 아니기 때문에 부자연스런 자세나 속박된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다.

- 네 번째는 기도의 시기이다. 하루 중에 자투리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과
가장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기를 찾아야 한다. 식사 전이나 후, 휴식시간이 될 수도 있고,
잠자기 전의 시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루 중에 하느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 다섯 번째는 기도의 길이이다. 기도를 하게 될 때 내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는
가를 보고 그 길이를 결정한다. 15분일 수도 있고, 30분일 수도 있고, 한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되도록 한 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한 시간 이상을 할애하면 피곤해지고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행이나 극기로 한 시간 이상을 넘길 수도 있고, 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에는 묵상 요점 하나씩을 15분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두세 번 나누어 할 수도 있다.

- 기타 참고사항 : 평온한 시기에 결정한 기도 준비들은 기도 중에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분심 잡념이 들 때가 많은데, 이 순간을 잘 이용해야 한다. 즉, 분심
잡념이 들 때 예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가 있다. “예수님, 지금 이러
저러한 생각이 들고 기도도 안 되는데 도와주십시오”와 비슷한 기도로, 직접 말하듯이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

- 분심에 대한 대처 : 분심이 든다는 사실에 분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때에 마음이
흐트러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되고, 마음에도 걸리지 않게 되어 평화스럽게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분심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파도처럼 밀려오는 분심은 기도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기본적인 시련이다. 그렇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 나 자신
이 분심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단단히 결심하지만 결국 분심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닫고, 하느님께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2. 기도 >

-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 시간을 충분히 내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내는 문제는 사랑의 정도에 달려있다. 영신수련에서의 기도는 형식면에 있어서는
렉시오디비나(Lectio divina), 묵상 또는 관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내용면에 있어서는
준비기도, 두 개의 길잡이, 세 개의 요점과 담화로 이루어진다.

- 우선, 준비기도는 여러분이 어떤 마음 자세로 기도를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너무 빨리 기도에 들어가려고 서두르지 말고, 잠시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긴장을 풀고,
기도하기에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숨을 가다듬으면서
당신의 안팎에 현존에 계신 하느님을 향해 당신의 마음을 드높인다. 항상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갖추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마음으로 그분을
간절히 원하고 찾는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 이 준비기도에 대한 우리의 기본태도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나의 모든 의향과 행동과 노력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께 봉사함을 위하여서만
마련되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 이 준비기도를 하고 잠시 침묵 속에 하느님
만을 생각한다. 모든 분심들을 꼭 없애버리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분심이 들 때는 예수님이나 성모님께 또는 주보성인께 도움을 청한다. 이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것이고,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랑을 확산시키는 좋은
도구가 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도를 한다.

- 두 번째는 두 개의 길잡이이다. 첫 째 길잡이는 장소 묘사로, 구체적인 장소를 상상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구체적인 장소란 묵상 주제에 나오는 장소로 산, 들, 광야,
호숫가, 회당 등과 같은 곳을 말한다. 두 번째 길잡이는 구해야 할 은총을 청하는 것이다.
찾고 있는 은총을 구하는 것인데, 묵상 제목에 맞추어서 해도 도움이 된다.

- 세 번째는 세 개의 요점이다. 복음 줄거리 안에서 잡은 세 개의 요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동안 될 수 있는 대로 하느님께 관대하고도 친밀한 마음을 품는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요점을 따라가다가 어떤 구절에서 특별한 의미를 느끼거나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있으면 잠시 멈추고 기다린다. 그 말씀을 깊이 음미하고 가슴으로 느껴보면서 무엇이
떠오르는지 본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마음의 움직임에 가능한 한 오래도록 ‘푹
머물러’ 그것을 음미한다. 가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너무 바쁘게 기도를 하기 때문
이다. 기다리는 시간을 마련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심정들을 천천히
보며 느껴보도록 한다. 진정한 기도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속에서부터 우러나다는 것을 기억
하도록 한다.

- 네 번째는 담화이다. 기도가 끝날 때쯤이면 친구가 친구에게 말하듯이 이 기도 중에 느낀
것(당신이 받은 빛과 은총)에 대해 주님께 친근하게 말한다. 틀에 박힌 언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고, 평소 친구와 이야기할 때 흔히 사용하던 말로 하느님께 이야기하면
된다. 진실한 모습으로 솔직하고 자유롭게 떠오르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된다. 그리고 끝
기도로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 또는 영광송을 바치고 마치면 된다.

< 3. 묵상 성찰 >

- 기도가 끝난 후 기도 시간 동안 일어났던 영들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묵상성찰이다.
이것을 잘하기 위하여 때때로 기도할 때와는 다른 장소, 위치, 자세 등을 택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 묵상성찰은 15분 정도 하는데, 기도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진행되어 온 것, 즉
하느님과 나 사이에 주고받은 것들을 살피는 것이다. 묵상성찰한 것을 적어두면 영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 이 묵상성찰에서는 내가 했던 생각들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위안, 고독,
두려움, 화남, 권태, 분심, 특히 그러한 느낌이나 감정들이 얼마나 깊었는지 혹은 방해를
하였는지에 대한 것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다.

- 묵상성찰에서는 하느님이 나를 초대한 것과 내가 그 초대에 어떻게 응답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 분위기와 그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면서 시작과 중간과
끝 모두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기도한 것을 성찰하는 데 있어서
형식면에서는 기도 준비 때에 하기로 한 것에 맞추어 기도 주제, 장소, 자세, 시기, 길이에
대하여 제대로 되었는지를 살피고, 내용면에서는 성찰 질문(여덟 가지)들을 중심으로 반성
해 보면 도움이 된다. 성찰을 끝내면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기도시간에 소홀히 한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도록 한다.


< 4. 양심 성찰 >

( 1. 개요)

양심성찰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을 움직이고 끌어당기고 있는가를 체험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
죄 많은 우리의 심성을 어떻게 당신께로 이끄시는 지에 관한 것이다. 양심성찰은 일상의 삶과
기도와 관련을 맺어야 하고, 관상의 자세 즉, 수동적인 자세로 대상이, 이웃이, 하느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 되도록 해야 한다.

- 양심성찰을 하는 첫째 목적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죄를 통회하고,
그렇게 죄를 짓는 자신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시고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사랑의 관점
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둘째 목적은 자기 자신을 제 3자의 입장으로 객관화시켜서 볼 수 있는 눈을 키우는 것이다.
나를 개방시키는 작업으로 감정에 휩싸여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나를 보게 해 주는 것이다. 셋째 목적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실제적인 사건 안에서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만남이 이루어졌나를 점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넷째 목적은 영들을 식별하는
가운데서 양심성찰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식별력을 키워 하느님 뜻에 민감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신앙 성장의 체험이다.

( 2. 방법 )

이 양심성찰은 고요한 곳에서, 때에 따라서는 산책하면서도 할 수 있다. 대략 15분 정도면
되고, 횟수는 적어도 한 번,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점심때와 잠자기전, 두 번을 하면
좋다. 이 양심성찰은 하루 동안 생활한 것을 살펴보는 다섯 단계와 앞으로의 계획을 살피는
한 단계로 전체 여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각 단계별로는 내용, 성서구절, 태도, 기도로
구성된다. 1단계 : 조명을 구하는 기도, 2단계 : 반성하는 감사기도, 3단계 : 주님 안에서의
성찰, 4단계 : 회심(통회)으로의 초대, 5단계 : 미래로 향한 희망적 결단, 6단계 : 앞으로의
계획을 살핌

< 5. 렉시오 디비나, 묵상과 관상에 대하여 >

- 기도는 주위 환경, 성격, 기질 등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각자에게 알맞은 기도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기도의 삶은 기도시간의 길고 짧음보다는 규칙적인 기도의
리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욕구만으로는 충족되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지지도
않는 것이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의 우리의 태도는 ‘가장 귀한 것도 선뜻 내어주는
부요한 마음’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려는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기도를 하면서 사랑을 알게 되고 행하게 되고, 그러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정화 차원으로서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 성격, 약점,
문제점과 결함을 알게 되면서 나의 나약성을 인식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만 함을 느끼게
된다.

-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성숙이 일어나고 사랑이 성숙된다. 기도는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비우고 성령께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고 성화시키는 길이다.
결국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고, 자기 자신의 과거를 정화시키고 성화시키
면서, 우리 자신이 상대를 위하여 먹거리가 되고 밑거름이 되는 세 번째 단계의 사랑을
하게 된다.

- 사람마다 성향이나 기질들이 다르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한 기도를
하는 데에도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도의 삶에서 각자 자기에게
맞는 기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기도할 성서구절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은 곳이 나타나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 그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그리고 사랑을
느끼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묵상기도는 영혼의 세 가지 기능, 즉 기억과 지성과 의지를
활용하는 추론적인 기도이다. 이러한 세 가지 기능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우정의 체험이며 사랑의 대화로써 인격적
으로 만나는 시간이다. 관상기도는 묵상기도와 달리 기억, 지성, 의지력의 활동이 줄어
들고 그 대신 사랑, 기쁨, 흠숭과 같은 감성적인 면이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말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도 상상의 눈으로 바라보고 느끼는 것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이다.

- 렉시오 디비나, 묵상과 관상기도는 처음에는 능동적이 되지만, 느낌이 왔을 때부터는
수동적이고 수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다. 다른 어느 것보다도 ‘하느님이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버려두는 것’일수록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기도가 된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생각이 점점 없어지고 대상이 내 안으로 점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될수록 점점 생각하는 것이 없어지면서 대상들의 감성적인 면들이 더 잘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기도의 참 목적이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7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6.13


[ 주님이 쓰시겠답니다 ]

- 지은이 : 손희송, 펴낸곳 : 생활성서/ 149p
- 모세에게 배우는 성숙한 신앙 (신앙 성장의 6가지 비결)
- 지은이 프로필 : 1986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교의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사제 서품. 1992-1994년 용산성당 주임신부,
1996년 가톨릭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등,
저서로 '열려라 7성사', '신앙인' 등 다수 집필.

[ 표지의 글에서 ]

- 모세의 삶을 통해 깨닫는 신앙 성장의 6가지 비결

1. 하느님의 계획 속에는 고통과 실패도 포함된다.
2.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라
3.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을 기억하라
4.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으라
5. 하느님의 계명을 기쁘게 받아들여라
6. ‘작은 모세’로 살아라


[ 책머리에 ]

- 신약성서에는 제 소임을 다한 나귀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
당하시려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들어간 나귀 이야기이다. “맞은편 마을로
가시오. 그러면 곧 암나귀와 그 곁의 새끼 나귀가 매어 있는 것이 보일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시오. 혹시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이 쓰시겠답니다.’하시오. 그러면
풀어 줄 것입니다”(마태 21,2-3).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끌려 온 나귀는 군중으로
부터 열렬히 환영받으시는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이 나귀는
주님의 의도대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수행한 충직한 나귀였다.

- 하느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등에 태워 모시고 간
나귀에 비유될 수 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일하는 모든 봉사자들, 특히 지도의 임무를
맡은 이들이 묵묵히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가는 충직한 나귀가 되었으면 좋겠다.
청년들을 비롯해서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처럼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생활하기를 바란다.


[ 글을 시작하며 : 하느님의 선택 ]


- 하느님은 특정 인물을 당신의 사람으로 선택하신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만 보더라도,
하느님은 아브라함에 이어 그의 아들 이사악을, 쌍둥이 형제 에사오와 야곱중에서
야곱을,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요셉을 특별히 선택하신다. 하느님의 선택을 흔히
흑백 논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선택된 사람은 구원받고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은 멸망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느님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선택이지, 어느 누구를 멸망시키기 위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하나를 취하시고 다른 하나는 버리시려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 하느님의 선택은 배타적이 아니라 표본적이다. 달리 말해, 하느님은 당신 구원 계획을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알리기 위해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선택하셔서 표본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한 개인을 선택한 것은 그를 엘리트로 만들어 특별대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신앙과 행복의 길로 인도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런 점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하신 말씀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즉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창세 12,3). 하느님의 선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파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기에 선택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와 은총 속에 있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특별한 과제도
안고 있다.

- 모세를 선택하신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 가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 제1장. 하느님의 계획 속에는 고통과 실패도 포함된다 ]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 여정에서 충실하게 하느님의 일꾼 역할을 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파라오에게 전하고, 그분을 대신해서 백성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가르쳤다. 그런데 모세가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까지는 오랜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하느님은 오래 전에 모세를 선택하시고, 시련 속에서 그를 단련시켜 당신의
일꾼이 되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 고통의 상황 >


- 모세가 태어난 시기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모세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의
나라인 이집트 땅에서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의 출생과 성장을 통해서 보이지 않게 해방의 싹이 트고 자라나도록 보살피셨다.

- 흉년의 재앙에서 이집트를 구한 요셉의 치적을 모르는 왕이 들어섰는데, 그는 큰
민족이 된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새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안보의 위험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방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기도 하고, 해산한 사내아이들의 살인 교사, 히브리인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파라오의 이러한 행동에는 억압과 죽음의 세력이
지닌 속성이 잘 드러나 있다. 모세는 이러한 살벌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 고통 속에 숨겨진 해방의 싹 >

-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과 절망 속에서 고통을 당하였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해방의 싹이 움트도록 보살피셨다. 하느님은 장차 당신의 해방 계획을 실현할
모세가 태어나고 잘 성장하도록 숨어서 이끄신 것이다.

-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항상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하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사내아이들을 죽이지 않은 산파들,
파라오의 명령에 굴하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며 아이를 키운 모세의 어머니,
측은지심에서 왕골상자에 있던 아기를 구해 준 이집트 공주, 무슨 일이 일어날까
촉각을 세우고 모든 상황을 예의 주시했던 모세의 누이 등, 이들 모두는 하느님의
협조자들이다.

-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펼치실 때 항상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하신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실 때도 마리아의 협력을 원하셨고, 이에 마리아는
“예라고 응답하였던 것이다.

< 실패를 통한 깨달음 >

- 모세는 어른이 된 다음 궁궐 밖에 나갔다가 자기 동족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거기서 동족 히브리인을 때리는 이집트인을 쳐 죽여 모래 속에 묻어 버리게 된다.
모세는 얻어맞고 있는 동족에 대한 연민과 억압받는 약자를 향한 정의감에 불타
주먹을 휘두르고 폭력을 사용했다. 모세가 저지른 살인 사건은 이미 널리 퍼졌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고 작정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모세는
이집트를 벗어나 멀리 도말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진 미디안
땅으로 피신해 갔다.

- 모세는 억압받는 동족들 편을 들고자 숭고한 결단과 용맹한 행동을 감행하였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 이집트인을 때려죽임으로써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불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높이 살 만하지만 격정에
휘말려 그릇된 방식을 택한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었다.

- 하느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모세가 저지른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살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 한다면서 사실은 자신의 뜻과
고집을 내세우지는 않았는지?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과 영광을
위하지는 않았는지? 실상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주제를 모르고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양 너무 오만하지는 않았는지?


[ 제2장.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라 ]


- 이집트에서 멀리 미디안 땅으로 피해 간 모세는 과거의 화려한 삶과는 단절된 채,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보살피는 소시민 생활을 영위한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초라한 처지에 있는 모세를 부르신다. 권세 있던 시절의 모세를 내치시고 미천한
처지에 있는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 이제 시련을 겪고 성숙해진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련 중에 있는 자신의 동족을 구하기 위해 분명히 나서게 된다.

< 부족한 사람을 쓰시는 하느님 >

- 미디안 땅에 온 후 목자가 되어 세상에서 잊혀진 채로 살던 모세는 어느 날 양 떼를
이끌고 광야 끝으로 가다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호렙’은
히브리어로 ‘황량한 곳, 불모지, 내버려진 땅’을 의미하는데, 이는 바로 모세의 초라한
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광야나 가시나무처럼 자신을 쓸모없는
이로 여기게 된, 내적으로 황폐해진 모세를 부르신다. 그분은 세상과 동족들로부터
철저히 잊혀진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너는 결코 잊혀진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 모세가 겪은 실패와 쓰라림은 세상과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과 모세 자신의 한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쓴 약이었으며, 모세를 당신 일꾼으로 쓰기 위해 단련시킨 내밀한
준비과정이었다.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신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모세의 물음에 하느님은 ‘야훼’라고 알려 주시기
전에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신다.

-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리고, 그들과 함께 파라오에게 가서 내보내 줄 것을 요구하라고
명하신다. 하느님은 모세가 이집트에서의 실패와 좌절 체험 그리고 광야에서의 40년간
양치기 생활을 통해 겸손 된 자세를 배우고, 당신의 소명을 받을 큰 그릇이 되도록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는 부정적인 체험마저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분의 빛 안에서는 고통과 실패마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구원에 보탬이 되도록 변화한다. 이집트로 돌아온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형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의 원로들에게 가서 하느님이 일러 주신 모든 말씀을 들려
주고 그 증거들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를 믿었고, 그가 전하고 증거한
하느님을 믿었다.

< 난관을 이겨 낼 힘을 주시는 하느님 >

-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께서 명하신대로 파라오에게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은커녕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모세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파라오와의 면담 후 모세는 몹시 위축되었다. 하느님 말씀에 따른 결과, 백성이 도움을
받기는커녕 한층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개입이 고난 받는 백성에게 구원이
아닌 더 큰 불행을 가져다준 것처럼 되어 버렸다. 모세는 이런 사태에 대해 이제는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서 있는 그대로 사정을 아뢴다. “주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파라오에게 가서 당신
이름으로 말한 뒤로, 그가 이 백성을 괴롭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무지 구해주지 않습니다”

- 모세의 처신을 통해 우리는 신앙인의 바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즉 비록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도망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서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씀
드리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태도라 하겠다. 사람과 사람이 진정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정직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자신의 처지를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듣고 도와주신다.

- 하느님은 당신이 소명을 맡기신 이들을 보살피시지만, 그렇다고 고난과 어려움을 없애
주시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세의 재소명에서 보듯이 필요한 때에 다시 힘과 용기를 주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에서 모든 난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지 말고, 다만
그것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다.


[ 제3장.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을 기억하라 ]

- 파라오는 모세가 전한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 그러자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이
차례로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파라오와 모세의 줄다리기가 진행된다. 이 대적(對敵)
과정은 힘겹고 위험스러웠지만, 모세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분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종살이의 땅 이집트를 벗어나게 된다.

< 하느님의 참된 일꾼 >

- 파라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움켜잡고 그것을 놓지 않으려 한다. 사실
거의 모든 권력가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비록 겉으로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대화를
하며, 심지어 뉘우치는 행동을 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등 종교적 성격을 띤 몸짓
마저 서슴없이 하지만, 이 모든 말과 행동은 결국 자신의 지위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파라오의 모습은 우리 각자 안에도 있다. 아쉽고 급할
때에는 하느님을 찾다가 위기를 벗어나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싶으면 금방 하느님을 등지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네 모습은 재앙이 오면 양보했다가
끝나면 양보를 철회하던 파라오와 닮았다 하겠다.

- 젊은 시절 모세는 자신의 능력만 믿고 주먹과 폭력으로 일을 단숨에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면서 대화와 지칠 줄 모르는 인내로 일을 처리해
나간다. 모세는 도무지 승복을 안 하려는 파라오를 상대로 끈질기게 협상을 시도한다.
하느님의 능력은 이렇게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하고,
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서두르지 않고 인내로 일을 하도록 이끄신다. 바로 이런 점들이
하느님의 참된 일꾼을 식별하는 기준이라 하겠다.

< 하느님의 구원 업적 >


- 하느님은 당신이 베푸신 해방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파스카 축제를 지내라고 명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으로 이집트 땅의 모든 맡아들을 치실 때, 모세에게
미리 일러 주신대로 집의 문설주에 발라 놓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죽이지 않은 채 그냥 지나가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는 ‘지나가다.’
라는 뜻의 ‘파스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우리말에서도 ‘지나감’을 뜻하는 ‘과월’
또는 ‘유월’이라는 말을 써서 과월절, 유월절로 번역했다. 출애굽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파스카 축제를 지내면서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감사했다.

- 이스라엘 백성이 파스카 축제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인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미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 사건, 즉 ‘신약의
출애굽’ 사건을 기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죽으셨지만, 죽음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로 ‘건너가셨다.’ 이렇듯 미사에도 파스카 축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중에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죄의 속박과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은 죄와 죽음이 완전히 극복되는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제4장.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으라 ]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강한 손길 덕분에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약속의 땅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고 험했다. 그 길 곳곳에는 여러 가지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들 앞에서 무력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 광야 : 하느님을 깨닫기 위한 단련장 >

-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건져 주셨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멀리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블레셋 땅으로 기는 길’이라고 일컫는 도로는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짧고
편한 직통길이다.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이 길로 걸으면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4~5일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 이집트에서는 가나안 쪽에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일련의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길로 간다면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파라오의 군대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직통길이 아니라 멀리 광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하느님의 또 다른 뜻이 숨어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건져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셨다.

-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닥치는 여러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면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시고, 이를 통해 당신께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다지려고 하신 것이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열 달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 기간이 요구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 광야에서
방랑 생활을 한 것은 바로 새로운 백성으로 태어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 광야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손길 >

- 해방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파라오 군대의 추격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이스라엘은 극적으로 구원된다. 갈대바다에서 극적인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수르
광야로 진을 옮겼다. 그들은 사흘 길을 가면서 물을 만나지 못해 갈증으로 걱정과 초조함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마라에 이르자 물을 발견하였지만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하여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온 지
한 달째 되는 날 씬 광야에 이른다. 거기서 그들은 먹거리가 떨어지는 위기를 맞아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녁에는 먹을 고기(메추라기)를
주고 아침에는 빵(만나)을 주겠다고 이르신다. 하느님은 자연 현상을 이용하셔서 당신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참고 : 메추라기는 해마다 9, 10월이 되면 북유럽과 스칸디나비아의 서식지에서 따뜻한
아프리카로 날아와서 겨울을 나고, 5, 6월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사이 대양을 가로
질러 날아오느라 지친 메추라기들이 잠시 쉬기 위해 시나이 반도에 내려앉으면 사람들이
힘 안 들이고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빵인 만나는, 시나이 반도의 건조 지대에는 위성류
나무가 많은데, 이 나무에 1밀리 정도 크기의 깍지벌레가 기생하여 살고 있다. 이 벌레는
위성류 나무의 수액을 빨아 일부는 애벌레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 위에 방울 모양으로
뱉어 놓는다. 이 분비물이 건조한 기후 탓에 물기가 빠지면 금방 결정체가 되어 땅에 떨어
지는데, 매우 달고 쫀득쫀득하여 먹을 수 있다.)

- 이스라엘 백성은 씬 광야를 떠나 진지를 옮겨 가면서 전진하다가 르비딤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마실 물이 없어 목마름의 위기를 겪는다. 상황은 한층 격렬해졌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원로들 앞에서 지팡이로 바위로 치라고 하시자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와 목마름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은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며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뚜렷하게
보여 주셨다.

- 광야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턱없이 부족한 척박한 불모지로서 끊임없이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체험하고,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며 그분의 자비를 갈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그래서 광야는 위험한 장소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 위해서는 광야를 거쳐야 했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악마는 세 가지 유혹, 즉
빵으로만 살려는 물욕,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는 명예욕, 세상의 권세를 잡으려는 권력
욕을 도구로 예수님을 시험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만을 섬기는
강한 믿음으로 유혹을 물리쳤다.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 고비가 지나니 또 다른 위기가 닥쳐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르비딤에서 아멜렉족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아말렉족은 광야 일대의 샘터와
오아시스, 목초지 등을 장악하고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들은 광야로 들어 온 낯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패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공격해 왔다. 여호수아가 싸우러 나가자
모세는 아론과 후르와 함께 언덕 위에 올라가 아말렉과 싸우는 이스라엘 장정들을 위해
기도한다. 모세가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모세가
팔을 든 태도는 청원 기도의 몸짓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투의 승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렸다는 뜻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중재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 하느님의 일을 다른 이와 나누는 겸손 >


- 모세의 장인이자 미디안의 사제인 이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와 있던 모세의 가족을 데리고 모세를 만나러 온다. 모세는 장인을 기쁘게
맞아 인사하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위대한 업적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하느님의 능력을 강하게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벅찬 감동을 감출 수 없다. 이드로는
모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이제 나는 주님께서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다는 것을
알았네”라고 고백한다.

- 이드로를 만난 시기에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백성들을 재판하느라 애쓴다.
이드로가 이를 지켜보고는, 이런 제도는 모세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두 가지 충고를 해준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켜야 할 규정을 알려주어
그들이 걸어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라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일의 성격과
중요성에 따라 사안을 나누어 그 일을 맡아 재판할 사람을 선출하여 그에게 권한을 부여
하라는 제안이다.

- 이드로가 제안한 재판 제도는 계층구조를 지닌 관료제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왕국의
정치제도는 왕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형의 관료제였다. 이스라엘 재판제도도 겉으로는
이집트의 관료제와 비슷한, 모세를 정점으로 한 계층적 관료제이다. 그러나 이집트와 다른
점은 모세보다 하느님을 최고, 절대 권위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재판관으로 내세운다.

-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나눠서 함께해 나가라는 이드로의
충고는 모세뿐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지도자,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부분
이다. 열성적인 종교지도자들은 흔히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이기 전의 모세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잦다. 그들은 모든 일에 간여하고, 하나하나 손수 챙기고, 건강을 해쳐 가면서까지
열정적으로 일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는 책임감이 지나쳐서 은연중에 다른 사람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경향을 보일 때 하느님은
위험을 깨우쳐 주시고자 예언자를 보내신다. 모세에게는 장인 이드로가 바로 그 예언자였다.
다행히 모세는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인 덕분에 하느님의 일을 다른
이와 나누어 할 줄 아는 겸손한 지도자가 되었다.


[ 제5장. 하느님의 계명을 기쁘게 받아 들여라 ]


-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갈대바다에서, 광야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래서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려 하느님을 한층 더 분명히 알고 깨닫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 완전히 사라졌던 하느님께 대한 의식이 깨이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사람도 성년이 되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
듯이,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 정도로 성년이 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어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신다. 이때 모세가 이 계약을 중개하는 역할을 한다.

< 하느님과 맺은 약속 >

- 하느님은 비천한 종살이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주도적으로 은혜를 베푸
셔서 그들을 구해 내셨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들과
대화의 관계, 즉 당신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주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당신이 주도적 구원
행위에 대해 응답하는 관계를 이루시려고 한다. 여기서 응답이란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그분의 뜻인 계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신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생활 규명과 십계명은 출애굽기(탈출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수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삶의 한계 상황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그분을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삶의 한계 상황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인 십계명을 실천해감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숙한 신앙인, 참된 신앙인은 고통 속에서 체험하고 알게 된 하느님을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도 잊지 않고, 일상의 삶 안에서 그분을 고백하고 그분 뜻에 따라 살고 자 노력하는
사람이 사람이라 하겠다. 이런 성숙하고 참된 신앙인 공동체로 자라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게 된 것이다. 십계명 준수는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이 주신 십계명을 익히고 성심껏 지키도록 누누이 당부했다.

< 십계명 : 자유와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 >

(제1 계명 : 너에게는 나 밖에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


-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Baal) 신과
대적해야만 한다. 바알은 가나안의 농경 문화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풍요의 신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유혹했다. 바알은 왕과 강한 자들의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짜여진 피라미드형의 계급사회를 옹호한다. 이 사회 체제는 다름아닌
이집트의 파라오 체제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바알 신앙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자유를
버리고, 사실상 이집트에서 겪었던 종살이로 되돌아 가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극성스러울 정도로 경고를 한 것이다.

- 오늘날 바알 신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적지 않다.
물질과 재산, 이데올로기, 성(性), 권력, 과학, 기술, 명예, 지식, 육체적 아름다움, 건강,
쾌락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상대적인
가치들이 절대화되면, 암암리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끊임없이 경쟁으로 몰아세우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종처럼 살아가기를 강요한다.

- 신앙이 없는 것보다도 잘못된 신앙, 편협한 신앙, 광신이 훨씬 더 비참한 사태를 불러
일으킨다. 오늘날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장승을 자르고 불상을 파괴하며 절에 불을 지르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서슴치 않으며, 스스로 정통 신앙을 수호한다는 자부심마저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제2 계명 :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된다./20,7)

- 이는 불필요하거나 거짓된 맹세, 신성 모독, 마술, 저주 등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 야훼는 곧 그분의 현존 또는 실재와 동일시 되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자기 편의대로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행위는 바로 그분 자신을 욕되게
하는 짓으로 여겼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그분의 이름인 ‘야훼’를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부터는 성서를 읽다가 ‘야훼’라는 이름이 나오면 ‘아도나이’
(주님)로 바꾸어 말하는 관습이 생겼다. 단, 대사제가 1년에 한번, 곧 속죄의 날 지성소에
들어가서 작은 소리로 ‘야훼’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 메모자 주 : 거룩한 네 글자(YHWH)로 표현된 하느님 이름을 전례에서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한 교황청 지침에 따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야훼’대신 ‘주님’이란 표현을 쓰기로
결정(2008.10.17.)하였다.

(제3 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20.8)

-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에는 쉬라는 계명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
가축, 떠돌이 식객에게 까지 적용된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종과 가축까지 쉬게 한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안식일의 근거는 하느님 창조사업에 두고 있다. 하느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레째 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이레째 날에는 쉬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달이,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의 근거로 출애굽 사건을 제시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희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
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라. 그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5, 15) 안식일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이며 은총의 표지라
하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안식일은 인간을 속박하는 굴레로 변해 버렸다.

- 유다인들의 생활 전반에 대한 규정을 적어 놓은 ‘미쉬나(Mishina)’를 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이 무려 39가지나 된다. 여기에는 밭갈기, 파종하기, 추수하기, 불 끄기,
물건 나르기 등이 속했다.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병자를 고쳐 주어서도 안
되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자주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을 어긴
다고 비난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의 목적 회복시키고자 하신
것이다.

- 초대 그리스도교는 안식일 대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을 ‘주님의 날’로 삼고
거룩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해방과 구원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꺽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중한
병이 들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거나 불가피한 일로 참례하지 못할 경우, 기도나 선행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도 있다.

(제4 계명 :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20,12)

- 자식은 부모로부터 생명과 삶의 지혜를 전달받는다. 그런 면에서, 부모는 자식의 인생에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그들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하고 높이
존중하며, 인격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하라는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여기서 ‘오래 산다’는 말은
단순히 수명의 연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말에는 풍요롭고 충만하게 살리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나아가 부모를 잘 섬겨 하느님의 뜻과 어우러진 사회에는 풍요로운 축복이
내리리라는 약속이다.

(제5 계명 : 살인해서는 안된다./20,13)

-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그의 존재 자체를 영원히
없애는 무서운 죄악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생명이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느님의
소유임을 믿기 때문에 남의 목숨을 해치는 행위는 물론, 자살도 일체 금한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일체의 행위도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대한 잘못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
(사목헌장 27항)라고 말한다.

-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살 희망이나 살아 갈 생계 수단을 빼앗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도 간접 살인에 속하며, 음주 운전 등도 자신의 생명은 물론 다른 이의
생명마저 위협하기에 제5 계명에 어긋난다. 또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지 물리적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거나 위협하지 말라는 뜻만이 아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차가운 시선 하나로도 얼마든지 한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겨서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제6 계명 : 간음해서는 안된다./20.14)


- 여섯째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기반인 혼인 관계를 보호하는데 그 본래의 목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남자가 남의 아내나 약혼녀와 성 관계를 맺으면 남녀가 모두 사형에 처해
졌다. 하지만 아직 혼인하지 않은 처녀를 범하면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거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반면 남편 있는 여자는 기혼, 미혼에 관계없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무조건 간음한 여인으로 단죄받았다. 아마 이러한 차별은 이스라엘에서 아내를 남편의 소유
물로 여겼던 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여섯째 계명은 남자에게 그 책임을
지워 타인의 가정을 깨뜨리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 하느님의 선물인 성은 하느님이 주신 본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목적이
부부애의 증진과 자녀 출산에 있다고 가르친다. 즉 인간의 성은 부부간의 친밀한 사랑을 표현
하고 결속을 다지는 아름다운 선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의
샘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인격과 생명의 차원이 제외된 채 성을 단지 쾌락의
도구나 지배 또는 이익의 수단으로 오용한다면 제6 계명에 어긋난다 하겠다. 성은 분명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크나 큰 선물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를 그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할 때
비로소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제7 계명 : 도둑질해서는 안된다./20,15)

- 한 사람이 지닌 최소한의 소유물은 그 사람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소유물의 박탈은 곧 생존과 자유를 위협하는 행위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평등과 자유를
옹호하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서는 도둑질을 엄격히 금했던 것이다. 제 7계명에는
형법에 규정된 절도죄 외에 세금 포탈, 부정 축제나 공용시설의 무단 사용(私用), 고리대금,
과소비와 낭비, 불공정 거래도 속한다. 자기 손으로 직접 남의 재물을 훔치지 않았더라도
지위나 지식을 이용해서 남에게 물질적인 피해를 입혀 생존권을 위협했다면, 이는 제7 계명에
위배되는 것이다.

(제8 계명 :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20,16)


- 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우리 옛말처럼, 거짓 증언은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 왕정 제도가 도입되기 전, 고대 이스라엘에서 대부분의 송사는 마을
주민들이 성문 앞에 모여 해결했다. 이때 유·무죄를 가리고 죄지은 사람을 죽이려면 둘이나
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했다. 증인으로 나선 사람은 진실한 증언을 해서 사람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지만, 거짓 증언을 해서 동족을 해칠 수도 있었다.

- 오늘날 제8 계명은 비단 법정에서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웃을 해치는 일체의
거짓말을 금하고 있다. 직접적인 거짓말은 물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또 자기 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히지 않고 침묵하는 것도 거짓말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웃에
관해 그릇된 소문을 퍼뜨리거나 험담, 중상 모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서로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서 진실을 지키고 거짓을 피하라는 것이 여덟째 계명의 핵심이다.

(제9·10 계명 :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20,17)


- 이 계명에서 ‘집’은 이스라엘 남자가 자유인으로 생활하기에 필요한 일체의 소유물을
가르킨다. 여기에는 토지와 같은 부동산은 물론, 아내, 종, 가축 등이 포함되었다. 아내가
여기에 속한 이유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아내는 가장의 소유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개신교
에서는 출애굽기의 분류에 따라 아내와 재물을 한 계명으로 보지만, 가톨릭에서는 신명기의
분류에 따라 둘을 구분(아내와 재물)하여 별개의 계명으로 여기고 있다.

- 인간은 배고플 때 음식을 원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필요로 하며, 피곤할 때 편안하게
머무를 곳을 찾는다. 의식주를 충족하려는 욕망 자체는 죄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욕망들이 어느 한도를
넘거나, 타인의 것을 부당하게 탐하고 집착하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남의 배우자를
탐낸다면 이는 한 가정을 파괴할 뿐 아이라, 나아가 사회 전체에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 십계명 요약 -

-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그들을 구속하고 옭아매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얻은 자유와
생명을 유지하도록, 그들에게 공동체의 규범으로 주신 것이다. 제1,2 계명은 인간이
섬겨야 할 대상은 오직 하느님 한 분임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인간끼리 억압하고 억압
당하는 종속 관계를 방지한다. 제3 계명은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는 것을
방지한다. 제4 계명은 생명의 전달자인 부모를 공경하고, 그 부모가 늙고 병들더라도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하라는 내용이다. 또한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들어 있다. 제5 계명부터 제10 계명까지는 인간 스스로 서로의 목숨, 가정,
재산을 보호하고 서로에게 정직하게 대함으로써, 각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한
울타리인 것이다.

<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신뢰 >

-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원로 칠십 명을 시나이 산으로 데려오라
하시고는 당신이 주신 십계명과 다른 법령을 계약 조문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체결하신다. 모세는 홀로 시나이 산에 남아 사십 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성소(聖所)와
그 안에서 봉사할 사제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지시받는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써주신 두
개의 증언판을 받아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들은 사십 일간 돌아오지
않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을 졸라서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 공경하고 있었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지켜야 했던 십계명
가운데 첫 계명을 어기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자비와 은총을 앞세우시는 하느님으로
인해 깨진 계약이 다시 체결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용서를 거듭하는 부모의 사랑’에
비유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참된 사랑은 용서가 특징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자신이
헌신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등을 돌리면, 절절하던 그의 사랑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복수로
변하기 쉽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시지만,
결국 그들을 다시 품에 안으신다. 용서의 크기와 사랑의 크기는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 제6장. ‘작은 모세’로 살아라 ]

-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 여정을 인도한 모세는 하느님의 일꾼
으로서 그분과 그분 백성의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해야 했다. 이런 중개자 모세는 ‘때가
찼을 때’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구원의 중개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예시했다. 그리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 중개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 계약의 중개자 모세 >

- 이스라엘이 종살이의 땅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거치는 사이 시나이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중개자로
세워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모세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서 어떤
공동체나 백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려 온 일상의 삶을 포기하고, 이에 따르는
수많은 어려움을 각오해야만 한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은혜로 그분과 계약을 맺게 되었지만, 모세가 시나이 산에
머무르는 사십 일을 견디지 못하고 우상 숭배를 하는 큰 잘못을 저지른다. 이에 모세는 백성
들을 추궁하고 야단친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이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죄지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운명까지 걸어가면서 하느님께 끈질기게 간청하여 용서를 받아
낸다. 백성의 참된 지도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백성이 못난 짓을 하더라도 하느님께
그들을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시기를 거듭 간청해야 한다.

<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 예수 그리스도 >

-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은 모세와 비숫한 길을 가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몸소 당신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 주셨다. 즉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들린 사람을 고치며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어 약하고 억눌리고 굶주린
백성을 돌보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는 모든 억압과 고통이 사라진 곳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또한 모세가 하느님 백성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전해 주었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셨다.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

-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에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제자들에게 다시 보내셨다.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금송아지를 숭배하여 벌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셨듯이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
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대들에게 평화!”하고 말씀을 건내신다. 이로써 하느님이 당신을
배반한 백성을 벌하지 않으시고 다시 용서해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을 만나고
나서, 또 그분이 선사하는 평화와 용서를 체험하고 나서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려움 없이 구세주로 선포하게 된다.

-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된 이들이 함께 모여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다. 신도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들을 팔아 각자 필요한 만큼
나눔을 하였으며,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음식을
함께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을 통해,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고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공동체, 또한 이런 의미에서 십계명의 정신을 그대로 실현하는 공동체를
보게 된다. 제자들과 모든 백성을 위해 고통당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 작은 모세 >

-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는 그 자체로 완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과정중에 있는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도 잘못과 악이
종종 발견된다. 따라서 교회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 모세를 본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작은 모세’가 많이
필요하다 하겠다.

- 비록 작은 모세로 사는 길이 험하고 힘들지만, 거기서 얻는 보람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모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성장하여 아멜렉과 싸움에 용감히 나섰던
여호수아와 장정들을 보면서 아마도 가슴 뿌듯하였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은 모세’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이들, 실의와 좌절 속에서 헤매다가 하느님 말씀을 통해
희망과 기쁨을 찾고 활력 있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 ‘작은 모세’ 역시 모세처럼 하느님 계획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단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했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또한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모세 역시
그런 운명을 겪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이
너무 무겁고 크게 느껴질 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길이 일찍이 누군가 갔던 길
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 모세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40년 간 광야를 방랑하면서
그처럼 고대하던 약속의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죽었다. 성서에는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으나 뭔가 다른 뜻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무릇 하느님의 일꾼은 일꾼일 뿐 주인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일의 결과에 집착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모름지기 하느님의 일꾼, 특히 그분 말씀의 봉사자는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씨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씨를 뿌리는 것이지 거두는 것이 아니다. 그 씨가 싹트고 꽃피며 열매 맺는 시기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기에, 묵묵히 내가 맡은 일을 하고서 결과는 오로지 하느님께 맡기는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 글을 맺으며 : 사제와 버스기사 ]


- 오늘날 사제들은 그 옛날 모세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그분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다. 신자들은 이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많은 요청을 한다.
기도하고 영성이 깊은 사제, 겸손하고 자상한 사제, 헌신적이고 봉사를 추구하는 자세,
폭넓은 지식과 안목을 갖춘 사제, 검소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는 사제 등이다. 이런
바람을 요약한다면,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라 하겠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를 흔히 ‘착한
목자’에 비유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당신을 착한 목자에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예수님과는 다른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 목자라는 직업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목자 외에 사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비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종중 하나인 버스 기사를
예를 삼아 현대에 요구되는 사제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버스는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그러므로 /버스 기사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골라 태울 수 없다. 버스를 타려는 사람 모두를 가리지 말고 버스에 태워야
한다. /버스에는 노약자를 위한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다. 친절한 버스 기사는 노약자들이
자리를 잡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으면,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해 자리를 마련해 준다./ 버스
기사는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편한 대로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노선을 충실히
따라가야 하고, 노선에 따라 승객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전해야 한다. 짜증을
내거나 난폭 운전을 해서는 안된다./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지켜 가며 정류장마다 정차해서
기다리던 사람들을 태우고 간다. 시간에 쫓긴다고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거나,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 오는 사람이 있는데도 못 본 척하고 출발해 버린다면 좋은 기사가 아니다. / 버스
기사가 출발하기 전에 버스에 이상은 없는지 점검하고 기름을 충분히 넣어 두는 것은 기본적
준비에 속한다. 중간에 고장이 나거나 기름이라도 떨어져서 서버린다면 곤란해진다./ 버스
기사는 운전석에 홀로 앉아 있다. 새벽부터 나와 일을 하다보면 오후나 밤 시간에는 피로가
쌓여 졸음이 올 수도 있다.

- 교회를 버스에 견주어 보면, 기사는 사제이고 승객은 신자들이다. 물론 버스의 종점은
하느님 나라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리고 이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한가족이다. 이 버스에서는 노약자석이 뮤명무실하지 않다. 기사인 사제는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길이 막혀도 인내를 갖고 종점을 향해 간다. 또한
승객인 신자들은 버스 기사가 운전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기에 버스 기사는 때때로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미 좋은 기사의 본을 보여 주신 운전 기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게 자신을 인도해 주고 계심을 믿기에 위로와 힘을 얻는다.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8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6.20.




[ 하늘에서 내려온빵 ]

- 지은이 : 최인호, 펴낸곳 : 샘터사/ 201p
- 최인호의 묵상이야기
- 지은이 프로필 :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벽구멍으로’가 입선되면서 문단에 나왔고 1967년 다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견습환자’가 당선되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72년 ‘타인의 방’
으로 현대문학상을 1982년 ‘깊고 푸른 밤’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펴낸
책으로는 ‘타인의 방’, ‘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 ’지구인‘, ’길없는 길‘,
’상도‘ 등이 있다. (메모자 주 : 2013년 9월 선종)

[ 표지의 글에서 ]

당신은 내 안에 함께 계십니다.
당신은 나처럼 미소 짓고 눈물을 흘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길을 걷습니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듯
당신은 내 안에서 내 마음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내 안에 함께 계십니다.
당신은 나처럼 미소 짓고 눈물 흘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길을 걷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큰 씨앗 ]

-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3년간 가톨릭주보에 일주일마다
연재하였던 ‘말씀의 이삭’란에 실린 내용들이다.

-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면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만큼 큰 나무가 된다.” 주님의 말씀처럼 말씀의 이삭들을 겨자
씨들처럼 작았지만 그 작은 낟알하나로도 수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성찬이 되는 기적을
느꼈으며 그래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보잘 것 없는 이 글들을
매주 열심히 읽어준 내 이웃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작은 묵상집이 언젠가는 주님께
바칠 성전의 벽돌 한 장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 이 책에 실린 ‘최인호의 묵상이야기’ 총 80편중 60편만을 요약 발췌하여 메모함.


[ 1장. 하늘에서 내려온 빵 ]

배고픈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하듯 나처럼 영혼의 영양실조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참된 양식인 하늘에서 내려온 빵, 주님의 살인 그
밀떡을 남보다 더 많이 먹어도 괜찮을 거야.

< 별 >
- 하늘에는 수억 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사람들은 그 별들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별만을 보고 그 별만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별들은 모두 떠돌이 별이거나
타버리는 별똥별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별들의 중심이 되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붙박이별은 오직 ‘그분의 별’ 하나뿐이다. 우리도 그 별만을 보고 별빛만의 인도를 받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간다면 언젠가는 마리아의 품안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별은 오늘도 밤하늘에 반짝이며 홀로 떠 있다.

< 칭찬 >
- ‘칭찬’, 나는 어머니가 생각하셨던 것처럼 자라나는 아이에게 ‘칭찬’이야말로 최고의
명약이라고 생각한다.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밝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칭찬은 부모에게도 좋은 것이니 칭찬을 해줄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부모의
마음도 자연 활짝 열리게 된다.

< 열려라 참깨 >
-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둑’이란 책에서 가난한 나무꾼 알리바바는 도둑들이 보물을
숨겨 놓은 동굴을 발견하고 ‘열려라 참깨’라고 주문을 외우자 동굴의 문이 스르르
열린다. ... 우리가 불구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을 향한 마음이 문이 열려야 한다. 우리가
똑바로 듣고 똑바로 보고 똑바로 말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온갖 보물로
가득 찬 주님의 동굴 앞에서 무엇보다 마음의 문부터 열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하느님,
내 마음의 문을 열어주소서. 그리하여 있는 사물을 있는 사물대로 볼 수 있고,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볼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아베마리아 >
- 예수를 낳으신 분이 하늘 아버지이지만 키우신 분은 성모님이다. 이 죄 많은 내가
성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어떤 죄를 짓더라도 나를 키우신 어머니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처럼 성모님도 나를 용서해 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베마리아, 나를 품안에 키워
주소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이제와 다시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어주소서.

< 하늘에서 내려온 빵 >
- 배고픈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하듯 나처럼 영혼의 영양실조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참된 양식인 하늘에서 내려온 빵, 주님의 살인 그
밀떡을 남보다 더 많이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먹는 주님의 살로써 내가 내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 나코 복음 >
- 마태오 복음 첫 장에는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온통 낳고, 낳고, 낳고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태
복음을 ‘나코 복음’, 마르코 복음을 ‘말코 복음’이라고 불렀다. 최근에 들어서야 그
낳고 낳고가 예수 탄생까지의 족보를 기록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성으로서의 예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사십이대 만에 대가 끊겼지만 신성으로서의
예수는 수억의 자식을 낳았다. 그분의 힘을 입어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우리들은
예수의 후예들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나코 복음’
즉 마태오 복음의 가장 마지막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하신 신성의 약속이다.

< 선물 >
- 아이들은 우리에게 있어 손님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드님들과 따님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하느님의 시민으로 양육해야 할 책임까지 주고 있고 또 하나의 예수님
이고 또 하나의 마리아님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주님께 봉헌하여 제물로 바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어 아이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제단에 봉헌하는 제물인 것이다.

< 작은 교회 >
-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마침내 둘이 아닌 하나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하나의 방향 즉 모든 가족들이 마음을 모아서
바라볼 수 있는 우리 주님의 모습, 바로 그 모습을 함께 쳐다보는 것이다. 우리들의
가정은 이런 의미에서 작은 교회이며 작은 수도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가족
들이 바라보는 하나의 방향이신 주님, 우리 가족들이 네 개의 기둥이 되어 떠받드는
신전이신 나의 주님, 마치 렌즈로 햇빛을 모아 하나의 점을 이루면 불꽃이 일어나듯이
주님의 빛으로 모든 가정에서부터 사랑의 불꽃이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가정
위에 은총을 내리소서.

< 두 자매 >
- 성경 속에 보면 주님과 친했던 한 가족이 나온다. 이 가족은 베다니아에서 살고
있던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나자로라는 병을 앓고 있는 오빠, 이렇게 세 사람이
살고 있던 가족이다. 마르타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생
마리아가 얄미워서 “주님 제 동생을 나무라주십시오”라는 요구에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 주님을 위한다고 우리들은 온갖 일에 마음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복잡한 세상에 많은 일을 하기 보다는 주님께 보다 가까이 다가 앉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참 좋은 몫을 택해 주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주님을
위한다는 사람은 많지만 주님의 바로 곁에서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제일 큰 방 >

- 주님께서 돌아가신 무렵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으로 인상적인 두 명의 ‘이름없는
사람’이 나타난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선뜻 나귀를 내어준 주인이나
주님께서 필요하다는 말만 전해 듣고도 선뜻 자기 집의 큰 이층방을 내어준 두
사람이다. 이 이름없는 익명의 두 사람이야말로 신앙의 본보기라고 믿는다. 여기서
이 평범한 한 사람이 내어준 이층방이 주님이 우리와 자신의 피와 살로써 영원한
계약을 맺는 이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다락방이 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방이
되었다.

< 물 위를 걸어 오시다 >
-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는 기적을 행하신다. 주님이 행하신 그 모든 기적은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이었으나 물 위를 밟고 걸어오는 기적은 제자들의
요청이나 환자들의 간청이나 사람들의 바람과는 무관한 단 하나의 기적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물 위를 걸어오셨다. 믿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고 싶으셨다. 그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움’과 ‘의심’이다. 베드로가 마음속에 두려움과 의심을 품지 않았
다면 그는 물 속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 조개껍질로 바다를 옮기다 >
-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위대한 사상가인 성아우구스티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신비를 알고 싶어서 깊은 묵상을 하였다. 그는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갔다가
한 소년이 모래밭에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어린이는 대답하였다. “저 바닷물을 이 조개껍질로 모두 옮겨 담으려구요.”
어린아이의 대답을 통해서 인간의 머리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해석하는 것은 마치
바닷물을 조개껍질로 퍼 담으려는 행동처럼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고 그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나이다.”


[ 2장. 마음의 눈 ]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어둠의 동굴 속에 갇혀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목숨으로 죽음의 냄새를 피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동굴 앞에
막힌 돌을 치워주시고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우리의 죽은 영혼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쳐 구원하여 주십시오.

< 그럼, 어떤 딸들이 나오리아 생각하셨나요 >
-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여인이 쌍둥이 자매를 키우고 있었으나 생활
무능력자가 되자 쌍둥이 자매는 동부와 서부지역으로 각각 입양되었다. 입양시킨
사람이 쌍둥이 자매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딸들을 찾아 갔다. 한
딸은 창녀가 되어 있었고, 한 딸은 모범적인 주부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신앙인이 되어 있었다. 딸들에게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똑 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딸들은 “그럼 우리 어머니 밑에서 어떤 딸이 나오리라 생각하셨나요.”
라고 똑 같은 대답을 했다. 똑같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가 쌍둥이의 한 딸에게는
절망이 되었고 다른 한 딸에게는 극복해야 할 소망이 되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씨앗이다. 우리들의 생은 이 씨앗을 각각 마음의 밭에 뿌리신 주님의 뜻에 따라
훌륭하게 자라서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똑같은 주님의 좋은 씨앗이 좋은 열매를
맺거나 못 맺어 가라지가 되어버리는 것은 쌍둥이 자매처럼 똑같은 상황을 전혀
반대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

< 곡예사 >

- 프랑스의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중에 ‘성모님의 곡예사’란 짧은 단편의 내용
중에 바르나베란 가련한 곡예사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한 수도원의 원장의 만남을 통해 수사가
되었다. 수도생활중에 그는 슬그머니 빠져나가 성당에서 시간을 보낸곤 하였다.
바르나베는 성모님 앞에서 거꾸로 서서 접시를 돌리고 열두 개의 칼을 가지고 곡예를
부리고 있는 것을 수도자들이 보게 된다. 신성모독이라고 분개한 수도자들이 뛰어가
막 끌어 내리려는 순간 성모님이 갑자기 제단위에서 서서히 내려와 자신의 푸른
옷자락으로 바르나베의 곡예사가 흘린 땀방울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이 감명 깊은
단편처럼 우리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각자의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하잖고 가엾은 곡예사의 솜씨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만 특별히
내려주신 최고의 달란트(재능)인 것이다.

< 라자로 >
- 성경에서는 우리 주님이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딱 한 군데에서만 나오고 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절대 눈물조차 흘리지 않으시던 주님께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누이들과 친척들인 유다인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시자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흐리셨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후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소리로 외치셔서 죽은 사람을 무덤 속에서 살려내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 죽음이야말로 물리쳐야 할 최고의 고통임을 잘 알고 계신다. 때문에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죽음을 물리쳐
승리를 거둔 것이다.

< 마음의 눈 >

- 살아 있는 부처인 중국의 마조 선사도 고향 사람의 눈으로 보면 배운 것이 없고
대대로 천민인 ‘키잡이 마씨네 꼬마녀석’인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고향
사람의 눈으로 보면 한갓 ‘무식한 마리아의 아들 목수 청년’에 불과한 것이다. ‘학벌’과
‘가문’과 ‘직업’으로 판단하는 우리들의 그릇된 잣대가 바로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수많은 부처를, 천사를, 하느님을 못 보게 하는 우리들의 눈을 가리는 검은 안대일지도
모른다. 주여,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고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들 ‘마음의 눈(心眼)’을 열어주소서.

< 어린 왕자 >
- 구세주인 예수께서 태어난 것을 알아본 사람은 아주 먼 동방의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는 그토록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니라 다만 유다인의
왕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먼 곳에 있었지만 그분의 별을 보았으며 가까운 곳에 있던
유다인들은 그분의 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까운 곳에 그분의
별이 있다. 가장 빛나는 별은 바로 내 마음속에 있으며 어머니와 내 아이들 속에
그분의 별이 빛나고 있다. 우리는 창조주인 하느님을 맞으며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심을 믿는다. 그러나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의 어머니가 바로 그 하느님의
분신이며 내 아이들이 예수의 화신임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몸에서 빛나는
‘그분의 별’을 봐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 ‘어린 왕자’들인 것이다.

< 돌아온 아들 >

- 불교의 법화경에 나오는 유명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잃었던 아들’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하다. 나도 주님을 떠나서 내 몫의 재산을 챙겨
들고 멀고 먼 고장으로 떠났었던 지난 과거의 일들이 또오른다. 욕망과 쾌락과
미혹에 빠져 있던 나는 더럽고 비참한 알거지가 되었었다. 영혼의 빈털터리. 알 수
없는 악의 종살이로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어느 날 온 가족을
데리고 항복의 백기를 들고 제 발로 보호구역을 도망쳐 나온 인디언처럼 성당을
찾아갔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항복합니다. 하느님. 무조건 항복입니다.” 이 한순간을
내 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먼발치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모양이다. 다만 아버지께로
돌아온 그 행위 하나로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내려주신 내 아버지. 하느님께 부처의
제자였던 수보리의 입을 빌어 나는 이렇게 찬탄했다. “하느님, 달려와 내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춰주신 내 아버지는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 최후의 만찬 >
-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화가였던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46세의 나이에
산타마리아 델 그라체 성당에 벽화를 완성시켰다. 이름하여 ‘최후의 만찬’.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품인 벽화이다. 주님을 가운데로 하고 열두 제자가 양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다빈치는 주님의 얼굴과 배반자인 가리옷 유다의 얼굴만은 쉽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밀라노에서 가장 선하고 신앙심이 깊다는 사람과 가장
흉악한 살인범을 불러와 그 모습을 모델로 주님의 얼굴과 가리옷 유다의 얼굴을 그림
으로써 1498년 마침내 ‘최후의 만찬’ 벽화가 완성되었다. 벽화가 완성되었을 때 감옥
으로 끌려가는 유다의 모델이었던 살인범은 울면서 말하였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선생님, 저는 몇 년전 선생님이 주님의 모습을 그리실 때 모델로 삼으셨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님, 내 몸속에도 주님을 닮은 모습과 은전 서른 닢에 주님을 팔아넘긴
배반자 유다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나이다. 이처럼 모순덩어리인 우리들을 주님이
흘리신 계약의 피로서 구원하여 주소서.

< 폼페이 최후의 날 >

- 서기 79년 8월. 이태리의 남부 도시인 폼페이에서는 가장 끔찍한 재난이 일어났다.
인근에 있는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2미터에 가까운 화산재가 덮쳐 도시 전체가
멸망해버린 것이다. 폼페이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쾌락의 도시였는데, 때문에 이 도시가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은 화산의 폭발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향락과 쾌락의 독소 때문인
것으로 느껴지고 있다. “그 날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홍수가 날 때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모두 물에 휩쓸려 갔다. 그러니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은 우리에게 언젠가는 다가올 그날 그 시간에 대해서 주의를 주고 계신다.
‘폼페이 최후의 날’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남산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라 우리들도 화석이 되어 멸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깊은 데서 고기를 잡아라 >
- 베드로는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어부였다. 어느 날 그는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서 지친 몸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
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시키는 대로
하고는 마침내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를 잡게 되는 것이다. “깊은 곳으로 가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목숨을 내던진 곳”에 부처가 있다는 마조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된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라”라는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깊은 곳으로 가서 그 깊은 곳에서 고기도 잡고 정치도 하고 장사도 하고
사랑도 해야 하는 것이다.

< 남을 비판하지 마라 >
-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남을 비판한다. 성철스님의 말씀대로
어제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고 흥분했던 그 생각도 하루가 지나면 내 이기주의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 주님의 이 말이야말로 정말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다. 이럴 때 성철 큰스님께서
남기시고 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는 말씀은
한 번 쯤 음미해야 할 진리라고 생각된다.

< 알버트 슈바이처 >
- 스물넷의 젊은 나이로 대학 교수가 된 알버트 슈바이처는 성신강림주일 아침 종소리에
잠이 깨자 이렇게 기록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아프리카 가봉)’
이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과 동시에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병든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
으니 거저 주어라.” 청년 알버트는 그 후 6년간 음악과 학문에 전념한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불쌍한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세계의 위인‘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아프리카 가봉에 들어가 청년
시절 결심한 대로 흑인들을 돌보았던 의사이자 뛰어난 음악가였던 슈바이처가 이처럼
성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성심강림의 대축일에 들었던 음성 때문이었다.

< 꽃동네 최귀동 >
-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 가면 ‘꽃동네’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어귀에는 십자가로
된 꽃탑 옆에 한 거지 할아버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 손에 깡통을 어깨 위에는
망태기를 메고 있는 이 거지 할아버지의 이름은 최귀동,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어는 날
해질 무렵 한 젊은 신부는 성당 앞으로 지나가는 이 할아버지의 모습에 강한 느낌을
받게 되었으며 뒤를 쫓아가 움막 속에서 다른 거지들을 얻어온 밥으로 나눠먹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이 신부는 주님으로부터 한 마디의 말씀을 듣게 된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이 젊은 오웅진 신부는
1976년 11월에 15명의 거지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오늘의 꽃동네가 시작된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 3장. 깨끗하게 되어라 ]

당신은 내 안에 함께 계십니다. 당신은 나처럼 미소 짓고 눈물을 흘리고 잠에서 깨어
나고 길을 걷습니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듯 당신은 내 안에서 내 마음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십니다.

< 톨스토이의 부활 >
- 라자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신앙에 눈 뜬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일흔 살이 넘는 나이에 마지막 걸작품인 ‘부활’이란 작품을 썼다.
일찍이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 젊은 시절은 공명심,
권세욕, 사욕,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이런 정열에 불태우던 시절이었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탄식하였듯 어둠의 무덤 속에
이미 죽어 있던 톨스토이에게 어느 날 ”톨스토이야 나오너라“고 한 마디 함으로써
톨스토이를 부활시킨 빛의 주님,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죽음에서 일어난 새사람이
되어 마침내 부활이란 소설까지 쓰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입구가 돌로 막혀
있는 있는 무덤 속에서 죽어 있는 사람들이다.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공명심, 권세,
이기심,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쾌락’의 어둠 속에 갇혀서 우리들의 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악취까지 나고 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 주소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고 우리를
부활시켜주소서.

<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 >
- 프랑스가 낳은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동안 12장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가 그린 자화상은 대부분 권총으로 자살하기 3년 전에 시작해서 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린 작품이었다. 죽기 전 자화상을 완성하고 나서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내 자화상은 그대로 하나의 거짓말이다.” 주님이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 그들인 내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으며,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으며, 남으로부터 칭찬받고 싶으며, 남으로부터 잊혀지지 않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실제의 내가 아니다. 고흐의 탄식처럼 나는 거대한 거짓말
그 자체이다. 오오, 나의 전부이신 주님, 이제야 알겠으니 나를 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남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실한 나를 되찾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오로지 주님에게만 보이기 위한 것이 되게 하소서.

< 깨끗하게 되어라 >

-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성당에서는 한 소년의 청에 의해서 불쌍한 사람을 위한 미사가
올려지게 되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조르쥬 베르나노스’이다. 이 소년이 불쌍한 사람
이라고만 표현했던 사람의 이름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 했다”고
평을 받은 유다가 이 꼬마 소년이 밝히지 않은 이름이었다.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을
유다가 가엾어서 이 소년은 그를 위해 미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 소년은 주님이 하시
고자 하시면 유다를 지옥의 불에서 구해 주실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소년은
훗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가 되어 그의 걸작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를
낳았으며 다음과 같은 금언을 남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다 주님의 은총이다.”

< 생명의 빵 >
- ‘에릭 크랩튼’이란 가수는 영국 태생으로 1960년대에 지미 핸드릭스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타 연주자로 손꼽히던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얻은 인기와
명성은 그를 마약과 방종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던 아들은 다섯
살 되던 해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추락해서 죽고 만다. 이 뜻밖의 죽음에서 그는 자살의
충동을 끊임없이 느끼면서도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절절히
배어 있는 노래를 작곡하게 된다. 이 노래가 ‘천국의 눈물’이라는 감미롭고 슬픈 노래
이다. 또한 그는 마약과 타락으로 물들어진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서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마약과 타락, 아들을 잃어버린 절망 그
고뇌 속에서 에릭 크랩톤이 발견한 주님이야말로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단 하나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주님. 당신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는 주님의 그 생명의 빵을
내게 주십시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절대로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 보조국사의 수심결 >
- 지눌 보조(普照) 스님은 우리나라가 낳은 고려 불교의 뛰어난 스승이다. 그분은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 후 ‘수심결(修心訣)’이란 명저를 지었다.
주님은 남을 의식하는 겉치레의 손을 씻는 일이나 잔의 겉면을 깨끗이 씻는 일보다
우리들의 밖이 아닌 안, 즉 마음(心)을 깨끗이 닦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에게 밖에서 보다 안에서, 형식보다 마음 안에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보조 국사의 말처럼 주님을 밖에서 아닌 내 마음 안에서
찾게 하소서. 그리고 사랑의 샘이신 주님의 성심이여, 내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성심을
본받게 하시고 주님께서 흘리신 그 피가 나를 취하게 하시어 영원히 주님의 피를 갈망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
-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불후의 명작이다. ... 주님은 죄를 짓는 사람보다
’죄 짓게 유혹하는 자‘를 더 미워했다. 인간에게 죄가 시작된 것은 하느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던 선악과를 아담과 에아가 따먹고부터이다. 이 원죄를 저지른 과정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죄의 출발은 ’죄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후 유혹받은 자는
그 죄를 본다. 죄는 그 빛깔과 향기가 현란해서 그 죄에 이끌리게 되며 그러는 자신에게
유혹을 받은 자는 악의 논리를 부여한다.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주인공)가 자신이
죽인 전당포 노인을 ‘한낱 가치 없는 기생충의 존재’로 규정짓듯 에와는 선과악의 열매를
본 순간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다”는 악의 논리로 무장한다. 논리를 앞세운 유혹
받은 자는 마침내 열매를 따먹는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또다시 죄를 유혹받은 자에게
자신이 당했던 죄를 똑같이 유혹하는 뱀이 되어 버린다. 이로 인해 죄는 전파되고 악이
만연하는 것이다.

< 의상을 벗어라 >
- 칼라일은 근대 영국이 낳은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다. ‘의상 철학’이란 이 탁월한
평론은 대자연과 우주를 ‘신의 의상’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육체는 영혼이 입은 하나의 의상이며 자연은 신의 의상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은 신이 의상을 갈아입는 일이며 죽음은 영혼이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 앞 못 보는 거지 바르티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가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큰소리로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지른다.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을 불러 오너라”하시자 소경은 참으로 이상한
행동을 한다. 즉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소경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버린
것은 칼라일이 말하였듯이 자신의 허물, 즉 남에게 보여지는 ‘나’의 의상을 벗어던진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 소경은 무엇보다 먼저 겉옷, 즉 자신의 자아를 벗어 던져 포기한
것이다. 소경은 있는 그대로의 벌거숭이로 주님 앞에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앞 못 보는
소경의 위대한 믿음인 것이다.

< 좋은 나무 >

우리들의 생각이 우리들의 행동을 낳으며 우리들의 행동이 습관을 낳으며 습관이 성격을
낳으며 성격이 운명을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변하려면 우리들의 생각부터 바꾸어
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수전노 스크루지(영국의 문호 차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도 자신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어제와 똑같은 성탄절의 아침을 눈부신
기쁨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사과의 좋은 열매를 맺고 싶다면
우리가 먼저 좋은 사과 나무가 되어야 한다. 사과나무가 되려면 씨앗인 생각이 사과의
씨앗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가시나무의 씨앗으로 머물러
있는데 우리는 사과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으신 주님, 좋은 열매를 꿈꾸기 전에 우선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될 수 있도록 은총 주소서.

< 너와 나>
- 마르틴 부버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현대의 고전이라 불리는 ‘너와 나’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의 전편을 지배하는 주제는 ‘처음에 관계가 있다’는 명제이다. 이는
마치 요한이 그의 복음 맨 처음에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쓴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마르틴 부머는 “인간이란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이다”라고 못 박고 ‘영원한 너’인 하느님을 향해서 ‘너’라고 부를 때 인격적 존재의 가장
깊은 경지에 이른다고 말했다. ‘나’가 온전한 ‘나’가 되기 위해서는 ‘영원한 너’인 하느님과
일치의 존재가 되면 될수록 완전한 인간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영원한 너인
하느님도 나와 하나이며 예수도 나와 하나이다.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이웃 사람들도 나와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하나인 것이다.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1869년 파리에서 출생했다. 대대로 신교도 집안인
아버지와 엄격한 가톨릭 집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지드는 평생 동안 양 극단적인
부모 사이에서 조화를 구했으며 지드는 출생 시부터 자신의 독특한 작품의 비밀을 잉태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자전적인 소설이 바로 ‘좁은 문’이다. 지드에게 있어 ‘좁은 문’은
마치 좁은 옷처럼 답답하고 벗어던지고 싶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엄격한 종교적
집안에서의 성장이 지드에게 주님은 기쁨과 해방의 존재가 아니라 두려움의 존재, 거세
(去勢)의 공포 대상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은 그 ‘좁다’는 의미 때문에 답답하고 고통스런
문이 아니다. 그 문이야말로 자유와 해방의 넓은 문이다.

< 낮은 자리 >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는 것을 보시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고 덧붙이셨다. 인간에게는 원래부터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다만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만 있을 뿐이다. 높고 낮은
것은 높여진 위치의 차이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높은 자리에 앉을 때 우리가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인간에게 있어 권력과 명예와
부의 싸움은 이오네스크가 표현하였듯 하나의 의자 싸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만
의자에 불과함에도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독점하려 하며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높은 자리를 강탈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으로 해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 하늘의 사냥개 >
- 프란시스 톰슨은 영국 시인으로 특이한 생애를 보낸 사람이다. 빈민굴에서 헤매던
그를 메이넬이 발견하여 글을 쓰도록 했는데 이때 쓴 시가 유명한 ‘하늘의 사냥개’이다.
이 시의 한 구절을 읽어 보면 웃음소리와 희망을 버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는
톰슨의 영혼과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힘센 두 발로 계속 쫓아오는 사냥개와 같은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느낄 수 있다.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저버림을 당하리라” “돌아 온 탕아‘의 비유는 성경 속에서 가장 잘 인용되는 구절이며
또한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를 떠올리게 된다. 아들은 도망가기를 멈추고 아버지에게
몸을 돌린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몸을 돌린 순간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고
성대한 잔치를 벌여주신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몸을 돌린 그 순간야말로 죽음에서 새
생명이 탄생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냥개로부터 숨을 곳이 절대 없는 것을
알면서도 톰슨은 계속 도망쳐 결국 빈민굴에서 아편중독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렇다.
피할 곳은 그 어는 곳에도 없으며 아버지에게서 도망칠수록 아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저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 기도의 완성 >
- 다그 하마슐드는 스웨덴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53년에 유엔사무총장이 되었던
사람이다. 이 분이 남긴 말씀 중에 짧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가올 모든 것을 긍정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에게 열 명의 나환자가 “자비를 베풀어 고쳐 달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주님은 깨끗이 고쳐 주신다. 그러나 한 사람만이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다. ...기도는 소망으로 시작되지만 감사로 완성되는 것이다.
시작만 되면 끝이 없는 미완성의 기도를 우리는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것뿐이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마슐드의 짧은 말씀은 완성된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의 기도가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는, 엎드렸던 무릎을 펴고 힘차게 일어서서 주님의 빛을 온몸으로 받아
들이는 긍정의 신천지가 될 것이다.

< 예언자 도스토예프스키 >
- 27세의 젊은 나이로 총살 직전에 발작을 일으키며 살아난 사형수, 그의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그는 이후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되었는데 유일하게 허용된
책인 성서를 4년 동안 항상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부활 대축일 밤에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 “하느님은 존재한다. 하느님은 존재한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천년은
기독교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으며 그가 말년에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서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모든 것은 천국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속에 천국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서 나무 위에 올라간 키 작은 자캐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려
오너라. 오늘은 네 집에서 머물겠다.” 키 작고 못생긴 사람, 돈은 많이 있었지만 매국노
라고 멸시당하던 자캐오는 이 순간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 이는 간질병자에
도박꾼, 인간적으로는 결함이 많던 도스토예프스키를 불러 내어 예언자로 쓰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떠올리게 된다.

< 죽음에 이르는 병 >

- 1849년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책의 제목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데 이는 주님께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그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라고 하신 그 말씀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 속에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책 속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절망이며, 절망이란 자기를 잊게 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이라 말하고 이 상실이야말로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그는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와 신앙으로서만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두 명의
죄수도 함께 못 박혀 죽는다. 왼쪽의 죄수는 죽는 순간에까지도 주님을 모욕한다.
그러나 오른쪽의 죄수는 죽기 직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주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로써 평생 죄를 짓던 흉악범의 죄수는 바로 ‘오늘’ 주님과 함께
최초로 낙원에 들어가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우리들의 인생은 주님 곁에서
함께 못 박혀 죽어가는 두 명의 죄수와 같다. 주님이 약속하시는 하늘나라의 낙원은
내일이 아니다. 바로 오늘이며 우리가 평생을 통해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죄를 뉘우
치면 과거를 묻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렇다. 우리들의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

< 별을 노래하는 시 >

-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인간에게는 네 가지의 우상(idora)이 있다고 말했다.
‘종족의 우상’(의인화), ‘동굴의 우상’(고집), ‘시장의 우상’(무성한 소문들), ‘극장의
우상’(권위)이다. 베이컨의 날카로운 통찰처럼 우리가 밤하늘에 떠 있는 그분의 별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우상의 궁전을 뛰쳐나와서 홀로
밤하늘을 우러러봐야 할 것이다. 1945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는 1941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자전
시집을 발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서시를 남긴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들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발견한 것은 ‘별’이였다.
그분의 별이 시인의 마음에 깃들면 이처럼 노래하는 시가 된다. 그분의 별이 가난한
사람에게 깃들면 기쁨이 된다. 그분의 별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깃들면 위로가 된다.

< 아직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
- 이형기 시인이 젊은 시절에 쓴 시 ‘낙화’의 가장 아름운 부분은 첫마디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제목이
낙화 이듯 떨어지는 꽃을 보고 시인은 꽃이 지는 그 뒷모습에 대해 시인적 감성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오는 때가 있으면 가는 때가 있고 피어나는
때가 있으면 지는 때가 있으며 태어나는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는 것이다. 마땅히
사라져야 할 때 사라지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추악하다. 불가에서는 이런 ‘때’에 대해서
‘시절인연 (時節因緣)’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진달래는 봄이 되어서 따뜻한 봄볕의 인연
속에서만 피어난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 미련없이 사라져 버린다. 우리 인간은 ‘시절
인연’을 가리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피어난다. 그러다가 한번 피어나면 자기의 인연이
다했으면서도 사라지려 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타날 때를 30여 년 이상이나
기다리셨다. 하느님의 아드님도 30여 년을 자기의 ‘시절인연’을 기다리셨다.

< 아침 이슬 >
- 주님께서는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시기 직전 다음과 같은 최후의 유언을 남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우리의 인생은 풀잎에 잠깐 맺혔다가 스러지는
이슬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동방교회의 수도자가 쓴 ‘아침 이슬’처럼 우리 자신에게
존재가 부여되는 것은 바로 태양이신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께서 계시다면 한낮에 찌는 더위가 시련이 된다 할지라도 서러움 모두 잊어 버리고
끝까지 갈 수가 있을 것이며 이슬방울은 마침내 진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당신은 누구세요 >
- 노르웨이의 고르텔이라는 사람이 쓴 ‘소피의 세계’란 작품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열네 살 난 소녀 소피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소인도 이름도
없는 편지 속에 단 한 마디 “당신은 누구세요”라는 질문이 쓰여 있다. 전혀 뜻밖의 질문을
받고 놀란 소피에게 온 또 한 통의 편지에는 “세계는 어디서 왔지?”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소녀 소피는 이 근원적인 질문을 받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예수가 태어나기 4백여 년 전 그리스에는 소크라테스라는 철인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그리스에는 쓸모없는 무력한 이론을 유력한 이론으로 만드는 궤변이 판을 치고 있었다.
에컨대 “늙어 가는 사람은 젊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이다.”라는 식의
궤변이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홀연히 나타나 젊은이들을 상대로 “용기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는 억지 논리의 궤변이 판치는
아테네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과 함께 끊임없이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청년들에게 퍼부어댐으로써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라는 진리를
설파하였던 것이다.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주님께 하는 부활에 관한
질문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억지와 말장난이 무성한 아테네와 같다. 궤변의 말들이 신문과 방송과 잡지에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궤변의 시대에 우리를 향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 4장.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

주님, 주님의 말씀도 이미 내 마음에 떨어져 싹이 터서 자라고 있나이다. 이 씨앗이 잘
자라 좋은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내 마음의 밭이 좋은 땅이 되어야 함을
내가 알고 있사오니 이는 오직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오니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어 도와주소서.

< 두려워 하지 마라 >
- 1941년 7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에서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다. 이에 몹시 분노한
수용소장 프리치는 그 대가로 사람을 골라내어 죽이기로 했다. 마침내 가족이 있는 열 번째
죄수인 가죠프니체크가 결정되었다. 이에 마르고 여윈 사람이 대신 나서면서 말했다.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나는 아내와 아이들이 없으니까.” 그가 바로 1982년 10월
시성이 된 막시밀리안 콜배 신부다. 인간의 모든 공포와 근심과 불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작 죽는 것은 육신이지 영혼이 아니다. 콜베 신부는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같이 있던 두려움에 떠는 소년
에게 말하였듯 죽음이 그토록 무서운게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콜베 신부는 기도
중에 그는 스스로 팔을 뻗쳐 주사를 맞았다고 그의 최후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콜베 신부가
화장장의 가마솥에서 소각되었을 때 수감자들은 “오늘 콜베신부는 새롭게 탄생했다.
성모승천 전날.”고 말했다.

< 내 마음의 밭 >

- 초대 그리스도 교회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성인이었던 아우구스티노는 서른두 살
때인 어느 날 친구와 더불어 무화과 밑에서 토론을 하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이웃집에서 어떤 아이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 아우구스티노는 이 단순한 노래의 가사말을 하느님이 주시는 메시지라 생각하고
즉시 눈물을 멈추고 성서를 집어서 펼쳐 눈에 들어온 첫 구절을 읽었다. 그것이 로마서
13장 13절이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아우구스티노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이가 부르는 노래의 단순한 가사말을 하느님이 주시는 씨앗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아우구스티노는 홀연히 눈이 떠져서 어둠이 스러졌으며 들을
귀가 열려서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씨가 되어 싹이 트게 된 것이다.

<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

-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즉 세례를 주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보다
조금 먼저 오신 것이다. 와서 주님에게 물로 세례를 주셨다. 이로써 예수는 죄인인 인간의
대표자로서 세례를 받으셨으며 그로부터 목수에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또한 요한은
예수를 구세주로 알아본 최초의 증인이었다. ‘우리 가운데 서 있는, 알지 못하는 한 분’을
구세주로 알아본 최초의 사람이었다. 예수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
이라고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이었다. 주님, 우리도 요한의 그 두 눈을 본받아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외치는 증인이 되게 하소서.

<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
- 1993년 2월, 한 신부님이 8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이름은 구인덕, 이는
그분의 한국 이름으로 원 이름은 셀레스뗑코요스, 프랑스 태생의 신부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인이었다. 6.25 전쟁 중에 구 신부는 여러 신부들과 수녀
들과 함께 혹한의 땅 중강진까지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이 죽음의 행진에서
12명의 신부들과 수많은 수녀들이 죽어 갔다. 마침내 1953년 5월 단 한사람의 생존자로
살아남은 구인덕 신부는 파리로 생환되었다가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주님은 말씀하셨습
니다.“다음 동네로 가자.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이 일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찾아왔다. 마침내 모든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구인덕 신부님.
하늘 나라에서도 당신이 사랑하셨던 나라, 한국을 굽어보소서. 주여 그분의 영혼을 당신
손에 평안히 쉬게 하소서.

< 어머니 데레사 >
- 1979년 12월 10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 수상자는 초라한 모습의 수녀복을 입은 70세의 할머니였다. 두 손을 합장하고
여인이 걸어 나오자 시장식장의 수많은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여인의 이름은 데레사. 우리는 흔히 그 여인을 ‘마더 데레사’ 즉 어머니 데레사라고 부른다.
191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알바니아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데레사는 1946년 9월부터
인도의 캘커타에서 살면서 고아, 나병환자,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살아왔다.
그 공로에 의해서 이 초라한 여인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굶주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그리스도며 그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 하였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버림받은 사람의 내부에도
데레사 수녀가 표현하듯 그 눈부시게 빛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현존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 죽어 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며 또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 참 포도나무 >
- 1839년 10월31일. 형리들이 감옥으로 들어와 한 소년의 몸을 움켜잡고 그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였다. 이 소년의 이름은 유대철 베드로, 당시 그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순교 사상 가장 어린 소년이었으며 가톨릭 사상 보기 드문
소년 성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역관(譯官)이었던 유진길의 아들이었으며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소년 성인은 14차의 형벌과
100여 대의 매질과 그리고 40대의 치도곤을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항상
평화로운 표정을 띠었다고 한다. 관원들이 이 소년을 감옥 안에서 몰래 죽인 것은
공공연하게 죽이면 군중들이 반발할까 그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 주님이
죽어 있는 거짓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참 포도나무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100대의 매질과 죽음의 형벌에도 참 포도나무를 떠나지 않았던 유대철 소년 성인과는
달리 나는 단 한 대의 매질에도 주님을 떠나며 아주 작은 고통에도 주님을 버리고 만다.
주님 참으로 부끄러운 이 나뭇가지를 참 포도나무 가지로 만드소서.

< 항상 말구유부터 시작하라 >
-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를 미칠 것이다.” 평생 바오로 성인의
이 말씀을 새기면서 그를 스승으로 섬겼던 알베리오네 신부는 마침내 1914년 8월
‘인쇄기술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성바오로수도회’를 창설하게 된다. 수도회를 창립할
무렵 꿈속에서 예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여기에서 빛을 비출 것이다.” 이 말씀은 이로부터 성바오로수도회의 핵심이
되었다. 주님이 태어나셔서 누우셨던 곳이 ‘말구유’였듯 ‘항상 말구유로부터 시작하라’
라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정신은 오늘날 그가 창립한 성바오로수도회에서 펴내는 수많은
책과 출판물 위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20세기가 열리던 날 밤, 16세의
신학생 알베리오네가 결심하였던 것처럼, 이제는 ‘하느님의 책이면서 인류의 책’인
성서에서부터, 우리 주님이 누우셨던 말구유에서부터 매스 미디어는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천사 잔 다르크 >
- 1412년 무렵, 프랑스는 전쟁의 패배로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때 13세의 무식
하고 못생긴 잔 다르크는 조국을 구하라는 주님의 계시를 받고 남장을 하고 전쟁터에
나가서 프랑스를 구해 내어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면서도
영국군에게 넘겨진 자신을 심문하는 자신을 심문하는 신학자들에게 “나는 하느님으로
부터 왔으며 이곳에는 아무 볼 일도 없습니다. 나를 하느님께로 석방하십시오. 나는
그곳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나는 하느님에게만 복종합니다”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마녀로 선고받은 잔 다르크는 화형을 당해 불에 타서 죽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패배한 프랑스처럼 어둠의 절망에 빠져 있다. 문명은 발달되고 물질은 풍요
하지만 사회는 범죄와 퇴패로 신음하고 있다. 이때야말로 우리의 잔 다르크가 홀연히
나타나야 할 때이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
- 1846년 9월 16일, 한강변의 새남터에서 25세의 젊은 청년이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에
목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망나니의 칼을 맞기 전 그 청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외국사람과 통한 것은
오직 천주교를 위해서였습니다. 천주를 위해 나는 죽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
됩니다. 여러분들도 죽은 다음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생각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 이 청년의 이름은 김대건. 우리나라가 낳은 최초의 사제이다. 그는 1821년 충청남도
솔뫼(당진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와 부모 등은 이미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
들이었으며 김대건은 15세 되던 해에 마카오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1845년 8월에 상해 부근 김가항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신부로서의 사제 생활은 불과 1년
1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낼 때 너희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나라가
낳은 최초의 사제 김대건도 주님의 말씀처럼 매질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박해를 받고
꽃다운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살아 있는 빵 >
- 1263년, 프라하에는 베드로라고만 알려진 독일 신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신부였지만 매 미사 때마다 과연 살과 피를 가진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성체 안에 현존하고 계시느냐는 의혹 속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에서 의심을 풀어주시도록 기도를 요청하고자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나 볼세나를 거쳐 크리스티나 성당에 이르게 된 신부는 그곳에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베드로 신부는 평소 때처럼 축성하고 난 뒤 성체를 둘로 쪼개었을 때 갑자기 붉은 피가
그곳에서 흘러 나오는 것을 보았다. 또한 쪼개어진 성체의 윗부분이 한 덩어리의 살로 변한
것을 보았으며 성스러운 피가 성체포 위에 25개의 점으로 떨어지고 가시관을 쓰신 주님의
모습이 그 점 속에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 놀란 베드로 신부는 미사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그 피 묻은 성체포를 제의실 상자 속에 숨겨 두고 그 성당을 떠났다.

- 그후 그 신부는 교황 우르바노 4세를 방문해서 이 비밀을 고백하였다. 교황은 즉시 주교를
그 성당으로 보내어 성체와 성체포를 가져오도록 하는 한편 화가 라파엘에게 이 장면을
그리도록 하였다. 지금도 바티칸에는 그때의 사건이 생생하게 그려진 라파엘의 그림이 잘
보관되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해마다 6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이 사건으로 교황 우르바노 4세가 교회 월력에 추가하였기 때문이다.

< 테크라 메를로 수녀 >
- 1900년,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해 ‘결정적인 밤’을 보낸 알베리오네 신부는 20세기에는
부도덕하고 무신론적인 방송, 출판, 영화 등 온 매스컴이 범람하게 되어 인간의 영혼이
타락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고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신앙과 도덕으로 무장한 강력한
매스컴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명을 깨달았는데 마침내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동반자로서
테클라 메를로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초대 장상)를 선택한 것이었다. 테클라 수녀는
1964년 2월, 70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그녀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였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온몸으로 전한 테클라 수녀의 딸들인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는 오늘도 그분의
정신을 본받아 책을 만들고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 베드로의 눈물 >

- 주님께서는 12명의 제자 중에서 유독 베드로를 ‘반석(磐石)’으로 삼으시고 그 바위 위에
교회를 세워서 자신의 으뜸 제자로 삼으셨다. 베드로는 유식하지도 않았으며 가난한 어부에,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사람이었다. 성격은 덤벙대며 변덕이 심하고 무엇보다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던 사람이었다. 주님의 모습이 변모하실 때 함께 나타난
모세와 엘리아 그 모두에게 관심을 끌려고 초막을 지을 테니 이곳에서 함께 살자고 아부를
하던 주책바가지였고, 나중에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잡아떼던 겁쟁이며 주님으로
부터는 직접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준엄한 질책을 받은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까지도 주셨다.

- 베드로는 누구보다 불붙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베드로는 주님이 돌아가신 후
손수건 한 장을 늘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큰 사랑으로
흘러 넘치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으며, 특히 자기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흐르는 문물을 닦느라고 베드로의 손수건은 늘 젖어
있었다고 한다. 베드로는 우리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값어치가 없는 사람이므로
제발 십자가를 거꾸로 세워 머리가 밑으로 되도록 하여 죽여 달라고 유언하고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그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님이 ‘살아 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라는 굳은 믿음과 주님께 대한,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는 사랑을 갖고 있었
으며 바로 이 믿음과 사랑이 주님께서 베드로를 으뜸 제자로 삼유 이유가 되었다.

< 법대로 사는 사람 >
-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그분을 성령으로 잉태하신 성모님 마리아를 마음속으로
공경한다. 또한 베드로를 위시한 주님의 제자들을 존경하며,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을 마음속으로 우러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아버지인 요셉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하고, 성경에서도 그분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 복음사가 마태오의 표현처럼 요셉은 법대로 사람 이상의 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있다. 그러나 요셉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그분의 외아들이신 예수를
위탁받아 키우시도록 허락받은 위대한 의인(義人)이시다.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으셨던 것은 그분이 비록 가난하지만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법대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우리는
요셉에게 분명히 배우고 있다.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 주님의 열두 제자중 토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주님이 토마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외 받은
토마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에게도 어쩔 줄 모르는 기쁨을 주기 위함이다. 그 기쁨을 직접
맛본 토마의 입에서도 주님을 향한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주님은 소외된 사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 잊혀진 사람을 특히 사랑하신다.
소외된 토마만을 위해 주님은 특별히 나타나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지게 하신 것이다.

< 지옥에 머물라 >
- 동방교회의 성인인 ‘실완(Silouance)’은 1866년 중앙 러시아의 탐보프에서 태어나
26세 되던 해 아토스 산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산 속에 살면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평수사로 살아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겸손’에 대해서 묵상하였으며 완전한 겸손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했다. 그는 ‘완전한 겸손’이야 말로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한 겸손을 소망하였던 이 성인에 악마는 많은 고통을 주면서 사악한 잡념으로 끊임없이
괴롭혔다.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실완은 주님으로부터 결정
적인 계시를 받는다. “의식적으로 지옥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나 절대로 절망하지 말라.
” 실완은 마침내 악마를 이기고 ‘겸손의 성인’으로 완덕을 이루게 된 것이다.

< 성 바오로 정하상 >
- 성 바오로 정하상은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과 더불어 우리나라 순교자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두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정하상은 유명한 실학자의 가문이었던 정약종의
아들로 불과 7세의 어린 나이 때 아버지와 친형을 순교로 잃어버렸지만 20세 때부터 평생을
교회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 그는 실질적으로 흐트러진 국내의 신자들을 한데로 모으는
지도자 역할을 하는 한편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주교를 통해서 교황청에
보내어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교구가 설정(1831.9.9)된다. 그는 또한
유방제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비밀리에 모셨으며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모심으로써 조선을 가톨릭의 요람으로 태동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45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하게 된다. 망나니에 의해서 목이 베어지는 최후의 순간
까지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흘러넘쳤다고 한다.

< 인생의 강 >
- 크리스토 폴이란 성인은 가톨릭 사상 가장 아름답고 전설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는 분이다.
그는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가을 건너다 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거인이었다. 천하에
힘센 장사였던 그는 자기보다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조그만 아이가 강을 건네달라고 했다. 거인은 강을 건너려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 아이가 너무나 무거워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고 중얼
거리자 아이가 말하였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로부터 크리스토 폴 정인은 모든 여행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크리스토
폴 성인에게 주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이 아기쯤이야 하는 힘센 거인의 교만을
꺾기 위한 은총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던 동방박사를 본받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아기 예수를 어깨에 메고 인생의 강을 건너고 있는
나그네인 것이다.

< 빈 무덤 >
- 우리 가톨릭에는 수많은 성인들이 있다. 우리나라도 자랑스런 103위의 순교자 성인을
갖고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을 발견하거나 명작을 썼던 창조자
들이다. 그러나 성인들은 무엇을 만들거나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생
자체를 완덕의 경지로 창조한 사람들이다. 그 성인 중에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분은
소화(小花) 데레사일 것이다. 대부분의 성인들이 극적인 인생을 산 것에 비하면 성녀의
생애는 너무나 단순하다. 열다섯 살에 봉쇄수도원인 갈멜수녀회에 들어간 성녀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성녀가 쓴 편지처럼 작은 모래알이 되기를 소망했던 이 성녀는
자서전 속에서 자신을 주님의 ‘작은 꽃’이라고 비유했다. 숨을 거두던 날(1897.9.30)
아침 성녀는 이런 말을 남긴다. “이 생명의 저녁에 나는 ‘빈손’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겠
나이다.” 평생 ‘작은’ ‘더욱 작은’ ‘더욱 하잖은’ 존재를 꿈꾸었던 이 성녀는 그 작은
존재마저 버리고 마침내 텅 빈 손이 되었다. 죽기 전 이 성녀는 우리에게 장미의 꽃비를
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39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6.27.




[ 그분의 손길 ]

- 지은이 : 존 파웰, 옮긴이 : 최진영, 펴낸곳 : 성바오로/ 81p
- 한 사제의 자서전적 신앙체험 이야기
- 지은이 프로필 : 대중적인 영성작가로 예수회 사제이자 시카고의 로욜라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침. 영문학, 철학, 심리학 그리고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
학위 소지, 저서로는‘왜 사랑하기를 두려워 하는가’, ‘행복의 조건’ 등 다수가 있다.

[ 표지의 글에서 ]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

하느님과 진실로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대화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며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화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내 안에 그분과 함께
갈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어두운 밤에 그분의 빛과 목소리를 듣고, 고난을
당할 때에 그분의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믿음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
- 성아우구스티노는 30년이란 오랜 세월을 방황하며 막다른 골목에 수없이 다다른
후에야 그가 그처럼 안간힘을 써도 찾지 못했던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괴테는
“모든 인간의 갈망은 실상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다.”라고 했다. 우리 대부분과 마찬
가지로 아우구스티노는 어린 시절의 마음을 잃은 후 슬픔과 지혜를 알게 된 중년에
와서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방황으로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 저는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늦게
서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진정 슬픈 특권입니다.”
.... 첫영성체 하는 날이 다가오자 나는 손등에다 그 날짜를 지어지지 않는 잉크로
썼다. 비록 잊지 않으려고 한 어린이 행동이지만 그때의 나는 하느님과 날짜를
정하여 만난다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은총의 현존을 확신하다 >
- 1940년대 가톨릭 계통의 고등학교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매일 아침 미사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게시판에 매일 영성체를 영하기를
권유하는 글이 씌어 있었다. “ 자신이 건강하지 못하다고 느끼신다면 아마도 당신은
좋지 못한 잘못된 빵을 섭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만찬에 오셔서 생명의 빵을 맛보십시오.” 나는 이 그리스도의 만찬에 빠짐없이
참석함으로써 많은 청소년들이 겪는 도덕적 갈등과 고민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생명의 빵을 믿게 되었고 은총의 현존을 확신할 수
있었다.

- 나는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시카고의 도살장에서 일했으며 언제나 호신용 칼을
지니고 다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남들이 수시로 권하는 ‘마리화나 담배’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거절할 수 있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며 거기다 동정(童貞)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권투도
잘했고 토론과 웅변대회에서 우승하여 메달도 받았다. 나는 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말싸움’쯤은 사양하지 않고 맞설 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젊은 전투병이었다.


<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했다 >
- 1940년대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나는 지도교사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럴듯한 몇 가지 이유와
동기가 있었지만 그 뒤에 숨은 진정한 이유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때까지 서서히 나를
붙잡아 온 은총의 흐름, 하느님의 손길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빈말이었다(나는
둘러대는 데에 뛰어 났다). 나는 ‘전투병’이요, 재즈 피아니스트요, 지르박 춤의 명수
였다. 그런데도 어길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흐름이 나를 그 어떤 것보다,
그 어는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 위기의 씨앗 >
- 신학교로 떠나기 전날, 그동안 어렵던 시절에 도움을 주셨던 이웃집 할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일반 대학교에 가는 줄만 알고 있던 할아버지는 내가 신학교에
입학했고,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자마자 눈에 띄게 상심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의 결심을 매우 유감스러워하며 나의 삶과 재능을 결국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보게, 이것을 알아두게나. 하느님이란 없다네.”
이 할아버지는 선량한 분이었지만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전쟁과 고통과 악이
가득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신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마침내 기다렸던 그날이 왔고 나는 예수회의 수련자가 되었다. 수련생활이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음은 사실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났고, 가구라고는 헌 과일상자
갖다 놓은 정도의 초라한 것이었고, 일상의 대화는 라틴어를 써야 했고, 긴 침묵과
매일 4시간의 기도를 드려야 했다.

< 의문이라는 첫 폭풍 >
- 새로운 도전에 접했다는 흥분이 가시자 수련생활이 요구하는 희생이 어떤 것인지
분명해졌다. 바로 그 무렵 돌연 의문이 여름밤의 천둥처럼 나를 엄습했고, 뒤따라
오는 불안감이 나의 영혼과 생활의 구석구석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느님은 진정
존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하느님의 아들인가? 성서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나는 두려움에 떨며 기도를 하러 갔지만 나를 맞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마주친 것은 엄청난 고독과 대답 없는 침묵이었다. 새로운 삶의 절망이나 약속이
없는 모든 것은 죽음일 뿐이었다. 이웃 할아버지가 하던 말이 긴박성을 띠고 내 귀에
끊임없이 울려 왔다. 이러한 불신의 ‘어두운 밤’이 넉 달이나 계속되었다. 삭막하고
황량한 넉 달이었다.

- 그 무렵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내 생애의 하느님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수련자들은 매일 저녁마다 통나무 토막으로 된 받침대에
무릎을 꿇고 책상 위에 손을 얹고 그날 하루 동안의 생각이나 언행에서 잘못했거나
실천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내가 유일하게 잘한다고
느꼈던 것은 나무 받침대를 무릎 끓기에 편하도록 놓는 재주뿐이었다. 무릎의 받침대를
잘 놓는다는 것은 싸움의 반은 이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미소짓곤 했다.

< 그분의 손길이 내게 닿았다 >
- 어느 날 나는 양심성찰을 하기 위해서 나무 받침대를 발로 밀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심장마비와 같은 심한 충격과 함께 갑자기 하느님의 존재가 내 마음 속을 가득히 채웠다.
내가 그날 체험한 바를 이렇게 밖에는 묘사할 수가 없다. 하느님 사랑이 부어 주는
순수한 기쁨으로 나의 몸과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끌어내는 이 황홀함을 견뎌낼
수 없어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어쩌면 ‘바바라 스트라이샌드’가 부른
“그분의 손길이 닿았다”라는 노래야 말로 그날 밤의 나의 체험을 그대로 전해 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모든 체험, 특히 하느님 체험은 근본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밀월 기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체험 후의 1년간이었다.
언제나 예기치 않은 때 나를 깜짝 놀라게 해주었던 그분의 손길은 그지없이 부드러웠다.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홉킨스의 ‘도이치란트 호의 난파’를 읽었고, 그 시는 내가 체험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 당신은 나의 주인되시는 하느님! 호흡과 빵을 주시는
이 세상의 해변이시오 바다의 지배자이시며 삶과 죽음의 주인이십니다. .... 나는 다시
당신의 손길을 느끼고 당신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 새로운 희망과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시력이 나쁜 사람이 처음으로
안경을 쓴 것 같았다. 완전히 새롭게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 전에 보았던 광경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믿음이란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해주는 새로운 내면의 안경이라 할 수 있다.

< 인내의 시간 >
- 신뢰라는 것은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 앞에 무릎 꿇었던 나의 승복
(承服)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약하고 설익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의 따뜻한
새 세계에서 불빛은 사라지고 추운 겨울이 자리잡았다. 단 한 가지 내 마음 속에 변함
없이 깃들어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환희를 맛보았기 때문에 다시는
이 세상의 즐거움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아무리 외로워도 이 세상의 즐거움 속에서는
어떠한 위안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하느님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른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나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 불나방과 같은 행위가 곧 하느님을 추구하는 나의 노력과 좌절을 상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당시 나에게는 하느님의 얼굴과 마음 위에 어떤 신비스런 망이 쳐져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옛날의 따뜻함과 위안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믿음을 잃었던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나의 믿음이 더 깊이 자라도록 원하시는
것일까? 어쩌면 이 체험이 나로 하여금 성숙하고 순화되도록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생명과 사랑의 시련이었는지 모른다.

< 망상에 빠지다 >

-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특히 교직에 종사할 사람을 수련시키는 신학교에서는 항상
이론에 중점을 두게 마련이다. 이론적으로나 각 개인의 마음 속에서나 우리는 모두
성인(聖人)이 되려고 노력하고 무릎을 꿇을 때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였다. 수련기
동안 날마다 몇 시간씩을 개인으로 또는 공동으로 기도를 바쳤지만 가장 많은 시간은
역시 공부하는 데 썼다. 신학교의 학사과정을 밟게 되자.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경쟁심과 본능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발동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의
나는 하느님보다 더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그것이 내가 망상이라고
정의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혼동하고 있었고, 목적과
수단을 식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지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를 만족시켜 줄 성공을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우수한’
학생이라는 위치와 평판을 얻기 위해서 경쟁하고 있었다.

- 공부하는 동안 기도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나의 기도는 그저 겉으로의 몸짓, 표면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게다가 나의 마음이 전부 기도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마음은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성공하고 싶은
끈질긴 집념이 나를 유혹했고, 내 눈을 어둡게 했고, 또 나의 마음을 갈라 놓았다. 이
무렵의 몇 년간은 타협의 기간이었고, 이처럼 어정쩡한 타협적인 추구자는 하느님의
얼굴과 마음을 찾지 못했다.

< 내가 약해졌을 때 그분의 힘과 인내가 >
- 그 무렵 몇 년간 저지른 갖가지 잘못이 있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 중에서 가장 큰
잘못은 그 잘못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될 때이다.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이해를 해야 했다. 어떻게 해서 그 일이 일어났으며 왜 일어났는가?
그리고 언제 나는 분열된 부분이 생겼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인내하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인내해야 겠다.
- 내가 몇 년간 영적으로 태만하게 지내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한 말은 내가
학교에서 공부를 무척 잘 한다는 것이었다. 재빨리 대답하고,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우수한 논문을 쓰고, 흥미진진한 강의를 한다는 식의 평가였다. 나의 치열한 경쟁심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과 칭찬을 열심히 갈구하였다. 망상의 가장 심각한 고질은
습관성이며, 젊었을 때 형성된 습관은 늙어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폭군이 되고 만다.
우리의 어제는 오늘 위에 무겁게 놓여 있으며, 오늘은 내일 위에 또 무겁게 놓여 있을
것이다.

< 서품 받던 날 >

- 나는 그때까지의 습관과 내적인 분열과 갈등, 그리고 모호한 자아의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사제로서 서품을 받는 제단 앞에 서게 되었다. 서품을 받던 날은 화창하고
더운 날씨였다. 가족과 친지들이 후덥지근한 성당을 가득 채운 가운데 새로 서품을
받게 된 우리들은 높은 제대 앞에 엎드렸다. 이렇게 엎드리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사리를 추구하는 마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교의 부름에 따라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이렇게 일어나는 행동은 그 순간부터 사제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상징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제를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태양은
찬란하게 비치고 전례는 엄숙하고 화려했다. 그리고 나는 사제가 되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자랑스럽게 나를 껴안았다.

< 오랜 망상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
- 서품 후에 나는 유럽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럽은 마음을
흥분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세 가지 외국어를 더 배웠고 가능한 한 여행을 많이 했다.
박사학위를 위한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은 것도 하나의 시험이요 경쟁이며 승리였다.
나는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자극을 원하는 나의 욕구이거나 옛 습관의 여력이었나
보다. 나는 학위증서에 ‘최우수’라는 영예를 안고 내가 다니던 신학교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5년간은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생활이었다.

< 다시 전환기를 맞다 >
- 이때의 나의 삶의 방향은 내리막길이었다. 나는 연설가로서 알려졌고 말을 잘함
으로써 많은 득을 보았다. 심지어 나는 기도에 관한 감동적인 강의와 설교도 하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실제로 기도를 하는 대신 기도에 대한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교수
로서 저술가로서, 그리고 연설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달콤한 향내가 내 사생활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래서 서른다섯이 넘으려는 나의 내면에서는 무엇인가 새롭고
깊은 삶의 뜻을 찾아야겠다는 위기의식이 먹구름처럼 끼고 있었다.

-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그들이 요구가
나의 시간과 활력과 개인생활에까지 침입해 오게 되자 나는 참기가 어려웠다. 나는
차츰 나 자신이 ‘쓰여지는’ 도구처럼 느껴졌고, 입버릇처럼 하는 칭찬과 감사의
말들은 점점 귀찮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때에 한없이 인내로우시고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두 번째로 나의 삶 속으로 단호하게 들어오셨다.
“나는 다시 당신의 손길을 느끼고 당신을 발견합니다.” 이리하여 나는 길을 다시
바꾸었다. 한 사람의 생애중 여러 번의 전환기가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이 두 번째의
체험으로 깊이 변화되었다.

<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게 된 연수회 >
- 한 친구의 간절한 초대로 “대화에 관한 연수회”에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이 생겨
참석했다. 그 짧은 한 주일 동안의 영향을 곰곰이 되돌아 보면서, 나는 나의 감정과
나의 동기와 목적에 관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왔다는 것을 고통스럽지만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감정이 어떠해야만 한다고 자신에게 늘 말해 왔기 때문에 나의
감정들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햇던 것이다. 언제나 사회적으로 훌륭하고 성스러운
사제 역할을 하는 데 몰두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왜 말하기를 두려워하는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경험이 나의 기도생활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에 관한 자아의식을 스스로 깨우치고 반성하는
것이 내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 강한 사람을 혼돈시키는 세상의 약한 사람들 >
- 새로 배운 자아의식의 교훈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에게 하느님께서
두 번째의 전환기를 마련해 주셨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신경증(노이로제)이 심한 한
여인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 노력이 필요한 환자였고, 끝에 가서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조금밖에는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것이고, 정상인의 기능을 최소한도밖에
발휘하지 못하리라고 판단되었다. 언제나 성공하는 데 익숙한 데다 즉각적인 확인을
얻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에게 이러한 환자는 가장 어려운 짐이었다. 이 여인과의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지는 동안 한 가지만은 분명히 느껴졌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사람
들을 사랑하고 도우려는 나의 욕망이 이 접촉으로 말미암아 순화된다는 사실이었다.
비뚫어진 선도 똑바로 쓰시는 하느님이 이 여인을 통해 나에게 은총을 베푸시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여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치료하는 몇 년 동안의 내 기도생활은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이 신경증 여인은 내 생활 속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녀는 약 7년전
초여름에 찾아와서 첫 진찰을 받았었다.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도 나아
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실패하였고 실패를 싫어했던 나는 자연히 화가
나고 몹시 불쾌했다.

< 그분은 누구시길래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가 >
- 그해 여름이 다 갈 무렵 어느 날 그 여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날 전화에서 들려
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나의 ‘예리한 진단력’은
그녀에게서 어떤 새로운 평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전화를 한 목적은 마지막 3년 동안
베풀어 준 인내와 도움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어요./ 뭐라고요?/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어요. 그 전에도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이제 그분을 알게 되었어요./ 무슨 환상을 보셨다는 뜻인가요?/
아녜요. 환상이 아니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만났어요.”

- 그녀를 다시 사무실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귀로 들었던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치유된’ 사람이었다. 심리요법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재생
심리요법으로 어는 정도 생활에 적응할 수 있고, 생활을 꾸려나갈 심리적 도구를 모색해
나갈 수 있긴 하지만, 치유되거나 완치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앉아서 나에게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이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완전히 치유된 사람
이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나에게 그녀의 체험을 얘기해 주었다.

- 그녀가 어느 날 기도회에 참석했을 때 어떤 사람이 모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라고 요청하며 했던 말이다. “당신 영혼의 모든 문과 하느님을 향하여 열어
보이십시오. 모든 방문을 닫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차지하시도록 열어 놓으십시오. 하느님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신앙의 깊이는 하느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삶을 인도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하나의 선물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당신의 삶과 당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십시오.”

< 깨어 기도하라 >
-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어느 날, 어느 시간에
하느님께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에서도 여러 번 하느님의 개입을
체험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 여인이 하느님의 ‘시간’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이끌어 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 기도회
에서의 권유대로 예수님을 자신의 영혼과 삶의 세계 속으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초대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께 무조건 승복하였다.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그녀의 말을 믿고,
그녀를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주인이 되셨다.

- 그녀의 말이다. “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과 나 사이에 높고 단단한, 뚫을 수 없는 벽이
있었습니다. 나는 자그마한 선물들을 벽 너머로 던지며 누군가가 저쪽에서 받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차갑고 불만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순간,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 때문이었는지 그 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맞이하셨습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내 영혼의 봄 >
- 그날부터 나는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나는 내 영혼의 많은 방들을 열어 놓고 예수님을
초대했다. 내 영혼의 파산과 내 삶의 방향을 상실함과 평화와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의
결여를 예수께 거듭 호소하였다. 그리고 성령이 내 마음 속의 모든 벽을 무너뜨리고 오랜
동안 쌓아 올린 모든 장벽을 파괴시켜 주시기를 갈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쟁의식과 성공을 향한 끝없는 갈망, 그리고 칭찬과 아첨에 대한
욕구를 떨쳐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때 내 마음 속에 일어난 것은 오직‘봄’이 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 나는 다시 한 번 절실하게 필요하던 새 안경을 쓴 듯한 기분이었고, 그 동안 흐릿하고
잘 안 보이던 것들을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았다. 능동적인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은 이상하고
두렵게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의 삶이란 인내의 시험장이며 적자생존의 경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는 세상은 따뜻하고 우애에 차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세상이며 사람
들은 남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형제자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때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어떤 심리학 이론에 의해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인가, 나는 하느님께서 진정 만지셨다면
그 경험은 아래의 세 가지 시험을 이겨야 한다고 믿고 있다.1) 시간의 시험 - 하느님의
‘시간’은 확연히 눈에 보이는 지속성이 있다. 우리는 그분 은총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고
그분과 만나는 시간에 그분을 뵙게 된다. 2) 현실성의 시험 -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
새롭고 활기찬 삶이 된다. 하느님은 나를 더욱 깊이 인간의 삶 속으로 끌어넣으며 내
마음과 내 입에서 새로운 긍정의 대답이 나오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3) 사랑의 시험 -
하느님의 손길에 마음을 열었던 사람은 그 때문에 하느님과 더 닮게 된다. 이미 나를
만지신 하느님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시, 그리고 또다시 만지시리라 믿는다. 그때마다
새롭게 그분의 손길을 느끼고 그분을 찾을 것이다.

<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 >
- 기도란 진실과 신뢰 속에서 서로 말하고 듣는 사랑의 관계이며 의사전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 정직하게 말한다는 것이 기도의 첫걸음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느님 앞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주는 것’은 자신을 드러냄
으로써 자신을 주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한 ‘자기 노출’이 없이는 진정하게 줄 수 없는
것이다.
-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은’ 행위는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 준다. 심리학자 융은
신경쇠약증을 내적 분열, 내면의 투쟁, 분열된 자아라고 정의하였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내 몸 속에서 싸우고 있는 또 하나의 법’이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가
“인간은 약하다.”는 전제하에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일 때에만 진정한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지체가 분열된 상태에서 마음속에 선과 악이 뒤범벅되어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는가?

< 하느님께 귀 기울이다 >

- 나에게 있어 하느님께 대한 사실상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
십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저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고, 저의 보잘 것 없는 제한된 두뇌
속에 당신의 생각과 식별력을 불어넣어 주시며, 당신의 눈을 통해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저의 약한 의지력 속에 당신의 힘과 욕망을 불어넣으시고, 이 보잘 것 없는
질그릇 속에 당신 거룩한 은총을 가득히 부어 주시는 겁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삶의
빵과 물고기를 받으시어 이 세상의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는 겁니까? 당신은 진정 누구
십니까?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시고, 저를 포근히 안아 주시고, 저의 목마른 넋 위에 당신의
뜨거움과 푸근한 손길을 느끼게 하여 주십시오.”

- 하느님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기도를 시작하고, 하느님 당신이 누구이며
또 내가 누구이고, 나의 삶과 이 세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실 때 귀 기울이며
기도를 끝마친다. 내가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시기 위해
이용하시는 나의 감각과 지각 기능을 모두 조용히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 나의 안테나 >
- (나의 지성) 하느님 앞에 나를 바쳤을 때 하느님은 나에게 오셔서 나 자신과 나의
문제들을 당신의 영원한 눈으로 보게 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각을 내 마음 속에
넣어 주시고 특히 당신의 판단력을 내게 주셨다. 그리고 나의 시야를 넓혀 주시고,
삶을 사는 데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별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 (나의 의지)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시인했을 때에야 하느님께서는 나의 삶이 조금은
뜻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시작했다. 나의 약함을 인정했을 때에야 그분의 힘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 (나의 감정) 내가 감정을 상했거나 용기를 잃었을 때, 아니면 고독이라는 은밀한
아픔을 느꼈을 때, 혹은 남의 비판을 받거나 일에 실패하여 슬퍼졌을 때, 하느님께서는
내게 오셔서 나를 위로하여 주신다.
- (나의 상상력) 하느님은 상상력의 힘을 통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다. 하느님이 말씀
하실 때는 언제나 ‘무엇인가 놀랍고, 독특하며 영원한’ 것이 있다.
- (나의 기억) 하느님께서 우리 두뇌에 저장된 어떤 기억을 자극시켜 우리와 대화를
하신다면 과거에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과 자애를 상기시켜 주심으로써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막아 주신다.

< 대화 기도의 필요성 >
- 우리는 다섯 갈래의 길(안테나)을 통하여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통교를 할
수 있다. 물론 하느님의 목소리를 세심하고 지각 있게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로 경청할 줄 알고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도에는 사람의 체험만큼이나 여러 종류가 있다. 아름다움과 음악과
무용과 인간 상호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기도가 있고, 묵상과 무언의 기도도
있다. 그러나 서로를 드러내는 대화의 기도가 나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이다.

-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은 대화를 통해서이다. 처음 시작할 때면 우리는 잘못된
인상, 왜곡된 관념, 근거 없는 공포 그리고 개인적 편견에 가득차 있다. 그러나 점차적
으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드러내 보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 주심에
따라 우리는 잘못된 인상을 교정하고,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고, 하느님의 신비하고
자애로운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내 생애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가 가장 필요로
하였던 것은 하느님께서 진실로 나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대화의 기도에서 성공을 거둬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분의 생각이 나의 지성을 성장시키고, 나의 의지 속에 그분의 힘과 갈망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어두운 밤에 그분의 빛과 목소리를 듣고, 고난을 당할 때에
그분의 평화로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 순간
나는 하느님이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으며, 나 자신도 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이야기를 끝내면서 >
- 대화의 기도를 하며 겪은 두 가지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끝마치려 한다.
첫 번째의 체험은 나의 흡연 습관과 관계된다. 어느 날, 아침기도를 하며 속으로 빨리
아침 커피 한 잔과 첫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하느님께서 이 문제에 관해 말씀하기를 원하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끄러운 죄를 고백하고 “아무래도 저에게는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하고 기도를
마쳤다. 하느님의 발밑에 엎드려 나는 자기 극복을 못한 수치감 때문에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바로 그때 내면으로부터 이러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너에게 줄 힘을
가지고 있다. 갈구하면 너의 것이 되리라.” 나는 곧 대답했다. “좋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면 제가 할 바는 꼭 하겠습니다.”
이 체험을 한 이후 나는 전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어지고, 그보다도 더 신비스러운 일은 담배 맛이
어떠했다는 기억조차 없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 나의 두 번째 체험이다. 우리 수도회의 대주교가 세 사람의 신학자를 선택하여 우리
교구의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오늘날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도록
했다. 이 강연의 마지막 날은 내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청중은 내가 함께 살며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나는 하도 여러 번 강연을 해보아서
불안하거나 초조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연사들이 먼저 강연을 하는 동안 나는 강연을 잘하게 하여 주십사하고 예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주치의이신 예수님과 의논하며 나의 초조와 불안을
검토해 보았다. 그날 밤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온 예수님의 진단은 나와 나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진단하셨다. “네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네가
어떤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친구들이 네가 얼마나 보배로운
존재인가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아주 멋진 연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연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을 원한다. 너의 친구들은 너에게서 감명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바라고 있다.”
내가 연설하던 그날 밤, 나도 사랑의 행동을 하겠다고
조용히 다짐하고, 사랑하는 나의 형제 친구들을 위해 강연을 하였다.

- (책 속에) 나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얼마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저의 이야기 중에서 특히 저의 약점과 불신에 관한 고백은 말씀드리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더구나 활자화된다는 사실은 나의 가슴을 죄는 듯하였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하여
그대로 밝히기로 하였다. 진정한 사랑의 선물은 자기를 그대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수가 없다. 여러분은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제가 의도하였던
대로 하나의 사랑의 행동으로 받아주시기 바란다.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시길 빌며.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0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7.04.




[ 인생피정 ]

- 지은이 : 이제민, 펴낸곳 : 생활성서/ 256p
- 바쁨 속에서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인생피정 이야기
- 지은이 프로필 : 마산교구 소속. 1979년 오스트리아 그랏츠대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
1980년 사제 서품,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 1986년
마산교구 양덕본당 보좌, 1987년 삼천포본당 주임신부, 1989년부터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봉직 등. 저서로는 '원효와 그리스도교(독일어)', '통일교 그 실상과 오해'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창조 신앙'이 있다.

[ 표지의 글에서 ]

첫사랑은 순수하고 그 느낌은 무엇보다도 강합니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여러분은
하느님과 처음 만났던 그 첫사랑의 순간으로 돌아가 그 열렬한 느낌으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삶의 구비구비에 숨겨진 행복의 조각들, 피정은 그 조각들을
줍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인생은 피정입니다.
바쁨 속에서의 여유와 창조적 삶을 꿈꾸는 이 시대인들께!



[ 책머리에 ]


- 현대인은 바쁘다. 바쁜 것은 삶을 즐기고 여유를 찾기 위해서 아닌가? 그런데 모두가
바쁘게 삶을 꾸려나가는 동안 사회는 더욱 삭막해지고 인간미도 없어지는 듯하다. 바쁜
가운데 찾는 것은 무엇일까? 바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나? 바쁨과
여유가 조화를 이를 때 우리의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우리가 인생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이고, 남이 보이고, 인간이 보이고, 사람 사는 집이 보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 보일 것이다. 그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 보일 것이다.

- 피정은 우리를 이런 삶에로 인도한다. 무미건조한 듯한 우리의 일상으로, 생명이 없는
듯한 사막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생명의 원천에서 목을 축이게 하고, 바쁜 가운데 우리를
잃지 않고 우리를 쉬게 하며, 모든 것의 의미를 찾아준다. 쉼과 여유를 즐기는 삶을 위해
우리는 피정을 해야 한다. 인생은 피정이다. 그동안 <사목>에 연재(1996년 2월~12월)한
글을 생활성서사에서 모아 단행본으로 엮었다.


[ 1장. 인생은 피정이다 ]


< 인생은 피정이다>

- 우리는 인생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마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기며 살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쉽게 교만해지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꺼려하고, 대인관계에서
부자연스러운 경우를 만들어내곤 한다. 인생에서 시행착오는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무수히 반복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어쩌면 인생은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자기의
인생을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의 과정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는가이다.

- 과정은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인생 자체가 과정이다. 인생의 노트에 끊임없이
낙서하며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연습생의 삶,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이 사실을 받아
들일 때, 또는 깨달을 때 우리의 행위는 겸손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다. 피정(수련,
연습)은 인생이 연습(수련)이고 과정임을 알게 해준다.

-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어떻게 인생 연습과 피정을 하셨는지를 생생하게 묘사
해준다.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는 장면이다. 광야는 예수께 인생 연습의
장소였다. 피정의 장소였다. 예수께서는 왜 광야로 나가셨을까?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유혹을 받으셨다. 시험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악마의 시험을 당하
시면서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셨다. 굶주림과 재물과 영예와 권세의 유혹에 맞선
싸움, 이 싸움은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연습을 위해, 피정을
위해 광야로 나가셨던 것이다.

- 피정(避靜)은 세상을 떠나 고요에 잠기는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의
체험처럼 외로움과 위로, 무서움과 아늑함,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체험하고, 이
만남을 통해 인생에 주어진 창조의 첫 순간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피정은
창조의 이 첫 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인간들의 인생 연습을 위한 시간인 것이다.

- 현대인은 연습 없이 쉽게 살려고만 하고, 쉽게 벌어 쉽게 쓰며, 쉽게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 쉽고 편리한 것만 찾고, 당장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쉽게 번 돈으로 쉽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 여긴다. 쉽고 살고 싶은 욕망은 어느새 인간에게서 인간됨의 기본 정서를
앗아가고 있다. 이는 인간을 나태하게 만들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됨을 잃게 한다.
이런 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다. 점점 비인간화되어 가면서도 느끼지 못한다.
포용력을 잃고 너그러움마저 잃어버린 그는 자기중심으로 편하고 쉽게 살아가는 것.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유의 정의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광야를 다시 찾아야 한다.

- 피정은 주님을 찾는 운동, ‘나’를 찾는 연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또는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일컬어질 수 없으며,
주님은 결코 인간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주님은 끝까지 신비
이다. 내가 주님을 찾는 것은 주님의 신비 안에 인도되기 위해서이고 결국은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안식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를 연습해야 한다. 인생은 연습이고 피정이다.

- 피정은 ‘나’라는 인생의 무대에서 주인공인 그분을 진솔하게 만날 수 있도록 묵상해
보는 시간이다. 나름대로 매력을 느끼고 보람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자유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뛰어든 그 무대가 실상은 그분이 마련하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은 삶이 어려울수록 이 삶에로 부르신 그분과의 만남,
첫사랑과 같은 그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용기를 얻을 것이다.

-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성서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까지 그분에게서 떠나 있었다”(루카 4,13). 악마는 아주
물러간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까지만 떠나 있다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악마.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유혹 중에 있다. 이는 잘 쉰다는 것은 쉽지 않고, 우리를
창조의 순간으로 인도하기란 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인생이 하나의 과정임을
깨우쳐 주는 말이다.

< 어린이가 되는 연습 >


- 피정은 다시 어린이가 되는 연습이기도 하다. 어린이는 아직 자기의 일을 자기의
주관이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고는 하나, 그만큼 자기 생명의 원천에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른이 되면서 출생의 순간을 잊고 거기서 자꾸 멀어진다. 출생의
순간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부터도 멀어진다. 출생의 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시 어린이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완성을 향한 엄청난
연습이 아닐 수 없다.

-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 18,17).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해 어린이로 돌아가야 하며, 나아가 부모로
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가장 원초적인 자기 모습에 도달해야 한다.

-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원천에서 산다는 것이지, 어린이 수준의 상태에
머물거나 어린이 흉내나 내며 산다는 뜻이 아니다. 어린이는 자라면서 어른이 되기
마련이다. 다 큰 어른이 유아상태에 머물러 어린이 흉내를 내고 어린이처럼 방실방실
웃는 것은 천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정신 이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어린이
상은 지긋한 어른의 나이에도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순수한 그 얼굴이다.
순수한 할아버지는 어린이가 아니면서도 어린이다. 말하자면 어른을 뛰어넘은 어린이다.

- 어른 중에는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 있는가 하면 어린이의 순수에 도달한 어른이
있다. 후자의 이 어른은 말하자면 어린이와 어른을 거쳐 이른 어른이다. 어린이-어른
-어린이의 3단계에서 도달한 어른에게는 어린이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생동한다. 예수의 말씀은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이기주의,
온갖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 차 어린이의 순진 무구함을 무자비에게 짓뭉개는 어른의
단계를 극복하고 그 후의 3단계의 어린이 단계에 도달하라는 말이다.

-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부터’ 즉 물과 성령으로 세 번째 단계의 인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인간은 영(靈)의 인간이다. 영의 인간은
어린이와 어른의 단계를 거쳐 어린이에 이른 인간이다. 자기 일생의 삶을 통해 자기
원천을 찾은 사람,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인 영원을 찾은 사람, 자기를 찾은
사람은 영의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어린이 이전의 어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시
원천을 찾아야 한다.

-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서 우리는 늘 이 3단계(속-성-속/俗-聖-俗) 도식을 만나게
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는 씨앗-열매-씨앗, 생명-죽음-생명의 3단계 삶이 암시되어 있다. 부활(영생)이
무엇인가? 그것은 3단계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영원한 삶, 죽음 후에 오는 삶, 이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표현한다. 죽음 후의 그 삶(부활)은 죽음 전의 삶과는 다르다.

- 우리 생활 속에 널려 있는 여러 가지 규칙과 규범을 통해서 우리는 3단계의 인생을
실천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인간이 사는지 법이 사는지 모르는 삶으로 삶도 법도
다 잃어버리는 삶이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은 대체로 율법주의자, 도덕주의자들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이 법을 벗어나 살고자 시도하는 삶이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은 안식
일보다 사람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막상은 자기 편리대로 사는 편의주의자다. 그는 자칫
방종한 자가 되거나 깨달은 척하며 위선적으로 살기 쉽다. 세 번째 경지의 사람은
참으로 깨달은 사람, 자유인이다. 행위에 거침이 없고 겸손하다. 3단계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구원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예수께서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르시고 또 그대로 사신 분이다. 그는 율법에 얽매
이지 않고 참으로 해방된 자유인이었다.

- 피정은 우리를 두 번째 단계를 뛰어 넘어 세 번째 단계에 이르게 한다. 세 번째
단계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곧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우리 인생의
목표이다.

< 인생과 쉼 >
- 세 번째 단계의 인생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순수한 인간적 노력과 의지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쉼이 필요하다. 쉼은 자신을 신뢰와 영에 내맡긴 가운데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말
잘 쉬기 위해선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다 휴식시키고 쉼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창조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쉼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쉼 자체, 즉 안식이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 현대인은 쉬지 않고 열심히 뛰는 것만을 성공의 비결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쉰다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행위로 비칠 수 있다. 쉼을 단순히 ‘열심’의 반대말
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공 위주의 삶에 쫓기면서 무의식중에 형성된 느낌일 것이다.
현대인에게 쉰다는 것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고,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은
비생산적일 것이다. 쉰다는 것은 경쟁에서 지는 것이고, 경쟁에서 지는 것은 인생의
패배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뛰고 기계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 현대인이 쉬지 못하는 이유로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도 한몫을 한다. 자기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처럼, 자기가 없으면
학교가, 본당이, 사회가, 나라가 안 될 것처럼 사사건건 끼어들어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간섭하는 일에 묶여 자기를 가만두지 못한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늘상
‘쉬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그말 이면에는 쉬지 않고 일하는 자기를 과시하고픈
욕망이 깔려 있다.

- 달력에는 안식일인 주일이 한 주간의 맨 첫날에 온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잘못
이해한 때문일까? 그러나 이 달력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가장 잘 해석해주고
있다. 이것은 안식일이 하느님께서 창조를 끝내신 후 피곤해서 쉬신 날이 아니라
안식일과 함께 비로소 당신의 창조 사업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후의 쉼이 없었다면 창조사업은 지속되지도
마무리되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쉬는 동안에 창조가 완성된다.

- 하느님은 우리 피조물과 사귀기 위해 안식을 필요로 하신다. 6일에 걸친 창조와
하느님의 쉼에 대한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다.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안식일의 하느님이시고, 이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삶의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이 안식을
잃고 있다.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처럼 말씀하시는 예수는 그야말로 영의 인간이다. 예수께서는 영의 인간으로서
우리를 당신의 쉼으로 초대하신다. 그의 여유와 쉼에서 우리는 온유와 평온과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 믿음과 들음 >
- 하느님의 쉼은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신뢰하지 않으셨다면
피조물에게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없었을 것이고 안식을 취하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피정은 신앙의 인간이 되기 위한 연습이다. 잘 쉬기 위하여 내맡기는 법을 배워야
하고, 또 맡기기 위하여 신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사고로 바쁜 사람들은 남을 신뢰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마저 쉬게 나두지
못한다. 그리고 불안하게 한다.

- 우리는 신뢰와 내맡김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인간 존재를 볼 때 자신을 맡기고
한적하게 가장 잘 쉴 수 있었던 때는 언제였고, 자신을 모두 내맡겨 놓고 산 때는
언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였고 어머니의 품속에 있을
때였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어머니의 모태 속으로 옮겨 놓고 생각해 보자. 거기서는
‘지금 또는 장차 무엇을 할까?’하고 질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곳에서는 내 의사로
무엇을 결정하거나 행할 수 없다. ‘이제 이 세상에 나가 볼까?’라든지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할까?’하고 계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심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내맡긴
채이며, 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거기서는 그에게 모든 일이 그냥 일어날
뿐이다. 모태 속의 태아는 조건만 맞으면 언제나 피고 지는 한족이 꽃, 한 포기 풀과도
같다.

-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내맡기는 존재’로 형성되어 있다. 신뢰하고 내맡기기
위해서는 ‘들음의 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맡김은 근원적으로 듣는 데서부터
가능하다.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고 바오로는 이야기 하였다.(로마10,14) 그런데
들음은 ‘들려오는 음’에 귀 기울이는 데서 가능하다. 들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근본 생활 정서이다. 인간은 들음과 함께 형성된다. 한동안 신학적
주제로 애용되었던 ‘인간은 듣는 존재이다’라는 명제가 현대 의학에 의해 실제로
증명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인간의 감각 중에 가장 먼저 작용하는 것이 청각
이라고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맨 먼저 작용하기 시작하는 기관이 귀이고,
한 생명을 마감할 때 맨 마지막에 멈추는 것이 귀라고 한다. 어머니의 뱃속은 창조가
원초적으로 이루어지는 곳, 안식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부터 나왔다.
인간은 원초적인 소리, 안식일의 하느님의 숨소리,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듣던
그 태초의 소리를 듣도록 해야 한다.

- 게쎄마니 동산의 예수께서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거기서 그는 드디어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천지 창조 때 아버지와 함께
계셨을 때 들었던 음성,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음성을
들으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모든 것을 내맡기고
원초적인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순간은 구원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무질서가 질서 지어지고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는 순간이었다. 피정은 듣는
연습이다. 귀를 기울여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온갖 고통 받는 인생의
소리도 들려온다. 고요를 듣지 못할 때는 그냥 고통의 소리일 뿐이던 것이 이제는
하느님의 소리로 들려온다. 그냥 자연의 소리이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빗소리,
언덕을 넘어 부는 바람 소리, 기암절벽에 부딪치며 내는 파도 소리도 천지 창조 때
하느님과 인간이, 하느님과 자연이 만나는 태곳적 소리로 들여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듣는 존재이다. 남에게 내 소리를 들려주기에 앞서 남의 소리를
듣는 존재이며, 남의 문화에서 나의 복음을 들려주기에 앞서 그 문화에서도 들려
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존재이다. 쉼은 들음에서 가능하고 들음은 쉼에서
가능하다. 안식일의 하느님은 스스로 피조물의 소리를 들으시면서 침묵 속에서
당신의 소리를 들려주신다.

< 기다림 >
- 믿음과 들음은 기다림을 요구한다. 내가 얼마나 잘 쉬는 존재인가는 나의 기다림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쉴 줄 아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며 가장 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가장 잘 쉴 줄 안다. 기다리는 사람은 느긋하여 남에게 편안함을 준다. 이에
반해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안절부절못함으로써 남까지 불안하게 만든다.

- 하느님은 우리 모든 인간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며 우리보다 훨씬 더 그날을 기다리
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더없이 악하게 보이고 더없이
희망 없이 보일 때 우리는 하느님의 기다림을 배우며 이 세상을 위해 더욱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하느님의 기다리는 마음에 대한 신앙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온갖
좌절과 실망을 극복하고 희망의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존중하고 사랑하신다. 우리가 진정
구원을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이 기다리는 마음, 침묵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자신을 낮출 줄 아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 이 마음 없이 평화를 부르짖고, 이 마음
없이 인간 존중, 생명존중을 부르짖는다면, 그리고 이 마음 없이 사치 풍조, 인명
경시 풍조, 부조리 등의 근절을 부르짖는다면 그 소리는 허공을 맴도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인간이 되기 위해 적어도 여덟 달 이상은 어머니 뱃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기다림의 기간을 채우기 싫다고 미리 세상 구경을 나왔다간 그는 죽고 만다.
기다리지 못한 그는 인간이 될 수 없다. 기다림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 존재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을 포기하는 것은 ‘나의 인간됨’뿐 아니라 ‘남의
인간됨’까지 방해한다. 온갖 어두운 사건들, 인신매매, 어린이 유괴, 방화, 살인
사건 등은 모두 기다릴 줄 모르는 성급한 상황에서 빚어진 비극들이다.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한 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우리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해나가야 할 일이다.

- 우리 민족은 곰을 건국 신화의 주제로 삼아 인내와 기다림을 인간됨의 가장 근본
자세로, 이 민족의 가장 근본된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다림을
아는 자만이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근본 자세에서 홍익인간의
위대한 이념을 세울 수 있었다. 남을 널리 이롭게 하는 정신, 이 정신의 실천은 기다림
이라는 근본적인 자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 기다리는 인간은 자기를 기다려주는 하느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존재에게도 순명과 겸손의 덕으로 대하며 사랑과 용서를 실천
한다. 그러기에 그는 항상 여유를 보이는 희망의 인간이다. 나는 지금 이 사회, 이
민족이 겉으로는 각박하고 성급해 보일지언정 그 깊은 마음에는 확실히 이런 기다림,
신뢰, 겸손, 희망, 사랑, 용서가 간직되어 있다고 믿는다.


[ 2장. 쉼과 창조 ]


< 시간의 거룩함 >

- 쉼 가운데 창조가 이루어진다. 쉼의 기본 정서인 고요가 깨어지는 데서 인간의
정서가 흔들리고 인간 공동체가 혼란스럽게 된다. 쉼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과 만나게 되며, 나아가 우리 자신이 이 모든 것과 연대하여 있고, 모든
것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첫날의 ‘시간’
으로부터 여섯째 날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창조사업을 하시고 일곱째 날 쉬셨다.
하느님의 창조는 일과 쉼의 조화였다.

- 하느님께서 제일 첫날 하신 일은 낮과 밤을 만드신 일이다. 낮과 밤이 반복되는
것은 시간을 의미한다. 어떤 신학자는 “하느님의 제일 첫 창조물은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대단히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브라함은
예수보다 1,700여 년이나 더 전 사람이었으니 지금 우리 시대에서 예수 시대를 바라보는
만큼의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 까마득한 과거의 사람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예수와
아브라함은 동시대인처럼 느껴지고, 같은 풍습 속에 살았던 것처럼 생각된다.

- 오늘날은 시간이 옛날보다 빨리 흘러간다. 이를 우리 인생의 시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산을 올라 갈때와 내려올 때의 시간에 대한 느낌이 다르듯이 인생도
그와 같아서 생의 절반쯤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어릴 때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속도는 빨라진다. 같은 한 달이지만
어린이와 노인에게는 그 길이가 다른 것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이처럼
상대적이다.

- 시간은 인간에게 상대적으로 느껴지게 이유는 하느님의 영원성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다. 하느님 안에서는 천년의 시간이 하루 같다. 그 안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을 떠나서는 영원을 체험할 수 없다. 인간에게
시간은 영원과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시간을 당신의 첫 창조물로
삼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간에 제한된 인간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태초의 그 시간은 인간이 영원한
하느님을 만나는 생명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체험할수록 그는 영원을 체험하게 되고,
그렇지 못할수록 영원은 그에게 허구가 된다.

- 태고의 창조 설화 구상은 첫날의 시간 차조와 일곱째 날의 하느님의 안식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로써 시간은 모든 것이 흘러가고, 모든 것이 전개되며 발전하는 테두리로서
정해졌다 (모든 것은 시간 안에서 흐르고 전개된다). 시간은 모든 것이다. 시간은 인간
에게도 원칙이다. 하느님께서 시간을 제일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은 시간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체험임을 말해준다. 인간은 시간을 체험함으로써 인간이 된다. 이 체험을
'내가 죽인 예수'의 저자인 사형수에게서 본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었고, 부활의 시간이었다. 인생이 하나의 시간임을, 그리고 그 시간이
영원과의 만남임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다.

- 우리는 이 시간을 현재 안에서 체험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생로병사의 모든 시간은
단순히 운명적인 시간이 아니라 은총의 시간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첫날 창조하신 시간은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피조물이 처음 만나는 시간이며,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거룩한 시간이다. 첫 인류는 이 사건을 기념하며 모든 시간에서 이 거룩함을
체험하고 있다.

- 현대인이 시간을 잃기 시작한 것은 낮과 밤의 구분(첫날의 창조)을 망각하면서 하늘을
낮처럼 밝혀 밤하늘의 별을 셀 수 있는 낭만적 정서를 잃으면서부터일 것이다. 밤과 낮의
구분을 잃고 자연의 빛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불행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어둠을 참지
못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인공의 빛을 밝힌다. 구름이 끼고 조금만 어둑해지면 습관적
으로 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낸다. 여명의 희미함이나 해거름의 어슴푸레함을 즐길 여유를
잃어가고 있다. 나는 아침 햇살과 저녁노을 좋아한다. 장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시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 시간을 잃으면 영원과의 만남을 잃고 생명도 잃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세분화된
시게를 차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인공의 시간과 속도에 쫓기며 살아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빨리빨리’의 시간에 자신을 잃어야 하는가? 외국의 웬만한 관광지에서는
한국의 별명을 ‘빨리빨리’라 부를 만큼 한국인의 서두름이 꼬집히고 있다.

-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22) 하고 말씀하신다. 내일 걱정은 오늘 하지 말라고
하신다. 현재를 찾으라는 것이다. 현재에 주어져 있는 은총의 시간을 느끼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살라는 요구이다. 시간을 잃으면 그 나머지는 아무 소용이 없다. 시간을
잃으면 문화도, 역사도, 그 안에 서린 삶도 다 잃는다. 시간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시간을 잃으면 삶의 공간은 무질서하게 되어 그 안의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린다. 시간은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

- 기도는 우리의 태초의 시간, 하느님과의 첫 만남이 있었던 그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조용히 기도하셨다면, 거기서 그 태초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자신을 그 시간으로 옮겨놓을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기도는 태초의 그 시간에 우리를 잠기게 한다.

< 공간의 거룩함 >
- 하느님께서 첫날 시간을 창조하신 후 둘째 날에는 공간을 창조하셨다. 이후부터
시간과 공간은 마치 하나의 낱말처럼 붙어 다닌다. 이 시공 안에서 푸르름이 생겨났고
새와 물고기, 들짐승, 길짐승 등 온갖 생명이 생겨났다. 그 공간은 말하자면 생명을
위한 공간이었다. 하느님은 이 공간 안에서 모든 생명들이 서로 연대하며 살도록
하셨다. 생명의 공간 안에서 우리는 자연과 연대하며 하느님 뜻에 맞갖도록 살아야 한다.

- 창세기 저자는 둘째 날 공간의 창조를 이렇게 묘사한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창세 1,6-8). 하느님께서 그렇게
공간을 만드신 것은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이어지는 창조 셋째 날에서
볼 수 있다.

- 하느님께서는 공간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다시 아래 궁창에 있는 물을 한데 모아
바다와 물을 가르셨다. 그리고 “마른 땅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거라”하고 명하셨다.
대자연의 창조다. 모든 자연이 자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하느님은 물을
초록색으로 단장하셨다. 온갖 자연이 푸르름에서 자라게 하셨다. “초록빛! 그것은
창조설화에서의 첫 번째 색깔이며, 하느님이 좋아하는 색일 것이다. 초록빛 그것은
생명과 살아 있는 숨의 빛깔이다.

- 땅을 온갖 푸르름으로 단장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창조 여섯째 날에 “땅은 온갖
짐승을 내어라”고 하시며 생명체로 이 생명의 공간을 채우신다. 푸르름뿐만 아이라
온갖 짐승을 내신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짐승들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땅은 창조사업의 능동적인 동업자다.
엄밀히 말해서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임을 받은
땅이듯, 온갖 짐승을 산출해내는 것 역시 하느님의 위임을 받은 땅이다.

- 시간의 창조로 밤과 낮을 만드시고 밤에는 달과 별을, 낮에는 해를 주시어 시간을
질서 지으셨듯이, 공간의 창조 후에도 모든 피조물들에게 각각 고유한 생명의 공간을
주시어 질서 있게 살게 하셨다. 물고기에게는 바다를, 새에게는 하늘을, 길짐승 들짐승
집짐승에게도 각각에 맞는 생명의 공간을 주셨다. 모든 피조물들은 각자의 생활공간과
생계 수단을 분배받았다. 공간은 모든 생명체가 연대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장소이다.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생명체를 멸종시킨다면 언젠가는 인간도 도로 당하게 될
것이다. 동물 세계가 없으면 인간 세계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에 창조 설화는
우리에게 모든 동물들과 친하게 사귀라고 당부한다.

-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연대성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이 공간의 거룩함을
다시 발견할 때 주어진다. 자기가 사는 공간에서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모든 생명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모든 공간이 하느님의 창조와 쉼의 공간임을
보아야 한다. 모든 공간이 하느님의 공간, 거룩한 공간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공간
안에서 생명의 거룩함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공간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
내는 거룩한 공간임을 체험해야 한다.

< 종교적 인간 >

- 종교인이란 일상의 삶에서 성속(成俗)의 일치를 이룬 사람, 자기가 처해 있는 시공
에서 천지 창조의 순간과 그 공간을 건드린 사람이다. 종교인은 자연 안에서 자연과
초자연, 자연과 은총의 만남을 살며, 이런 차원에서 3단계에 이른 자연인이다. 종교인
에게 자연은 단지 ‘자연스러운’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종교적 가치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와 우주적 현상들의 구조 그 자체 속에 거룩함의 상이한
양상들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적 인간은 세상에서 거룩한 것의 수많은
양상들을 발견한다. 세상은 단순히 속(俗)이 아이라 거룩한 것이 계시되는 속이다.
세상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나타내는데 보여준다.

- 현대인은 자연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늘(대기)의 오염,
물의 오염, 땅의 오염, 숲의 오염은 자연을 탈신성화(脫神聖化)한 결과이다. 이들을
신과 분리시키며 그들의 거룩함을 보지 못한 결과이다. 우리는 다시 창조 설화에서
태초에 물이나 하늘을 중시하였고, 물을 중시하였으며(세례 등), 또 땅을 인간의 생명,
인간의 어머니(사랑)로 보았다는 데에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자기가 초월을 계시하고 있는 세상 한복판의 사람임을 안다.

- 3단계의 자연의 경지에 이르러 쉼을 찾은 종교인은 만물을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이다. 비종교인이 세계와 자연과 우주 그리고 자기의 행위를 자기에게
로만 향하도록 하는 데 반해, 종교인은 스스로 자기와 자기의 행위를 세계를 향하여,
태초의 하느님과 모든 것이 만나는 그 시간, 그 장소를 향하여 개방한다. 종교인은
열린 세계 가운데 살며 그의 실존은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다. 이는 그가 신들과 교섭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거룩함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종교인은 모름지기 산업화
되고 도시화되어 가는 와중에서도 자기의 우주적 가치를 잃고 있는 종교를 다시 살려야
한다.

-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 안에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지
못할 때 오만해지고 불손해지며 무질서해진다. 그래서 속화되고 거룩함은 사라진다.
종교인은 창조의 시공 안에서 자연과 모든 생명체와 연대감을 가지고 태초의 현안을
느끼며 고요와 안식을 산다. 그는 고요와 안식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인간이다.
그는 모름지기 쉼의 인간, 즉 창조의 인간이다. 그는 시간을 시간이게 놔두며, 공간을
공간이게 놔둔다. 사물을 창조의 사물이게, 일을 하느님의 일이게 놔둔다.


[ 3장. 예수와 그리스도 ]


< 예수의 ‘나’, 우리 모두의 ‘나’를 찾는 존재 >
-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나는 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리고 언제부터
그 젊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주장이 우리의 삶에 그토록 지재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토록 커다란 의미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예수’니 ‘하느님’이니
‘하느님의 아들’이니 ‘그리스도’이니 하는 개념들이 불과 2백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생소한 외래 개념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예수에 대한
물음이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 이처럼 심각하게 던져지고 있다는 것,
그가 구세주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쉽게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무엇을 고백하는가? 어째서 유다인
예수에 대한 그들의 고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의 한국인에게까지도
종교의 근본된 물음이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인간 실존을 대표하는 근원적 인물일 수
있을까? 그리고 어째서 예수께서 단순한 역사적 인물의 범위를 넘어 신앙의 대상이
되는가? 우리가 신앙을 헛되지 않기 위해서, 또 맹목적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하고 또 그 답변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에 대한 물음은 제 삼자의
물음일 수 없으며,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막연히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이 단순히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의 주장이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개관적인 근거가 주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고 가르치는 바가
참으로 진리라면 궁극적으로 성서를 모르고 신앙 조항을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납득이 되고 그렇게 인정되어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
인을 가리지 않는 만민의 구원자이시다’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이 옳다면 예수의
존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비신앙인에게도 의의가 있고
이해 가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의의를 이론적 신앙 지식이나 열심한 행위
안에서만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는 소위 ‘열심한 자’나 예수를 알고 신앙을 고백
하는 자에게만 만나지고 그런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제한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 인간은 누구나 ‘나’에 대해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나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나‘를 잃은 존재가 얼마나 불행하고 허무하고 무의미
한지를 안다. ’나‘를 잃은 인간의 삶은 개인에게뿐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를 잃은 인간들에 의해 사회도 ‘나’를 잃고, 같은 방식으로 자연도, 환경도, 우주도
‘나’를 잃게 된다. 참되게 살기 위해서 인간은 ‘나’를 찾고, 사회의 ‘나’를 찾고, 우주와
자연의 ‘나’를 찾아야 한다. 사회도 국가도 모두가 ‘나’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찾는다면 예수의 ‘나’에서 우리와 온 우주의 ‘나’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자기를 신앙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왜 자기를 믿어야 하는지 사람들이
알고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시간과
몸으로 자기의 존재를 태초의 순간과 공간에서 찾으신 분이다. 그는 창조의 순간을
말씀과 행위로, 온몸으로 사셨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태초의 순간에까지 옮겨놓아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자 해서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면 이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나’를 찾은 한 인간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나’를 찾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나‘를 찾게 해주셨다. 예수의 복음과 가난에서
예수의 ’나를 찾게 된다.

< 예수의 ‘나’에 나타난 복음 >

- 예수의 ‘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를 최초의 순간과 공간으로 인내하며 거기서
우리의 ‘나’를 찾게 해준다. 인간이 처음부터 추구하는 구원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이 복음에 의하면 구원이 발견되는 태초의 그 순간은 지금 내가 활동하는 이 순간에
펼쳐진다. 예수 이전의 인간은 이 구원의 시간을 자기 삶의 영역 바깥 어딘가에서
찾고자 하였다. 자기가 처한 시간과 공간이 영원과의 만나는 장소라는 것을 모르고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이 무지(無知)에서 구해주셨다. 그의 첫
복음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마르 1,15). 라는 말씀이다.

-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 도래했다고 선포하시면서 이 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지금 죽어야 한다고, 지금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이 복음을 몸소 실천에 옮기셨으니, 그이 삶은 강생의 순간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삶이었고, 그 때문에 그의 삶 전체가 부활의 삶이었다. 회개란 이 십자가의 길로
방향을 잡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를 ‘미구에 올 나라’라고 표현하시지 않고 ‘이미 지금
우리 가운데 와 있다’라고 하신다.

- 회계(metanonia)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린다는 뜻인데, 이는 곧 ‘하느님의 방향’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데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로, 인간의 현실로 들어오셨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로의 회개는 인간 그 현실, 나아가 자연과 우주로 마음을 움직여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돌아섬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하느님과 일치
하는 가운데 인류 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일이 실행됨을 의미한다.

- 회개는 현실과 미래를 이원화시키는 사고와 그로 인한 현실부정의 세계관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받아들이고 적극 참여하도록 해준다. 그래서 현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회개다. 회개는 현실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현재와 일상의 새로운 발견인 것이다. 그래서 회개한 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요한 8,11).

- 예수께서 요구하신 회개로는 가난에로의 회개, 원수에게로의 회개, 낮음으로의 회개,
여자에게로의 회개, 십자가로의 회개가 있다. 회개가 최종적으로 일어난 곳은 다름 아닌
십자가이다. 십자가로의 돌아섬은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 ‘나’에 얽매이지
않을 때 나는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가난과 부, 명예와 굴욕, 장수와 단명
등의 이원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높이 못 박힌 곳이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가 열린 곳,
영원한 생명이 제시된 곳, 인류의 참 자아가 탄생한 곳이다.

< 자유인 예수 >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회개를 요구하셨다. 회개는 근원적
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자신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 하느님의 신비로 돌아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관심사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창조와 자연 그리고 그 안에
일어나는 인간의 현실로 자신을 몰입시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현실의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와 죽음으로 회개하신 것도 이런 차원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이 회개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깨닫고 초월한 자유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회개한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회개하지 못한 때문이다.

- 예수는 자유인으로 한적한 곳과 군중 속, 부유한 층과 가난한 층, 지식층과 무식한 층
사이를 거침없이 드나들었고, 고관들의 식사에 응하는가 하면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 재를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자유와 속박의 대립을
초월한 참다운 자유,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뛰어넘는 참다운 옳음, 참다운 정의가
예수의 행위의 표준이며 그 양상이었던 것이다.

- 그분은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분은
자유인이었다. 진실로 자유로운 사람이 율법을 옳게 지킬 수 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유란 의지의 선택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몰입하는 데서, 하느님
나라에로 회개하는 데서 얻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자유롭기 위해서 인간은
하느님 나라를 구해야 하고, 상대적 가치 평가와 인간의 지혜로부터, 그리고 온갖 생각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 참 자유인은 참 사랑의 인간이다. 참 사랑은 참 자유를 얻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다.
참된 사랑은 이웃과 원수의 벽을 무너뜨릴 때 가능하다. 자유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된다. 원수사랑은 자유를 얻기 위한 척도이자 절정이다. 자유로부터 나온 사랑의 행위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것은 누가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인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내가 자유로우면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되며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유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행위에 거침이 없어지고, 모든 행위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무엇이든 행하라”고 하였다. 자유에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며, 순수하게 사랑할 때에 가장 자유롭다. 사랑하는 사람의 웬만한 실수는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지만, 미운 사람의 작은 실수는 곱게 보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해서이다. 모든 사람의 행위가 내게 귀엽게 보일 때 그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하게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롭기 위하여 인간은 사랑을 배워야
한다.

- 가장 자유롭고 사랑할 때는 ‘기도하는 순간’이다. 기도하는 순간에 인간은 자유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만 자유와 사랑을
얻으려 하는 것이 도리어 자기 자신을 오만한 힘의 노예가 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초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잇을 때 인간은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 되며 사랑의
인간이 된다. 가장 자유롭고 사랑하는 인간은 순수하게 기도하는 인간이다.

< 자유와 순명 >

- 기다릴 줄 아는 인간은 순명할 줄 안다. 그리고 순명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순명은 명령 복종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생명에 순명하며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그 생명에 순명할 때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가장 잘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순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다운 자유의
인간, 참 사랑의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하느님께 대한 순명은 인간에 대한 순명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고 메마른 데는 인간이 순명의 정신을 잃은 것도 한몫 한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순명을 잃은 것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순명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힘, 내 의지대로 하겠다는 말인데, 그러나 세상은 내 힘,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 맺는 말 ]


- 쉬는 가운데 창조와 재창조가 일어난다. 피정은 쉼이며 창조의 시간이다. 모든 것은
사실 조용한 가운데, 쉬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변화다. 피정은 변화를 몸으로 입는 시간이다. 피정을 통한 쉼은 변화, 녹아 들어감을
위한 연습이다. 변화하지 않고 녹지 않으려고 애쓴다면 곧 죽음으로 말라버리고 만다는
것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모든 인간들 안에 스스로 변화하며 들어가신 그리스도를 우리도
닮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 세례로 창조의 쉼에 이른 사람은 변하여 새 인간이 된 사람이다.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나’라는 인간 안에 들어와 변화하며 탄생시킨 작품이 새 인간이다. 새 인간의 원형을
예수 강생 사건에서 본다. 하느님께서 변화하며 인간 안에 들어오셔서 새로 탄생시킨
새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사건은 예수의 죽음에서도 일어났다. 예수는 죽음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 죽음은 한 생명의 끝이 아니라 부활이었다. 죽음은 하나의 변화다.
이 변화를 통해 부활의 삶이 다가온다.

-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은
꼭 붙들도록 연습하라 한다. 그 연습을 내 의지로, 힘으로 하려 할 것이 아니라 내맡기는
가운데 행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 요구는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무리이다.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나 당신께 감사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지만, 마땅하고 옳다고 다 실행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에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고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진 하느님의 뜻,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이름으로 살 때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항상 감사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근원을
둘 때 우리는 삶 자체가 기쁨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연습해야 한다.
인생은 피정이다.

-end.




[ 독서 메모 소회 2 ] <독서 021~040>

독서메모를 시작한지 어느덧 9개월이 지나고 있다. 작년 가을인 10월에 시작하여
겨울과 봄을 지내고 여름이 다가오면서 한 해 목표인 50권의 서적중 40권을 읽었으니
80%의 독서를 한 셈이다. 책의 쪽수에 따라 독서 시간이 달라지는데 현재 기준하여
쪽수가 적게는 47쪽에서 많게는 359쪽에 이른다. 책의 형식과 내용 및 수준에 따라
독서의 속도는 느리거나 빠르기도 한다. 보통 200쪽 내외는 부담 없이 독서를 하게
되나 300쪽이 넘는 책은 두터움에 약간 부담이 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책의 쪽수에
관계없이 책에 담긴 내용과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선택적으로 독서하며
메모를 하고 있다.

독서하면서 메모(밑줄 긋기)를 해두는 작업이 반이라면 이를 다시 정리하여 타이핑
(typing)하는 작업(PC로 한글문서 입력)과 개인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과정까지 합하면
반이 소요된다. 이 작업 속에서 독서의 습관화와 책을 요약하여 다시 읽게 되면서
자신의 신앙을 재교육하는 계기가 되는 등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고 있다.

이제는 하루에 잠시만이라도 독서하려는 습관이 생기면서 ‘답게’ 사는 취미생할의
일부가 되었다. 신심서적외에 여러 분야의 서적들(사회, 문화, 과학, 취미 등)도 있으나
요약된 독서메모가 온라인상에서 공유되기 때문에 혹시라도 저작권 시비의 소지가
있을지 염려되어 제한적으로 게시하고 있다. 그리고 영업적 목적이 아닌 개인
홈페이지의 취미생활 일부로 행하는 것이고 본인이 구입한 소유의 책을 기본으로
독서 메모하면서 책의 출처(제목/ 출판사/ 지은이, 옮긴이/ 발행일/ 쪽수 등)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독서메모를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메모는 책의 본문중에서 나름대로 마음에 와 닿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발췌하여 요약(메모)하기로 하였다. 메모중 마음에 드는
내용의 서적이 있으면 벗으로 생각하고 직접 구독하여 정독해 보기를 권장한다.”고
하였고, “소중한 책들을 선물한 지은이, 옮긴이, 펴낸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답게' 살기 위하여 독서 메모를 시작한다.”고 하였다. 현재까지는 별 이의가 없었으나
혹시 책의 당사자가 독서메모의 게시에 이의가 있으면 이메일(홈페이지 초기화면 게시)로
전달바라며, 선의의 목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독서 메모' 게시에 많은 양해 있기를
바라면서 별일이 없는 한 메모는 계속하려 한다.




금주의 독서 메모 041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7.11.


[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

- 지은이 : 송봉모, 펴낸곳 : 바오로딸/ 124p
- 송봉모 신부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중 10편
- 지은이 프로필 :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S.S.L)취득,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서강
대학교 수도자 대학원에서 신약 과목 강의 등

[ 표지의 글에서 ]

실타래처럼 엉키고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삶의 감격을 제대로 느끼며 살아가는
길은 없을까? 일을 일답게, 삶을 삶답게 만들어 가는 비법은 진정 중요한 일과
바쁜 일을 구분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 머리말 ]


< 쫓기는 삶에 대한 반성 >
-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성취한 그 무엇을 올려놓고 진득하게 즐길 시간이 없다.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인간, 아니 일의 노예가 되어 내일을 향해 뛰어가는 동안 우리 인생은 어느새 황혼기에
접어들고 만다. 그리하여 삶은 마치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다 끝나버린 허망한 인생
살이로 다가온다.

- 인생의 목적은 다음 목표, 그 다음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계를 즐기면서 충만된 삶을 사는 것이다. 유다 법전에 나오는 말이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서 살고, 패자는 경주가 끝나야만 행복이 결정된다.”

- 미국의 유명한 개신교 사역자 맥도널드는 주님과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삶의 주체가
되어 앞만 보면서 달려가는 그리스도인을 가르켜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멍청하게 있는 시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항시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절제 없는 팽창욕에 사로잡혀서 더 능률적인 방법,
더 좋은 결과, 더 깊은 영적 체험들을 갈망하고 늘상 긴장과 조바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자기가 이룩해 놓은 성공이나 성취를 기뻐할 시간이 없다.

-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경쟁심이 심하고 승부욕이 강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
들이 그의 의견이나 그가 하는 일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크게 화를 낸다. 쫓기며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너무나 바빠서 인생의 친밀한 관계,
곧 부부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를 돌볼 겨를이 없다.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너무 바빠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돌볼 겨를이 없다. 오랫
동안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않아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오는 위로와 기쁨을 얻지
못한다. 또 성찰과 영적독서를 멀리하여 내적 성장은 멈추어 버렸고 영혼은 황폐화되어
있다.

-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인생의 매단계를
느긋이 즐기면서 내적으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애 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풍성한 생명을 주고 또 주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행동양식만이 우리에게 올바른 해결책을 줄 수
있다. 그은 30년이라는 짧은 인생, 갑작스럽게 끝난 것 같은 인생을 사셨지만 사실은
‘다 이룬’ 꽉 찬 인생을 사셨다. 우리는 균형 있고 통합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찬미하면서,
그것을 가능케 하였던 근본 요소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 마태오 복음 6장 25-34절
(세상 걱정과 하느님의 나라)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합되게 사시면서 취하셨던 행동
양식이 들어 있다.


[ 1장. 마태오복음 6장 25-34절의 말씀 ]

< 성서 본문 >


-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
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
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 세상의 시각에서 본 성서 본문 비판 >

- 비판적인 안목으로 이 성서 말씀을 대하면 사정이 금방 달라진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라니 경쟁이 덜했던 조선시대라면 모를까. 요즘 같은 시대에 조금만 방심해도
직장에서 쫓겨나는 판에 어떻게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주님께는 부양할
가족이 없어서 내일에 대한 세심한 준비가 얼마나 필요한 줄 몰랐던 것인가?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라는 말은 세상모르는 자의 현실성 없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주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일까?

- 성서 본문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무리’와 ‘제자들’이다. 무리는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죄인, 창녀, 세리, 과부,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
이다. 이들은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했고, 생존과 내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이 극심한 가난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마시오’하고 말한 것은 현실감이 없어서도,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근심의 노예가 되어 활력을 잃어버리고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되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근심거리가 생기면 그 근심거리가 해결될 때까지 거기에
사로잡힌다. 그 근심거리가 우리 생각을 지배하고 나아가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하여 결국 근심 걱정이 우리 몸을 해치고 목숨까지 해친다.

- 예수님이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라고 한 것은 닥쳐올 미래에 대해서 예측하거나
신중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덧없는 걱정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갈라지고, 삶의 활력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또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을 마비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 바오로 사도는 근심에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근심’과 ‘세상에 대한 근심’ 두 종류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느님 뜻에 맞는 근심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받게 하니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근심은 죽음을 자아냅니다”(2고린 7,10).
‘하느님 뜻에 맞는 근심’은 회심을 이루게 하는 근심, 영혼 구원을 위한 근심,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기 위한 근심, 제자 직분을 충실히 살기 위한 근심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근심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나그네 삶에서 종신토록 갖고 다녀야 할
근심이기에 종신지우(終身之憂)라 부른다. 그러니 모든 노심초사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상일에 대한 것이다.

< 성서 본문에 대한 구조 분석 >

-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걱정하지 말라’란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매번 문단
제일 처음에 제시된다(마태 6,25,31,34). 이어서 무엇을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지,
걱정에 대한 구체적 대상이 서술되고 이어서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논리적 근거가
제시된다. 첫 번째 ‘걱정하지 마시오’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기에, 두 번째 ‘걱정
하지 마시오’는 그런 것들은 이방인이나 걱정하는 것이고, 세 번째 ‘걱정하지 마시오’는
하루하루 그날의 걱정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둘 다 목숨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고, 세 번째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세 번째 가르침에 있다. ‘하루하루
그날의 걱정으로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이 책의 제목인 ‘일상도(日常道)를
살아가는 인간’의 핵심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 2장. 첫 번째와 두 번째 ‘걱정하지 마시오’ ]

<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니 >

- 주님은 우리에게 의식주(衣食住) 문제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근거는 명확하다.
“목숨은 양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마태 6.25). 주님의
이 말씀은 더 소중한 귀한 목숨과 몸을 주신 하느님이 음식이나 옷과 같이 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단 한 시간인들 보탤 수 있는가?’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온갖 근심에 사로잡혀 산다. 한 가지 근심이 생기면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시간과 힘을 지배해 버려 결국은 건강까지 해치게 된다. 일찍이 잠언 저자는,
심령의 근심이 몸은 물론이요 뼈까지 마르게 한다고 했다(잠언 17,22). 모든 질병의 70,
80%는 근심 걱정에서 생겨난다는 보도도 있듯이, 걱정은 우리 목숨을 연장시키기보다
단축시킨다. 의식주 문제, 곧 현세적 문제에 사로잡혀 근심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모독은 물론이요, 우리가 그만큼 아버지의 돌보심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자기 고백이 될 것이다.

< 걱정하지 마시오. 이방인이 아니니 >

- 예수님이 볼 때 의식주 걱정은 이방인들, 곧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
들은 하늘 아버지를 모르기에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에 노심초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이시며 모든 경험의 지평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잘 알고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 덕에 살아가는 우리가 아버지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근심
걱정과 좌절감에 빠진다면 그것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근심걱정들은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의심하는 것이요, 한 걸은 더 나아가 하늘 아버지의
자리를 침범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아버지가 되어서 노심초사하며 의식주를 해결
하겠다고 애쓰는 것이니 말이다.

-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제게 이것을 주십시오.’ 또는 ‘제게서
이것을 가져가십시오.’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아버지’를 매순간 신뢰한다. 그분은
지상의 모든 아버지들의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베풀어 주신다.” <6세기 영적 스승인 니느베 이사악>


[ 3장. 세 번째 ‘걱정하지 마시오’와 일상도(日常道)의 삶 ]

- 세 번째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이 책의 주제가 되는 일상도의 삶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주님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뒤 왜 걱정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그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마태 6,34). 예수님의 가르침,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와 ‘하루하루 그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는 쉽게 말해서 ‘오늘 걱정은 오늘로
족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의 걱정만큼은 누구나 견딜 수 있다’는 말씀이 된다.

-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통만 허락하신다. 사실 오늘의 걱정,
지금 이 순간의 걱정은 결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만약 삶이 힘겹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오늘의 걱정 때문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삶이 힘겨운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걱정을 앞당겨 미리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면
견디지 못한다.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이들이 많다. 좋은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책을 보는 사람들은 만성 소화
불량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위장으로 가야 할 신경이 온통 머리로 갔기 때문
이다. 이는 우리가 한 번에 하나밖에는 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이다.

- 오늘 하루만을 생각하면서 충실하게 살아갈 때 우리 삶은 그만큼 가벼워진다. 평생을
어떻게 견디어 낼까 생각하면 힘겨운 것도 오늘 하루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하면 견딜
만해진다. ‘오늘 하루를 좌우하는 것,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하루만 사랑으로 살고, 오늘 하루만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하게 살겠
다고 결심한다면 삶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는 것이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이로운 것은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신건강만
얘기하지 않고 영혼건강까지 언급한 것은 내일 일을 걱정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주전략
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속성상 오늘을 살게 하시지만 마귀는 내일을 살도록
이끈다.

- 건강한 정신과 영혼을 보존하려면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매사추세츠 대학병원의
카밧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완전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감정과 성실과
가치와 건강을 다 누리고 싶다면 내 앞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오늘의 하느님, 일상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 일상도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일상도의 영성이다.
일상도의 영성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평화롭고 안정될 것이지만 그 영성을 살아
가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은 걱정과 수심에 잠기고, 영혼은 지치고 메마르게 될 것이다.
일상도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때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대다수는 일상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줄곧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느라고 현재의 순간들을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의 상당 부분이 내일에 대한 걱정 근심으로 소모되고 있다.


[ 4장. 자각하며 살아야 할 세가지 요소 ]

< 바쁜 일과 중요한 일의 구분 >

- 생명을 잘 보전하려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힘들여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자연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즉시 알 수 있다.
자연은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진도 빼지 않고, 최소한의 노력만을 하면서 살아간다.
나무는 자라나려고 애쓰지 않으며 꽃은 꽃을 피우려 애쓰지 않는다. 그냥 자라나고
꽃을 피운다. 모두들 자기들의 본성을 따라 자연스럽게 자라고 움직인다. 유일하게
자기 본성을 따라 살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다. 바쁜 일들에 끌려다니면서 생의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중요한 일과 급한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일들은 미루지
말고 때맞추어하되, 중요치 않은 일들은 뒤로 미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일과
급한 일 사이에서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 성서는 짧고 귀한 인생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지혜롭게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우둔한 자들이 아니라 슬기로운 이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자세히 살피시오. 때를 선용하시오”(에페5,15). 이 성서구절에서 ‘때’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말로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영원을 향한 시간, 생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는
구원적 시간을 가르킬 때 사용한다. 이 말은 흘러가는 시간, 어제, 오늘, 내일 등 소모
되는 시간을 가르킬 때 사용되는 크르노스와는 구분된다. 크르노스와 카이로스처럼
우리의 삶도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하나는 일상적 시간인 크르노스로 언젠가는 허멍
하게 사라질 세상 것을 향해 정신없이 살다가 쓸쓸히 사라지는 삶이다. 다른 하나는
구원적 시간인 카이로스로 중요한 일들을 우선시하면서, 즉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주님에게 마음쓰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 성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도(聖徒)라 부른다. 우리가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현존을 믿으면서, 주님의 뜻을 일상에서 성취하기 위하여 카이로스적 삶을 부단히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의 풍파에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삶을 영위해 가는
기준점은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도로 불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 삶은 상당히 크르노스적이다.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표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항상 처리해야 할 세상 일들이 눈앞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서는
우리를 성도라고 하며 슬기로운자가 되어서 카이로스적 시간을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 성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순간 삶이 카이로스적 삶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
이라 부르는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야 한다.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첫 번째 관심을
두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마음의 평화와 무난한 일처리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과
바쁜 일 사이에서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1) 우선 중요하면서 급한 일을 구분해서 먼저
처리할 필요가 있다. 중요하고 급한 일은 즉각 응답하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이다. 2) 그 다음 순서는,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이다. 소중한 관계(하느님, 자신,
가족, 친지, 친구와의 관계)에 마음쓰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긴급성이 없어 쉽게 무시될 수 있는데, 카이로스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실하게 돌볼 필요가 있는 일들이다. 3) 다음은, 중요하지 않은데
급히 처리해야 될 것처럼 다가오는 ‘일감바구니’이다. 통상 ‘일감 바구니’는 긴급하다는
가면을 쓰고 있다. 급한 일에 노예가 되어서 중요한 일들을 미루며 살다 보면 남는 것은
황폐화된 내면과 악화된 관계뿐이다.

- 미국의 기업가 S.아터번은 ‘사랑을 잃지 않고 일에서 성공하는 법’에서 참다운 성공이란
직업과 돈,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일상도의 삶을 가능케 하는 실제적 방법이다.

< 선택과 결단의 삶 >


- 일상도를 살아가려면 누군가 던진 공을 생각 없이 받지 말아야 한다. 받을 것인지 받지
말아야 할 것인지, 받는다면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지 그때마다 선택하여야 한다. 크고
중요한 일은 물론이지만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일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긁직굵직한 사건들 앞에서 심사숙고하며 선택 결정을 내리지만 우리같이 영혼을 돌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 앞에서도 신중하게 선택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실하다.” 말씀하셨다.
하느님 현존안에서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은 매순간 선택 결정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 17세기 가르멜 수도회의 로렌스 수사님은 하느님의 현존을 항시 느끼며 살아가신
분으로 유명하다. 로렌스 수사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귀한 가르침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점이다. 미사를 드리거나, 성체 앞에 머물러
있거나, 영적독서나 깊은 묵상기도중에 있을 때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서 할 때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 현존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구분이 있을 수없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고린 10,31)해야 한다.

- 주어진 자리와 환경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저극적인 지향을 둘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사랑하게 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 세상의 자질구레한 걱정거리에서 해방됨은 물론이요,
그 일들을 신적인 일들로 승화시킬 수 있게 된다.

< 가상적 걱정을 멀리함 >


- 일상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실제의 걱정과 가상의 걱정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와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무려 550번에 걸쳐 하셨지만
우리 하루 삶은 여전히 이 걱정 저 걱정, 온갖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로 가득차 있다. 가상적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비극적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전에 그 사건의 고통을
체험한다. 이들은 직장을 잃기도 전에 이미 직장을 잃은 서러움을 맛보고, 사업이 부도
나기도 전에 부도난 절망을 체험하며, 중병에 걸리기도 전에 마음 고생을 한다. 실제로
발생하지도 않은 사건들을 상상하면서 불안해 하고 초조해할 때 좋아하는 것은 마귀뿐이다.
어느 성인은 근심 걱정은 마귀의 운동장이라 했다. 마귀는 가상적인 비극의 씨앗을 우리
안에 뿌리고는 우리의 평화를 갉아 먹는다.

- 왜 우리는 실제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끊임없이 걱정하며 살아갈까?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소하고 단순한
일도 모두 중요한 일처럼 대하고, 평범한 상황도 극적인 상황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중요하게 여기기에 사소한 것에 힘을 낭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유
할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더 심하다.

-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으로 널려 알려진 심리학자 칼슨 박사에 의하면
지금 하느님과 함께 온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사 모든 것이 다 사소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영원을 향한 길목에 서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사 모든 것은 사소한 것이다. 대데레사 성녀의 말씀대로,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졸이고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모든 것은 지나가고 주님만이 영원한 분
이시거늘. 다음은 ‘오늘을 사랑하라’라는 토머스 칼라일의 글이다.

“어제는 이미 과거 속에 묻혀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오늘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라
오늘은 영원 속의 오늘/ 오늘처럼 중요한 날도 없다
오늘처럼 소중한 시간도 없다/ 오늘을 사랑하라
어제의 미련을 버려라/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 오늘이 30번 모여 한달이 되고
오늘이 365번 모여 일 년이 되고/ 오늘이 3만 번 모여 일생이 된다”


[ 글을 마치며 ]

< 아메림노스, ‘걱정하지 않는자’가 되기 위하여 >

- ‘어떻게 해야 우리의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께서 이 질문에 정답을
주신다. “여러분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시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시오”
(요한 14,1). 우리가 근심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을 믿는 것이다.
“수고하고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마태 11,28).

- 근심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대한 믿음뿐이라는 것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잘 보여준다. 초대교회 일부 신자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자신의
이름 다음에 ‘아메림노스’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걱정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초대교회의
커다란 거목이었던 두 분,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만 보아도 ‘걱정하지 않는자’로서
살아갔음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오직 무슨일에서나 기도와 간구로써
감사하며 여러분의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알리시오”(필립 4,6). 아메림노스, 곧 ‘걱정하지
않는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며 살아가던 초대교회 신자들은 늘 밝게 살았을 것이다.

<실제적 걱정거리를 모두 하느님 앞에 바치며>

- 우리는 실제적 걱정을 주님 앞에 갖다 바쳐야 한다.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하며 탄원기도를 드려야 한다. 베드로 사도가
“여러분은 모든 근심을 그분께 내맡기시오”라고 권고했듯이 근심 걱정에 포로가 되기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 마음의 평화를 깨는 모든 구체적 근심거리들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응답을 주시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탄원기도를 드릴 결심을 해야 한다. 하느님은
눈물과 울부짖음으로 바치는 기도를 거절하지 못하신다.

- 실제적 걱정거리를 두고 주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실제적 걱정거리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더라도 근심에 사로잡혀
세월을 허송하기보다 하늘 아버지께 달려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 근심을 아뢰며 아버지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간절한 기도는 분명 근심의 이랑을 메워 주고 마음의 두려움을
없애줄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

- 우리는 하느님을 마몬(마귀)과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의 첫 번째요 마지막
섬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이 주인됨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온전한 의탁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온전히 순종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탁, 이러한 순종의 태도를 없애려는 악마적인 요소가 근심 걱정이다. 근심 걱정은 하느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요, 우리 스스로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야 된다는 심중을 드러낸다.

- 우리의 근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느님 뜻에 맞는
근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세상에 대한 근심’이다. 우리가 ‘하느님
뜻에 맞는 근심’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여러분은 먼저 그분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라는 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말씀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근심이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 뜻을 향한 근심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말씀이다.

-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입술로는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지만 구체적 삶에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말한다. 또한 영원한 생명과 관련해서는
하느님을 신뢰하지만 세상의 일용할 양식과 관련해서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하느님을 미워하는 이들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일상 삶의 무게중심을 이동할 것을 요구하신다. 세상살이
에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의 필요성을
찾으라고 하신다.

- 예수님의 삶의 중심축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 이 중심축 덕분에 예수님은
그 바쁜 가운데서도 늘 하느님의 현존을 보며 지금 이 순간의 성스러움을 살 수 있었다.
예수님은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찬 우리에게도 같은 가르침을 준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2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7.18.


[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 ]

- 지은이 : 스즈키 히데코, 옮긴이 : 최경식, 펴낸곳 : 생활성서사/ 254p
- 죽음묵상 하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들
- 지은이 프로필 : 성심수녀회 수녀, 도쿄대학교 대학원 인문과학 박사과정,
일본 성심여대에서 일본 근대문학 강의, 문학요법 및 심리요법을 통해
말기 중환자들의 내적 치유 도움 봉사, 일본 에니어그램 학회 명예회장,
국제 코뮤니언 학회 회장 활동 등, 저서로는 '가장 아름다운 화해 이야기',
'사랑과 치유의 366일'등이 있다.

[ 표지의 글에서 ]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다 했을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귀기울이면 이별조차 아름답습니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


-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살아남은 우리에게 반드시 메시지를 남기고 이승을 떠난다.
그것은 형태를 달리해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집약할 수 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소중히 해주십시오. 살아 있다는 것은 한없이
고귀한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어원이 하나인 세 낱말(삶, 사람, 사랑)이
가진 참된 뜻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 죽는
순간까지 기다릴 것 없이 ‘지금’ 당장 그 뜻을 살도록 호소하고 있다. 저의 오랜 체험을
통해 종종 실감하고 있는 일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국경(國境)이란 없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뿐이다. 죽음을 앞두고 자기 자신, 가족
그리고 다른 이들과 ‘반조(返照)’의 그 마지막 빛 속에서 화해한 이들이 지닌 그 사랑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해지리라 믿는다.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의 원제목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전해 주고 싶은 말’이다.)


[ 생명과의 만남 ]

- “죽음이 가까워온 환자가 원기를 되찾고 마치 회복된 것처럼 여겨지는 때가 대략
하루 정도 있다. 그 사이에 환자는 뭔가를 정리하거나, 유언을 하거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곤 한다. 우리들은 그런 것을 ‘반조(返照)현상’<이 시간은 죽음 직전에
반짝이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총정리하는 순간을 말함>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느
대학 의학부 교수의 말. 중국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회광 반조(回光返照)’라 부른다.
촛불은 다 타버리기 직전에 불꽃이 크게 타오른다. 추락하는 비행기는 낮은 선회를
되풀이하다가 한번 급상승하고는 힘이 다 빠진 것처럼 하강한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죽음 직전에 환자의 생명이 불타오를 때 그를 마룻바닥에 내려놓아 준다고 한다.
대지로 돌아간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찾아드는 ‘건강이 아주
회복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 이 시간에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로써 인생 최후의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자연과의 일치, 자기 자신과의 화해, 다른 이와의 화해
라는 작업이다.

- (저자의 죽음 체험에서 본 빛/건물 이층에서 떨어져 의식 불명상태가 됨) 완전한
자유에 대한 감미로운 기대가 찾아들었을 때 나는 스스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하늘 한 모퉁이에서 비치는 생명의 빛이 나를 감싸 주었다. 빛은 생명 그것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이지만 결코 눈이 멀 만큼 눈부신 것이 아니라 내 전 존재를
감싸주는 따뜻한 빛이었다. 나는 그 빛에 싸여 내 목숨이, 내 전 존재가 완전한 생명에
의해 충만되어 있음을 느꼈다. 빛은 생명의 충만이며 살아 있는 완전한 인격을 지닌
분이었다. ‘빛 그 자체이신 분’은 나를 속속들이 알고 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생명 자체였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지복(至福)이구나’하고 깨달았다. 그러는 한편
으로는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 나라(奈良)에서의 죽음체험 직후부터 나는 불가사의하기보다는 섭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중증의 병자들이 누워 있는 곳에 초대받게 되었다. 병자들에게 가면
누가 가르쳐 준도 아닌데 자연히 손이 내밀어지고 그 사람들 몸에 내손이 닿으면서
그와 호흡을 맞추며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그러면서 환자의 어디가 아픈지, 또 어떻게
아픈지 나는 내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일상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시간대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병자와 둘이서 함께 맛보는 명상의 극치와 같은 상태이다. 나는
병자와 일치하여 대우주의 기(氣)가 제 손을 통해 병자의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깊은 고요로 충만된 시간이며 병자와 일치하고 우주 만물과도 일체감을
느끼는 시간이다.

- 나는 병자들을 가까이 한 체험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죽음이 임박해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 얼마 남지 않은 나날에 자기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인생의 의미를 찾거나 또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해결하고, 불화를 화해로 풀며 보다 풍요로운 사랑
으로 결합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 죽음으로 향한다고 하는, 여태껏 체험해본 일이 없는 상황 속에서 병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을 느끼고 이제 끝나려 하는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온갖 상념들이 가슴속을
스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은 가족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가슴 아프고 쓸쓸한 이별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족에 대해 감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고 자기가 떠난 뒤에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겠다.
병자는 이런 생각이나 희망을 숨김없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싶어 한다. 끝내
살아내지 못한 자기의 인생이나 자기가 끊어버린 부분에 대한 후회나 소망 같은 것도
애기하고 싶은 것이다.

- 기도할 때나 명상할 때 나는 분심 때문에 마음을 모을 수가 없다. 그것이 보통 때의
나다. 그러나 병자에게 손을 대고 있으면 나는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
‘빛을 만난 사람은 특별한 초자연적인 힘을 받게 된다’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모양으로
실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빛을 만나는 것’은 무상(無償)의
은혜이며 받는 쪽의 인덕(人德)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또 ‘빛을 만난’ 체험 후에
별안간 훌륭한 인간이 되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경우는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다만 ‘빛을 만나는’ 것에 의해 그 사람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 인생의 임종을 함께 나눠주신 분이 돌아가시면 나는 적막함을 강하게 느낀다. 그와
동시에 그분이 저 눈부신 빛의 세계에 들어가신 것에 대해 깊은 기쁨도 느낀다. 인생
최후의 가장 귀중한 시간인 ‘반조, 화해’의 시간 안에 나를 넣어주신 분들이 이 지상을
떠나면서 남겨주신 것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이들이 전해준 것들, 그리고 내가 진실
이라 받아들인 것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충실히 써나가도록 노력했다.


[ 고향의 어머니 ]
* 등장 인물 : 오하라 시옹(양로원 후원회장/사람들에게 ‘어머니’라 불림),
스즈키(수녀/저자), 아키(친구의 막내딸), 요시코(폐암 환자), 요시코의 남편

- ‘도호쿠의 츠가르’에 살고 있는 예순이 넘은 ‘오하라 시옹’ 씨는 굵고 곧게 자라 소박한
꽃을 피우는 들꽃이라는 이름 그대로, 몸집이 크고 침착하고 꾸밈없고 소탈하며 유머가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머니’라 불리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시옹 씨는 ‘고향 어머니’의 이미지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이분은 수많은
병자나 노인의 집을 자주 문병하여 임종하는 자리를 지켜보면서 돌봄의 봉사를 실천하신
분이다.

- 죽음이 다가오기 조금 전에, 아주 완쾌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있다. 갑자기 원기를
회복하고 곧잘 음식을 먹든지 애기를 하든지 한다. 가족들은 이것을 보고는 대단한 희망을
가지고 아주 열심히 격려하거나 몸을 보신시키려 든다. 하지만 이것은 임종 직전의 한
때일 뿐이다. 사람에겐 뭔가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그저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순간순간마다 호흡을 함께하려는 생각으로 있노라면, 문득
상대방이 말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순간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기회를 잡아 말을
걸면 병자는 망설임 없이 애기를 꺼내게 된다.

- 죽어가는 사람은 대개 죽음이 다가온 것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어떤 위로에 충족되어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주위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에만 치우쳐서
저승으로 가는 사람을 이승으로 잡아끌어 되돌아오게 하려 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런데 임종하는 사람이 정말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곧바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조용히 격려해주며 용기를 북돋워 주는 일이 것이다.

- 다음은 중증 환자(페암)의 병실에서 임종 전에 요시코 씨와 그 남편이 함께 부른 노래
가사이다. <마리아의 성심(聖心)>
마리아의 성심/ 그것은 푸른 하늘/ 우리를 감싸주는 푸른 하늘
마리아의 성심/ 그것은 떡갈나무/ 우리를 지켜주는 단단한 떡갈나무
마리아의 성심/ 그것은 꾀꼬리/ 우리와 함께 노래하는 숲속의 꾀꼬리”

- 요시코 씨는 그 이튿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래도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는지
입을 약간 벌리고 소녀 같은 표정을 짓고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 때와 그날 행해진 매장식
때는 밝은 햇살 속에서 꾀꼬리가 ‘꾀꼴꾀꼴’하고 끊임없이 울어댔다. 거기 참석했던 사람
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이른 철에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들은 일도 없었고 꾀꼬리의 울음
소리에 그토록 황홀해지는 일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묘지를 떠나면서 요시코 씨의 남편은
시옹 씨에게 다가와 “꾀꼬리가 울어줘 정말 기뻤어요”하며 눈물을 흘렸다.


[ “내 이름을 외쳐 불러주오” ]
* 등장 인물 : 산 할아버지(별명/양로원 노인), 시옹, 스즈키

- 어느 날 양로원을 방문할 때 어느 낯선 노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노인이라고 해도 그 남자
분은 멋과 품격이 훌륭한, 참으로 품위가 있어 보이는 신사였다. 이 세련된 노신사는 이상한
이름인 ‘산 할아버지’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산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소지품은 일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억조차 모두 상실하고 있었다.
알츠하이머 증세 등을 보여 양로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어디’ 에서 온 ‘누구’인지 도대체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양로원에서는 본명을 알아낼 수가 없어 그에게 가명을 붙여 주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명이 아닌 ‘산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만 불렀다.

- 이 노인은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었을 텐데도 자기에 대해 따뜻한 인정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냄새 맡듯 금방 알아낸다고 한다. 자기를 물건 취급하듯 다루면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이고, 그의 옷을 벗겨 벌거숭이가 되게 하면 재빨리 두 손으로 앞을
가린다고 한다. 그것은 수치심이라기보다는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산
할아버지’에 국한된 애기가 아니라 망령이 든 노인들에게 공통되는 점이라고 한다. 인간
으로서의 존엄을 최소한 지키는 것, 온정으로 상냥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민감하게 가려내는
것, 이 두 가지는 인간의 근원에 있는 것으로 죽을 때까지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빼앗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 본명을 잃어버린 ‘산 할아버지’는 침묵의 상황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듯, 아니 시를 읊듯이
소리를 높여 다음과 같이 외우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외쳐 불러주오/ 어린 날에 불리던
그 이름으로/ 내 이름을 외쳐 불러주오” 그는 세 번 소리 높여 명료한 어조로 낭랑하게 되풀이
했다. “아하 지금 또다시/ 내 어린 날의 이름을 외쳐 불러주오/아하 지금 또다시/...중략.../
어린 날에/ 어머니가 불러준 내 이름으로/ 나를 외쳐 불러주오/ 나를 외쳐 불러주오”하고
단숨에 읊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신성한 분위기에 감동되었다. ‘신들린 시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드러누운 채 입을 크게 벌려 당당하게 낭송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신묘했으며
듣는 이들의 영혼을 뒤흔드는 신비스런 힘에 넘쳐 있었다. 틀림없이 어디선가 들은 일이
있던 시였다. 그것이 미요시 타츠지의 시라는 것을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 ‘산 할아버지’는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시는 그의 삶의
마지막 증언이 되었다. 그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뒤에도 사랑을 민감하게 느낄 줄 알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끝까지 지켰다. 그리고 인생 최후의 나날을 양로원에서 신선처럼
살았다. 인간으로서의 이 세상 존재가 모두 사라져가려 하는 그 시각에 전 생애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 편의 시에 집약해서 표현했던 것이다.

-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Identity)이다. 성서 속에서 ‘이름을 부른다’라는 것은 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다. 한 인간을 고유하고 둘도 없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 이름이 불린 사람은 이렇게 느낀다. 인생을 헤매며 지내는 나,
그러한 나를 염려해주시는 분,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특별한 인간이다라고 믿도록 해주시는 분. ‘산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사람이었다.
내 마음 속에 울려 퍼진 그 시는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깊이 살아 있다.


[ 마지막 선물 ]

* 등장 인물 : 시옹, 노리코(시옹의 손녀), 스즈키, 스도오(노인의 집 임종자), 타키(직원)

- 시옹 씨가 들고 온 큰 보자기 속엔 작은 술병이 들어 있었다. 시옹 씨는 스도오 씨가
노인의 집에 들어 온 이래로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최후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고 미리 의사와 상의해서 특별 허락을 받은 것이다. 시옹 씨는 술을 좋아하는 스도오
씨에게 마지막으로 술을 한 모금 마시게 해주고 싶었다. 보자기 속에서 정종 병을 꺼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온 탈지면에 술을 적셔 넌지시 스도오 씨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스도오 씨는 눈을 감은 채 있었는데 그것을 한 번 입에 대고는 정신이 확 든 것처럼
상상외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렇게 한 모금 빨아 마시고는 잠든 것처럼 잠잠해졌다가 입을
벌렸다. 시옹 씨는 적당한 때를 보아가며 술을 빨아 마시도록 했다. 고개를 치켜들고 위를
보며 돌아 누운 스도오 씨의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흘렀다. 짙은 갈색의 깡마른 볼 위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대화가 시작됨)

- 시옹 씨는 보자기 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을 펼치자 누렇게 바랜 한 장의
사진이 나왔다. 기모노 차림의 여자와 노리코 또래의 여자 아이 둘이 찍혀 있었다. “노인의
집에 입원하신 직후였어요. 제가 거기서 새로 입원한 스도오 씨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옆에
다가서 있는 저를 알아차리자 그것을 꼬깃꼬깃 구겨서 침대 아래 쓰레기통에 버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사진이지요. 그때 제가 주워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스도오 씨는 얼굴을
가릴 만큼 사진을 눈 가까이에 대고 그 속으로 파고들 것처럼 쳐다보았다. 사진을 꽉 쥔
앙상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스도오 씨, 부인과 두 따님에게 스도오 씨의 그 심정을 반드시
전할께요.” 시옹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손을 뒤로 뻗쳐 베갯머리
에서 작게 접어둔 종잇조각을 끄집어냈다. 그 종이에는 스도오 카츠코, 미츠코, 아이코라는
가족의 이름들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스도오 할아버지가 처음 자기 일을 남에게 알린 것이다.
이틀 뒤 스도오 씨는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


[ 만취, 만월의 달님 ]
* 등장 인물 : 타키(노인의 집 직원), 이마이(노인의 집 후원자/ 임종자), 시옹, 스즈키

- 이마이 선생은 자식이 많은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변변히 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자수성가해서 훌륭한 회사를 만들었다. 이 지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는데도 거만하게 굴지 않고 당신이 태어난 고장을 위해서 새 도로를 만들고, 병원이나
노인의 집에 거액을 기부하거나, 젊은이들을 위해 취직 알선도 해 주었다. 인품도 좋아서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무척 좋아 하였다. 일흔의 나이에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위독한 상태였다.

- 이마이 선생은 시옹 씨를 보자 급하게 오른손을 내밀며 신음하듯 천천히 말했다. “전 평생
동안 앞 뒤 생각 없이 그저 일만 죽도록 해왔어요.”시옹 씨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방
안은 갑자기 깊은 고요에 휩싸였다. 긴 침묵이 있은 뒤, 나직하고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시옹씨, 전 좀더 즐거운 삶을 보내고 싶었어요.” 짧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말에는 오장육부
에서 우러나는 무거운 울림이 있었다. “선생님, 그 한 말씀을 하시니 이제 후련하시지요.”
이마이 선생은 편안하고 안심했다는 눈길을 시오 씨에게 보냈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두 사람은 방금 나눈 짧은 대화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음미하고 있는 듯했다. 얼마
있다가 시옹 씨가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 미련이 남는 일은 더없으십니까?” 이마이 선생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머리를 숙이고 느릿느릿 두 무릎을 끌어 당겨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어린이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 어린아이처럼 흑흑 흐느껴 울던 이마이 선생이 가냘픈 목소리로 “어머니!”하고 불렀다.
그러자 시옹 씨는 똑같은 어조로 “네에-”하고 대답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이윽고
이마이 선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시옹 씨는 이마이 선생을 천천히 자리에 눕혔다.
“어머니!” 고개를 치켜들며 드러누운 선생은 두 눈을 감고 입술만 움직였다. 시옹 씨는
“어머니는 기다리고 계세요. 이제부턴 쭉 계속해서 함께 계시게 됩니다”

- 그리고는 티없이 투명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절) “엄마는 밤을 세워/
털장갑을 떴어요/ 낙엽져 찬바람 불면 추울세라/ 부지런히 뜨개질했어요/ 고향 소식이 닿으면/
엄마의 된장국 냄새가 날 거예요.” (2, 3절 중략). 어느새 병실 안의 사람들 그리고 복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소리 맞춰 합창하고 있었다. 한마음이 되어 부르는 그 노래 소리는
병실의 창문을 넘어 백설의 세계로 널리 울려 퍼져 나갔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모두 한결
같이 고개를 숙였다. 병실안의 많은 사람들이 흐느끼며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이
노래는 이마이 선생이 노인의 집 행사 때면 와서 노인네들과 어울려 함께 곧잘 부르던 노래
였다고 한다. 시옹 씨와 나는 노래 소릴 뒤로 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보름달이었다. 내려
쌓인 눈은 밝은 빛을 띠며 빛나고 있었다. “야아! 만취, 만월의 그 달님이다.”


[ 빛으로 역전할 때 ]
* 등장 인물 : 나라카 요노(양로원의 노인), 후쿠시(생활보호자), 시옹, 스즈키

- 병자는 호기심을 갖지 않고 말하고 싶은 사람, 자유로이 무슨 말이든지 표명할 수 있고,
그 사람이 뜻하고 있는 것을 착실하게 듣고 이해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그런 사람, 다시
말해 자유롭고 안정된 사람을 찾고 있다. 많은 경우 처음에 병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얘기가 끝나면 그가 참으로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보게 된다. 말기 환자들의 간호에 전 생애를 걸고 있는 큐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병자는 자기의 과거를 얘기함으로써 해방이 된다. 다음 세계로 여행할 준비가 된다. 말기
간호란 상대방이 자유로이 표명할 수 있는 신뢰를 창조하는 일인 것이다.”

- 요노 씨도 후쿠시 씨도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평소 늘 해오던 익숙한 행위를 통해서 그
사람답게 죽어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요노 씨나 후쿠우 씨가 몸소 가르쳐준 것은 똑같은
행위라 해도 동기나 그 행위의 내용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역전(逆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 씨도 얼핏 보기엔 평소 때의 그 허풍과 별 다름없어 보이는 행동을 취하면서, 임종의
순간이 임박해오고 있음을 무의식 속에서 예감하고, 그 나름의 형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요노 씨는 자기 평생을 통해 구세주이신 예수님께 ‘비천한
저를 마중나와주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최후의 순간을 마친 것이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었든지
일생의 오점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최후의 막다른 곳에서는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 매춘부였던 과거를 짊어지고 있던 요노 씨도, 허영과 허풍으로 따돌림을 받던 후쿠시 씨도
죽는 그 순간에는 전 생애에 빛을 받으며 일생을 완결한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어느 순간에
주어지는가 하는 것은 사람의 지식으로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릴케'는 이름도 없는
작은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은총의 순간'에 관한 예지를 지닌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스런 최후로 가와바다 야스나리 등 자결한 예술가들의 모습은 살아 있는 우리들
에게 격렬하게 도전하며, 삶의 의미를 계속 묻고 있는 그들의 삶은 죽음을 통해 우리들의
비참함이 빛으로 역전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 마녀의 마술 ]
* 등장 인물 : (개구리 임금님/그림 동화), 카오리(식도암 환자), 켄타로와 미치코(아들과 딸),
큰 회사 사장, 스즈키

< 엄마의 기일> - “저는 이 병에 걸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오리 씨는
서른네 살로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식도암의 난치병 환자이다. 그에겐 어린 켄타로와 미치코
라는 귀여운 아들딸이 있었다. 카오리 씨는 철이 든 이래로 “이 아이를 낳은 친어머니는 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지요.”하고 외할머니나 집안 친척들이 말하는 것을 귀가 아프게 들어
왔었다. 특히 엄마의 기일과 자기의 생일이 같은 날이라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도 무겁게 들렸다.
이런 말들로 카오리 씨는 항상 ‘내 생명은 엄마 목숨과 바꿔서 얻은 거야. 엄마는 내 탓으로
돌아가신 거야’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드디어는 엄마를 죽인 자기에겐 반드시 큰 벌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은 그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삶의 행복을
마음껏 맛본다는 것을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 어느 날, 내가 문병을 막 들어갔는데 때마침 카오리 씨의 아이들이 엄마 문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카오리씨가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 눈길에서 엄마의 깊은
애정을 읽은 나는 “카오리 씨, 지금 당신이 만일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면 저 아이들이 그것을
자기들 탓이라고 생각할까요?” .... “그런 일은 없지요. 저 애들은 참 착한 아이들입니다.”
“그래요. 그럼 저 아이들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행복했나 돌이켜 보세요.” 다시 찾아 갔을 때,
카오리 씨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으나 의식은 또렷했다. “저는 저 애들 때문에 엄마로서의
기쁨을 마음껏 맛볼 수가 있었기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 그리고 두 아이를 머리맡에 불러
놓고 “엄마는 말이다. 켄타로와 미치코, 너희들의 엄마였던 것이 아주 기쁘단다. 그리고 너희들
때문에 정말 행복했었다.”하고 말해 주었다. ... 카오리 씨는 뜻을 새기듯 그리고 애원하듯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잘 들어둬. 엄마가 만일 죽어도 그건 결코 너희들
탓이 아니라는 말이야.”

- 그 이튿날, 병세가 악화되어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내게 바싹 바른 손을 맡기고 그는
천천히 띄엄띄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에요. 제가 어제 아이들에게 그렇게 얘기를
해주고 있었을 때 제 목소리에서 분명히 저는 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답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 것은 자기 탓이라고 줄곧 생각해왔었지만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의
기우였을 뿐 오히려 어머니는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줄 수 있었다는 하는 커다란 기쁨에
싸여 천국으로 떠나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카오리 씨는 그날 저녁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기뻐요....”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깊은 잠이 든 카오리 씨는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때 귀천했다. ‘엄마는 내 탓으로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마녀의 마술에 걸려
있던 카오리 씨는 ‘벌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개구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 진짜 자기인 왕자님으로 소생한 것이다.

< 화롯가의 광경 > * 예순일곱 살로 심장수술을 받은 큰 회사 사장의 병문안 이야기
- “병에 걸린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군요. 병들어 생각하는 시간에 축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자기 인생의 원점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중략(화로 위에서
끓는 국물을 뒤집어 써 큰 화상을 입음) ... 어렸을 때의 잘못된 생각이 일생을 좌우하게 된 셈
이지만, 병이 난 덕분에 저는 다행히 그 잘못된 생각을 뜯어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붙었던 귀신이 떨어져나가듯 어머니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속에 뚫려 있던 바람
구멍도 사라졌고요.” 일주일이 지난 뒤 그는 심장 장애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거행된
성대한 장례식 때 제단에 올려진 그의 사진은 헌화를 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움직이지 못할
만큼 만면에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심장 장애가 일어나기 전날, 산책을 허락받은 그는
아내와 함께 외출하여 이발을 하고는 부부가 함께 사진은 찍은 것이었다.


[ 행복이 있는 곳 ]

* 등장 인물 : 대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았던 중년 여성, 아들(정신박약아), 스즈키

-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제 몸뚱이 속은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대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았습니다. 자궁암을 시작해서 위암, 장암 등 암이 전이되면서 차례로 대수술을
되풀이해서 받았습니다. 이처럼 속이 텅빈 몸뚱아리를 하고서도 어떻게 살아 있는지 의사들도
모두 다 신기해하는 형편입니다. 아무튼 제 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건강하게 살아 있는가 궁금하시지요. 실은 제가 정신박약아인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지금까지 중병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맞았지만 ‘이 아이를 혼자 남겨 두고 죽을 순 없다’
라는 마음 하나로 살아 온 것이다. “저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살지 않으면 저 아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 병 같은
건 생각 할 여유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병이 어떻든 간에, 그리고 의사가 죽는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저 스스로 ‘반드시 살아야 한다’라고 단정한 것이지요. 아이가 살아 있는 한 저는
산다고요. 이것이 병과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 그 아들은 태어나면서 3년을 살면 오래 사는 것이라고 선고를 받았었다. 그랬는데 그는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을 수 있었다. “그날 찹쌀 팥밥을 지어 조촐하게 생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엄마,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 아이는
그저 생일을 축하해줘서 고맙다고 말한 것이었겠지만, 저에겐 마치 자기가 어른이 되는 오늘날
까지 키워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한 것처럼 들렸습니다. 답례해야 할 사람은 사실 접니다.
원래는 이미 죽었어야 할 저를 그 아이가 천진하게 웃는 얼굴로 대해줌으로써 제 생명을
용솟음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어느 날, 편지에서 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 다행스럽게도 아직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이 저에게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하고 씌어 있었다.

-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이 말은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식의 탄생을 보면서 갖는 소망이며 또한
죽어가면서 자기 자식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일 수 있다.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다. 중증의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의학적으로는 밝힐 수 없을 만큼 건강하고 밝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접할 때면
나는 ‘무스타카스’의 다음 말을 생각한다. “만일 슬픔이 그 사람 자신의 것으로 수용되고 그
사람 존재의 핵심으로 감지될 수 있다면, 그때 아픔은 이웃과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한 정(情)
으로 성장한다. 고통에 의해 마음이 열리고 슬픔 속에서 생기와 기쁨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우러나오게 된다.”


[ 바닷가의 소년 ]
* 등장 인물 : 제인 수녀, 토니 소년, 스즈키

- 제인 수녀는 내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사이좋게 지낸 친구이다. 그 당시 마흔 살이 된
그는 스탠포드대학의 어린이암 병동에 항상 문병을 다녔다. 토니는 그 병동에 입원해 있던
환자로 아홉 살인 금발의 귀여운 남자 어린이였다. 이 아이의 요청으로 주말에 의사의 허락을
받고 캘리포니아이 바닷가로 함께 나가게 되었다.

- 바닷가에는 상쾌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토니가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두 시간이나 흘러
가고 있었다. 제인 수녀는 곁에서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참 만에 토니가 “수녀님,
제 장례식은 수녀님이 치러주세요”하고 똑똑히 말했다. 침묵이 잠시 흐른 뒤, “저 말이예요.
외할머니 계신 곳에 가고 싶어요”하고 불쑥 말했다. 토니에겐 엄마가 안계셨다. 제인 수녀는
오랜 침묵을 깨고 토니가 겨우 입을 열고 말한 부탁에 대답했다. “그래, 외할머니 계신 곳에
가고 싶다고 그랬지,. 외할머니 댁은 멕시코에 있지? 그럼 이번에 건강해지면 내가 데려다
줄게. 그러니까 토니도 빨리 건강해져야지” ... 중략 ...

- “토니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 엄마예요.”/ “그렇구나,
토니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구나.”/ “수녀님, 제 장례식, 수녀님이 꼭 치러주세요.
하지만 수녀님,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죽어서 엄마 계신 곳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 계신 곳에 가니까 쓸쓸해하실 건 없어요. 그리고 저를 병원에선 찾지 마세요. 저는
죽으면 엄마 계신 곳에 가니까. 더 이상 거기엔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수녀님, 제 장례식을
치를 때엔 저는 이미 병원에 없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제인 수녀님.”

- 토니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예요’라고 최대의 비밀이자 결코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말을 털어놓고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 잠이 푹 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영원히 잠들었다. 제인 수녀는 약속한 대로 토니의 장례식을 맡아서 치렀다.
(제인 수녀가) 그가 만일 결혼을 선택했다면, 틀림없이 좋은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를 갖는 대신에 죽어가는 어린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아이들의
심정에 부응하고, 그들의 생각을 모두 받아들이며 함께 있어주었고, 그 아이들의 생각을
소망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힘을 키워준 것이다. (수녀가 되기 전의 흑인 정신병자의 총기
난사 사건)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서 ‘커다란 존재’와 만나, 그 ‘커다란 존재’에 자기의 목숨을
건사람 (제인의 약혼자였던 젊은이)이 지니는 저력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제인은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고, 젊은이는 의사가 되어 남미의 벽지에서
헌신하게 되었다)


[ 젊은 수녀가 겪은 마음의 어둠 ]

* 등장 인물 : 젊은 수녀, 원장 수녀, 스즈키

- 젊은 수녀는 프랑스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 수녀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가가
되어 빈곤과 에이즈의 소굴이라 일컬어지는 아이티로 파견되었다. 그는 엄한 수도원의 규칙을
끝까지 지키고 살았으며, 언제나 명랑하고 순수했다. 또 가난한 아이티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
으로 일했다. 그런데 서른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다. 그 수녀를 문병하러 갔을 때
암은 이미 여러 곳에 전이되어 그의 온몸을 침식하고 있었다. 병실에서 그는 웃음을 그치지
않고 그 숱한 문병객들을 명랑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는 암이라는 중병에 결렸어도 끄떡없이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느 날 수녀를 잘 알고 있는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그
수녀가 실은 ‘마음의 어둠’을 겪고 괴로워하고 있으므로 문병을 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 ‘마음의 어둠’이란 신앙을 가진자가 그 신앙을 믿을 수가 없게 되고 빛을 찾아낼 수 없는
고통을 어둠에 비유해서 하는 말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게도 명랑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있던 수녀가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존재를 전혀 믿을 수 없게 되고, 지금까지는 천국
으로 가는 것이라 기뻐만 하고 있던 그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캄캄한 어둠 속 심연으로
떨어졌으리라라고는 미처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티로 오기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고 싶었으나 그곳에서 나이
많은 수녀님(원장 수녀)에게 사사건건 괴롭힘을 받아 그 학대에 못 이겨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다시 자원해서 아이티로 온 것이었다. (이하 원장 수녀의 죽으심과 속죄 편지 내용, 그리고
젊은 수녀의 심경에 관한 얘기 생략)

- “이렇게도 고통스런 병이 든 지금, 제게 이런 고통을 준 하느님이 참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어두운 마음으로 아직까지 어둠을 헤매고 더듬거리며
빛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러한 저를 사랑하고, 지켜주고, 또한 이끌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을 수가 없다’라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그래도 역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싶다’라고 강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연로한 원장 수녀님이 편지 맨 끝에서 ‘당신이 제 독기를 받아주는 사람이 되어줬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정화되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저도 역시 임종의 때에 저를 정화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며 떠나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쳤을 때, 피로해보이긴 했지만 그의 표정엔 맑고 평화스럽고 깊은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 ‘과연 그랬군요, 선생님’ ]

* 등장 인물 : 스미 칸지(갑상선 전문병원 원장/별칭 ‘과연 그랬군요, 선생님’),
그의 어머니(식도암 환자), 스즈키

- 칸지 원장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죽을 때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끝마치는 때에,
친숙했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음 놓고 시간을 보내는 그 소중함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병원을 개축하면서 임종하는 이들을 위해 거실을 하나 만들었다. 그 방엔 병자를 위한
독방에 붙여 다다미를 깐 열 칸짜리 방이 연결되어 있다. 많은 가족들이 숙박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아무리 해도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면, 마지막 순간이나마 풍족하고 좋게 해주고
싶다는 염원에서 마련된 방이다.

- 이 방에 처음 들어가게 된 사람은 우연히도 그의 모친이었다. 병원 개축이 끝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모친이 식도암에 걸렸다고 판명되었다. 그 후 대학병원에서 수술 후 이 병원에 입원
하여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병상은 호전되질 않아서 임종은
이미 시간문제라 여긴 그는 모친을 이 방으로 옮겼다.

- (아들과의 필담 대화중) 어머니께서는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라고 쓰셨다. 어머니께서는
다시 종이에 이렇게 쓰셨다. “흰둥이”. “흰둥이”란 어머니께서 13년 동안 가정부와 함께
길러 온 애견이었다. “어떤 중대한 부탁일까‘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과연...선생님‘은
’뭐야, 흰둥이 따위 부탁인가‘하고 맥이 빠지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제가 잘
돌볼 테니까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펜을 다시 잡으셨다. 그리고는 아까 그 종이에 ”칸지,
너는 안 돼“하고 덧붙이셨다. 그는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와 마찬
가지로 그 가정부에게 어머니 집 관리를 부탁하며 흰둥이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하겠노라고
어머니께 굳게 약속했다. 어머니께서는 그 약속을 듣고는 기뻐하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
이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후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 “최근에 자택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이 적어졌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이들이 병원 한
구석에서 죽어가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과 고별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병원
안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방을 제가 먼저 쓰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어머니의 포근함을 사무치도록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과연
그랬군요 선생님’의 그 입버릇대로 “과연 그랬군요”라고 대답했다.


[ 이즈의 어부 ]
* 등장 인물 : 츠치야(어부/등뼈 골절로 입원한 할아버지), 스즈키, 스즈키 어머니

- 친척이란 아무도 없는 츠치야 씨가 무심코 던진 내 그 한마디(“츠치야 씨, 3월말에 다시
문병차 들를게요”)를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주었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츠치야 씨,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츠치야 씨가 기다려
주셔서 정말 감격하고 있어요.” 나는 그의 손을 다시 또 한 번 꼭 잡아주었다. 그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고갈되고 왜소해진 그의 몸속에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물이
있을까 하고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 넘쳤다. 뼈마디가 튀어나와 너무나
앙상한 발을 주물러드리면서 저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도 나를 아쉬워했던가 하고
생각할 때 너무나 고마워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 친척도 문병객도 없는 그에게, 입원한 이래 의사나 간호사 이외에는 자기 몸에 손을 댄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더더구나 시간을 두고 발을 주물러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 피부에 닿는 사람의 온기가 고마웠나 보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와 발을 주물러준다. 그를 한 번 더 기다려보자’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기다린다고
하는 희망이 한 달 이상이아 목숨을 연장시킨 시킨 것이었나 보다. 그는 어느덧 졸고 있었고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츠치야 씨는 제가 찾아간 뒤 계속 잠을 자다가 그날 밤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한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똑같이 비참한 조건아래서도 마지막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기다려주고 있다는 희망을 계속해서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밤과 안개>에는 적혀 있다. 사람은 목숨의 한계에 달해도 역시 사느냐 죽느냐를 선택한다고
한다. 마음 깊은 곳을 채워주는 희망이 있는 한, 병은 치유의 가능성으로 넘쳐 있다는 것도
증명되고 있다.


[ 모국 ]
* 등장 인물 : 에미 사쿠라이(말기 암 환자), 아키코(딸)/하야시 히로이, 스즈키

- 에미 씨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자란 교포 2세이다. 그러나 일본으로 시집을
와서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 오래 살았다. 하지만 병이 들면 역시 어릴 적 습관으로 되돌아가
가는 것인지, “가슴에 쥐가 들어와 날뛰고 있다”라는 등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애기를 끄집어
내곤 하였다. 나는 아키코 씨의 안내를 받으며 에미 사쿠라이 씨의 병실을 찾아갔다. 그는
바짝 말라 산소호흡기를 대고 있었지만 숨을 쉬고 있는지 어떤지 걱정이 될 정도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병자 가까이에 않았다.

- 이윽고 에미 씨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그는 별안간 “ 저는 에미 사쿠라이입니다”하고
영어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소리였다. 그리고 격한 어조로 헛소리는
계속됐다. 전부가 영어였다. “저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 “저는 미국인이 아닙니다.” 나는
일미(일본?미국)문화의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 온 에미 씨가 일본인으로서 동시에 미국인으로
서의 갈등을 끝까지 고통을 받아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의표를 찌른 헛소리는
계속됐다. “저는 스페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 일본은, 미국은,
독일은, 칠레는, 핀란드는 ......제나라가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나라의 이름들을 불렀다.
말기 암의 고통을 참아 견디고 있는 병자가 정연하게 세계의 여러 나라 이름들을 불러나가는
데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에미 씨는 한동안 가위에 눌린 듯 고통스러워했다.

- 갑자기 이불 속에서 에미 씨의 앙상한 오른 팔이 불쑥 나와 탁자 위에 있던 성모상을
잡았다. 뼈마디만 보이는 그 작은 손으로 꽉 잡은 성모상을 높이 쳐들고 에미 씨는 눈을
부릅뜬 채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듯 하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저는 이분의 나라로
갑니다. 그곳이야 말로 참된 저의 나라입니다.” 힘에 넘치는 최후의 말을 마치고는 에미 씨는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인 것처럼 하고 숨을 거둔 에미 씨의 가슴 위에는 두 팔을 벌리고
사람을 맞아주시는 듯한 작은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다. ... 이후 <하야시 히로이 이야기 계속>

- 에미 사쿠라이 씨나 하야시 히로이 씨는 ‘어머니의 나라’에 맞아들여진 것은 아닐까?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모국’에 귀속되기를 바라고 찾아 온 에미 씨는 지금 영원한 ‘모국’에서
영원히 사는 기쁨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친한 분들과 사별할 대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라고
희망하는 것은, 우리들이 갈 곳에 ‘모국’이 기다려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왠지 모르게
예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진혼가 ]

* 등장 인물 : 병원장의 아버지, 미츠구 소년, 휠체어를 탄 남자, 야노(식물인간)

- (타고르의 시집 <초승달>에 나오는 시한편 ‘마지막’)“ 제가 떠나갈 때가 왔어요/
엄마, 저 가요/ 쓸쓸한 새벽녘 동이 트는 어둠 속에서/ 엄마가 두손을 펼쳐/ 잠자리 속의
아가를/ 더듬어 찾으려 할 때 저는 말할 거예요/ ‘아가는 거기 없어요’하고요/ 엄마, 저는
갑니다 ... (중간 생략)... 푸쟈(puja)의 잔칫상에서 얻은 것들을/ 들고 찾아 온 이모는
묻겠지요/ ‘아가는 어디 갔어요? 언니’ 하고/ 엄마는 조용히 대답하겠지요/ ‘아가는 내 눈 안에/
내 몸 속에/ 나의 영혼 속에 있단다’하고요”

- 야노 씨는 암수술을 받았다. 경과가 좋아 곧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날 저녁,
침대위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몸을 뒤로 젖히듯 쓰러진 야노 씨는 그 순간부터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 후 병원 측과의 타협으로 야노 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야노씨가
약하게나마 자기 혼자 호흡하는 것을 의사는 알게 되었고, 야노 씨에게서 조금씩 기계를 떼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두 눈을 뜨고 자기 집 침대에 누워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야노 씨는
한 달 동안 집에 있다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 사이 병문안을
수많은 친구와 회사 동료들이 다녀갔다. 건강할 때 야노씨는 노후엔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 “제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어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을 통해 평화를 위해서 일한
것은 아닐까요. 그 한 달 동안 그분은 하느님의 은혜와 사람의 따뜻함에 싸여 일생중에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병문안 오신 분들은 어느 분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좋은 얼굴을
하셨고, 병자를 문병하는 불안은커녕 고요하고 평화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저 자신도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 판도라의 상자 ]
* 등장 인물 : 키하라 치사토 (종합병원 부원장의 외동딸), 스즈키/ 히바리 청년

-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는 열어서는 안 될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병고, 비애, 질투,
탐욕, 시기심, 음험함, 기아, 증오 따위의 온갖 불길한 벌레들이 기어 나와 하늘을 뒤 덮고
시끄럽게 날아다니게 되었다. 그때 이래로 인간은 불행으로 영원히 괴로워하게 되었지만,
그 상자 한 구석에 겨자씨만큼 작은, 빛나는 돌이 남아 있었고 그 돌에는 희미하게나마 ‘희망’
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 ‘판도라의 상자’ 한 구석의 작은 돌에서 방사되는 그 빛은 ‘희망’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 향한 희망이다. 치사토 양은 죽기 직전 확신에 찬 밝은 모습으로 희망이 충족된
상태를 전해주었다. “저는 크신 존재에 저 자신을 위탁한 것입니다. 일상의 당연한 일이
대단히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산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전 우주는 하나이며 모든 것이
사랑과 조화 속에 있다는 것을 잘 알겠어요. 누구에 대해서도,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따뜻한 마음이 저절로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 치사토 양이 남겨준 이 말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들 앞에 계시된 ‘희망’이라고 생각
한다. 사고로 즉사할 수 있었는데 치사토 양에게 건강한 하루가 주어진 것은 바로 이러한
영원으로 연결되는 메시지를 전하라는 큰 사명을 다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전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라고 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지금 나는 한 송이 꽃의 미소가 감동을 주는 나날을 살아가고 싶다고
희구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치사토 양에게 묻고 있다. “치사토 양, 만족스런 일생
이었지요?”


[ 운명의 선의(善意) ]
* 등장 인물 : 미유키 씨(전문직 여성/말기 암환자), 스즈키

- 미유키 씨는 큰 출판사에서 열심히 근무했던 쟁쟁한 전문직 여성이었다. 마흔 아홉 살이
됐을 때 갑자기 암에 걸렸는데, 병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미 온 몸에 전이되어 말기의
대단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원한 이래로 미유키 씨는 ‘왜 나에게만?’이라고 하며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문병 오는 사람의 친절을 딸 잘라 거절했다. 문병객들의 발걸음은
점점 줄어들어 그는 더욱더 고독해졌다.

-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세 번째 방문을 했다. 미유키 씨는 아주 쇠약해져서 이전같이 미쳐
날뛰듯 하는 기력은 잃고 있었다. 자기는 곧 죽는다, 장례식 따위는 필요 없다, 어려서부터
자기는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도, 인정을 받지도 못해 늘 외로웠다 하며 “운이 나빴어,
운이 나빴어”하고 되풀이 하며‘나는 참으로 운이 나빴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온거다. 왜 하필 나만 괴로운 운명의 지배를 계속해서 받아야 하나,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라는 것이 그가 되풀이 하는 한탄의 주된 줄거리였다. 그러나 그가 너무나도 수없이
“운이 나빴어‘를 연달아 늘어놓았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운이 나쁘다니, 태어났을 때부터
운이 나빴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하고 말하게 되었다.
(이후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가 시작됨)

- “저는 오랫동안 ‘운명이란 어쩌면 이렇게도 악의에 차 있을까’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다가온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운명이란 선의(善意)가 아니었던가 하고
겨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실은 우연이란 없는 게 아닐까 싶군요.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떤 의미로는 필연이 아닐까 싶군요. 일어나는 사건마다 운명의 선의가 작용하고 있어,
모든 것을 좋게 안배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그것,
오랫동안 ‘운명의 악의’라고만 여겨온 그 말씀도 실은 ‘행복으로 초대하는 길잡이’가 아니
었던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제게 남겨진 시간은 이제 얼마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진솔하게 마주보고 저를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에게도 저를 용서해
주시라고 빌고 싶습니다.” “보세요. 저 같은 인간은 자식을 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업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괴로워하는 가운데 경쟁심만을 불태우며 살아왔습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는 참말로 생각해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 깨달았어요. ‘운명의 선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제게 괴로운 인생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토록 깊은 예지를 보여준
미유키 씨는 이튿날 아침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 전날 그렇게도 건강해보였는데 그의
죽음은 거짓말 같았다. 절망의 심연으로 깊이깊이 가라앉고 있던 미유키 씨는 할머니라는
큰 거북에 떠받혀서 ‘운명의 선의’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코 가라앉는 일이 없는 영원한 저
세상으로 떠나갔던 것이다.


[ ‘과월(過越)의 기록 – 네 통의 편지 ]

* 등장인물 : M씨(간경화 환자), 아케미(맏딸), 마사부미(오빠), 큰 할아버지, 스즈키,
스즈키의 친구, Y신부

- (병실에서) 한 장의 상본에 다음의 한 구절이 있었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요한 13,1). 이 구절을 소리 내어 읽은 내 친구는 천진하게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은 죽기 전에 가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그러셨던 것이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해서라도
이것만은 말씀해 두고 싶으셨던 것이겠죠.” 가족들 중에서 자기 혼자만 가톨릭 신자가 아니
었던 M씨는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저 유명한 ‘최후 만찬’ 그림은 그리스도께서
유언을 남기고 있는 장면이란 말인가요?”

- 한 주일 뒤에 M씨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됐다. 로마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Y신부가 문병 왔다. M씨는 임종을 앞두고 Y신부한테 세례를 받았다. 그 것은 세상 삶으로
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장엄한 과월(過越)의 의식이었다. 최후까지 전력을 다해준
S교수님은 숨을 거둔 M씨가 자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한 젊은 의사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나는 의사이지만 죽을 때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죽는다. M시와 같은
태도로 죽음을 맞고 싶다.” 그가 남긴 네 통의 편지는 극한적인 고통을 받아들였을 때에만
비로소 보이게 되는 ‘죽음을 넘어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이것을
‘과월’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과월’이란 성서 속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그것은 구세주를 기다리던 구약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전 인류를 위한 구속(救贖)을 다하신 새로운
기쁨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가르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는 것을 가르킨다. 또한 고통에서 희망으로, 멸망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것을 뜻한다. 그가 남긴 네 통의 편지는 ‘아들에게 부치는
아버지의 편지’, ‘아버지가 딸에게 부치는 편지’, ‘아내에게 부치는 편지’, ‘M씨 부인이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였다.


< 저자 및 역자 후기 >

- (저자 후기 중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죽음이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신문에 실려 있는 부음을 단지 정보로만 읽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죽음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심정으로
통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죽어간 사람이 지금보다도 더더욱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나기 시작한다.

- (역자 후기 중에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뉘우쳤으며 크게 감동했다. 이런 책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저자의 수필 맺음말에서 그는 “죽음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울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기 인생을 완결시켜주는 시간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반사되는 빛 속에서 화해하게 되는 최후의 반조(返照)시간을 통하여
삶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 올 죽음에 준비함으로써 삶을 보다 빛나게 할 수 있다.”라고 마무리 하고 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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