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주의 독서 메모 ] 43권~ 50


 



금주의 독서 메모 043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7.25.


[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

- 지은이 : 송봉모, 펴낸곳 : 바오로딸/ 134p
- 송봉모 신부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중 11편
- 지은이 프로필 :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S.S.L)취득,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서강
대학교 수도자 대학원에서 신약 과목 강의 등

[ 표지의 글에서 ]

세상 한복판에서 고단하고 힘들 때 이렇게 기도하자!
"저와 함께 계시는 사랑하는 주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바쁘고 어려울수록 더욱더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자.



< 들어가는 말 – 세상을 이분(二分)하는 태도 >


-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을 영적인 자리와 세속의 자리로 구분한다. 하느님과 관련된 교회
활동이나 모임은 영적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활동이나 모임은
세속에 속한다. 이러한 구분은 우리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영적 세계에서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세속 세계에는
하느님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여겨 욕심에 따라 행동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교회에서는 하느님을 기억하지만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산다는
얘기다.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지만 평일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셈이다. 극단적으로
세상을 이분해서 보는 좋은 예를 우리는 영화 ‘투캅스’에서 볼 수 있다.

- (이분법적이고 바리사이적인 태도) 영화 ‘투캅스’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양분해서
대할 때의 속물적인 모습을 과장해서 표현한다. 이른바 바리사이적 모습이다. 이 세상을
영과 속으로 구분하면서, 세속은 거룩하지 않기에 철저히 멀리하는 태도다. 바리사이
처럼 철저히 거룩한 신앙생활을 고집하는 이들은 대중가요는 물론 가곡과 고전음악
까지도 세속 음악이라 하여 멀릴 할 뿐 아니라 영화도 아무 영화나 보지 않는다. ‘십계’나
‘나자렛 예수’처럼 신앙에 관한 영화만 본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작품성이 뛰어
나고 감동을 준다고 해도 하느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가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단순히 어떤 작품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나오니까 좋은 것이고, 신앙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봐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너무나 미숙한 생각이다.

- (이분법적인 태도는 비성경적·비교회적이다) 세상을 영과 속으로 양분해서 보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그러한 태도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10,31)라고 하였다. 또한 세상을 양분해서 보는 태도는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신자
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것을 권고했다.

- (장소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장소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과 우리의
태도다. 우리가 지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가 않는가에 따라 그 자리가 구분된다. 세상을
영과 속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태도를 버릴 때 하느님 현존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넓어
진다.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도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 로렌스 수사의 다음 말은 우리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기도하는 시간이 부엌
에서 일하는 시간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기도할 때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 못지않게 부엌에서 일할 때도 철저히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 로렌스 수사는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프라이팬의 계란을 뒤집을
때도, 지푸라기를 주울 때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우리 모두는 로렌스 수사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지향을 두어야 한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고생을 하든, 고통스러워하든, 휴식을 취하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하나의 행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룩한 지향을 두어야 한다.

-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감으로써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하루 2퍼센트의 영적
시간은 일터나 가정에서 생활 할 때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은총을 얻는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려는 우리의 시선이다. 성찬의
전례 때 사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가 우리의 모든 행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중대한 결정에서 사소한 일에 이르기
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다.


[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붙들어야 할 것들 ]


-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신다. 마르타처럼 바쁜 삶을 살면서도 마리아의 관상적
태도를 갖기를 바라신다. 마르타는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좋은 마음에서 부엌일을 시작
했다. 하지만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가운데 마음이 갈라져 버린다. 그러한 내적
상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들어난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41). 마음이 갈라져 있으면 영혼이 평화롭지 못하다. 쉽게 불평과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신경이 예민해져 날카롭게 반응하게 된다. 마르타가 그런
상태인 것이다.

- 마르타는 주님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다 갖추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우리를 활동이나 기도 안에서 만나기를
바라신다. 주님의 이 두 가지 바램을 채워드리는 길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활동과 관상을
통합시키는 길이다. 이는 붙들어야 할 삶의 양식을 붙들고, 물리쳐야 할 삶의 양식을 물리치는
훈련을 끊임없이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 교회 역사에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활동과 관상이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활동보다 관상이 더 중요하고, 활동수도회
보다 관상수도회가 더 탁월한 수도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
하는 이들은 마르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이다. 활동과 관상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며 궁극에는 통합에 이른다. 통합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마르타의 바쁜 삶을 살면서도 마리아의 관상적 태도를 지녀야 함을 뜻한다.

- (기억 훈련)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숭고한 열망,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과
함께하려는 지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망각이다. 우리는 쉽게 하느님의 현존을 잊어버린다.
망각은 우리가 직면해야 될 적 가운데 가장 악랄한 적이다. 파스칼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 은혜
로운 만남에 깊이 감사했고, 자신의 삶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은총의 체험을 적어 심장 가까이 품고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자주 메모지를 만지곤 했다.
우리도 파스칼처럼 할 수 있다. 그런데 특별한 체험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
기억 훈련을 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훈련> : 하루 중 자주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예를 들면 특히
바쁠 때, 어려움을 겪을 때, 심리적으로 힘들 때, 피곤과 무력감으로 의욕이 없을 때는 “저와
함께 계시는 사랑하는 주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제게 평안을 주소서/ 제게 온유함을 주소서/
당신의 위로를 주소서”라고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자.
<두 번째 훈련> :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십자 성호 긋기. 초대교회 신자들은 매사에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고 사랑하고자 늘 성호를 그었다. 하루를 시작할 때, 집안에 들어가거나
나갈 때, 신발을 신을 때, 책을 펼칠 때, 식탁에 앉을 때, 램프에 불을 켤 때, 침대에 누울
때와 같이 모든 일상 안에서 성호를 그으며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의식했다. 우리도
식사 전후 등 하루 몇 번씩 성호를 긋는다. 남들 보란 듯이 성호를 긋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마음만으로라도 성호를 그으면 된다.
<세 번째 훈련> : 한 가지 일을 마친 후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는 스타티오(statio) 훈련.
이는 일을 시작할 때마다 성호를 긋는 훈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호를 긋는 훈련이
주님과 함께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스타티오는 주님과 함께 되돌아보는 훈련이다. 이는
어떤 일에서 다음 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했던 일을 깊이 생각해 보는 행위로 통합된 삶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 세 가지 훈련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자주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훈련,
둘째는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긋는 훈련, 셋째는 한 가지 일을 마친 후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는 스타티오 훈련이다. 이 훈련은 세상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가 고질적인 망각병에서 벗어나 가장 효과적으로 하느님의 돌보심과 현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 훈련은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도와
주며 우리를 영적, 인격적으로 성장시킨다.

- (기도 자리 마련하기)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려면 기도할 것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기도할 곳으로 물러나 고독 속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나약한 인간 본성 때문이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
했지만 어느새 성공을 찾고, 다른 이들과 협력하기 보다는 경쟁을 하고, 내적 자유보다는
무질서한 애착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당이나 골방을 찾아야 한다. 성당이나 골방에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지하철 안이든, 가게나 복도 한구석이든, 어디서든지 주님과 함께하는 고독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로렌스 수사님은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하루 종일 허드렛
일을 하면서 지냈지만 하루를 미사로 시작했으며 규칙적으로 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했다.
수사님이 바쁜 부엌일에서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성당에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주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매우 간단하고 분명하다. 주님은 우리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와 인격적인 친교를 맺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다.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당신의 동반자를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라 동반자다. 여기서 동반자는
구체적으로 신부(新婦)를 가르킨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창조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신부인 우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바쁠수록 성당이나
골방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 ]


- 관상과 활동을 통합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이 있다. 이는 마르타한테서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마르타가 많은 일을 염려하면서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타가 온갖 시중드는 일로 너무 분주했다는 것이다. 마르타의 이와 같은 모습은
실상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걱정에 사로잡힌 모습, 쫓기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는
<성서와 인간-10 :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에서 다루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진리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참된 인간의 길과 참된 하느님 섬김의 길을 가르쳐 주신 이래 더
이상 새로운 가르침은 없다. 실제로 인류 정신사를 발전시킨 이들 대다수는 그전에 알려
지지 않았던 것을 새롭게 발견한 자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시대에 맞게
말하고 필요한 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 것) 예수님은 몇 번에 걸쳐 걱정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령
하셨다. 권고가 아니라 명령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강하게
명령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걱정은 파괴적인 습관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명령이 아니라 권고에 그치게 되면 새겨듣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6만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상당한 숫자다. 이중에서 94
퍼센트인 5만6천 가지 생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걱정거리이다. 성경에서 걱정이라는
말은 정신세계가 나누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하루 종일 6만 가지의 생각이 오간다면 정신
사나울 수밖에 없다. 머릿속을 맴도는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 잡다한 것들이다. 이러한
대부분의 생각은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다.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일어난 것처럼 상상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 핸리 나웬은 걱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걱정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는 행위다. ‘혹시’라는 생각으로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걱정은 정서적·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에너지만 낭비할 뿐이다. 우리가 근심 걱정의 노에가 되지 않으려면 ‘혹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수록 미래에 대한 덧없는 근심 걱정은 줄어들게 된다.

- 하느님과 함께 온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세상사가 사소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면서 근심
걱정을 할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악마다. 근심 걱정은 악마의 운동장이라는 말이 잇다.
악마는 가상의 비극을 우리 상상 안에 설정해 우리의 평화를 갉아먹는 치사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라
해도 원수 악마가 근심 걱정으로 우리 내면을 감염시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
잡혀 폐한 삶을 살게 된다.

-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법) (1) 근심 걱정이 생길라치면 즉시 기도한다. 성경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기도할 것을 강조한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
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필리 4,6).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 우리의 근심 걱정을 온전히 내맡기지
않고는 평화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기지 않으면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없다.

- ‘근심의 주요 원인은 혼란’이라는 말이 있다. 나쁜 소식을 듣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혼란스러운 채 내버려둘수록 근심은 계속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서 하나씩 정리해 보는 것이다. 첫째는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의
근본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둘째는 내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인지 구분한다. 셋째는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최선을 다해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할 수 없는 것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의지해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 (2) 근심에서 벗어나려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걱정하는
신자들에게 마음에 걱정거리 대신 담아두어야 할 유용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
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필리 4,6.8).

-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기뻐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기쁨은 그리스도
인의 표지요 구원받은 자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딘가 구멍이 뚫려 있어 기쁨이 새고 있다는 말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르다.
즐거움은 가변적이고 일시적이지만 기쁨은 항구하며 영속적이다. 즐거움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되지만 기쁨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한테서 비롯된다. 기쁨은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이기에 항구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신앙 문제라 할 수 있다.

- (3)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방법, 곧 하느님께 걱정거리를 갖고 나아가 기도하고 걱정하는
대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해도 약한 인간인 우리는 여간해서 근심을 떨쳐내기가 어렵다.
근심이 밀려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마음에서 내보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근심에 근심이
꼬리를 물고 밀려 올 때는 곧바로 그 연쇄 고리를 끊어버려야 한다. 근심거리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은 내적 기쁨을 누리는 한 방법이다. 근심거리를 마음에서 내보내는
연습을 계속하다보면 자연스레 몸에 익히게 될 것이고, 좋은 습관이 된 만큼 마음은 평안
할 것이다.

- (쫓기듯이 살지 말 것) 일에 쫓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후회스런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서도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은 육신의 우선순위와 다르다. 육신은
성취와 성공, 감각적인 쾌락과 재미 등에 우선순위를 두지만 영혼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
가족과 함께 시간 갖기, 동반자인 배우자와 함께 대화하기, 하느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경치
보기, 하느님이 허락하신 인생을 감사하며 살기 등에 우선순위를 둔다.

-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는 이렇게 말한다. “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
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고,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죽음
앞에서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그것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13).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이것만이 중요하다. 나머지는 모두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 분석심리학자 융(G.Karl Jung)은 분주함은 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악 자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삶은 영원을 잊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 때문
이다. 쫓기는 삶의 반대는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삶이다. 그 여유란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통합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정서적인 힘과 시간을 가르킨다. 억지로라도 여유를
가져야 한다. 파스칼은 “누군가에게 ‘충분히 여유를 갖고 살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 하루의 여유는 아침에 시작된다. 하루의 여유는 아침에 시작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차분한
마음과 온전한 정신으로 시작한 하루와 허둥지둥 일어나 서두르는 마음과 몽롱한 정신으로
시작한 하루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하루 일과를 늦게 시작하면 그만큼 하루 삶의 속도는 급해
진다. 늦게 일어났으니 모든 것을 서둘러야 한다. 아침도 서둘러 먹어야 하고, 일터에도
서둘러 가야 한다. 허겁지겁 바쁘게 살다보면 내면이 피폐해진다. 인내, 사랑, 동정, 배려 등
온유한 마음은 사라지고 그 반대의 마음이 생긴다. 거칠고 날카롭고 공격적이고,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하게 된다. 나아가 서둘러 움직이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짓을 많이 하게
된다. 모름지기 활동중의 관상을 살려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온유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 테오도로 에프(Theodore H.Epp)는 왜 기도로 아침을 시작해야 하는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긁어모았던 시간은 아침이다. 만나는 태양이
떠오르면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침에 영적 만나를 먹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꼭 아침에 기도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이에 동감하는 첫째 이유는 하느님께
수확물의 맏배를 봉헌하듯이 시간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그날의 첫 시간을 봉헌해야 한다. 둘째, 첫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하루를 여유롭게 사는가 아닌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어제 삶을 반성하고, 오늘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여유롭게
살 수 있다.

- 하루중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외에 가장 많이 차지하는 시간은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신문과 잡지를 보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을 합치면 하루 여섯 시간은
될 것이다. 물론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고 여가를 보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해서 우리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인격적·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경험은 어느 정도 수고를 들여야 하는데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주는
정보는 우리의 수고 없이 밖에서 주어지는 정보일 뿐이다. 참 기쁨은 땀을 흘린 후 열매를
거둘 때 갖게 되는 것인데,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어떤 인내의 땀 흘림도 없이 주어지는 것
이기에 우리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것과 관계가 없다.

- 바오로 사도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에페 5,15-16)라고 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의미 있게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이란 그리스어로 카이로스이다. 성경
은 두 가지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이다. 카이로슨 질적인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주님과 일치하여 의미 있게 살아가는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주님과 관계없이 세속에 휩쓸려 허망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다.


< 나가는 말 –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


-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낳는다.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낳는다. 습관을 심으면 성격을
낳는다. 성격을 심으면 운명을 낳는다.” - 영국의 저술가 새뮤얼 스마일스.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표현한 것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렇게 권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언행일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주님 사랑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천막 만드는 생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영적
북극을 향한 시선을 절대 흩뜨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침반의 바늘은 언제나 북극을 가르키고
있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영적 북극을 향해 있어야 한다. 삶의 모든 일을 하면서도 마음의
눈은 늘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한다.

- 습관은 우연히 생기지 않는다. 습관은 반복 훈련을 통해 생긴다.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면
매일 몇 시간씩 연습을 해야 하고, 춤을 잘 추고 싶다면 매일 몇 시간씩 춤 연습을 해야
하듯이,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고 싶다면 매일 같이 필요한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연습이 처음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인내와 수고가 요구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연습은 점점 쉬어질 것이다. 프랭크 루박은 로렌스 수사의 책을
읽고 나서 그분처럼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그는 1년 동안 부단히 활동과 관상을 통합하려고 애쓴 후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평화의 기쁨 그리고 생명의 에너지를 자기 안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다.

-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면 ‘인앤아웃(In N Out)’이란 식당이 있다. 맥도날드나 버거킹과
같이 햄버거를 파는 식당이다. 인앤아웃 식당은 어떤 식당을 가든 항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가 좋다. 값이 비교적 싸고, 종업원들이 친절하며, 맛이 잇기 때문
이다. 맛이 있는 것은 사용하는 재료가 하나같이 신선하기 때문이다. 냉동이나 가공된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매일같이 공급되는 신선한 재료만 사용한다. 그런데 인앤아웃 식당의
진짜 특별함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식당에서 제공되는 종이컵 밑바닥을 보면 작은
글씨로 ‘요한 3,16’이라고 쓰여 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이다. 왜 눈에 띄지 않는 곳, 컵 밑에다 그것도 깨알 같은 글씨로 ‘요한 3,16’
이라고 쓴 것일까? 그것은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바쁘게
움직이며 일해야 하는 식당 안에서 마음만큼은 고요하게 주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다.

- 인앤아웃은 독실한 신자 가족이 운영하는 체인점이다. 처음 이 식당을 차릴 때 그들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식당을 운영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친절한
서비스와 함께 가장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들을 섬기
겠다는 목표인 것이다. 인앤아웃 식당의 운용목표는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앤아웃이 갖고 있는 거룩한 지향은 우리 각자가 처한
삶의 자리 어디에서든지 그대로 적용할 수 잇을 것이다.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4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8.01.


[ 미사는 빵이다 ]

- 지은이 : 최광복(엮음), 펴낸곳 : 도서출판 빅벨/ 124p
- 가톨릭이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예비신자 교리 및 신자 재교육용 교재
- 지은이(엮은이) 프로필 : 성신고등학교 졸업, 대건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위스콘신대학에서 M.B.A 졸업, 한국산업은행 본점,
싱가폴 지점 근무, 한국산업증권, 홍콩법인 대표이사, STX엔진(주) 감사 등

[ 표지의 글에서 ]

성경을 읽고 기도만 하면 되지 왜 빵을 성체라하며 먹는 것일까?
왜 가톨릭 신자들은 빵을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정말 2천년 동안 내려오는 전통적인 미사와 성체성사의 의미를 모르고는
가톨릭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 책머리에 – 영성체는 미사의 꽃이요 핵심이다 >

- 가톨릭교회의 공식예배 ‘미사’에서 신자들은 빵을 나누어 먹는데 이것을 ‘성찬례’ 또는
‘성체성사’라고 한다. 성체(그리스도의 거룩한 몸)를 받아 모신다고 해서 ‘영성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성체는 미사의 꽃이요 핵심이다. 왜냐하면 가톨릭신자들은 성찬례의
빵을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말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2천년 동안 내려오는 거룩한 전통으로서 미사와 성체성사는 가톨릭 고유의
트레이드마크라고 말할 수 있다. 미사에서 사제와 신자들이 같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모습이야말로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나눈 최후의 만찬의 재현일 것이다.

- 가톨릭교회의 공식적 예식 즉 전례는 미사와 성사로 이루어져 있다. 성사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일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하는 통로로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지로 드러내는 특별 예식이다. 성사에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 일곱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직접
주시는 성사이므로 최고의 성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성경을 읽도록 한 것이다. 관련 성경구절을 실었고,
교부들의 가르침과 성인들의 말씀도 가끔 소개함으로써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둘째,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의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2003.4.17.)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다.
이 책은 가톨릭이 궁금한 사람이나 가톨릭에 입문하는 예비신자 그리고 신자 재교육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성체성사 안에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가
요약되어 있다”고 하였다. 미사에서는 성체성사를 ‘신앙의 신비’라고 표현한다. 이 신비를
깨닫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1부. 성체성사는 꽃이다 ]


[ 1.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

- (성체성사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2천 년 전 초대교회 때부터 미사 예배를
드릴 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셨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 내려와서
가톨릭교회 전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을 성찬례 또는 성체성사라 한다. 미사는
가톨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공식 예배로서 신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성찬의 전례를 거행한다.

- 교황 바오로 2세는 2003년 성체성사에 관한 회칙을 선포하였는데 그 회칙 제목이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이다. 이 말은 성체성사는 교회가 먹고 사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곧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성체성사로 먹고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성체성사의 정의에는 최고의 찬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이라고 했는데 이는 성체성사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원천이요 정점이라는 말은 시작이요 끝이라는 말이다. 성체성사의 정의는 이것 말고도,
교회의 영혼, 성당의 살아 있는 심장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성체성사를 부르는 이름도 다양
한데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감사례, 주님의 만찬, 빵을 나눔, 거룩한 희생제사,
친교이다.

- 하느님의 백성 즉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죽음을 전하고 부활을 선포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미사 중에 선포하는 감사기도중 ‘성찬제정과 축성문’에 나온다. 성찬례의
감사기도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이로써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구원의 성사’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는 구원의 경륜이야말로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 2. 과월절의 희생양 ]

- (왜 과월절이라고 하는가?) 과월절 즉 ‘파스카’는 히브리어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기리는 축제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이집트를 벌하러 죽음의
칼을 든 천사가 내려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대문간에 발랐다. 죽음의 천사는 모든 이집트 집안의 맏아들과 가축의 맏배를 죽였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집은 천사가 들르지 않고 건너 넘어 갔다고 해서 과월절이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기리는 축일을 해방절 또는 과월절이라고 한다.
이때 서둘러 누룩 없는 빵을 만들어 먹고 이집트 탈출의 여행길에 나선 것을 기념하여 무교절
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미사 때 받아먹는 성체 제병(밀떡)을 누룩 없는 빵으로 만드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성경 읽기 : 탈출 12,1-3, 5-8, 11-14)

- 과월절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뛰어 넘는 것 즉 ‘부활’을 의미한다. 파스카는 온갖 죄,
즉 탐욕과 교만, 시기와 질투에 얽매인 노예생활에서 자유와 사랑의 새로운 삶에로 건너 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파스카는 우리가 죄의 생활에 죽고 하느님의 은총의 생활로 다시 태어
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파스카의 의미를 미사 때마다 재현한다.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기도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은 과월절의 희생
양인 것이다. (성경 읽기 : 1코린 5,7-8).

- (시나이산의 계약은 피의 계약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도 계약으로 보았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계약을 어기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는 것도 계약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계약을 어기면
죽음으로 밖에는 해결하는 방법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사람을 죽이는 대신
귀중한 재산이 되는 양을 희생 제물로 대신 죽여 바쳤던 것이다. 나 대신 죽는 희생양으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려고 한 것이다. 이것을 희생양 또는 속죄양이라 한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후 짐승을 잡아 번제(희생제물을 태우는 제사)를 올리고 그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림
으로써 맺어진 시산이산의 계약도 이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 읽기 : 탈출 24,1-11). 모세와 그 백성은 하느님과 피의 계약을 맺은 것이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성찬례도 피의 계약이다. 이와 같이 미사는 인간의 죄를 대신
하여 희생양을 봉헌하는 ‘희생제사’이다. (성경 읽기 : 히브 9,14/로마 3,25/ 에페 5,2).


[ 3. 친교의 잔치 ]


- (돈 없이 공짜로 와서 먹고 마셔라) 성찬례는 십자가의 희생제사이며, 동시에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잔치이다. 잔치란 먹고 마시는 것이다. 시나이산 계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피의 계약을 맺은 것 외에도 매우 중요한 주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세와 70명의 원로들이 하느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서 먹고 마셨다”(탈출 24,11). 이는 하느님 앞에서 잔치를 벌이는 천국복락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잔치에 초대하신다. 잔치에 와서 공짜로 먹고 마시라고 초대
하신다. (성경 읽기 : 이사 55,1-6).

- 모세와 70명의 원로들이 시나이산 위에서 하느님을 뵙고서 먹고 마셨듯이 잔치는 산 위에
베풀어진다.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고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가까이 근접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모세와 또 백성 중에서 뽑힌 70명의 원로들만
산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성경에서는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장소로 여러 번 묘사된다.
산은 하느님이 나타나시고 또 거룩한 일들이 일어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나이산
(모세의 십계명), 호렙산(모세의 불붙은 딸기), 시온산(아들을 왕으로 세움), 모리야산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침), 타볼산(그리스도의 변모) 등이다.

- (지혜가 자신을 먹고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신다) 구약성경에서 지혜는 ‘의인화’되어 하느님
처럼 자신의 열매를 끝없이 풍성하게 베풀어 주신다.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이고 하느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지혜는 바로 하느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잠언은 지혜가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잔치를 묘사하고 있다. 지혜의 음식을 먹고 지혜의
술을 마시라는 초대는 자신의 마음과 삶 안에 이 지혜를 받아들이라는 권유이다. 이는 어리
석음을 버리고 참생명을 얻어 의롭게 살아라는 것이다. (성경 읽기 : 잠언 9,1-6/집회 24,
19-21)/요한 6,54-55).

- 집회서에 지혜는 자신을 먹고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신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당신자신을
먹고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신다. 구약에서 지혜가 베푸시는 잔치는 신약에서는 성찬례를 가리
킨다. 지혜는 예수님 안에서 ‘인격화’한다고 볼 수 있다. “나를 먹고 나를 마셔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잔치에 초대 받았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 받았다. 또 오병이어의 잔치에도 초대 받았다. (성경 읽기 :
묵시 19,5-10)/ 요한 2,1-11)/ 마태 14,14-21).


[ 교회의 탄생 ]

- (가르침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되어 있다. 가르침을 듣고(말씀의
전례), 빵을 떼어 나누고(성찬의 전례) 기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미사인 것이다. 빵을 떼
나누는 것, 즉 성체성사는 초대 교회 생활의 중심이었다. (성경 읽기 : 사도2, 42-47).
우리는 순교자 성 유스티누스의 증언으로 2세기 때의 성찬의 거행과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미사전례 전통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증언은 155년경 안토니우스 황제
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쓴 글이었다.

- (일치의 성사)
하느님의 백성은 초대 교회 때부터 성찬례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성찬례는 서로 빵을 떼어 나누는 일치와 친교의 성사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
즉 교회는 성찬례의 친교 속에서 하나로 일치된 신앙공동체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빵을 떼어 나누는 성찬례 참여에서 이루는 일치의 힘을 강조한다.
(성경 읽기 : 1코린 10,16-17). 미사 때 사제는 포도주에 물을 조금 섞는데 이는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그리스도 당신자신의 희생제물과 일치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교회의 탄생) 교회는 파스카 신비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어린양)
의 희생제사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또 예수님의 피 흘리신 희생제물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교회는 창으로 찔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오순절(성령강림절, 즉 부활 후 50일)에 성령을 받음으로써 태어난 것으로 보지만,
교회 형성의 결정적 계기는 다락방의 성찬례에 있다는 것을 교황회칙 ‘교회는 성사로 산다’
에서 밝히고 있다. 즉 성체성사는 교회의 기원 자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의 토대와 근원은 파스카 성삼일이며 그중에서도 성목요일 성체성사의 제정에
있다고 보았다.

- 첫날 성목요일 최후만찬 때에 세워진 성체성사는 성삼일의 신비를 전부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목요일 밤 게쎄마니 동산의 피땀 흘린 고뇌와 성금요일 골고타에서의 죽음,
그리고 일요일 아침의 부활까지 성삼일과 파스카 신비를 전부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성찬례
거행에 그 기초와 중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세워질 수 없다.”라는 말을 잘 새겨야 한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성체성사 안에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가 요약되어 있다”고 하였다.


[ 5. 신앙의 신비여! ]

- (성체성사를 세우심)
성체성사를 세우심에 대한 성경 말씀은 공관복음 세 곳(마태오,
마르코, 루카)과 코린토 전서에 나온다. 미사 본문에 나오는 ‘성찬제정과 축성문’은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전서와 가장 가깝다. 바오로 사도가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라고 한 말은 이 성찬례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기원을 둔 전통임을 의미한다.
이 전통은 생전의 그리스도를 본 사도들의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통은 2천년 동안
가톨릭교회에 보존되어 내려왔다. (성경 읽기 : 1코린 11,23-26/ 루카 22,14-20)

- 루카복음에서는 이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고 싶은 예수님의 강한 바람이 나타나 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과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것은
지상에서 하는 마지막 과월절 식사로서 이 식사가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과월절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또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이 음식과 포도주를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종말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완성될 것이라는 간절한 기다림을 담은 말씀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하여 우리는 미사의 감사기도 중에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종말의 완성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항상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이다.

- (나는 생명의 빵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예수님은 생명의
빵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 부분은 성체성사의 핵심을 분명하게 해석해 주는 중요한
말씀이다. (성경 읽기 : 요한 6,66-69).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성체성사가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인지 의심하는 신자들이 더러 있을지 모른다. 다른 교파의 크리스천 중에는 이
말씀을 그냥 상징적인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
하신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명의
빵인 성찬례를 믿지 않는다면 제자들까지도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믿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을 우리 각자에게도 하신다. 우리는 수제자 베드로를 따라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로지 성찬례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찬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필수조건으로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 (실체변화와 탁월한 현존)
성찬례를 믿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내 살은 참된 음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톨릭에서는 미사의 성찬 축성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실체변화’라고 한다. 외형으로는 그대로의
빵의 모습이요 포도주로 남아 있지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피인 것이다. 교부들의 가르침 중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이다. “빵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가? 그것은 축성에 의해서 이다. 축성은 어떤 말씀으로 이루어지는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 거룩하고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는 순간, 사제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체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 성체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 현존은, 복음서와 사도 바오로가 증언
하였듯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선포되었고, 교회 전승에서 신앙의 진리로 인정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빛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이 교리를 가톨릭교회는 언제나 보존해 왔고 또 세상 끝 날까지 보존할 것이다.
따라서 성체의 실재적 현존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은 바로 교회의 전승이다.

- (탁월한 선물, 임마누엘)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선물이다. 성체성사에서 주시는 선물은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바로 탁월한
선물이며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치유해주시고 평화를 주시고 사랑을 가르쳐
주신다. 가톨릭 신자는 이 탁월한 선물을 받으러 미사에 간다. 사제는 일생동안 매일 미사를
드려야 한다. 평신도들도 가능한 자주 미사를 참례해야 할 것이다. 월터 취체크 신부의 체험
수기 ‘나를 이끄시는 분’에서 그는 미사의 의미를 우리를 웅변해 주고 있다.


[ 6. 은총 속에서의 친교 ]

- (희생제사냐 잔치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자들이 성체조배 및 성체행렬에 경건하게
참여하면 큰 은총을 받는다고 하였다. 성찬례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그 거룩함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성체성사에
대한 흠숭예배를 미사 중에는 물론이고 미사가 끝난 후에도 실천하여 왔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축성된 빵(성체)을 아주 신중하게 보존하고, 장엄한 흠숭을 위하여 신자들에게 현시
하며(성체현시 및 성체강복), 또 백성들의 기쁨에 찬 행렬(성체행렬) 중에 함께 모심으로써
이 흠숭예배를 실천한다.

- 성찬례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어린양의 희생을 재현하는 희생제사의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일치를 이루는 친교의 잔치이다. 우리는 미사 때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서로 음식을 나누는 친교의 잔치를 벌인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는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제사이며, 동시에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친교의 잔치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 (은총 속에서의 친교) 은총 속에 머물러 있는 자만이 성체성사 안에서 영적 친교 즉 영성체를
할 수 있다. 영적 친교는 은총생활을 전제로 한다. 즉 은총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
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은총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는 사람’이
되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을 실천하게 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중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고백성사를 받아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엄중한 경고를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가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교회 안에서
지금도 또 앞으로도 유효함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 지상에서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며, 어떤 면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을 미리 누리는 것이다. 옛 기도문에는 성체성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 거룩하여라! 그리스도를 모시는 잔치여, 그 수난의 기억은 새로워지고, 우리 영혼은 은총에
벅차고, 후세의 영광은 보장이 되는 잔치여!” 성체성사는 후세의 영광이 보장되는 잔치이므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다가올 천상의 영광을 미리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종말 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와 계시는
‘임마누엘’일 것이다.


[ 7. 성찬의 여인이신 성모님 ]

- 성모님은 강생의 신비(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심) 안에서 성체성사 신앙을 미리 이루
셨다. 이 말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성모님은 이미 사람이 되신 말씀을 잉태하고 있었
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머무신 역사상 최초의 감실(성체를 모셔 두는
함)이 되신 것이다. 사실 성모님은 9개월 동안 예수님을 잉태하고 계셨으므로 우리는 성모님을
‘황금궁전’ 또는 ‘계약의 궤’라고 부른다. 그런데 황금궁전보다 더 좋은 단어가 성경에 나와
있다. 바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마을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시고 성모님은 훌륭한 ‘빵집’이신 것이다. 이 탁월한 빵집은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고 최초의 감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을 ‘성찬의 여인이신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 성모님은 성체의 어머니이시다. 성체는 성모님으로부터 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으로
부터 당신의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살은 성모님의 살에서 왔으며, 예수님의
피는 성모님의 피에서 왔다. 동정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내 살에서 나온 살이요, 내 피에서
나온 피”라고 부르시는 것은 더욱 합당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성모님을 성체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다.

- 영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마음 안으로, 즉 집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된다. 성 암브로시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마리아의
영혼을 지녀야 하고, 하느님께 용약하는 마리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
이로다.” 마리아의 노래(루카 1,47-55)인 ‘마니피캇’은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때
부르신 노래다. 우리도 영성체를 하면 예수님을 우리 몸속에 모시게 되므로 찬미와 기쁨의
정신으로 마리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2부. 미사의 의미 ]

- 성체성사를 잘 받아 모시기 위해서는 미사의 참된 뜻,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미사는 신자생활의 중심이며 그 핵심을 이룬다. 미사는 교회의 영혼이고 성당의 살아 있는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사에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기도가 다 들어 있고 또 중요한 교리가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사에 나오는 모든 기도문과 축성문(미사 본문)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2000년 신앙과 예배의 전통이 미사
전례에 다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사를 이해하면 가톨릭의 전부를 이해한다고 말할
만하다.


[ 1. 미사는 참회로 시작한다 ]

- 미사는 크게 나누어 전반부의 말씀의 전례와 후반부의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어 있지만
앞부분의 시작예식과 끝부분의 마침예식(파견)이 있다. 시작예식은 참회, 자비송, 대영광송이
그 핵심을 이룬다. 그래서 ‘미사는 참회로 시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 (참회) 은총이 머물러 있는 자만이 영적인 친교를 이룰 수 있다. 자신의 죄에 묶여 있거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파스카 신비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없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을 수도 없다. 죄가 있는 사람은 참회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얻고 화해를 한 뒤에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중죄를 지은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은총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므로 화해의 성사(고해성사)를 통하여 영적인 건강을 되찾아야만 은총의 공동체
안에서 파스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성경 읽기 : 마태 5,23-24/1고린 11,27-29)

- 미사가 시작되자마자 사제는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라고 참회를 권유한다. 신자 공동체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느님과
모든 형제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음을 고백한다. 미사 중의 참회기도는
중죄(대죄)를 지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성사적 가치는 지니지 못할지라도 이 참회의 시간은
중요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해주고 또
사소한 죄는 이 참회의 시간에 사함을 받기 때문이다.

- (자비송) 참회의 기도 후에 이어지는 자비송은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나의 빚을 갚을 길이 없을 때 우리는 주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빈다. 갚을
자신이 있을 때에는 “좀 기다려주시오”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갚을 길이 없을 때
우리는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간청한다. 이것은 빚진 사람이 채권자
앞에 무릎 끓고 “빚을 탕감해 주소서”하고 간청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죄인이다.

- 그리스도교 역사상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 만큼 자주 바쳐져 온 기도는
또 없을 것이다. 이 짧은 기도문이야 말로 하느님과 인간의 근본적 관계를 단 한마디로 드러
내고 있는 것이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참회하는 마음이다. 참회하는 마음은 남을
탓하지 않고, 세상의 죄 많음에 자신의 몫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마음 자세
이다. 앞에 ‘주님’과 ‘그리스도님’으로 호칭을 바꾸어 가며 하는 이 자비송은 두 번씩 세 번
총 여섯 번을 읊는다.

- (대영광송) 대영광송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을 드리며 기도하는
가장 오래된 훌륭한 시이다. 대영광송 첫 부분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천사의 노래이고, 둘째 부분은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주님 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 까지로서 아주 오래전인 2세기부터 사용된
성부께 대한 환호소리이다. 셋째 부분은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 하느님, 성부의
아드님”부터 끝까지로서 4세기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성자)께 대한 찬양노래이다.

- 대영광송에 나오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미사의 가장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봉헌되는 희생양을 우리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
에서의 파스카 신비가 그대로 미사성제에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구한 어린양의 희생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 제사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미사의 시작 예식으로 먼저 참회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고
영광을 바침으로써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 2. 말씀의 전례 ]

- 말씀의 전례는 독서(구약 및 신약 성경), 화답송(시편), 복음전 알렐루야 노래, 복음
(4복음서), 강론(사제의 설교), 신앙고백(사도신경), 보편 지향기도(신자들의 기도)로 되어
있는데 주로 독서, 복음, 강론 등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엠마오의 제자
들처럼 먼저 성경의 말씀을 들어야만 마음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먼저 말씀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해야지만 성찬례에 참석할
수가 잇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먼저 듣고 난 다음 신자들은 ‘신앙고백’을 하고 이어서
‘신자들의 기도’를 바친다. 신앙고백은 요즈음 주로 ‘사도신경’을 바치는데 대축일에는
‘니케야 신경’을 바치기도 한다.

-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의 헌법(헌장)과 같은 것으로서 세례식 때뿐 아니라
매 미사 때마다 선언하는 신앙고백문이다. 신경을 믿지 못하면 더 이상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신경에는 기본적인 믿을 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을 외울 때 마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세례식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신경은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님(창조주의 존재/천주 존재),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시고 심판하러 오실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강생구속), 그리고 성령님(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
이다. 그 다음으로 고백하는 신앙조문은 거룩하고 보편된 가톨릭교회, 모든 성인의 통공(모든
성인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통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죄의
용서(자비송의 의미)와 육신의 부활(종말신앙)을 믿으며 영원 삶(상선벌악)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가톨릭(그리스어 catholic)은 ‘보편된’이란 의미이고 천주존재, 강생구속,
삼위일체, 상선벌악은 꼭 알아야 할 4대교리라고 한다. 그리고 교회의 네 가지 특성이란
거룩하고, 보편되고, 하나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온다는 것이다.


[ 3. 성찬의 전례 ]

- 성찬례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정된 것이다. 최후만찬의 오래된 전승에 속하는 복음은 마르코와 코린토 전서이다.
(성경 읽기 : 1코린 11,23-26) 성찬의 전례는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시간으로서 예물준비,
감사기도, 영성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 보면 제사와 식사이다. 제사를 ‘감사기도’라 하고
식사를 ‘영성체’라고 한다. 이는 예식은 미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이다.

- (예물 준비) 예물 준비는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할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것인데, 사제는
제대 위에 준비된 포도주에 물을 조금 타면서 다음과 같이 예물 준비 기도를 바친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간단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그리스도교 교리가 담겨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참 사람이시다. 그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뉨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술에 물을 타면 완전히 섞여 하나가 되듯이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완전하고도 유일한
중재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의 중간에 서서 중재를 하실 수 있는 것이다.

- (감사기도) 감사기도는 미사의 가장 핵심 부분으로서 여러 개의 기도문과 축성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나열해 보면 감사송, 성령청원(축성기원), 성찬제정과 축성문, 기념과
봉헌, 성령청원(일치기원), 전구, 마침영광송 등이다. 감사기도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지만
전례의 절정은 감사송, 성찬제정과 축성문, 전구 등이다. 감사기도는 네 가지 양식이 있는데
가장 간단한 제 2양식을 많이 사용한다.

- 감사기도중 첫 부분인 ‘감사송’은 전례시기별(대림, 성탄, 사순, 부활, 연중 등)로 또 고유
축일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뀐다. 감사송 끝에 모든 신자들이 합송하는 ‘거룩하도다!’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것으로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 세라핌이 하느님 시중을 들면서 부른
찬미가이다. ‘호산나’는 직역하면 ‘구원하소서’이지만 여기서는 ‘만세!’라는 환성이다.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고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환호할 때의 찬미가이다.
‘성령기원 : 축성기원’은 봉헌된 예물 즉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 달라고
성령을 청하며 기원하는 것이다.

- (빵과 포도주가 몸과 피가 되다)
다음의 미사 본문인 ‘성찬 제정과 축성문’은 사제가 제대
에서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려 축성하는 순간이다. 십자가상의 희생제사가 제대 위에서 재현
되는 순간이며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순간이다. (미사 본문)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드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
하여 이를 행하여라.’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 이 미사 본문은 미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이 최후만찬 때 세우신 희생
제사가 ‘지금 여기 제대 위에서’ 바쳐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변하’한다. 겉모양은 그대로 빵과 포도주로 남아 있지만 그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다. 한 실체가 다른 실체로 변화하는 것은 초자연적 현상으로서 항상
신비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다.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이고 빛의 신비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현존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전통적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성경 읽기 : 요한 6,48-57)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성찬 제정과 축성문’ 끝에 신자들은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신앙의 신비인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신앙의 신비는 구세주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뿐만 아니라 부활의 신비도 드러내는 것이다. 성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피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 즉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을 미리 잠깐 맛보게 하는 식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천국을 미리 누리는
것이며 미래의 영광을 보증해 주는 징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 까지’
이 신앙의 신비를 전하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종말신앙을 선포하는 것이다.

-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기다린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티우스는 성찬의 빵을 “죽음을 물리치는 영생의 약”
이라고 하였다.

- 빵과 포도주의 축성 후 사제는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도록 일치의 기도를
올린다. 성령청원은 ‘성찬제정과 축성문’ 전과 후 두 번 하는데, 첫 번째는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위한 기원’이고 두 번째는 ‘일치를 위한 기원’이다. (성령청원 : 일치기원)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 4. 모든 성인의 통공 ]

-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한 전구)
신앙의 신비가 재현되는 순간, 즉 성찬축성의 시간이야
말로 구속의 은총이 가장 충만한 은총이므로 우리의 기도가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순간에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 속에서 전구(轉求)의 기도를 드리고
도움을 청한다. 감사기도 중 이 ‘전구’의 순간에 교회와 교황, 우리 주교 및 성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리고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또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한 전구’라고 한다. 성찬례의 희생제사는 하느님 백성(교회)의 모든 지체 곧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해 바쳐진다. 은총 속에 있는 이들은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하여 얻은 해방과 구원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 (모든 성인의 통공)
사도신경에 나오는 ‘모든 성인의 통공’은 하느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신앙과 사랑의 친교이다. 이 친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
순례 중에 있는 교인들과 정화중에 있는 연옥 영혼들과 천상 영광중에 있는 성인들과의
일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 일치는 신비체(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신자들을 그 지체로 하여
이루는 신앙과 은총의 신비스러운 몸)의 구성원들이 서로 영적인 선물(기도와 선행)을 나누는
적극적인 일치이다. 즉 우리 지상의 순례객들은 천상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
하면서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우리를 위한 중개와 전구를 청하면서 그들과 친교를 이룬다.
또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선행을 실천하면서 그들과 친교를 이룬다.
이러한 일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의 전례에 참여한 모든 이의 친교인 영성체
속에서 구체화 된다.

- 우리는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빌어달라고 기도하며 또한 연옥 영혼들도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뵙게 해달라고 전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모님께 전구 기도를 드리는
것도 이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모님이야 말로 모든 성인들의 공동체
중에서 가장 으뜸이신 분이시다. 모든 성인의 통공 즉 지체 상호간의 소통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이고 친교이므로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근원적 중요성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지체 상호간의 전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성인
공동체의 소통을 더 다양하게 하고 더 활성화함으로써 지체 개인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심화시키고 촉진시킨다. 성인들의 통공과 전구는 그 근거가 ‘하느님의 은총’에
있으며 그 원천이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 있기 때문이다.

- 성찬의 희생제사(미사)의 봉헌이 죽은 이에게 유익하고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은 교회의 가장 오랜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미사를
거행하는 관습은 이미 2세기에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미사의 효력이 어떤 기도보다
더 크다고 믿었다. 우리 죽음의 순간, 일생의 행업을 선과 악으로 칼날 자르듯이 흑백을 가려
내는 그런 무서운 하느님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에게도 ‘모든 성인의 통공’ 속에서 한 가닥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이라는 우리 교회의 오랜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기도는 ‘전구’의 기도 다음에 ‘마침 영광송’으로 끝맺는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 (영성체) 영성체 예식은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치와
친교의 시간이다. 영성체 예식은 주님의 기도, 평화의 인사, 빵 나눔, 하느님의 어린양,
영성체로 구성되어 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한 후,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또 죄의 용서를 청한다. 이는 미사 시작 때의 참회를 영성체 직전에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이다. ‘빵 나눔’에서 사제가 축성한 빵을 떼는 동안 신자들은 모두 하느님의 어린
양을 노래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미사의 대주제로서 미사 첫 부분(대영광송)에 나오고
영성체 직전에 또 나온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미사가 희생제사임을 대변해준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인 것이다.

- 성찬의 음식은 빵과 포도주이므로 영성체는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것이다. 이를 양형
영성체라고 한다. 그러나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수가 많아지고 또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는
중에 성혈을 흘릴 염려도 있는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일반 미사에서 신자들은 성체만
영하도록 하고 있다. 성혈을 받아 모시지 않았다고 해서 성사의 효과가 반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체의 두 가지 형상 안에 각각 성사적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빵의
형상으로만 하는 영성체로도 성체성사 은총의 모든 열매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양형 영성체는
성찬의 표지가 더욱 완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영성체 형태이다. 혼배미사나
특별 축일미사 때에는 양형 영성체를 허용하기도 한다.

-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듯이 우리도 내 살점을 떼어 낼 때의 아픔을 참고 이웃과
나눔을 하고 희생을 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체적 삶을 산다는 뜻은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아내로서 남편에게, 어버이로서 자녀들에게, 자녀로서 부모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먹히면서 축복해
주는 삶이라 하겠다. 내가 먹힘으로써 나를 먹는 사람이 영원히 살도록 말이다”(이한택).
빵을 떼어 나누는 진정한 의미를 4세기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에게서, 또 20세기의
‘마더 데레사’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 (현세의 봉사)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복음)는 최후만찬 때 성체성사 제정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서는 최후만찬에서 봉사의 표양으로 ‘세족례(발씻김
예식)’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것은 성체를 영한 신자는 예수님처럼 남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성당문을 나갈 때 남들의 발을
씻으러 나간다는 각오로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 (성경 읽기 : 요한 13,12-17).

- (파견)
미사는 ‘강복’과 ‘파견’(마침 예식)으로 끝을 맺는다. 본래 ‘미사’라는 말은 ‘파견
(mission)이라는 말이고, 파견된 사람은 missionary로 선교사라고 한다. 엠마오의 제자들
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곧바로 일어나” 뛰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가십시오. 파견되었습니다”는 현대적인 말로 하면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이다. (미사 본문/파견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 (부활하신 후에야 알아들었다) 성체성사는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때 세워졌지만 성목요일
밤부터 부활 아침에 이르는 성삼일이 지나고 나서야 제자들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이해했을
것이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구약 예언서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야
그리스도가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성경 읽기 : 루카
24,13-35). 엠마오 제자 얘기는 바로 미사 참례와 똑같은 것이다. 아무리 인생이 나를
속일지라도, 그래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도 낙담하지 말고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미사의 첫 부분인 말씀의 전례에 해당한다.

- (두개의 식탁이 있다) 우리는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야만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함께 성찬을 나누어 먹어야만
성령의 힘을 얻어 이 신앙의 신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사의 참된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미사는 엠마오 이야기와 똑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 말씀의 전례에서 성경이 봉독되고 또 강론이 있는데 이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설명해주시는 부분과 같다. 그 다음 성찬의 전례는 엠마오라는
마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서 나눈 것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인
에게는 말씀의 식탁과 빵의 식탁 두 개의 식탁이 있다. 성경과 성체 이 둘은 교회가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이 두 가지 보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가지 보물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 되시는 것이다.

-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한 약속은 이와
같이 성경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켜진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의하여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낡은 인간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여정이다.


[ 부록 ] - 성체 찬미가

1. 성 토마스의 성체찬미가 (Adoro Te Devote)
2. 성 토마스의 성시 “혀여, 노래하라” (Pange Lingua)
3. 성찬의 신비 찬미가 (Lauda Sion Salvatorem)
4. 성찬의 신비 찬미가 (옛 번역)
5. 성모님과 함께 드리는 성체기도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5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8.08.


[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

- 지은이 : 로버트 버크만, 옮긴이 : 모현 호스피스, 펴낸곳 : 성바오로/ 227p
- 죽어 가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 호스피스 활동을 위한 길잡이
-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 블루 베일 차림의 수도자들은 예수님 죽음의 현장인 갈바리 산에
함께 한 이들, 곧 그분의 어머니와 여인들과 사도요한의 정신을 따라서 호스피스 활동을
펼친다. 이들의 의학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 보살핌으로 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임종을
맞는다. 모현(母峴)은 이러한 수도회 정신을 전해 듣고 어떤 스님이 지어 준 이름이다.
모현 호스피스는 임종을 앞두고 고통을 겪는 환자들과 함께, 또한 환자 가족들과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누며 생활한다.

[ 표지의 글에서 ]

“나는 개인적으로 자가면역 질환으로 2년 동안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고, 한때는 죽음 직전
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전에 내가 꼭 알아야 했던 많은 것을 배웠다. 환자로
지내면서 평범한 의사와 훌륭한 의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공감과 지지
였다. 우리는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배운 것을 최대한 이 책에 담았다. 죽어 가는 사람을
돕는 일은 언제나 많은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일로, 때론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 머리말에서)



< 들어가는 말 >

나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쓴다. 첫 번째는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음과 죽음의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죽어 가는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일러주기 위해서이다.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감정을, 마찬가지로 환자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당신이 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이며, 또 환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또한 환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부. 말하는 것과 경청하는 것 ]


[ 1. 왜 말해야 하나? 왜 경청해야 하나? ]

- (1. 서로 대화하는 것이 상대를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서로 통할 수 있는 방법은
입맞춤, 접촉, 웃음, 얼굴을 찡그리는 것, 심지어는 ‘침묵’조차 포함해서 여러 가지가 있다.
어쨌든 대화가 가장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다.

- (2. 단지 근심을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생긴다) 말을 하면 안도감이 생긴다.
환자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단지 환자에게 말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줄 수 있다.
모든 해결책을 내어놓지는 못하더라도 친구를 도와줄 수는 있다. 사실 ‘잘 경청’하는 것만
으로도 효과가 있다.

(저자는 책에서 등장하는 ‘친구’라는 단어를 환자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이들 – 배우자,
부모, 자식, 형제, 친구, 동료‘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음)


- (3. 사람은 말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국 해를 끼칠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꺼려할 때 말기 환자가 느끼는 소외감이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 말기 환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 일단 불안감이 생기면 환자는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하기 힘들어진다. 환자가 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고도의 경청법’이다.


[ 2. 귀담아 듣는 법 ]

잘 듣는 것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것일 것이다. 자연스런 대화를 위해 몇 가지 규칙만
알고 있으면 어색한 점을 대부분 피해 갈 수 있다.

- (1. 주위를 올바르게 설정하라) 묻는 것이 잘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물리적인 환경이
중요하다. 편안히, 앉아서, 느긋하게 환자와 얼마동안은 보낼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라.
이야기 하는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라. 이 말은 앉아서 이야기 하라는 뜻이다. 환자와 편안한
거리를 유지하라. 일반적으로 한두 걸음 정도의 거리가 알맞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책상이나 탁자와 같은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듣고 말하는 동안 상대방을 주시하라.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환자의 손을 잡고 어떤 식으로든 접촉을 유지하라.

- (2. 환자가 말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라)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를 때는 깊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기분이 어떤지를 묻고, “이야기해도 괜찮겠어요?”라고 묻도록 한다.

- (3. 귀담아 듣고, 당신이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 환자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애써야 할 것이며, 열심히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여야 한다. 잘 듣기 위해서는 환자가
하는 말에 깊이 생각하라. 대꾸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마라. 환자의 말을 가로막지 마라.
반대로 환자가 당신의 말을 가로막으면, 환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말을 멈추어라.

- (4. 환자가 말을 하도록 격려하라) 잘 듣는다는 것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격려하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잘 이야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고개를 끄떡이거나 “예,”,
“그래요.”, “좀 더 자세하게.”, “그래, 알겠어.”라는 간단한 말만 해도 된다.

- (5. 침묵과 비언어적 대화도 잊지 마라)
당신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 때’는 침묵
하라. 때로는 참으로 할 말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아무 말도 못하고 곁에
있기만 하는 것을 겁내지 마라. 때로는 환자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거나 어깨를 껴안아 주는
것이 어떤 말을 하는 것보다 낫다.

- (6.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은 “이 점은 이야기하기 힘들군요.”
라거나 “이 점은 잘 모르겠는데요.”라거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당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

- (7. 오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라) 환자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직감적으로 아는
것은 굉장한 일이지만, 이해가 잘 안되면 주저 없이 물어보아야 한다. “무슨 뜻으로 말씀
하시는 건지 알려 주실 수 없을까요?”라고 묻는 것은 정말로 필요하다. 오해는 지례 짐작
하는 데서 생긴다.

- (8. 주제를 바꾸지 마라)
친구가 기분 상한 일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면 그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기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듣도록
하라. 만약 대화하기가 정말로 힘들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라. 친구가 제시한 문제의
진의를 파악하기 전에는 주제를 바꾸지 마라.

- (9. 일찌감치 조언을 하지 마라) 바람직한 것은 누가 물어오지 않는 한 조언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누가 물어오기 전에 조언부터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화가
끊길 수 있으니 대화 초기에는 조언을 삼가라.

- (10. 추억을 떠올리도록 하라) 많은 환자들이 나이 들었거나 젊었거나 옛일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 나이 많은 환자는 회상을 통해 자기의 삶이 의미 있었음을 재확인한다. 추억을
나누는 것은 환자나 우리 모두에게 씁쓸하고도 달콤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정신치료사와
상담가들이 환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돌이켜 보도록 권장하는데 회고록
(이를테면 ‘유도된 자서전’)을 이용한다.

- (11. 유머에 반응을 보여라) 유머는 우리가 공포와 위험에 처했을 때 중요한 작용을 한다.
정신을 환기시키고, 일이 적절히 처리되는 동안 긴장을 없애 준다. 유머는 처음에 불가능한
듯이 보이는 일에 대처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나는 다른 환자와 지내 본 체험으로 웃음이
환자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썰렁한 유머라도 환자가
원하면 유머를 말하도록 격려하라. 확실히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농담으로 환자를 즐겁게 하려고는 하지 마라.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친구의 기분을
좋게 하려는 것보다 친구의 유머에 재치 있게 반응하는 것이 그에게 더 큰 도움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웃음이 병을 낳게 한다고 믿고 있다.

- 요약하면, 고도의 경청법의 목적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최대한 이해하는 방법이다.
절대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친구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잘 대화할 수 있다.
친구의 마음을 잘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많이 친구를 도울 수 있다.


[ 3. 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나? ]

-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마음의 지표를 정함으로써 당신의 대응방법을 바꿀
수 있는데 이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 (1. 친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고 이해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괴로움과
아픔은 줄어들고, 당신은 아주 곤란한 처지에서도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 (2. 반응을 달리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일단 친구가 표현한 감정이나 느낌이 당신의 감정
이나 느낌과 다른 점을 안다면, 당신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논쟁의 소지가 있는 일도
서로 도움이 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일로 바꿀 수 있다.

- (3. 하는 일의 방향을 설정하라) 방향이 설정되면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환자가 어떤 말을 할 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한다면, 당신은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사태 해결에 한 몫을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면, 당신은 분란에 일조하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 2부. 죽음의 과정 ]



[ 4. 과도기 ]

-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건강하던 자신이 죽을 수도 있고 또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까지 고통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것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서 ‘실제로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로 생각하는 변화의 시간이다.
이 변화의 시간은 나이에 상관없이, 병의 종류에 상관없이 여러 단계로 이루어지는 힘든
시간이다. 과도기를 더욱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이 과정을 3단계, 즉 죽음의 공포를
맞이하는 초기, 육체의 쇠약으로 생활방식이 바뀌는 병약기, 끝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시기로 나누었다.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의 과정을 부정, 분노, 거래, 우울, 수용의
5단계로 나눈다. 나는 이 5가지 반응 외에 근심, 불안, 희망, 죄의식 등 더 많은 종류의
반응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반응은 아주 초기에, 어떤 것은 병약기에, 또 어떤 것은
마지막 단계에 흔히 나타난다.

죽음의 과정을 개념적으로 잘 정리한다 하더라도, 교과서에 적힌 대로 죽어가는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죽음을 예측할 수도, 순서를 정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초진 때 이미 병이 깊어 죽음에 직면해 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신체적으로 큰 불편이 없어서 죽을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든 때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비교적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못 받아들인다.


[ 5. 위협에 직면하여 ]

- 병을 진단 받을 때, 신체적인 이상이 있든 없든 자신에게 일어날 죽음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대한 공포의 순간을 맞게 된다. 이럴 때 보이는 행동은 각양각색이다. 인간의 마음은 나쁜
소식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앞날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한
태도 결정이 힘들어진다. 사태 수습을 위해 발버둥 치며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때문에 어떤
반응이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만약 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면 쉽게 대처할 수 있다.

< 환자의 감정 >
- (충격과 의혹) 말기 질환과 죽음에 직면한 환자는 거의 모두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충격과 의혹이 시기를 거치게 되고, 때로는 그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그로부터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다. 충격이란 아주 불쾌하고 괴로운 상태다. 환자가 자신이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간단히 빠져나와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아무도 충격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 없다. 이 반응은 정상적인 하나의 과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숨에 회복하지 못하거나 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천천히 신간을 두고 회복
한다. 그러나 환자가 계속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 (부정) 환자는 마음속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이라고 말하지만, 부정하는 감정이
워낙 강해 사실을 간단히 믿지는 못한다. 부정은 사람이 갖고 있는 정상적인 방어기법중의
하나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은 대개 천천히 사라지며, 환자는 궁지에 빠지지 않고서도
나쁜 소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환자에게 (나쁜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암 병동에서 이루어진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
나는지를 절실히 알고 싶어 하고, 그래야 앞으로 계획을 빈틈없이 세울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이야기를 들은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의 정신 상태를 비교해 보면, 이야기를 듣지
못한 환자가 우울증, 불안, 소외감을 훨씬 많이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에게 원하는 사실을 다 이야기해 주고나면, 대부분의 환자들에서 이런 감정들은 천천히
없어짐을 알 수 있다.

- (환자가 알기를 원하지 않으면) 환자가 “나는 알고 싶지 않아. 말하지 마.”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므로 현실을 분담하여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많은 경우 환자는 묻고 싶으면서도 대책을 감당할 만큼 자신이 용감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외적인 상황은 다루기 힘들므로, 이 경우에도 환자를 돕고 싶으면
마음이 통하고 노련한 협력자(의사, 간호사, 사회사업가, 성직자, 정신과의사)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 (분노) 분노는 어떤 병에서나 흔히 나타난다. 그런데 감기처럼 단순하고 저절로 낫는
병에서는 병이 나으면 분노가 없어지지만, 만성병일 경우에는 날마다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환자가 경험하는 분노에는 3가지가 있다. 1. 친구, 친척, 살아 있는 환자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분노.(소위 ‘하필이면 내가 왜?’라는 분노) 2. 이런 일이 생기게 만들었다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운, 숙명 또는 영향에 대한 분노.( 종교적 믿음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분노가 신을 향할 수가 있고, 신앙심을 잃을 수 있다) 3. 도와주려고 노력한 모든 사람,
특히 의사와 간호사에 대한 분노.(‘흉보를 전해 준 사람에 대한 비난’)

‘하필이면 내가 왜?’라는 분노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 때,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기보다
고통과 절망의 울부짖음에 응답한다고 생각하라. 운명 또는 신에 대한 원망도 흔하고
실제적이다. 이와 같은 분노는 환자가 세계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근본적인 물음에서
나온 것으로 위로의 말이나 해서 넘어 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비교적 흔하고 복잡한
분노는 특별히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특히 의사)을 향해서 드러난다. 이 분노는 보통
이상으로 강하다. 당신은 이런 일에 제3자로 판단할 입장에 설 수도 있고 스스로 분노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중병의 경우에 흔히 나타나는데, 당신에게 개인적
으로 심한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당신 개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 (공포심) 심각한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흔히 볼 수 있고, 사회는 이를 수용하고 예측
한다. 가장 흔한 공포심 중에 하나가 두려움에 대한 공포이다. 공포심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공포심은 상상력을 동원한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상상하는
사람이다. 둘째,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공포심을 갖고 있다. 공포심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요소와 그 배합으로 이루어진다.
곧 육체적 무능과 병을 가지고 활동해야 하는 두려움,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두려움,
친구와 가족에게 짐을 지운다는 두려움, 가사에 도움이 안 된다는 두려움 등 온갖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에는 육체적 고통에 대한 것도 있다. 그리고 삶이나 존재의 끝에 대한 두려움과
영성적 두려움도 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환자가 어떤 공포를 가지고 있든 간에 환자
에게 시간과 마음을 열어 놓을 공간을 주고, 우리의 우정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 (희망, 절망 그리고 우울) 생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한다는 가능성(실현성)은 환자에게는
허무한 일이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절망도 죽어가는 흔히 나타나는 감정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절망을 즉각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절망’이라는 말은 ‘희망이 사라짐’을 뜻한다.
즉, 절망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뿐이다. 문제는 희망의 종류가 다양한데, 어떤 희망은
실제로 환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절망이 생각의 변화로 인해 생기는 반면에 우울은 기분이나 감정의 변화에 의해 생긴다.
우울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생길 수 있다. 절망은 대체로 우울증을 동반하는
반면에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 모두 절망을 느끼지는 않는다. 절망 또는 우울증을 가진 환자를
돕기 위해서는 2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절망과 우울증은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런 주기가 나쁘게 작용하여 실제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느냐 하는
점이다. 절망에 빠진 환자를 바라보는 것이 죽어 가는 사람을 돕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노력과 노고라는 점에서 보면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일인 셈이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접근방법 제시)

- (죄책감) 누구나 병이 위중해지면 어디에서나 죄책감이 생긴다. 이는 마치 소나기가
내리듯 찾아 왔다가 대부분 사라진다. 죄책감을 정의하기가 쉬지 않지만 책임감이라는
의미는 끊임없이 연상된다. 공포심이 상상력을 동원하듯 죄책감도 감성(感性)을 요구한다.
감성이 죄책감을 보상하거나 없애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도우려고 하는 환자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다. 죄책감이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고통 받고 있는 자에게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 당신의 느낌 >

- 우리는 친구나 친지가 3가지 주제 밑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고려할 수 있다. 1. 당신의 ‘공감’
- 환자가 화를 내면 당신도 환자의 분노를 느낄 것이고, 환자가 절망하면 당신도 절망감을
반영할 것이다. 2.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당신의 감정.- 환자가 느끼는 감정과는 동떨어진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당신이 화를 내는 반면에 환자는 불가피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환자가 낙관적인 반면에 당신은 절망에 빠질 수 있다. 3. ‘표적’이 된다는 느낌 또는 환자의
표현에 대한 당신의 반응.- 특히 환자가 화가 나 있을 때, 그 분노가 쉽사리 당신에게 향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환자가 표현하는 감정과 실제 감정은 다를 수 있으므로 이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가지 주제에 대한 세부 내용 메모 생략)

< 도움을 주기 위한 지침 >
- 말기 질환의 위협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돕는 일은 실용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수반해야
한다. 위협에 직면한 상태에서 환자에게 가장 큰 충격은 감정적인 것이고, 따라서 감정적인
면을 돕는 것이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 당신은 초기부터 실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면도 도와주어야 한다. 다음 지침은 초기에 환자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도와주는데 도움이
된다.

< 일반적 지침 >

- (1. 알맞은 곳을 찾아라)-서둘러 무엇인가 하려고 하지 마라. 처음에는 조심스레 당신이
어디에 가장 큰 도움이 되겠는가를 찾아라. (2. 다양성을 예측하라)-환자의 기분과 사고방식은
날마다 변할 수 있다. 미리 이 점을 알고 있으면 이런 일이 생겨도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다.
(3. 반복을 예측하라)-정신적 고통과 싸우는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계속 맴돌 필요성을
느낀다. 할 수 있으면 동행하라. (4. 자신의 일정이 아니라 환자의 일정을 따르라)-이미 짜인
계획에 따라 환자를 돕기보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즉석에서 계획을 짜라. 계획을 진행하기에
앞서 환자가 이미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관찰하라. (5. 활동과 도움을 혼동하지 마라)-많은
경우 환자를 위해 하는 일이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환자가 원하지
않는 한 자꾸 환자의 견해를 듣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지 마라. (6. 정보를 듣되 세계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마라)
-환자를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병세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만 자기주장만을 가지고 전문가가 되려고 하지 말고 환자의 상반된 의견도
경청하라.

< 부정으로써 돕는 법 >
- 계속 부정하고 있는 사람을 돕기란 쉽지가 않다. 먼저 부정의 힘은 강력하다는 것을 기억
하라. 환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환자의 감정을 드러내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 절망으로써 돕는 법 >
- ‘절망’이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완치되어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신이
보증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이 현실적인 희망을 줄 수 있는 힘은 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을 만나면 거짓된 희망으로 빈 공간을 채워서는 안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은 친구
로서 자신의 신용만 떨어뜨린다. (1. 가능한 한 현실적이 되라)-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을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아 당신을 못 믿을 사람으로 만든다. 환자를 내치지 않고, 희망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자신이 현실적이고 정직한 사람임을 말하게 된다. (2. 환자가 느끼고
있는 점을 알라)
- 환자가 얼마나 속상해 하고 있는지를 말하게 하라. 경청하고, 받아들이고,
가까이 머물라. 만약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건 할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그냥 옆에 머물러 있어라.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으면 환자의 손을 잡거나 어깨나 팔에 손을
얹어라. 일이 나빠질 때 움츠리거나 외면하기보다는 옆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이것이 친구
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3. 실질적인 희망을 강화하라)- 일단 환자의 절망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고 여겨지면,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암 환자의
90%는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통증에서 해방되고 싶은 희망은 현실적이고도 멋진 목적
이다. 대부분의 경우 죽어 가는 환자가 자신의 존엄성과 존경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현실
적인 희망이다. 이런 희망이 환자들의 주된 생각이고, 환자나 당신 모두가 이런 희망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6. 와병 중에 ]

- ‘와병 중’이라는 것은 처음 진단을 받고 충격을 받은 뒤의 단계이며, 환자가 마지막 순간이
실제로 다가왔음을 알기 전의 단계이다. 다시 말해, 환자가 곧 다가올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닫기 직전의 단계다. 이 단계는 진단 후에 곧 시작되지만, 만약 환자가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까지 진행되기도 한다. 이 시기는 병과 불확성
이라는 두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가진다.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것이고, 희망과
절망이 끝없이 교차하며 환자와 친구의 심기를 건드린다.

< 환자의 감정 >
- 병이 진행되면서 환자의 여러 감정들이 계속된다. 점차 적응되면서 큰 충격은 사라지지만,
새로운 장애나 증상이 나타나면 사소한 충격이 새롭게 살아난다. 부정하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우울증이 더 심해진다. 이 시기에는 환자의 체험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나는 병으로 인한 신체적 증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증상이 환자의 생활과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다.

- (육체적인 병) 중병에도 다양한 차이가 있다. 어떤 병은 빨리 진행되면서 환자를 마비시켜
거동을 할 수 없게 만들고 남에게 의지하게 만든다. 어떤 병은 초기에는 기능에 전혀 장애를
가져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개의 경우 환자의 신체 상태는 점차로 또는 단계적으로 나빠
진다. 그래서 건강의 악화는 예측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환자가 진단을 받을 때는 비교적 건강하다고 느낀다. 대부분의 중병이 비교적 천천히
진행되고, 오늘날에는 병의 증세를 오랫동안 무시하고 지내기보다는 일찍 의사를 찾는 편이다.
중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므로 병을 인정하기 힘들다. 분명 신체에
주요 증상이 없고 일상생활을 어느 정도 잘하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건강하다고 느끼는
것이 상황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 (고역) 신체 질환에서 우선 고려해야 할 중요한 점은(첫 충격 후) 지배력의 상실과 일상
활동의 상실, 좋아지지 않을 때 생기는 피로감과 고역,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 (신체 증상에 대한 감정적 충격) 신체적 불편감은 환자 개인에 따라 다르다. 중요한 것은
현재 환자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생기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무엇이 그를 가장 성가시게
구는가? 얼마나 가까이 지낼 수 있는가? 만일 환자와 가까이 지내려면 신체적 불편감에
의해 환자의 기가 꺾인 데서 오는 모든 반응에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한다. 아마 감정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일에 희망을 잃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심정일 것이다.

- (무슨 의미가 있나?) 말기 환자들은 가끔 “계속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묻는다. 이러한 감정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말은 순간적으로 머무르는
절망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끝내는 자살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서서히 그리고 결국에는 세상을 캄캄하게 보는 환자의 시각이다. 빛은 사라지고 사태는 점차
어둠에 갇힌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이때에는 절망을 대하는 접근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환자의 감정적인 깊이를 알고 받아들이며, 현실적인 희망을 강화하는 것이다.

< 당신의 감정들 >
- (교감하는 느낌) 우리는 ‘위협에 직면하여’ 있는 동안에 환자의 감정을 쉬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환자의 분노와 좌절을 자신도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병이 계속되어도
별 의미가 없다고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당신의 감정) 당신은 환자가 죽을 것이라는 예상과 그로 인해 상실
감을 가질 것이라는 ‘예상된 슬픔’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데 대해 분개하고,
짐이 지워졌다는 느낌을 갖고, 같이 지냈던 즐거움을 그리워하고, 병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이런 감정들은 흔히 생긴다. 환자를 원망하는 감정과 병을 원망하는 감정을 확실히 구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신의 감정을 환자에게 전가하기 쉽다는 점에 주의하면 충돌을 줄일 수 있다.

< 도움을 주기 위한 지침 >
- ‘위협에 직면해 있는’ 기간에는 마음의 충격이 꽤 크다. ‘와병 중’에 있는 기간에는 마음과
몸 둘 다 문제가 된다. 이제 앓는 사람은 실제적인 문제와 감정적 문제라는 2가지 차원에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 접근 방법과 방책을 찾기 전에 먼저 중요한 고민이 무엇이고, 그 중에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 (1. 필요한 것을 분석하라) 환자와 그 가족이 이용할 수 있는 간호, 취급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많은 소책자들이 있다. 우리가 특별한 방법으로 환자를 돕고 싶다면 환자를 돌보는
의사, 간호사, 암협회, 병 자기관리 단체 등을 포함한 여러 곳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2. 환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실질적으로 신체적 도움은 꼭 필요하고 많은 경우
고맙다는 말을 듣지만, 정신적 차원에서는 일이 힘들어 진다. ‘와병 중’에 환자는 언제나
선택과 결정에 참여하게 된다. 수술이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하는지, 조그마한 가능성을
위해 부작용을 견뎌야 하는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이렇듯 중요한 결정과 불확실성 앞에 놓인
환자는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환자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하는 것도 중요하다. 환자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 있으나 우리가
환자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책망을 받을 수도 있다.

- (3. 환자가 진실로 원하고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라) 치료 중에 가끔 환자는 자신의
깊은 공포와 분노를 드러내는 말을 한다. 예로 “수술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수술을 거부하는 것은 병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단이다. 또 공포의
표현이거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수술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격분하는 것은 병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기도 한다. 그리고 절망에서 오는 외침일 수도 있다. 이러한 난국에 환자의
감정요소를 알면 도울 수 있다. 환자가 말한 의미를 같이 토론하도록 하라. 가까이서 환자를
격려하다 보면, 처음에는 전혀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화제의 이면에 숨겨진 환자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7. 마지막 시기 ]

- 말기 질환의 마지막 시기가 되면, 환자는 점차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머지 않아 죽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어떤 환자는 병의 초기에 죽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환자 자신이나 그들의 친구들이 편해진다. 우선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환자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힘든 점과 받아들이고 난 후 어떤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 환자의 감정 >

- 환자가 점점 죽음을 받아들임에 따라 대개는 슬픔이 커지고 때로는 심약해진다. 불확실성과
큰 갈등을 일단 뛰어 넘고 나면, 대개 평온함이 찾아오고 분노가 줄어든다. 당연히 마지막
시기에는 부정이 사라진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대개는 정말로 슬퍼진다. 환자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지는 데 대해, 그리고 삶의 즐거움을 버리고 간다는 데 대해 슬퍼한다. 이런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앙심이 아주 강하거나 사후세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마지막 시기에 절대 슬퍼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환자들은 삶의 마지막에 대해
아주 담대하며 친구나 가족과도 쉽게 이야기한다.

-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살던 방식대로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일상생활을 까다롭지 않고
즐겁게 지낸 사람은 죽을 때도 그런 식으로 죽음에 다가갈 것이다.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사람은 죽을 때도 그런 식으로 죽을 것이다. 어떤 죽음은 아주 특이해서 마치 삶을 복사해
놓은 것 같은 경우도 있다. 환자가 자기 방식대로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친구의,
그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의 목적이다.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환자의 방식대로, 환자가
살아온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대부분의 사람은 죽기 직전에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 양상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어떤 이는 격렬하게, 어떤 이는 마지막까지 통증을 느끼면서 죽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올 수 없는 무의식 상태에 빠진다. 임사(臨死) 체험을 한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평화와 고요가 찾아오고, 고요함이 통증과 고통을 가져간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엔도르핀이라는 물질이 뇌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 당신의 감정 >

- 초기에는 아주 슬프고 예기된 비통함 그리고 분노와 원망을 경험하는 시기가 있다. 그러나
병이 점점 마지막 단계로 진행됨에 따라 친구와 친척들은 몸도 마음도 지친다. 간호하는 사람
들은 거의 대부분 수시로 참을성을 잃고 해방감과 함께 환자의 죽음을 예상한다. 대개의 경우
이런 생각은 정상적인 반사작용일 뿐, 간호를 끝내겠다는 뜻은 아니다.

< 통제 불능 >
- 통제 불능도 경험하게 된다. 환자들에게 해준 많은 일들이 가치 있는 일이고, 그래서 감사를
받기도 하지만, 환자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병이 승리하게 됨에 따라 통제 불능의 강한
실망감을 가지게 된다. 이런 감정과 좌절감이 합쳐져 그 자체가 분노와 허탈감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적으로 환자를 비난하게 된다. 자신의 정신적 투자가 다 허사가 된 것 같기에 환자로부터
멀어지기도 한다. 이런 감정과 원인에 유의하여 한 걸음 물러서는 여유를 가지면 전체 상황을
다시 한 번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받아들임의 차이 >
- 환자는 죽음을 받아들여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렇지 못한다면 정말 힘든
일이 생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환자를 도울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 받아들이기 전의 환자를 돕기 >
- 마지막 시기에 환자의 태도는 대부분 의사와 환자사이의 유대관계에서 생기는 신뢰에 의해
좌우된다. 만약 환자가 자기 의사를 믿고 그의 조언과 지시를 받아들인다면 당신도 그 관계를
지지해야 한다. 이것이 환자에게 힘이 된다. 만약 그 의사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다른 의사를
구해볼 여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서로가
갖고 있는 어떤 절대적인 우수성보다 서로의 개성이 잘 조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가
치유를 위해 온 천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때로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돈과 시간, 힘과 기회만 잃는다.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비겁한 일도 배반행위도 아니다.

< 대체 요법 >

-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마지막 단계에서 대체요법이 논의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치료법을 도입하는 것을 자신이 상당히 환자를 돕고 있다는 기분과 능력이 있다는 명분으로
여긴다. 대부분의 대체요법과 비전통적인 의료는 짧은 유행을 일으키고 난 뒤 영원히 없어
진다. 대개 1-2년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고 약 5년 정도 절정을 이루다가 사라진다. 만약
대체의학에 큰 기대도 걸지 않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일도 거의 하지 않는다면 잃을 것도
별로 없다. 하지만 커다란 희망을 걸고 주요한 목표로 삼아 힘을 쏟는다면 부디 조심하라.
기적적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둘 다 시작하기 전보다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 죽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의 환자를 돕기 >

- 죽음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공포와 분노를 줄여 주고, 죽음을 쉽게 맞이할 수 있다. 일반적
으로 두 가지 종류의 도움이 가장 가치 있다. 환자의 삶을 일일이 정리하도록 하는 실질적인
도움과 죽음이 환자의 삶의 의미를 앗아가거나 환자와 알고 지낸 사람들이 결코 환자를 잊는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강화해 주는 정신적 도움이 있다.

< 마지막 소원 >
- 당신과 환자가 친밀하고 둘 다 환자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 당신은 환자를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다. 환자가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도와주라. 중요한 문서를 정리하도록 도와주라.
환자가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아주라. 환자가 병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도와주라. 말기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동 등 특별한 장소가 있으면 적당한
곳을 찾도록 도와주라. 생의 마지막에는 아주 사소한 일도 환자에게는 중요하다.

< ‘과감한 수단은 사양’ - 생전 유서 >

- 매우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환자를 도울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은 환자의 치료에 대한
생각을 주치의한테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기가 되었을 때
자신이 어떤 치료는 받겠고 어떤 치료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다.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생전’유서이다. 이 짧은 문서는 환자가 혹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친구나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과감한 수단을 쓰지 않겠다고 미리 서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생전 유서가
환자를 치료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원하면 생전 유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 ‘당신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 삶의 끝자락을 맞이한 사람의 가치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줄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친구로 남을 것이다. 당신은 그를 잊지 않을 것이고, 그가 아직도 사랑받고 있으며, 그는
만나서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주라.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말하라.

< ‘당신에게 ...을 약속하고 싶다’ >
-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약속이나 당신의 주관에 반대되는 약속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 약속을 하면 나중에 상처를 주게 된다. 하지만 평소대로 노력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약속을 하되, 평생 동안 지키지 못한다 해도 너무 큰 죄책감을 느끼지는 마라.
사별 후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 ‘임종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지?’>
- 대부분의 사람은 죽을 때 의식이 없어지고, 그 대신 가수면과 혼미상태로 잠에 빠져
있다가 혼수상태가 되어 죽음에 이른다. 시간적으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마지막 순간에 실제로 의식이 없다. 하지만 많은 환자들은 자신이 죽을 때
가까운 사람이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한다. 환자의 상태가 극히 나빠지면 특별히 친척이나
친구가 가끔 불려오기도 한다. 때로는 정당하고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곁에 있지 못하는
수도 있으나 이유에 관계없이 살아 있는 사람이 너무 죄책감과 비통함에 휩싸이게 된다.
사후에도 우리는 임종의 순간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기억을 되살리면서 괴로워한다.

< 안락사 >
- 안락사는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하나는 ‘적극적 안락사’로 환자에게 치사물질을
주입해서 죽이는 것인데, 모든 서방세계는 이를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살인혐의로
사법처리한다. 또 하나는 ‘소극적 안락사’로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킬 소지가 있는 약물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합법적인 조치이며, 삶의 질에 가치를
주는 완화의학에서는 표준지침으로 받아들인다. 통증과 증상을 줄이기 위해 효과적인
약을 쓰는 것이 좋은 완화의료이다. 생전 유서를 쓰는 것은 이런 치료를 받고자 환자가
자기 뜻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것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환자를 인간적이고 사려 깊게 돌보는 길이다.


[ 8. 안녕 : 슬픔의 작용 ]

< 슬픔의 작용 >
- 슬픔이란 떠나보내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과의 인연을 떠나보냄으로써
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환자가 필요로 했던 중요한 관계가 깨어져
상처를 받는다. 기억하라.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환자가 죽은 후에도 당신은 살아야
하므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 환자가 차지한 자리를 대신할 무엇
인가에 마음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면, 당신은 슬픔 뒤의 삶을
개조할 수 있을 것이고, 슬픔의 기간은 당신이 정신적으로 다시 건강해지고 친구가 죽은
후에 인생의 성공을 이룩해 가는 방향으로 지나갈 것이다.

< 슬픔의 단계 >

- (초기 단계)
슬픔의 초기 단계는 충격과도 같다. 사별한 가족의 말대로 ‘마비’, ‘충격’,
‘망연자실’이다. 충격 후에는, 가끔 깊은 슬픔이 뒤따른다. 죽은 사람이 거론되거나 추억이
살아날 때면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초기 단계에는 쉽게 신체적 증상이 수반되기도
한다. 근심과 고통 때문에 가슴과 목의 통증, 호흡곤란, 전신의 통증 등의 증상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이 경험한 증상과 연관된 교감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 (중간 단계) 사별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때이다. 대개 죽음 후 몇 주
지나서 시작되지만, 미리 사별 연습을 한 경우에는 더 일찍 시작되기도 한다. 이 기간에
충격과 정신이 멍해지는 현상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겉보기에는 정상적으로 생활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당신은 정상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은 절대 정상이 아니다. 떠나
보낸 사람 없이 생활에 다시 적응하는 것은 큰일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시 적응하는
동안, 사람을 잃기 전과 똑같은 감정과 행동을 보일 수는 없다. 슬픔의 기간 중에서 중간
시기가 가장 힘든 고비이다. 사별 후 6개월쯤 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라앉고 우울한
기분을 갖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픔을 해소한다. 원래 스스로 해소
하는 때가 바로 이 단계이다.

- (해소 단계)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즐거움과 사랑으로 기억할 수 있고, 약간의
유감은 있지만 그래도 고통과 번민 없이 좋은 순간들만을 회상할 수 있다면 슬픔이 해소
되었다고 보는 것은 일리가 있다.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하고 독립적으로 살기 시작하면 슬픔이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별 전과는 다른 생활양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지만, 대개는 많은 부분을 해소한다.

< 예상된 슬픔 >
- 예상된 슬픔이란 환자가 죽기 전부터 시작된 슬픔이다. 예상된 슬픔은 정상 행동이라고
하지만, 특별한 문제를 야기한다. 환자가 죽지 않거나 또는 예견된 시간 안에 죽지 않을
경우, 미리 슬픔을 예상한 사람들은 2가지 감정, 즉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묻어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과 친구와 가족에게 거짓 사별을 시킨 환자를 책망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상된 슬픔이 꼭 죄의식을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시기가 너무
길어져서 못 참을 정도가 되면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 슬픔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 사람에 따라 슬픔이 잘못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중간 단계에서 곤란을
겪는다. 슬픔이 잘못되어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는 것을 ‘병적 슬픔’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상당히 큰 문제이다. 슬픔의 해소가 전혀 진전이 없거나 6개월 전에 받았던 상처가 아직도
같은 정도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거나, 친구의 마지막 순간에 보낸 것과 같은 삶을 계속
살고 있거나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이, 특별히 정신치료가 필요하다.


[ 9. 영성적인 면 ]

< ‘주님, 하필이면 제가 왜? >

- ‘하필이면 내가 왜?’는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고뇌에 대한 울부짖음이고, 도움을 찾는
요청이고, 죄책감의 표현이며, 이런 것들이 다른 것들과 뒤섞여 있는 감정이다. ‘하필이면
내가 왜?’와 ‘주님, 하필이면 제가 왜?’의 차이는 두 번째 물음이 특별히 신을 가르키거나
또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특정 신의 모상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질문은 분노, 격정,
절망 등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세속적인 질문인 ‘하필이면 내가 왜?’에 들어 있는
좌절감뿐 아니라 신앙에 대한 의심도 포함하고 있다.

신앙에 대한 의심에는 3가지 주요 요소가 있다. 첫째는 병을 생기게 내버려둔 신에 대한
분노이다. 둘째는 강한 실망감인데, 환자는 진심으로 자기 신앙을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
했는데 기대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 결국 버림받고 속았다는 기분을 갖게 된다.
셋째는 죄책감인데, 과거에 잘못한 일에 대해 신이 벌로 병을 내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 자기 삶의 원동력으로서 모든 일을 주관한다고 믿는 환자는 이런 의문들 앞에서 고민
하게 된다. 신학적 견지에서 보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허용되는 일이다. 실망과 분노, 그리고 죄책감의 표현으로 “주님, 하필이면 제가 왜?”라고
말하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고 이상한 일도 아니다.

< 기도의 작용 >
- 기도는 과학도 의학도 아니다. 기도는 영적이고 신비스럽고 오묘한 것이다. 필연적으로
기도하는 사람과 신이 서로 작용하는 영적인 관계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나 주관적으로
보면, 기도는 괄목할 만한 효과를 나타낸다. 환자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기도는 면담이나 진통제나 항우울제와 같은 효과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과 신 사이의 거래라는 점이다. 대체로 기도는 그 자체로 안도감을 가져다
준다. 현재의 상태, 기분, 신체적 고통, 희망과 실망을 말로 표현하는 그 자체가 치료의
효과를 지닌다. 믿는 이와 하느님 사이의 기도 관계는 아주 치유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짐을 덜고, 자신을 표현하고, 감정을 지워버리는 수단이 된다. 신앙인은 하느님과의 관계
에서 영적 표현에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으며 고통을 줄이고 편안해지기 위해 고통과
상처와 요구를 가지고 하느님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잘못된’ 신학 이론 >
- ‘잘못된’ 신학 이론이란 억압적이고, 작위적이고, 파괴적이고, 편협한 종교 이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거의 언제나 철저하게 상과 벌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잘못된 신학 이론(그리스도교 근본주의 교회/교파에서 나오는 말들)은 환자에게 큰 나쁜
영향을 끼친다. 많은 경우 잘못된 신학 이론에 의한 위협을 받은 환자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들은 터라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 하기 때문에 진실을 찾아
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당신 혼자의 힘으로 잘못된 신학 이론의 효과를 제거하기가 어려우면
언제든 교회나 다른 종교기관에 있는 권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 종합해서, 환자가 자신의 영서에 입각해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다음 사항
들을 명심하라. (1. 주제에 접근할 만큼 환자와 충분히 가까운 사이인가?)- 친구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생각해 보고 어느 정도 친교를 나눌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2. 민감하라)
- 신중하게 다루라. (3. 잘못된 신학 이론이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판단하라)
(4. 도움을 청하라)- 지도 신부 등과 상의해 도움을 받으라. (5. 환자의 선택을 존중하라)-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한 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하고 지지하라. (6. 환자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도 겁을 먹지 마라)- 환자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고 싶어 할 때
옆에서 들어주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 3부. 실전 ]


[ 10. 모든 간호인이 꼭 해야 하는 것들 ]

< 도움을 주기 위한 목록 >
- (1. 제안하라)-먼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를 알아라.
(2. 정보를 구하라)-환자의 의료적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분별 있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3. 요구를 분석하라)- 환자와 가족들의 요구를 평가하라. (4. 당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주고
싶은 것을 정하라) (5. 작고 실질적인 일부터 시작하라) (6. 넘치게 하지 마라)- 환자와 그
가족에게 적당하면서도 부담 없는 도움을 주라. 당신의 관대함에 신경을 써라. (7. 경청하라)-
정기적으로 환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 (8. 다른 사람과 연계하라)-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라.


[ 11. 각 개인의 관계 ]

< 부모를 여읜다는 것 >
- 부모를 여의고 받는 고통의 주원인은 우리가 정신적 지주를 잃고 난 뒤에 상처를 받기 쉽다
는데 있다. 상처를 받기 쉽다는 것은 아주 약해진다거나 의타심을 갖게 된다는 신호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다. 고통의 두 번째 원인은 부모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당신의 역할이 바뀐다는 것이다.

- (계획을 세우기 위한 세부지침) 1. 정보를 얻되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려고 하지마라.
2.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3.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목록을 만들라.
4.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라. 5.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을 만들라.
6. “만약에 ....한다면”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라. 7. 한 번에 한 걸음씩, 그리고 현실적으로
8. 모든 계획엔 유연성이 있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라.

< 배우자를 잃는다는 것 >

- 배우자를 잃는다는 것은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 친구, 애인, 지지자, 제2의 부모를 잃는
것을 말한다. 말기 질환이 결혼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 (계획을 세우기 위한 지침) 1. 정보를 얻되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려고 하지마라.
2. 지금까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3. 앞으로 무엇이 필요할 것인지를 추정하라.
4.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아라. 5.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을 작성하라.
6. 가족 전체를 위한 장래 계획을 세워라. 7. 한 번에 하나씩 계획하고 유연성을 가져라.

- (성에 대한 문제) 1.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라. 2.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라.
3. 사생활을 요구하라. 4.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라.

- (사별 후) 배우자를 잃고 다시 생활하는 것은 힘겨운 미래이다. 1. 느끼는 대로 받아들여라.
2. 필요한 것을 분석하라. 3. 자원의 목록을 만들어라. 4. 급하게 큰 결정을 하지 마라.
5.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라.

< 형제 또는 자매를 잃는다는 것 >
- 형제 또는 자매 사이는 부부 관계보다 좀 더 변수가 많다.
모든 형제간에 들어맞을 만한 몇 가지 일반적인 지침을 명심하자.
1. 지금까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2. 당신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라. 3. 지난 일을 이용하라.
4. 지금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받아 들여라.

< 친구를 잃는다는 것 >
- 형제와 마찬가지로 친구는 대개 동료나 같은 세대의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친구가 죽는다는
것은 가까운 사람을 잃는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우리도 또한 죽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친한 친구는 배우자, 자식, 부모를 모두 합쳐 놓은 것과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환자를
돕는데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

< 어린아이들 >
- 어린아이가 죽거나 가족 중에 누군가가 어린아이 앞에서 죽으면 특별한 문제가 생긴다.
- (죽어가는 아이) 모든 아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의 이해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 (연령별로 어린이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나)/ (죽어 가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반응)
- (실질적인 계획을 어떻게 세우나) 1. 정보를 얻어라. 2. 아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찾아라.
3. 자원 목록을 만들어라. 4. 아이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찾아라.
5. 다른 식구들도 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라. 6. 가능한 정상적인 생활을 하라.

- (말하기와 듣기) 1.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라. 2. 아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짧다.
3. 얼마나 이해했는지 점검하라.

- (사별 후) 아이를 잃고 난 슬픔은 언제나 아주 크고 깊으며, 때로는 오래 지속된다.
다음의 지침들이 아이를 잃고 난 가족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이상화하지 마라.
2. 너무 오랫동안 물건에 집착하지 마라. 3. 서둘러서 큰 결심을 하지 마라.
4. 슬픔을 선별해서 부담하라. 5. 도움을 청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 부모의 죽음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 >
- (아이들과 부모의 병) 부모가 앓는 동안 나타나는 아이들의 행동은 그들이 그 일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 (실질적인 조언) 1. 아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시키지 마라. 2. 어린아이는 문병을 짧게
하도록 하라. 3. 놀이를 통해 아이들을 참여시키고 끌어안아라.
4. 반응을 예측하고 당황하지 마라. 5.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의 목록을 만들라.
6. 학교에도 알려라. 7. 자녀를 위해 시간을 안배하라.

- (부모가 죽고 난 뒤) 부모의 죽음은(특히 엄마의 경우) 어린아이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여러 가지 감정을 겪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죄의식과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 부모와 사별한 아이들을 돕는 요령은 최대한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 (도움을 주기 위한 지침) 1. 안정감을 주라. 2. 자녀들을 위한 시간을 가져라.
3.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라. 4.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라. 5. 당신의 역할을 분명히 하라.

- (말하기와 듣기) 1. 죄책감은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해결하라. 2. 추억을 피하지 마라.
3. 슬픔을 적당히 나누어 가져라.

< 형제의 죽음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 >
형제나 자매의 죽음은, 특히 나이가 비슷하거나 오랫동안 같이 지내 온 사이라면 남은
형제나 자매에게 참담함을 안겨 준다. 문제가 생겼을 때 즉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뒤로
미루는 것보다 낫다.


[ 12. 에이즈와 치매 ]

- 에이즈나 정신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병(치매)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돕는 것은 특히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 병의 특징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돕는 사람은 환자와
대화를 잘하려고 계속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도와주려는 노력을 힘들게 만드는 사회적인
요소가 있다.

< 에이즈 >


- 에이즈(AIDS)라는 병은 바이러스에 의한 면역계 질환이다. 바이러스는 성적 행위를
통한 감염, 주사바늘에 의한 감염, 수혈을 통한 감염 등이 있으며, 자궁 안에서 산모로부터
태아로 전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비교적 약해서 인체 밖에서는 쉽게 죽는다.
때문에 에이즈 환자가 만졌던 물건을 만지거나 가볍게 접촉하는 것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
일단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하더라도, 발병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한다. 만약 발병하면,
환자는 극히 드문 폐렴을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질병에 걸리기 쉬워진다. 환자의 피에
노출되지 않는 한, 그냥 접촉해서는 절대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친구가
에이즈 환자라도, 그를 만났다고 해서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릴 위험이 가장 높은 집단으로 알려져 있어서 에이즈 환자들이나
그들의 친구들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와 불신감은
여러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동성애자에 대한 섣부른 공포심이 유발되고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에이즈를 ‘동성애자의 역병’이라 부르고 ‘신의 천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이즈로 죽는 사람보다 담배를 피워서 죽는 사람이 더 많지만 흡연자에 대한 비난은
그리 심하지는 않다. 흡연과 성적행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사회적 금기여부에 기인하는
듯하다. 성적 행위가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이고 사람들이 성에 관해서는 곤혹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만큼 환자에 대한 공포심과 무관심이 미리 내재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의 가족과 친구들도 똑같이 사회적 오명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에이즈라는
진단을 받으면 부모는 자기 자식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부모는
한방에 유린당한 사람처럼 다가올 사별, 고통, 불필요한 수치심까지 지게 된다. 더군다나
종교적인 면이 그 짐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 종교와 에이즈 >

- 에이즈 환자들 중에 신앙심이 강한 종교인이 많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쟁점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교회에서 비난을 받고, 위안과 생명력을 얻어야 할 근원으로부터 잘려
나갔기 때문에 더욱 심한 고통을 받는다. 많은 기독교 교파 중에 유독 근본주의자들이
동성애를 죄악시한다. 그들의 견해와 정의로는 어떤 종류의 동성애도 교회 영역 밖의
일이며, 하느님의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근본주의 교파의 목사가 에이즈에
대해 분개하는 광경은 실로 역겹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아주 동떨어져서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특별히 자기 시대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과 같이
일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인내와 자선을 가르쳤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비난
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가 에이즈 환자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공포,
무시와 미움으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에이즈 환자를 돕고 있으나
그들과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느낀다면, 다른 말기 환자를 대하듯 그들을 대하면 된다.
‘이 환자가 에이즈가 아닌 다른 질병으로 죽어 가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라고 자문해 보면 주위의 시선과 마주할 수 있다.


< 지능 상실과 연관 병 >

- 사회와 동떨어져서 희생되고 있는 또 다른 의학적인 문제는 지능 상실 또는 ‘치매’가
있다. 알츠하이머 병, 헌팅턴 병(선천성 중추신경 질병), 말기 다발성 경화증을 포함해
뇌의 신경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질환이 지능 상실을 가져 온다. 이런 경우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 전에 친구나 가족에게 사랑과 호의를 받던 사람은 사라지고, 그 대신 신체적으로는
닮아서 우리가 알아볼 수는 있지만, 걸핏하면 잊기 잘하고, 성미는 급하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귀신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 가족들은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인데도 죄책감을
느낀다.

치매가 진행됨에 따라 그 사람이 불합리하고 분별없다는 것을 알고 그가 말한 것을 상기
시키거나 설득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는
그 사람이 육체적으로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또는 친구이므로 그를 보면 과거의 감정이
되살아나 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보호자는 인내와 침착한 성격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전에 알던 사람과는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므로 다소 힘들어진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히 절망적인 좌절로부터 자신의 감정을 떼어 내고, 또 한편
으로는 친구를 간호하기 위해 육체적으로 충분히 가까이 있어야 한다.

치매가 생긴 사람을 더 이상 집에서 간호할 수 없게 되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이때 일반적으로는 다른 시설을 찾게 된다. 그렇게 되면 치매에 걸린 사람을 간호해야 하는
부담을 더는 가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가족이 더 이상
돌볼 수 없어서 시설에 의뢰하고 나면 실패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가족이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친다. 치매 환자를 다른 곳에 맡기는 것이 가족의 정신건강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하다면, 이는 아들이나 딸로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과정이다.


[ 13. 의료계 종사자의 대화 ]

- 환자나 친지들이 의료진에 대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대화의 결함이다. 의사의 대화
수준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환자나 친지들이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경우 양쪽 모두에 잘못이 있다. 의사나 간호사는
조직의 일부이지만, 대체로 정보를 유출하지 않으며, 적당한 보조요원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로는 방문간호사, 사회사업가, 상담사, 원목자, 작업 요법 치료사, 물리
치료사, 정신치료사, 정신과 전문의, 가정방문팀, 완화의료팀 등이 있다. 그런데도 적절한
도움이 환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 가장 흔한 문제는 대화의 결함이다.

다음은 대화의 기회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간단한 방법들이다.
(1. 어떤 내용의 대화를 원하는지 결정하라) -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문제로 대화를
하려는 것인지 먼저 결정하라. (2. 대화의 우선순위를 정하라) - 의사, 간호사, 비서에게
급하게 할 말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혀라. (3. 전화롤 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 - 해야 할 말을
전화로 해도 되는지 고려해 보라. (4. 용건만 말하라) - 두서없이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라.
(5. 약간의 불확실성을 예견하라) - 불행이도 많은 질문을 하지만 쉽게 답변을 얻지 못한다.
특히 미래에 관한 부분에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6. 최신 정보를 얻어라)-
방문을 할 수 없는 날에는 병동으로 전화를 해라. (7. 만족스럽지 못하면 이야기를 중단하라)-
자칫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환자의 치료에 악영향을 끼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으므로, 꼭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이 방법은 쓰지 마라. (8.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라) - 의사와 간호사는 사람을 돕기 위해 전문 의료인이 되었고,
그래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을 듣고 싶어 한다.


[ 결론 ]

- 무엇보다도 아무리 고통스럽고 좌절하고 힘들고 지쳐도, 죽어 가는 사람을 돕는 일은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이 책이 다른 사람을 돕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6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8.15.


[ 벼락을 맞았습니다 ] - 나를 살리신 하느님

- 지은이 : G.P 오르티즈, 옮긴이 : 차 베네딕토, 펴낸곳 : 아베마리아출판사/ 190p
- 저자의 기적적인 임사체험(臨死體驗) 이야기


[ 표지의 글에서 ]

이 책은 1995년 5월5일 남미에 위치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시작된다.
치과 의사이며 이 책의 저자인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 박사는 그날 강한 벼락을 맞아
몸이 숯처럼 완전히 타버리면서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의학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하느님, 성모님, 성인들을 만나고,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며, 연옥과 지옥의 실상을 직접 확인하고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


"듣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귀머거리이며, 보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장님이다."

< 책머리에 >

- 이 책의 저자인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 박사는 콜롬비아의 치과의사로서 1995년
5월 5일 콜롬비아의 보고타 국립대학에서 일어난 사건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날
그녀는 대학에서 논문자료를 정리하기 위해서 다른 건물로 가던 중 역시 치과의사인
조카와 함께 벼락을 맞았는데 조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완전히 치유된 후 그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임사체험(臨死體驗)을
전하고 있다. 벼락을 맞았을 때 그녀의 살 전체가 숯처럼 타버렸고, 간과 신장과 허파도
회생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되었다. 심장도 이미 멎은 상태였다. 모든 의사들은 소생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포기한 상태에서 역시 의사인 동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다시 소생하게 되나 또다시 심장이 멎게 된다.

- 그녀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죽음의 상태에서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오가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심장이 멎은 상태에서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심각한 뇌손상을 입게
되는데, 글로리아 박사는 기적적으로 아무런 뇌 손상도 입지 않고 모든 피부와 내장기관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촌 덕분이었다.

- 저자가 체험한 모든 표현대로 사후 세계가 똑같이 일어난다 볼 수는 없으나, 이런 표징
들을 통해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하는 사후 세계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후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하나의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윤리의식과 죄의식이 희박해져 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그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겸손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 2009년 성 요셉성월에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한국본부장 하 안토니오 몬시뇰

* 이 책의 글은 모두 존칭어(존대어)로 기술되어 있으나 일상어로 수정 메모하였음 *


[ 1. 벼락을 맞았습니다 ]

< 1995년 5월 5일 > 하루 종일 비가 내렸던 금요일, 중앙도서관으로 필요한 몇 권의
책을 가지러 조카(치과의사)와 함께 작은 우산을 쓰고서 가는 길에 큰 물웅덩이를 뛰어
넘으려고 하는 그 찰나에 우리는 벼락을 맞았다. 조카는 즉사했다. 나는 벼락이 팔 위쪽
에서 들어와 몸 전체를 태워버렸다. 내 몸의 살 전부는 엄청난 벼락으로 인해 숯처럼
타버렸다. 두 젖꼭지는 사라져 버렸고 특히 왼 가슴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몸에 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입술, 복부, 하체뿐만 아니라 발도 완전히 타버렸으며, 번개는 내 몸의
안과 밖을 시꺼멓게 태운 뒤 오른발을 통해 빠져 나갔다. 간과 신장도 심하게 타 버렸고,
허파와 난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벼락이 내 몸에 닿은 즉시 나는 심장마비 상태에 빠졌고,
사실상 죽은 목숨이었다. 벼락으로 인한 전기 충격 때문에 몸은 움츠려든 채 심하게 떨고
있었다.

<“글로리아!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기적은 너무 엄청나서 믿을 수가 없어요”>
내 몸으로 입증할 수 있는 개별적인 세 가지 상태를 통해 하느님의 이 기적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다. 첫 번째는 심장 정지 상태인데, 이것은 뇌 기능 유지에 중요한 산소 공급
부족을 야기하여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남기게 된다. 지금까지 급성 심장 정지 환자들의
경우 생명을 건지거나 큰 정신적 장애 없이 살아나는 기회는 극도로 미미하다. 심장마비의
혼수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후에도 뇌에 전혀 손상이 없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위대한 기적이었다. 심장과 마찬가지로 숯처럼 되어 버린 신장과 허파가
다시 기능을 회복한 것도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피부가 재생된 사실도 큰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한 달 후에 의사들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글로리아!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기적은 너무 엄청나서 믿을 수가 없어요. 거의 모든 피부가 재생되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지금 여기 생성된 것은 얇은 피부막이고, 그 사이사이에 생살인 부분이 여전히 많아요.
하지만 연한 피부가 생성된 부위로 볼 때, 곧 몸 전체가 다시 피부 보호막으로 덮일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리가 염려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발을 절단해야하겠습니다.”

- (감사와 절실한 청원 기도후) 갑자기 제 발의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3일 사이에
검은 다리가 천천히 붉은 색을 띠며 밝아지기 시작했다. 숯이 된 다리에서 점점 더 넓게
혈액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내 다리구나!’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다리를 절단하기 전 마지막 검사를 하기 위해 내 병상으로 회진을
왔을 때,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로 버티고 서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의사들은 나를
검사하며 계속해서 내 발을 만져보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리로 할 수 있는 동작들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심한 통증은
있었으나 이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다리가 제 몸의 한 부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 유방과 난소의 재생 >
여러 의학적 검사를 통해 현재 난소의 상태로는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1년 반쯤 지났을 무렵, 젖꼭지 부위가 피부로 뒤덮여 있던
그 자리가 갑자기 당기고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부가 당기면서 팽창하기 시작하더니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젖가슴 형태가 나타나더니 점차 자라기 시작했다.
다 무너져 내렸던 젖가슴이 다시 생겨나게 되었던 것은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난소가 완전히
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게 가슴을 다시 주셨던
것이다. 그 후 생리도 정상적으로 되었고, 내 몸의 모든 여성 호르몬도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난소에서는 다시 정상적으로 난자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내
몸 안에서 이루셨던 기적들이었다.

< 몸은 지상에, 영혼은 천상에 > 이번 사고로 내가 체험했던 것은 가장 극적이고 훌륭하며
설명할 수 없을 만치 놀라운 것이었다. 사실 그것을 세상의 말로 제대로 설명한다는 불가능
하다. 내 몸은 숯처럼 검게 타서 누워 있는 동안, 내 영혼은 놀랄 만큼 하얀 터널 속에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밝은 하얀 빛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나는 환희와 평화와 행복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말로는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시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 그런 빛 속에서 나는 앞으로 걸어갔으며,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나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으며, 그 빛의 터널 안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위쪽으로는
태양처럼 빛나는 하얀 빛이 있었다. 그 빛의 색깔과 밝음을 표현할 수는 없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상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 빛은 그야말로 황홀함 그 자체였다. 그 빛은 위대한
사랑과 평화의 원천 같았다. 다시 위쪽으로 시선을 두자 매우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 저와 관계되었던 모든 사람을 단 한순간에 그것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정말 눈
깜짝할 순간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를 보았다. 형언할 수 없이 충만하고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환생에
관한 사실에 속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 그곳에서 사람들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으며,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달랐다. 지금
우리가 보는, 피와 살로 된 몸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내가
포옹할 때 그의 생각, 감정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이를
내 품안에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그런 방식으로 나는 계속 올라
갔고, 내 안은 평온함과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경이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런 나를 점점 더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그 길의 끝에서
멋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호수를 보았는데 정말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편안함을 주는
향기가 나는 갖가지 색상의 나무들이었다. 너무도 경이롭고 아름다웠으며 온통 사랑으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나와 함께 사고를 당했던 조카가 그 경이로운 정원으로 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도 그곳에 무척 들어가고 싶었지만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 다시 지상으로 돌아옴 > 그 순간 나는 남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소리치며 울었고,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로 아내인 나를 불렀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정말 그 짧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한눈에 다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주님께서는
저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 주셨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 평온, 그 기쁨, 그 충만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거의 죽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몸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
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의 포옹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도 그 신비한 빛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는 그
엄청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모두를 껴안아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무결한 방식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내 영혼은 내 몸으로 들어와서 영혼의 발로 내 몸에 달린 머리의 정수리 부분을 건드렸다.
그 순간 내 몸 위로 아주 강한 불꽃이 튀었다. 그러면서 내 영혼은 내 몸 안으로 끌려 들어
갔다. 마치 몸이 나를 안쪽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부터 전신 화상을 입은 내 몸의 고통도 느끼기 시작했다.
완전히 화상을 입은 몸은 너무나 아팠고, 그 고통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몸 구석구석이 무서우리만치 타버렸고, 그 모든 부위에서 연기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의사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환자가 정신을 차렸어요! 정신을 차렸네요!” 그들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너무나 컸다. 다리는 완전히 새까맣게 되어
마치 숯덩이 같았다. 온몸은 살을 덮고 있던 피부가 타버리면서 생살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 숯이 된 몸뚱아리 > 가장 크고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은 허무감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는 동안 인생 대부분을 언제나 몸을 관리하는
데 다 보냈다는 사실을 그 한순간에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그것만이 내 인생의 중심이었고,
주된 관심거리였다. 오로지 내 몸에 대한 사랑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름답던 몸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가슴이 있는 곳에는 눈에 띄는 구멍이 자리잡았고, 특히 왼쪽 가슴부위는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 아름답던 다리도 보기에도 끔찍하게 되어 하얀 뼈만 남아 있었다.
숯처럼, 타버린 돼지 바비큐처럼 완전히 새까만 다리! 내가 그토록 정성들여 잘 보살피고
가꾸었던 몸의 모든 부분이 숯처럼 새까맣게 망가졌던 것이다.

< 부끄러운 고백 > 그 당시 나를 그나마 교회에 붙잡아 두었던 유일한 끈이 바로 지옥에
대한 믿음이었다. 나를 여전히 교회 공동체와 연결시켜 놓았던 것은 악마의 존재론적 두려움
이었다. 그래서 악마와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부터
생각이 변했다.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가게 되므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던, 지금 어떤 사람
이든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주님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로부터 나는 교회에서 완전히 멀어졌고, 교회와 교인은 모두 멍청
하다는 등의 비난을 시작했다. 저는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악마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성직자들이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 사실을 미리 얘기하는
것은 다음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악마는 정말 존재합니다! > 내가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였는데, 그때 나는 정말로
악마들이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악마들이 나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앞에 있는 악마를 쳐다 보았다. 여태까지 내가 이 지상에서 본
그 어떤 것도 그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수술실 벽을 통해 수많은 어두운
형상들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모두 끔찍하고
무서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그것들 눈에서는 증오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나는 순식간에 알아챘다. 죄에 대한 그들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계산하러 온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 값을 치러야만 했고, 그 값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와 거래를 햇던 것이다.

- 죄는 사탄의 것이며, 사탄은 그것을 공짜로 준 것이 아니기에 값을 치러야만 했다. 값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받은 이후에 내가 저지른 모든
죄를 그 짧은 한순간에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죄값을 모두 치러야만 한다. 평화를 잃은 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내적인 평온을 상실하고, 건강을 잃으면서 그 값을 치루는 것이다.

-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 바로 악마의 가장 큰 계략이며
거짓말인다. 그것이 사탄의 전략이며, 그리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에게 모든 일을
벌일 수 있게 된다. 악마들이 나를 에워싸기 시작하고 나를 데려 가려고 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과 끔찍함과 공포 그 자체였다. 내 영혼은 그들의 손아귀
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으며, 내 몸 속으로 도망치기 위해 내 영혼을 몸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몸이 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 도망치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 그리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수술실 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벽을 통과하는 순간 내 영혼은 전혀 다른 세계로, 즉 무(無)의 세계로
도약하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거기 생긴 터널 내부로 들어 갔고, 그 터널은 밑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땅 속 아래로 깊숙이 빨려 들어 갔다.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몸무림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는 터널 안 극도로 깊고 어두운 곳까지 끌려들어 갔다.
그 암흑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고 불쾌했다. 위쪽은 밝았지만 아래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어두어졌다. 그러다가 빛 속에 있는 나의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께 다가가서 그 곁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캄캄한 짙은 암흑 속에 파묻혀 버렸다. 계속해서
점점 더 끔찍한 인물들과 형상들을 볼 수 있었는데, 도저히 지상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형상이었다.

< 죄와 사탄 > 죄는 우리 영혼에 흔적을 남겨 놓는다. 그 흔적은 마치 흉터나 물집처럼,
형태 없는 구멍처럼 우리 영혼에 낙인을 찍는다. 그때 가장 끔찍했던 것은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바로 나에게서 풍겨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지은 모든 혐오스런 죄가 내 영혼
바깥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나의 가장 깊속한 곳에, 내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바로 그곳에서 그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퍼져 나왔다.
나는 악마와 유사하게 생긴 끔찍한 짐승을 보았는데, 내가 그동안 저지른 모든 흉악스런
행위로 꼴사납게 된 바로 내모습이었다.

- 그곳 저편에서는 각자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대로 자신의 생애를 세밀한 부분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입 밖에 낸 말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했던 생각들까지
모조리 들어난다.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한 사람의 일생 동안 있었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 것과 생각한 것 사이의 큰 차이 때문에
진저리를 친다. 그리고 우리가 범한 죄들은 우리 자신에게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이 중죄를 범하면, 악마가 마치 채권자인양 그 즉시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악마의 소유가 되도록 서명하라고 강요한다. 이때 가장 비극적인 일은 사탄이 그
죄인에게 주는 첫 임무가 이것이라는 점이다. “자, 이제 가서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너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게 데리고 오너라!” 교회의 성사에 참여하는 생활
만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된 ‘악마의 세력권’의 사슬을 깨뜨려 버릴 수 있다. 성사의
은총과 기도의 힘만이 죄를 밀어 내고 끊어 버릴 수 있다.

- 내가 어쩔 수 없이 무방비 상태로 그 터널을 통해 미끄러져 내려간 후에 나는 어느 평평한
광장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나는 완전히 절망에 사로잡혔지만 그곳을 벗어나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곳에선 그런 강렬한 의지가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땅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땅은 살아 있었고, 땅이 움직였다. 발아래에는
너무도 무섭고 끔직한 나락이 펼쳐졌다. 그것은 사람의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거기서는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거기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으며, 한줌의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공포를 느끼는 중에도 나는 그 나락의 가장자리에서 미카엘 대천사가 내 발을 붙잡고 있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몸은 그 구렁으로 떨어졌지만, 발은 미카엘 대천사의 손에 깍 붙잡혀
있었다. 그렇게 나락 언저리에 매달려 있을 때, 내 영혼 안의 빛을 완전히 꺼 버리려고 모든
괴물들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구역질나는 괴물들이 내 몸을 뒤덮었을 때 느낀 역겨움과
공포는 상상 이상으로 심했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각 괴물들 위로 증오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의 공포를 제대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혼인 성사의 중요성 > 언젠가 죽게 되면 ‘생명의 책’에 혼인성사의 순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한 부부가 그 순간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황금빛 속에 둘러싸인 것을
보았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부부가 하는 맹세의 말을 ‘생명의 책’에 금빛 철자로 기록하셨다.
우리 부부가 영성체를 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에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 마음 안에 담으셨고, 그분 마음 안에서 우리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떼어 놓아
서는 안 된다.
- 누구든지 혼외정사를 하게 되면 그 더러운 영들이 즉시 그에게 들러붙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악하고 더러운 영들은 하느님의 자녀를 쾌락과 본능과 성적 갈망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만일 어떤 부부가 자신의 배우자에게 지켜야 할 정결을 지킨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내리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거룩하게 결속시키시고 그들의 성(性)을 축복
하신다. 혼인성사로 맺어진 부부가 성적 사랑을 나눌 때 그들은 배우자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온
은총을 선사하지만, 축복받지 못한 결합에서는 서로를 죄로 더럽힐 뿐이다.

- 제대에서 이루어지는 성사와 기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배우자를 배신하게 되면, 그는 다름 아닌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그는 결혼식에서 하느님과 자신의 배우자에게 했던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된다.
혼인 서약을 성실히 지키지 못할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 주님께서 우리
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의 정결을 지키지 못한다면, 너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배우자에게 신의를 지킬 수 있도록, 너희 하느님께 신의를 지킬 수
있도록 내게 기도하여라.”

< 사탄의 간교함 > 사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우리를 조용히 다루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이 믿도록 갖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속인다. 사탄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 신앙인조차도 속이고 있다. 개개인의 나약한 부분을 이용해서 신앙인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래서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쟁이를 찾아가는 가톨릭 신자들도 많다. 사탄은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렇게 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게 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매우 정교한 술책으로 이 모든 것을 유인하고 이용하며 지휘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누가 점쟁이에게 가게 되면, 거기서 무엇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 짐승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자신의 낙인을 찍는다는 사실이다.
심령술과 점성술을 하는 등으로 오늘날 크게 유행하는 이런 것을 단지 취미삼아 할 때라도
악한 짐승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낙인을 찍어 둔다.

< 연옥의 형벌 >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실상 무신론자였다. 나는 악마의 실존을
믿지 않았고, 따라서 하느님의 실존조차도 믿지 않았다. 내가 처해있던 무서운 심연, 그 끔찍한
장소로 다시 돌아가도록 한다. 거기, 그 상황에서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연옥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이여, 제발 나 좀 도와주세요” 그 순간 나는 수백만의 영혼들이 소리 내어 크게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그 끔직한 장소, 증오와 고통으로 가득 찬 수렁과 진흙탕에서
이를 깨물며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을 나는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나를 엄청난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장면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같은 고통스런 형벌은 하느님의 부재(不在)로
인한 것이며, 죄의 결과였다. 죄는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을 완전히 거역하는 것이다.

- 이 ‘불쌍한 영혼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낳은 삶을 시작하면서
자기들의 삶을 바꾸며, 사랑의 덕을 완성하고, 환자들을 방문하며,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주님의 거룩한 성찬예식에 참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 중에 있는 그 영혼들은
그것으로 매우 많은 선과 위로를 얻게 된다. 연옥에 있는 그 영혼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무한한 은총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미사 성찬식에 자주 그리고 빠짐없이 참례하여 그 은총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한 선물
로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해 천상의 아버지께 전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다 > 지상의 내 육신이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작은
빛줄기를 보았다. 아주 가는 빛이었지만 매우 짙은 암흑 속이었기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 무서운 암흑의 늪 같은 구덩이 위로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운 부모님을 그곳에서 보았을 때, 나는 구원자를 만난 것 같아 매우 기뻤으며 그래서
큰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저 아래에 있는 당신들의 딸에게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에, 나는 부모님의 내적인 고통을 즉시 보게 되었다. 나는 단지 부모님을 바라보았을 뿐
이지만 부모님이 딸을 보면서 느끼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곧바로 알 수 있었으며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비통하게 울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계속 기도하셨다. 부모님이 나를 그곳
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 그런데 부모님이 거기에서 당신들의 딸이 고통을 겪는 것을 모조리 지켜보아야 했던 것은,
자녀에게 시켜야 했던 교육에 관해 주님께 정산(定算)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하느님
께서 내게 주셨던 달란트의 파수꾼으로 임명되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의 삶과 모범으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만 했다. 부모님은 하느님께서 내게 주셨던 은총을 소중히
간직하도록 도왔어야 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신 달란트의
파수꾼이다.

< 안락사 >
“나를 여기서 꺼내줘요!”라고 온 힘을 다해 소리치는 순간에도 지상의 내 육신은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내 몸에는 많은 기계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사망선고가
내려지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다. 내 몸은 오로지 기계의 힘에 의해서 연명되고 있었다. 의사인
내 여동생이 기계 장치를 계속 연결해 놓도록 함으로써 겨우 살아 있는 셈이었다.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기계 장치를 제거하려는 의료진을 여동생이 설득하여 그대로 두고 있었다.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것이 의사들의 의견이었다. 그들은 이미 내 가족에게,
환자가 죽음에 임박했으니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왜냐하면 무척 긴 시간 동안 내가 깊은 가사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동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은 내 곁을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 2. 하느님의 십계명 시험 ]

< 하느님의 십계명 시험 > 나는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 난 가톨릭 신자야!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실수이며 착각했을 거야! 제발 나를 여기서 꺼내줘!” 그토록 절망적으로 소리치는
순간 나는 갑자기 어떤 소리를 들었다. 매우 부드럽고 사랑스런 목소리였는데, 바로 천상의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내 영혼은 온통 흥분으로 가득차서 전율했다. 이어서 평화가
내 영혼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그때껏
나를 에워싸고 있던 어두운 형상들과 해충들이 모조리 도망치듯 내개서 물러갔다. 어둠의
세력은 사랑을 대적할 수 없고, 평화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평화가 나를 감싸고 있을 때 그 매혹적인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그래, 좋아! 네가 정말 가톨릭 신자라면, 하느님의 십계명이 뭔지 내게 확실히 말할 수 있겠
구나!” 이는 내가 직접 친 덫에 자신이 걸린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내가 어긴 약속, 내가 고백한
죄를 들을 것 같았다. 십계명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내용에 관해서는 백지상태였다.

[ 첫째 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
- 어머니는 사랑의 첫 계명에 대해 생전에 자주 언급했었다. 나는 대답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아주 좋아”란 대답이 들렸다. 하지만 즉시 친절한 목소리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네 이웃을 사랑했니?” 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예, 예, 사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소리가
말했다. “아니야!” 간단명료하고 날카로운 부정이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 ‘그 목소리’가 계속 말했다. “아니야, 너는 네 주 하느님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지 않았어!
더군다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한 적은 결코 없었어! 너는 네 하느님을 네게 짜 맞춰서
생각했어. 네가 큰 곤경에 처한 그 순간에만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렸어. 그분은 네가 곤란한
때만 찾는 부적 같은 존재였지! ...중략..... 어려울 때 너는 돈을 원하며 이렇게 기도했었지.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주님, 제게 곧바로 돈이 주어질 수 있도록 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 너의 수많은 기도는 바로 이와 유사한 것이었어. 그리고 이것이 바로 네가 하느님과 가졌던
관계였어! 너는 네 주 하느님과 이런 방식으로 교류했는데도 네 삶의 가장 사랑스런 자리를
내어 드렸다고 생각하는구나!” 이는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동안 하느님을 그렇게 취급했다.
그 목소리가 들려 준 그대로였다. 내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비참한 진실이었다.
나는 완전히 나 자신에게 빠져 있었다. 나는 지극히 배은망덕한 존재였으며, 전혀 감사할 줄
몰랐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경멸하고 비웃음거리로 삼기까지 했었다.

< 점성술, 미신, 유행 사조 >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오히려 수성, 금성 등의
별자리를 더 믿었다. 행운의 물건이 하느님보다 더 중요했다. 점성술과 별점에 눈이 멀어
있었고, 별자리가 내 삶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떠벌리고 다녔다. 믿는 이들 중에
점성술에 빠져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사악한 힘에 근원을 두고 있는 그 술수에
자신이 얼마나 빠져 있는지를 알아 챈 후에는 거기서 헤어나기 어렵다. 나는 세상에서 유행되는
사조에 맞춰 살기 시작했다. 모든 유행 사조, 그것이 비록 병든 두뇌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내게는 하느님의 복음보다 더 흥미로웠다. 성경과 가톨릭교회의 수백 년에 걸친 가르침보다
더 많은 지식을 전해 주는 것 같았다. 그에 따라 나는 환생을 믿기 시작했다. 믿음이 없고
영혼이 없던 내 삶을 채우기 위해 내가 환호하며 반겼던 가르침이 바로 환생이었다. 창조주에
대한 감사는 낯설게 되었고 그런 것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은총이란 말은 내 사전에서
지워버렸다.

- 이 모든 것을 십계명 시험에서 천상의 목소리가 던지는 말씀과 질문으로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눈을 덮고 있던 것이 씻기듯 사라졌다. 그 목소리는 내가 십계명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시험했다. 그 목소리는 내가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쭐됐던 것을
꾸중했다. 그 목소리는 내 말투로 나를 내리쳤다. 그 순간 ‘이제 나는 어떻게 되나? 악마가
명한 대로 지옥으로 가야만 하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하느님의
십계명을 근거로 하여 지난날의 내 삶을 계속 짚었다. 그때까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 주었다.

< 미움, 분노, 비난 >
나는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리기 전에는 주님을 사랑하며 좋아한다고
자주 고백하곤 했다. 무신론의 오류에 빠져들어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하기 전에는
“내 주 하느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주님께 속삭이기를 자주했었다. 그런데 그토록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 사랑을 고백했던 바로 그 혀로, 그 입으로 나는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내리쳤고,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나는 하느님과 관계된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을 비난하고 비판했다. 나아가 나는 이 세상 전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고, 세상 탓을
했다. 나의 지난 시간을 되돌려 보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얼마나 뽐냈
던지, 얼마나 시기심 많고 참을성 없는 사람이었던지, 얼마나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던지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 “네가 경배하는 유일한 하느님은 돈이야”> ‘그 목소리’는 그동안 나의 이기적인 생활태도로
인해 내가 아내로서, 엄마로서 얼마나 잘못 살았으며 헛살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내
모습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 아내라는 사람에게서 바라시는 기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나는 하루 종일 투덜거리기만 했다.
나는 늘 기분이 나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제대로 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한 번도 가족 외의 형제자매나 동료에게 제대로 된 사랑의 감정이나 순수한 동정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여기 다 쓰지 못한 수많은 사실들을 보았고, 시험이 계속 진행될 때마다
나는 나의 ‘굳어 버린 심장’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분명해 졌고 명확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십계명을 토대로 한 그 시험에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었다.

- 지난날의 내 삶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나는 과거에 그토록 엄청난 무지와 혼란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질서를 내 안에서나 내 인생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시험에서 지난날의 모든 이미지가 모조리 거짓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네가 경배하는 유일한 하느님은 돈이야. 돈이라는 우상 때문에
넌 죄에 떨어졌어! 돈과 황금이라는 네 우상 때문에 너는 나락으로 떨어졌어. 그리하여 너는
하느님에게서 계속 멀어졌구나” 맞는 소리였다. 오랜 시간 나는 매우 많은 돈을 지녔지만,
그 후 파산했다. 나는 많은 빚을 졌고, 돈을 모두 잃고나서 알거지가 되었다.

[ 둘째 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
- ‘그 목소리’가 이제 둘째 계명으로 나를 꾸짖을 때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모든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사회에서 사탄이 이끄는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악마는 나의 동반자가 되었다.
나는 큰 거짓말쟁이가 되었던 것이다. ‘예술적인 거짓말’의 수준까지 올라갔다. 나의 죄가
점점 더 커지고 무감각하게 될 지경까지 거짓말의 수준이 올라갔고, 수치심도 사라졌다.
거짓말의 강도는 점점 더 심해졌고, 나는 성인이나 주님의 이름을 걸거나 성물을 두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엄마,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그것은 확실해요.”,
“엄마, 내말이 거짓말이면, 내가 벼락을 맞을 거예요. 정말이지 엄마한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런 그럴싸한 거짓말로 어머니한테 받아야 할 벌을 용케 피하기도 했다.

- 우리가 입으로 그처럼 경솔하게 생각 없이 내 뱉는 길고 짧은 말들은 결코 그냥 바람에
의해 사라지지 않으며, 결코 그냥 허공으로 흩어져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은 말들은 대기 중으로 사라지지 않고, 말한 그 순간의 진실을 지니고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마치 부메랑처럼 되돌아와서는 우리에게 꽂힌다. ... 나는 정말 벼락을 맞았고
벼락이 내 몸을 관통하면서 나를 사실상 두 동강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를 완전히 태워 버린
것이다.
- 저 세상에서 나는 가톨릭 신자라고 당당하게 밝혔지만, 내가 한 말을 한 번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늘 어기고, 부정직함을 감추기 위해 점점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오용했던 과거를 그 목소리는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위선과 조작을 통해
사들인 명성을 지니고서 자주 주님을 거역하고 그분께 화를 냈으며, 그분을 모욕하고 그분을
저주하기까지 했는데 그것도 모두 보았다. 이 같은 내 과거를 똑바로 보게 되고 거기에 대해
명확하게 알게 되자, 나는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고 참기 힘든 고통을 맛보았다.

[ 셋째 계명,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
- 십계명에 따라 나를 시험할 때, 주일과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계명에 다다른
순간에는 더더욱 참담했다. ‘그 목소리’는 아주 또렷하고 냉랭하게 내게 말했다. 내가 몸을
치장하고 외모를 가꾸는데, 가식적인 아름다움을 지키는데 매일 4~5시간을 허비했다고.
그러면서도 주님께 깊은 사랑과 감사를 드리거나 기도하는 데는 매일 10분도 할애하지
않았다고. 이어서 그 목소리는 내가 주님께 얼마나 자주 배은망덕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이며 구원하신 분께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으른
탓에 미사에 참례하고 싶지 않을 때 내가 늘어놓았던 궤변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기도하지 않았으며, 주일에 교회에 가서도 그분께 감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한 번도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고 내 영혼을 돌보지 않았다. 나는 성사
생활도 전혀 하지 않았다.

- 사악한 거짓말쟁이이며 ‘분열을 일으키는 자’인 악마가 나를 고해성사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이렇게 사탄(악마)은 내 영혼의 정화와 구원을 방해했다. 말하자면,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악마는 내 영혼의 하얀 조끼에 시커먼 암흑 왕국이 새겨진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나는 첫영성체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제대로 된 고해성사를 한 적이 없었다. 고해
성사는 오늘날 결코 적절하지 않으며,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견해였다. 그 결과 나는 성체를 영할 때마다,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불경하게 받아 모신 죄를 범하게 되었다. 자기 영혼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어서
참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 나는 미사에 참례했을 때 하느님께 일말의 존경심이나 경외심이라곤 전혀 갖지 않았으며,
미사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무슨 일이든 해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의 위대한 신비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했을 때 즉각 들어 주시지 않으면 교만으로 가득차서 불평만 해댔다.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 버리고 무감각해져서 주님마저도 함부로 대했으며 주님을 이야깃거리로 삼으며
희희낙락했다.

< 사제를 비난하고 놀린 죄 > 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사제
들을 비판하고 헐뜯는 그 죄였다. 시험 중에 이 부분이 내 머리를 얼마나 세게 강타했는지
겪어 보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게서 이 죄를 가장 무겁게
여기셨다. 나의 가족들은 늘 사제에 관해 험담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서
엄한 목소리로 네게 문책하시며 말씀하셨다. “그들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다. 사제는
무엇보다도 신자 공동체를 통해서, 본당의 신자들을 통해 성화된다. 그리고 공동체는 기도와
존경과 배려와 서로간의 협조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을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사제가
죄에 빠지면, 너희들은 그를 질책하기 보다는 오히려 너희 공동체가 그에게 존경과 배려와
협조를 보여주지 않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는지 먼저 너희의
잘못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주님께서는, 내가 사제를 비판하고 험담
할 때마다 악령들이 어떻게 내게 들러붙었는지 보여 주셨다.

- 어느 사제가 무너지면 그가 속했던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서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
이다. 공동체는 사제의 성화에 책임이 있다. 악마는 가톨릭 신자를 증오하며, 사제들을 더더욱
증오한다. 악마는 우리 교회를 증오한다. 비록 사제도 한 인간이지만, 사제의 손은 하느님께
닿으며, 그는 천상의 하느님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시도록 청할 전권(全權)을 가지고 있다.
사제의 말에 의해 평범한 빵과 포도주가 하느님의 몸과 피로 바뀌는 성(聖)변화가 완성된다.
사제는 주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이며,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권한을 받은 사람이다.

< 사제의 중요성 > 기름 부은 사제의 손을 악마들은 대단히 싫어한다. 악마는 천상으로부터
권한을 받은 그 손을 완강히 철저히 증오한다. 그리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성체를 영하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를 혐오한다. 왜냐하면 성체성사가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어 놓기 때문
이며, 천국으로 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 없이는 아무도 천상 행복을 누릴 수 없다.

- 우리 교회를 헐뜯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신비스런 은총
이다.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죽음을 맞는 그 사람들은 이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연옥에 갈 수도 있겠지만,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악마가 사제들을
그토록 증오하는 것이다. 사제가 한 명이라도 있는 한,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거룩
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제들을 위해 아주 많이 기도해야 한다. 악령이 끊임
없이 사제들과 싸워 그들을 무너뜨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내게 보여
주셨다. 나는 내 영혼이 죄 고백을 통해 어떻게 깨끗하게 되는지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뉘우치며 모든 죄를 고백하자 사탄이 나를 속박해 놓았던 사슬을 풀어 주셨다. 이 모든
것이 사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다른 성사들도 사제를 통해서 받는다.

[ 넷째 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라 ]
- 이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부모님께 배은망덕했는지 눈앞에 똑똑히 보여 주셨다.
나는 내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기엔 너무 무식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결코 나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며 부모님께 소리치기도 했다. 나는 돈을 수단으로
부모를 내 목적과 이해관계를 위해 들러리로 세웠고 조정했다. 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여신’이었으며 그야말로 ‘유아독존’이었다. 하느님의 자비 덕택으로 지난 생활에
대해 명백히 성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나 괴로웠고, 나는 뼛속까지 전해지는 고통으로
아파했다.

[ 다섯째 계명, 살인하지마라 – 낙태 ]
- 나의 ‘생명의 책’에서 하느님의 다섯째 계명인 ‘살인하지 마라’는 항목에 이르렀을 때.
‘아, 이계명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를 죽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으로 내게 훈계
하셨다. 그분은 정말 자세하게 내가 얼마나 혐오스럽고 잔혹한 살인자였는지를 보여 주셨다.
게다가 내가 저지른 살인은 주님의 눈에는 가장 끔찍한 것으로 간주되는 살인죄였다. 즉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낙태시킨 죄였다.

< 고해성사의 중요성 > 고해성사 중 제대로 된 고백을 하지 않았던 그 순간부터 사탄이
실제로 내 안으로 들어 왔다. 그 이후로 무엇을 고백하고 고백하지 않을지 내가 골랐다.
그때부터 나의 신성모독적인 고해성사(모고해)가 시작되었고, 제대로 고해성사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영성체를 하는 모령성체를 시작했다. 그 후 내 삶이 얼마나 비참하게 몰락
했는지, 영적인 죽음의 과정이 얼마나 심해졌는지를 주님께서 보여 주셨다.

- 악마가 나를 고해성사로부터 떼어 놓았고,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내 영혼의 치유를
받고 죄를 씻어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갔다. 그동안 내가 지은 모든 죄는 공짜가 아니
었으며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죄는 악마의 재산이기에 우리는 값을 치러야만 한다. 죄는
악마가 자신의 낙인을 그 영혼에 불로 찍어 놓은 것과 같은 형태였다. 내가 처음 잉태되었을
그때 그토록 아름다웠고 빛이 통과할 만큼 투명했던 영혼이 빛이 사라지면서 칠흑처럼
어둡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 나는 고해성사를 멀리한 채 계속해서 모령성체를 했고, 고해성사를 받을 때조차도 제대로
된 고해성사를 한 적이 없다.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 우리는 성령과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가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암흑 속에 있는 우리의 정신에 빛을 밝혀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악마를 기쁘게 하는 것들 중 하나가 우리의 정신이 어두워져서 어떤 것도 죄가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보다 죄 많은 사제에게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고해성사 따위는 이제 구닥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친구 에스텔라의 임신과 낙태 / 16세에 순결을 잃었습니다 > - 메모 생략
< 낙태가 별일이 아니라고? >
사탄은 우리가 낙태란 엄청난 일을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결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기도록 하여 망치도록 한다. 이 세상에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니 낙태는 별일이 아니란 듯, 그저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 듯
여기게끔 만들어 버린다. 사탄은 젊은이들을 이렇게 부추기면서 이를 믿도록 한다. 섹스는
단지 즐기기 위한 것이며, 그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사탄이 사람들을
그렇게 유혹하는 것은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인간의 희생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의적인
낙태를 통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이 커지기 때문이다.

- 주님께서는 ‘생명의 책’에서 의사가 낙태 수술을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내가 보도록
해주셨다. 의사가 집게 같은 것을 가지고 내 뱃속의 아기를 집어서 조각내는 것을 내 눈으로
생생하게 보았다. 그때 아기는 사력을 다해 울었다. 필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울었다.
그들이 이 영혼을 주님의 손에서 떼어낼 때, 주님께서 전율하시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아이가 살해될 때 지르는 비명 소리는 하늘에 울려 퍼지며 그곳을 진동시킨다.
내 아기가 낙태될 때도 심장을 도려내듯 크고 강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나는 들었다.

- 인간은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는 즉시 자신의 영혼을 받는데 완전히 어른처럼 성숙한
영혼이다. 이 영혼은 완전하며, 완전히 성숙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처럼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완성된 상태로 창조하셨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하나가 되자마자 그 안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 나왔다.
그리고 이 빛은 마치 태양처럼 빛이 났는데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광채에서
나온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바로 그 순간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영혼은 이미 완전히
성숙하게 다 자란 상태이다. 영혼은 완벽하며 하느님의 모상 그 자체이다. 영혼과 하나 된
그 어린 생명은 하느님의 심장에서 나온 성령에 잠긴다. 임신한 여자의 자궁은 주님과 새로
창조된 영혼과 이 빛이 하나가 되면서 형성된 광채로 가득 찬다.

< 낙태는 가장 무거운 죄이며, 가장 끔찍한 죄이다 >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피를 흘릴 때마다
우리는 사탄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 되며, 그로서 이 세상에서 사탄의 힘이 더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 어린 생명의 영혼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몸은 서서히 형성되고 점차 자라나지만, 영혼은
이미 완성된 상태이다. 그 어린 생명이 살해될 때 내지르는 비명은 지상의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하늘과 땅을 진동시킨다. 지옥에서는 승리의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 주님께서 내게 더 많은 것을, 즉 사람들이 이른바 ‘가족계획’을 통해 낙태를 유발시키고
있는 실상을 보여 주셨다. 나는 첫 임신 후 자궁 안에 ‘루프’라고 부르는 구리로 된 링을 심어
두었는데 수정란의 착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임신을 하고 싶을 경우에만 그것을 일시적으로
제거하곤 했다. 그런데 이 링이 낙태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수정란이 자궁 안에 자리 잡지
못해 죽으면, 그것이 바로 낙태인 것이다. 루프를 착용한 많은 여성들이 월경 시에 핏덩어리가
섞여 나올 때 매우 고통을 느끼는데 이 정체는 갓 수정된 생명체이며 착상하지 못하고 유산된
생명체이다. 루프로 말미암아 착상하지 못한 초미니 유산아이다. 그 수정란은 이미 사람이다.
이는 이미 완전한 형상을 갖춘 영혼을 지니고 있는데도 육적인 형상을 허락받지 못했을 뿐이다.

- 내 ‘생명의 책’을 경이롭지만 고통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내 안에서 수많은 난자가 정자를
만나 수정되었고, 그 순간 미세한 생명체로 아주 조그만 아기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기들의 영혼이 형성될 때 빛을 발했던 수많은 불꽃들도 보았다. 또한 인간에 의해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그 영혼들의 비명 소리도 들었다. 그 순간, 내가 왜 그동안 늘
기분이 나빴고, 늘 비참한 기분으로 투덜대며 지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온종일 좌절감만
맛볼 때가 많았고,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종종 심한 우울증이 밀려오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가 완전히 밝혀졌다. “내가 태아 처형소가 되었기에 그랬구나!”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죄의 수렁에 더욱 깊숙이 빠졌던 것이다.

[ 여섯째 계명, 간음하지 마라 ]

- 내 인생을 돌이켜 본 그 순간에 내가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이른바 ‘육욕의 쾌락’을
추구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죄를 짓게 되면 바로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살면서 하느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있었다. 슬프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은, 행동으로 옮겨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런 생각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영혼 안에서도 무거운 죄를 범할 수 있는데, 말과 행위로 실행하지 않았어도 생각만으로 대죄를
범할 수 있다. 이렇게 범한 모든 죄의 결과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죄가 미친 영향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을 때 정말 괴로웠다.

[ 일곱째 계명, 도둑질을 하지 마라 ]
- 일곱째 계명에서 나는 다시 안심하며 내 자신을 매우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 계명
에서 있어선 비난할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의 집에 풍족하게 쌓아
둔 많은 생필품이 썩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는 것을 철저하게 보여 주셨다. 내가 음식이 변질
되도록 내버려 두는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
주셨다. 우리나라의 극심한 빈곤에 대해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며, 일곱째 계명도 어겼다는 것을
주님께서 내개 보여 주셨다. 또한 누군가의 ‘좋은 명성’을 훔치는 것, 곧 험담이나 비난을 하는
것은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도둑질보다 훨씬 무거운 벌을 받는 죄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아이들
에게서도 도둑질을 했다. 내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다정한
엄마가 되는 것을, 자기 자신을 버리고 헌신하는 사랑의 실제적 모범이 되는 것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점에서 실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부끄러웠다. 마치 영화를 보듯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책’에서 자신의 생애를 모조리 볼 수 있다는 점을 여러분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 여덟째 계명,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

- 나는 정말이지 이 계명의 전문가이다.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사탄은 거짓의 군주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항상 내 스스로 사탄을 내 삶의
아버지로 선택했다. 거짓에는 단계도, 가볍거나 무거움도 없다. 모든 거짓말은 그냥 거짓말일
뿐이다. 비상시의 거짓말, 듣기 좋은 거짓말, 자비나 동정에서 나온 거짓말이란 없다. 수많은
거짓말들이 오로지 악마의 지시에 따라 간교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꾸며낸 것들
이다. 사탄은 모든 거짓말의 아비이며, 근본적으로 거짓말쟁이이다.

- 거짓말은 거짓말일 따름이다. 그중 가장 나쁜 것은, 한번 빠지게 되면 결국에는 자신의
거짓말을 사실로 여긴다는 점이다. 가장 큰 거짓말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거짓말이 있다. 남을 험담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다른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함부로 나쁜 별명을 지어서 떠벌리고 다니거나, 사악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약점을 잡아내고 그것으로 그를 찌르는 경우도 해당된다. 나는 자주 그리고 많이
이런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를 아프게 하며 중상모략을 했다. 나는 이 모든
짓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 했었다.


[ 열째 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
- ‘그 목소리’가 하느님의 십계명을 토대로 하여 내 삶을 살필 때 내가 지은 모든 악한 행위,
죄, 원한의 뿌리가 소유욕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았다. 단지 모든 것을 갖고 싶고,
모든 것을 맘대로 하고 싶다는 광적인 바람과 중독이 그 원인이었다. 그냥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 손안에 쥐어야만 만족하는 습성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가장
큰 소원은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가지는 것이었다. 사람의 행복은 돈과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달성된다는 그릇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원하던 많은 돈과 명예를
소유했음에도 내적으로는 형언할 수 없이 공허했으며, 너무 외로웠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았다.
- 다른 욕망과 마찬가지로 소유욕은 돈과 부에 대한 중독에서 비롯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나도 가져야 된다.”라는 집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집착에 끌려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런 소유욕이 나를 곧바로 지옥행으로
이끌었고, 나를 지으신 하느님을 떠나게끔 했으며, 탐욕에 빠져 들게 되어 그분의 손길에서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놀라운 방법으로, 내가 결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나를 받아 주셨다.


[ 3.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 ]


< 생명의 책 > 하느님의 십계명에 따라 나의 삶을 샅샅이 살펴본 뒤, 나의 ‘생명의 책’을
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 순간은 정말 놀라웠다. 그 책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 책은 내가 잉태되던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포가 합해지는 순간, ‘착!’하고 불꽃이 생겼다.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거기서
내 영혼이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보호를 받으며 형성되었는데, 사랑이 지극하시고 매우
다정한 하느님 아빠, 아버지를 그 순간 보았다. 그리고 ‘생명의 책’에서, 내 삶에 있었던 많은
상황들을 전체 맥락에서 볼 수 있었고,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과 결정이 낳은 각각의 결과들도
보았다.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난날의 사건들을 영화처럼 듣고 볼 수 있다. 나도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고 들었으며 내 머릿속 생각들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다. 이처럼 나는 내 삶의 내면에 깔린 거짓과 진실을 모조리 보았다.
내가 저지른 모든 거짓 행동이 명백히 드러나 있었고, 조금도 꾸밈없이 만천하에 드러나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생명의 책’에서 우리의 행동을 밝혀 주신다. 우리가
언제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의 행동으로 누가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지, 누가 그 결과를
뒤집어썼는지, 그 일로 고통을 겪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 사람이 그 일로 어떻게
살게 되는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주님께서 보여 주신다.

< 주님의 최종 질문과 질타 >
최종적으로 주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너는 나에게 어떤 영적
보물을 가지고 왔니?”/“내가 너에게 준 달란트로 무엇을 했느냐?/ “육신의 아름다움을 가꾼
다고 써 버린 그 많은 돈으로 너는 너무도 많은 자선을 할 수 있었지 않았느냐?, 너를 육신의
노예로 만들고 네 육신을 괴롭혔던 그 다이어트가 네게 무슨 도움이 되었느냐? ...

- “너는 네 자신을, 네 육신을 ‘황금 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여기서 무슨 송용이 있느냐? 너는 이웃에게 많은 것을 내어 주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단지
사람들이 네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네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너는 사람들이 네게 호의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 모두를
네 돈으로 조종했다. 그런데 네가 영생을 위해서는 지금 무엇을 자져왔는지 말해 보려무나!
내가 마지막으로 재정 파탄으로 너를 덮쳤을 때, 그것은 네가 생각한 것처럼 벌이 아니었다.
그 파탄으로 너를 네 자신의 우상, 네가 섬겼던 ‘황금 송아지’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파탄은 너를 내게 돌아오게 하기 위한 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너는 반항했고, 저항
했으며, 상승된 지위를 떠나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너는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며, 남
탓을 했다. 너는 돈의 노예, 배금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너는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을 네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직접 이루었다고 믿었다. .....
(이하 질문과 질타 계속)

< 하느님 사랑의 부재, 영혼의 죽음 > 주님께서는 사랑, 헌신적이고 아무런 조건에 메이지
않는 사랑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셨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표현하신 그 사랑, ‘카리타스
(caritas)’, 그 자비, 그러한 ‘이웃 사랑’이 내 안에 없었다는 사실들을 그제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분께서 받았던 사명과 달란트인 ‘하느님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의 부재상태에 있다.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설명하셨다.
“알겠느냐, 네 영적 죽음을, 네 영혼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 “네 영적 죽음은 바로 네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에 대해 전혀 무관심해지면서 시작
되었다. 너는 그들에 대해 그냥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을 네 눈앞에서 보여 주었을 때, 그것은 네게 대한 나의 경고
였고, 네게 경고음을 울리기 위해서였다. .... 너는 그들의 고통에 아무런 연민도 가지지
않았다. 네 마음은 돌처럼 딱딱했고, 얼음장처럼 찬 벼랑이었다. 네가 지은 죄로 인해 네
심장은 돌처럼 굳어 버렸고, 얼음덩이처럼 차갑게 변해 버렸다!”

- 마침내 내 ‘생명의 책’ 겉장을 덮었을 때,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큰 부끄러움과 슬픔이 내게
밀려들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동안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사악하고 배은망덕하게 행동
했는지를 깨닫고는 그것을 몹시 후회하면서 느낀 고통은 훨씬 더 엄청났으며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주님께서는 내 삶을 반성할 수 있도록 내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가셨다. 내게
시련과 힘든 시간을 주셨다. 내가 인생의 모든 것에 크게 실망하도록 어려움도 안겨 주셨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나를 당신께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신 일이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방법을
동원하며 나의 의지표현을 기다리셨다. 그분께서는 단 한 번도 내 자유의지를 꺾으신 적이
없다. 내가 그 수많은 부르심과 기다림을 깨닫고 내 자유의지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기다리셨다.

- 내 ‘생명의 책’을 덮자, 내가 여전히 저 아래 끔찍한 암흑의 지옥 언저리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분명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 어두운
구멍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 끝에는 문이 하나뿐이니, 거기를 통해
‘영원한 암흑’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절망감이 밀려들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모든 성인들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고 애원했다.

- 이런 후에 위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내 어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전혀 움직일 수도
없었던 어머니는 두 손가락으로 위를 쳐다보라는 몸짓을 보이셨다. 그 순간 내 눈에서
두 개의 큰 껍질이 떨어져 나갔다. 이로 인해 내가 그동안 영적으로 장님이었는데 눈을
뜨자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께서 서 계셨다. 마음에 큰 회한과 고통을 느끼면서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용서하소서! 주님, 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소서! 두 번째 기회를 주소서!”

< 중재기도의 위력 > 그러자 내가 여기까지 전했던 모든 체험의 순간 중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오셔서 그 시꺼멓고 끔찍한
수렁에서, 그 무섭고 두려운 구렁에서 나를 꺼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데리고
가실 때, 그 수많은 해충들과 구역질나고 역겨운 짐승들과 나를 따갑게 파고들던 얼룩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저 아래 바닥을 보니 온통 이런 찌꺼기 천지였다. 그분
께서 나를 위로 들어 올리시고는,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상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을 것이다.”

- 이어서 매우 엄격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상으로 되돌아가는 은총을 받는 것은 네
가족이나 친구들이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네 가족이나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너를 위해 기도하며 내게 애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 혈육이 아닌 사람들, 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의 많은 기도 덕분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심장이 끊어질 정도로 애절하게 울면서 영혼 깊이
내게 기도했고, 너를 위한 크나큰 사랑과 연민의 감정으로 그들의 마음을 내게 드높이
올렸기 때문이다.”

- 그 순간 나는 수많은 빛이,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찬 작고 하얀 불꽃들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내 앞에 보였다. 그것은
중재기도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모든 빛들은 벼락을 맞은 나에 관한 소식을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에서 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가슴아파하거나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 우리 주님께 화살기도를 바쳤던 사람들, 진정으로 함께 아파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 사람들이 그토록 애절한 기도를 바쳤고 나의 구원을 위해
기도와 미사를 봉헌했던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미사
봉헌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꼭 명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미사성제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 > 이어서 주님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지상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이 체험을 천 번뿐 아니라 그 천 배인
백만 번이라도 이야기하고 전해야 한다. 네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도 다음번에 올 때는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 기름 받은 자들,
즉 봉헌된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 내가 행한
이 세상의 기적들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받는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듣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귀머거리이며, 보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장님이기 때문이다.”

- 내가 여기 전하는 것들은 결코 여러분을 협박하거나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여러분
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협하거나 강제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방금 읽은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이다. 나와 여러분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무한한 선과 자비 덕분에 얻은 기회이다. 아마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나도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그 엄청난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내가 여러분에게 이 모두를 전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 언젠가 여러분 각자의 앞에 ‘생명의 책’이 펼쳐지게 되면, 즉 여러분이 죽어서 영원의
세계로 건너가게 되면, 내가 전해드린 것들과 매우 유사한 과정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현존하신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깊숙한 곳에 있는
생각과 비밀스런 감정들도 모조리 보고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밝혀지고, 그 어떤 것도
비밀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가장
황홀한 일은 우리 모두가 직접 주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며, 우리 개개인이 그분과 얼굴을
마주보며 서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도록 풍성한 축복과
은총을 부어 주시기를 빈다.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7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8.22.

[ 괴짜 수녀 일기 ]

- 지은이 : 이호자, 펴낸곳 : 생활성서사/ 191p
- 한 수도자가 주워 모은 자그마한 행복 조각들 이야기
- 지은이 프로필 : 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소속 수녀,
1968년 수녀회 입회, 청각장애 교육사도직인 애화학교에서 생활, 교장 역임,
저서로는 ‘언어 지도의 이론과 실제’, ‘발음 발어 지도’가 있다.

[ 표지의 글에서 ]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세상, 그것이 하느님 나라일지 모릅니다.
세상일에 둔할수록 마음은 더 단순해질지 모릅니다.
저마다 이기려는 세상에서 수도자는 밑지며 사는 길을 걸어갑니다.
어딘가 한 군데는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부축하며 힘돋으며 걸어갑니다.
님께 이르는 그날까지.



< 책머리에 >

- 사람은 저마다 제 빛깔을 지니고 있다. 이 빛깔은 태초에 받은 빛으로써 자신만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이 빛깔은 언제 가장 아름답게 빛날까? 바로 웃음 짓는 순간이 아닐까?
“보시니 좋더라” 하시던 하느님의 표정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음이 머무는 가슴에서
빛깔들의 향연은 더욱 풍성해진다. ... 어느 순간 나는 드디어 내 빛깔을 찾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하느님의 어릿광대가 되는 일이었다. 천부적인(?) 주특기인 실수를
자랑삼아 얘기하며 주변에 웃음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 이 책에는 50여 편의 이야기(일기)가 있으나 몇 편의 이야기만 일부 발췌하여 메모함.


< 보약보다 더한 아침잠 5분 > p78

- 내가 수녀원에 입회할 당시 기상시간은 새벽 4시 55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딱 오 분’만
더 잤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 아, 그런데 얼마 후 기상 시간이 다섯 시로 바뀌었다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가. ‘그러면 그렇지. 오 분을 아껴서 뭐할라꼬...’ 그 다음날부터 새벽
기상종 소리가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릴 수가 없었다. 왠지 푸근히 잔 듯했고, 그 전날의
피로도 말끔히 가신 것 같았다. 그러니 당연히 기상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가뿐히 일어날
수밖에. ‘진작 이렇게 하지, 이건 보약이나 다름없어.’ 혼자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난 어느 날, 큰 수녀님과 기상시간에 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확인이라도 하듯 몇 시에 기상종을 치시는지 여쭈었더니 4시 55분이라고 하시지 않는가.
이게 웬 소리?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기상시의 기분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몸이 어딘지
찌뿌드드하고, 멀쩡한 머리 허리 팔 다리가 쑤시고, 참으로 요상한 일이었다. ‘아침잠 5분은
보약보다 더하다는데.’ 그러니까 세상사 모두가 마음 하나 먹기에 달려다는 체험을 톡톡히
한 셈이다. ... 중략 ... 요컨대 뭔가 좋은 애기는 얼마든지 듣고 알아둘 필요가 있고,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요즘 들어 새삼 느끼게 된다.


< “우리 집 멍멍이가 새끼를 낳아요”> p82

- ... 한번은 교리시간에 열강(?)을 하고 나서 잔뜩 기대를 하며 맨 앞에 앉은 자매 한 분
에게 방금 한 교리 내용을 이해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우리 집 멍멍이가 지금 새끼를
낳고 있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느님 얘기 중에 웬 멍멍이? 옛 선사들의 화두 같기도
하고. 자초지종을 물어본즉슨, 집에서 기르는 개가 새끼를 낳으려 하는데 교리시간에 결석
하지 않기 위해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해놓고 왔으니 서둘러 가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교리시간 내내 이 자매의 귀에는 열강하는 내 목소리가 산고를 겪는 멍멍이의 울부짖음으로
들렸던 게 아닐까? ... 중략 ... 그래도 많은 이들이 세례성사의 은총을 절절히 느끼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걸 보면 ‘오! 신앙의 신비여’ 라는 환호를 발할 수밖에 없다.


< 모기 밥의 기도 > p115

- ... 전자 모기향을 설치한 그날 밤, 모기들은 더 극성스러운 것 같았다. 그렇게 편리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럴 수가! 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변압기의 스위치를 켜지 않고 전원코드만
꽂아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미 온 집안 모기에게 헌혈을 해 준 상태였으니 피가 부족
하여 빈혈을 일으키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같은 수녀원에 사는 요한 수녀 역시
모기의 극성에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그는 “웨에~웽” 하는 소리만 났다 하면 즉시 불을 켠
다음, 이런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주님, 모기를 잘 잡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나의 기도는
달랐다. “주님, 모기한테 물리지만 않게 해주십시오.” 이것을 보고 적극적인 기도와 소극적인
기도의 차이라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기도도 소용이 없는 듯 번번이 무단 헌혈을 당하기가
일쑤. 그럴 때면 무장간첩과 같은 모기의 야간 침투 행각에 감정이 상하고 예민해지고 만다.
하느님이 지어내신 모든 만물 중에 하나도 쓸모없는 게 없다는데 하느님은 왜 모기를 만드신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것은 모기가 개구리나 거미의 밥이 되어 준다는 사실이다.
그 후부터 나의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님, 너무 가렵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물려도
좋습니다. 이왕이면 제가 모기에게 영양가 높은 밥이 되도록 말입니다.”


< 오징어 춤 > p125

- 오징어가 대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오징어를 산 채로 운반하는 방법의 하나는 ‘꽃게’
라는 천적을 함께 넣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몇 마리 외에는 거의 다 건강하게 살아남는
반면, 천적이 없이 오징어만 넣었을 때는 절반 이상이 운반하는 도중에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랴. 고난이 있어야 영적 성숙도 있고 강해지는 법!
언제였던가, 지금은 고인이 된 분과 함께 차를 타고 산길을 들어섰을 때였다. 산 중턱에
‘산오징어’라고 적힌 큰 현수막을 보고 ‘산에도 오징어가 있나? 이상하다. 산나물은 알지만
산오징어라니,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이런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대뜸
그분이 “산오징어 먹어봤어요?”하고 물어왔다. 나는 “바다 오징어는 먹어봤지만 산오징어는
먹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 후에야 그것은 산(山) 오징어가 아니라 산(生) 오징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나는 산오징어보다는 건오징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오징어를 굽는 데는 전문가이기도 하며, ’오징어 춤‘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 춤은
오징어가 구어지면서 몸통이 꼬부라지는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


< 빨간 모자 추기경 할아버지의 매력 > p143

- ...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 수녀원(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애화
학교 졸업식에는 거의 빠짐없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주시곤 했다. 식이 끝나면 수녀원에
오셔서 점심을 드셨는데, 그때마다 세상 사는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일어나실 줄을 모르셨다.
그때 해주셨던 우스개 중에 한 가지. 기억에 생생한 것은 ‘안나 시리즈’다. 어떤 신자 부부가
딸을 낳고는 이제 더 안 낳는다고 ‘안나’라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런데 또 딸을 낳자 ‘다시안나’
라고 했으나, 또 딸을 낳자마자 인큐베이터인 유리관에 넣어야 했으므로 ‘유리안나’라고 지었고,
또 딸을 낳아보니 비비 말라 있어서 ‘비비안나’라고 지었고, 또 딸을 낳으니 더 이상 말이
안 나와서 ‘마리안나’라고 지었다는 얘기다.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추기경님의 전기를
한 때 애독한 일이 있었다.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은 소신학교 시절에 신학교에서 나오고 싶어
죽겠는데, 병이 나면 집으로 보내는 걸 보고, 한 번은 꾀병을 부렸단다. 그랬더니 학장님은
가고 싶었던 집으로 보내지 않고 병원으로 보냈는데, 알고 보니 진짜 병이 들어 있었다는
얘기다. 그때도 추기경님에게 그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얘길 드렸더니 “아, 그거? 평범한 어떤
소년의 이야기지 뭐”하셨다. 바로 이 점이 추기경님을 온 국민의 존경받는 인물로 만드는
매력이 아닐까.

< 예수님도 커피를 드셨을까 ? > p151

- 나는 커피를 별로 마셔본 기억이 없다. 향긋한 커피향이 후각을 자극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예 마실 생각을 안 하니 구미가 당길 리 없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잠 못 이루는 밤’이
두려워서이다. 언젠가 통신교리 신학원 하계연수회에서의 일이었다. 매일 쉬는 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꼭 커피를 건네주었다. 거절도 못하는 데다 ‘내가 조는 걸 보았구나’ 하는 생각에
순순히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는 사람도 하나같이 꼭 “이걸 마시면 졸음이 안와요” 하고
말을 잊지 않았다. 사흘간 꼬박꼬박 받아 마셨으니 결과는 당연했다. 밤이 깊을수록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졌다. 우선 성서를 펴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요한복음을 두세 번 읽다 보니
눈에 띄게 많이 나오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몇 번쯤이나 나올까 하고 세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았다. ‘예수’ 278번, ‘아버지’ 165번, ‘말씀’ 129번, ‘세상’ 66번, ‘하느님’ 58번, ‘사랑’
46번, ‘생명’ 36번, ‘영광’ 36번 등이었다. 이 단어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문장도 발견하였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
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요한 3,16).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1). 밤을 세워가며 성서를 읽은 보람이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를 직접 만난 흐뭇한 기분이었고, 요한복음서의 핵심을 발견한 성서학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심오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이 모두가 커피 덕분
인가? 예수님도 커피를 드셨을까?

< 들꽃 같은 사제 > p161
- 또 한 분, 피정강사로 오신 어는 시골 신부님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가 오늘날까지
사제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성당에 가지 않고 헌금으로 빵을 사먹고는 성당에 갔다고
거짓말을 했던 날, 촛불 앞에서 밤을 새워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시던
신부님, 신자들을 향해 기술이나 재주를 길러주는 부모보다 영원을 선물하는 부모가 되라고
하시던 강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성가 부르기를 좋아한다며 성가를 연이어 몇 곡이나
부르시던 모습도 인상적이다. 특히 그분이 지으신 ‘들꽃 마을의 기도’는 언제 읽어도 좋다.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주여, 우리로 하여금 올라가기보다 내려가게 하시고/
커가기보다 작아지게 하시며/소리내기보다 침묵하게 하시고/ 화려하기보다 단순하게 하시며/
풍요롭기보다 가난하게 하시고/ 고민하기보다 고통당함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미래의 행복보다 오늘의 어려움을/ 앞날의 변화를 재촉하기보다 오늘의
불완전을 채워져야 할/ 빈 가슴을 간직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 영혼 육신의 온갖 가지
세상 장식을 떼어 주시어/ 임의 십자가만을 목에 걸고/ 작은 미소 머금은 채 살아가게 하소서.”



< 암 세포도 죽이는 한마디 말 >
p188

-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감사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수명이 한 달 정도씩 연장된다며, 그동안에는 말을 아끼고 살았지만 이제는 칭찬을 많이하고
산다고 했다. 또 웃으며 열심히 사는 것으로 암 세포를 죽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살고
있단다. 볼 수 있는 눈과 걸어 다닐 수 있는 다리와 먹고 마실 수 있는 입과 들을 수 있는
귀와 생각할 수 있는 머리와 뭔가를 만들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손, 그리고 이 모든 것,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미사 감사송에서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도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어쩌면 감사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주님, 새해에는 하루하루가 당신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순간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사랑의 건망증, 감사의 건망증 환자가 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성사(聖事)를 제게 베풀어 주십시오.”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8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8.29.


[ 보시니 참 좋았다 ]


- 지은이 : 박완서, 그림 : 김점선, 펴낸곳 : 이가서/ 167p
- 작지만 소중한 삶의 이치, 아름다운 속삭임 이야기
- 지은이 프로필 :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 장편소설로는 ‘휘청거리는 오후’ 등 10여 편이
있으며, 소설집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등 7여 편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등 6편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1월22일 선종/2011년 금관문화훈장)

[ 표지의 글에서 ]

화면에서 본 것처럼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꽃과 푸성귀, 날짐승과 들짐승, 물고기와
곤충들이 벽면 하나 가득 자유롭게 흩어져 있습니다. 구도랄 것도 없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데도 하나라도 보태거나 빼거나 위치를 바꾸면 안 될 것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 신기합니다.


< 작가의 말 >

이 짧은 이야기들은 1970년대 말 청소년들과 젊은 엄마들을 주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쓴
글들 중의 일부이다. 출구라고는 보이지 않는 답답하고 어둡던 유신시절 나는 나도 제어할
수 없는 이상한 열정으로 보문동 오래된 한옥 안방에 밥상을 들여 놓고 책 한 권 분량의
원고지를 메꿨다. 연재가 아닌 전작으로 책 한권을 쓰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979년 동화집이라 이름 붙여 샘터사에서 출간되었고, 그중 몇편을 골라 '자전거 도둑'
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여 청소년들에게 널리 읽히기 있던 중에 '이가서'에서 누락되었던
것들을 찾아내어 또 한권의 책이 나오게 되었다. - 2004. 입춘 박완서


< 찌랍디다 > p11

- 어린이가 자라서 자기 자신의 책임을 질 만한 어른이 되면 결혼을 한다. 결혼이란 남남
이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제 몸같이 사랑하여 함께 사는 일이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 책임을 진다는 건 책임을 나눈다는
뜻도 된다. 남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나 나누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옛날 옛적, 우리나라엔 여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그걸 능히 감당
할 수 있게 된 색시를, 스스로의 책임을 알기에도 아직 먼 어린 신랑에게 시집보내는 나쁜
풍습이 있었다.

- 자연의 섭리는 지혜롭고 자비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어리석은 욕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들과 딸을 고루 점지하셨다. 만일 사람들의 욕심을 그대로 들어주었더라면 우리 겨레의
역사는 그 어리석고 욕심 많은 시대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자연의 섭리는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사람으로 점지했기 때문에 남자 중에도 똑똑한 남자와 어리석은 남자를
골고루 섞었고, 여자 중에도 똑똑한 여자와 어리석은 여자를 골고루 섞어서 점지하셨다.

- 첫날밤이 되었다. 색시는 눈 내리깔고 족두리 쓰고 다소곳이 앉아 신랑이 족두리를 내려
주길 기다린다. 신랑이 신방에 든 지는 오래건만 도무지 족두리를 내려 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색시는 눈을 뜨고 신랑을 찾았다. 자세히 보니 발뒤꿈치로 꽁무니를
단단히 틀어막고 앉아있는 꼴이 뒤가 급한 모양이다. 낮에 그렇게 주책없이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다.

- 색시는 똥 싼 바지를 담은 옻칠한 궤짝을 비단 보자기로 싸고, 계집종을 불러 시댁에
갖다드리라고 하면서 뭐라고 묻거든 ‘찌랍디다’라고 대답하라고 한다. 계집종은 비단
보자기에 싼 것을 이고 한달음에 사돈댁으로 갔다. 새아씨가 보낸 물건을 가지고 왔다고
하자 웃어른들이 대접도 융성하게 안으로 맞아들였다. 비단보자기를 끄르자 옻칠도 아름
다운 궤짝이 나왔다. 이 속에 무엇을 넣어 보낸는지를 묻자 계집종은 “찌랍디다”라고 간단히
말했다. 아랫목에서 듣고만 있던 노마님의 타이름에 얼른 궤짝을 사당으로 옮기고 향을
피고 절하고 나서 다시 가져와서야 노마님은 궤짝을 열었다. 그 속에서 나온 건 떡이 아니라
새신랑의 똥 싼 바지였다. ’찌‘란 똥의 다른 말이다. 이런 기막힌 망신을 당하자 아들을 너무
일찍 장가들였다는 뉘우침보다는 감히 시댁에 그런 망신을 준 새댁을 괘씸하게 여기는
마음이 더했다.

- 워낙 신랑이 변변치 못해 당한 일이라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 놓고 문제 삼는 것도 누워서
침 뱉기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시댁 식구들은 다만 시집살이나 지독하게 시킬 것을
벼르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색시는 시집와서 어린 신랑을 지성으로 거두고 공부시키고,
시부모님께 효성스럽고 동기간에 우애 있기가 한결같아서 시댁 식구들은 색시가 그런 일을
꾸몄으리라는 걸 점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일가문중에서나 동리 사람 중에서 어린
신랑을 장가들이고자 하는 일이 생기면 극구 말리기를 잊지 않았다.


< 보시니 참 좋았다 > p35

- 성수, 성미 남매는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하룻밤을 같이 자고 돌아온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얼마 안 떨어진 시골에서 혼자살고 계신다.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는 중에
‘애들아 저, 저, 저것쯤 보렴, 정말 좋구나’하고 말씀까지 더듬으면서 아이들을 쿡쿡 찌르신다.
그런 일은 여태껏 없었던 일이다. 할 수 없이 애들도 눈여겨보는데, 어떤 유명한 미술 평론가가
전국에 있는 성당을 순례하며,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또는 조형물을 보여 주고는 그 예술적
가치를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종합해서 좋은 것들을 다시 한 번 보여주면서 평론가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정하는 순서가 맨 마지막에 있다고 했다.

- 할아버지의 열중은 좀 지나칠 정도였다. 특히 맨 마지막에 그 평론가가 가장 아름다운 성화로
어느 시골 성당의 벽화를 선정하자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숨이 멎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숨을 죽이고 화면만 응시하였다. 화면에 나타난 벽화는 성당 그림으로는 드물게 성화가 아니다.
나무와 들꽃, 새와 짐승, 물고기와 곤충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그림이다. 아이의 솜씨인
듯 수법이 유치할 정도로 사실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사생화는 아니다. 참새를 탄 말, 나무
위에 올라앉은 물고기도 있다.

- 주말에 같이 텔레비전에서 나온 성당으로 벽화 구경 가기로 한다. 서울역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가서 다시 시외버스로 두 시간이나 더 걸려 성당이 있는
마을을 찾아간다. 아주 오래 걸리는 외진 동네인데도 할아버지는 지도도 없이 그렇다고 길을
묻지도 않고 곧장 잘도 찾아간다. 시내 건너 야트막한 동산에 안긴 아담한 마을이 보이고 한눈에
성당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집도 보인다. 아이들이 할아버지 고향인지를 묻자 “여기는 할아버지가
태어나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진짜 고향이다. 너무 못살던 게 한이 되어 떠나고 나서
다시는 안 돌아왔지” 육십년 만에 찾게 되는 고향이었다.

- 사제관에서 나오던 젊은 신부님의 손수 안내로 세 사람은 마침내 벽화 앞에 섰다. 화면에서
본 것처럼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꽃과 푸성귀, 날짐승과 들짐승, 물고기와 곤충들이 벽면
하나 가득 자유롭게 흩어져 있다. 구도랄 것도 없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데도 하나라도 보태
거나 빼거나 위치를 바꾸면 안 될 것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 신기하다. 할아버지는
마치 벽화 속으로 빨려 들어 갈 것처럼 뚫어지게 벽화만 바라보고 있던 중에 신부님이 입을
여신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이 벽화가 그려진 건 오십년도 넘는다고 합니다. 누가
그렸는지 작자는 미상인데, 이 그림을 그리게 한 당시의 신부님이 이 그림에 붙인 이름만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와 우리들은 다들 이 그림을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부르지요. 창세기에서
그림 제목을 따올 만큼 그 신부님은 그림을 아꼈나 봅니다. 생전에 몇 번 수리를 하면서도 이
그림 때문에 이 벽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신 게 전통이 되어 나중에 신축을 할 때도 이 벽을
살리도록 설계를 했다니까요. 그러다 보니 마침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의 영예까지
안게 된 거죠.”

-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있던 성미는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는 걸 느낀다. 울음 때문인지 그렇게
열심히 설명을 해 준 신부님께 인사도 변변히 안 하고 마치 도망치듯 성당을 나온다. 할아버지가
쫓아가다 말고 성수가 대들 듯이 할아버지에게 말한다. “그 그림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린
것 맞죠?” 할아버지는 누가 들을세라 주의를 돌아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떡였다.

- “할아버지가 아주 가난한 소년일 적 얘기다. 소년은 신부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
신부님은 소년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아시고는 학용품과 화구를 사주셨지.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나게 큰 화판을 내주시며 뭐든지 그려 보라고 하셨지, 아무리 뭐든지 그리고
싶어도 소년은 그때까지 보고 자란 것밖에 못 그렸지. 그 큰 화판이 지금까지 보존된 성당의
벽이란다. 내가 그린 건 아주 미숙한 습작에 불과했는데 와 보니 평론가의 말대로 정말 좋은
그림이더라. 내 평범한 그림을 예술로 만든 건 오랜 세월과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명품으로 치는 골동품도 태어날 때부터 명품이었던 게 아니라, 세월의 풍상과 사람들의
애정이 꾸준히 더께가 앉아야 비로소 명품이 되듯이 말이다.”


< 쟁이들만 사는 동네 >
p51

- 우리들이 사는 동네보다 조금 더 하늘 가까운 곳에 미장이, 칠쟁이, 땜쟁이와 기와쟁이,
석수쟁이, 점쟁이 등 온갖 쟁이(장이)들이 다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다. 쟁이는 다 살고
있었지만 욕심쟁이는 없었나 보다. 작은 집 속엔 그날 먹을 양식하고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세간박에 없었다. 어느 한 집 마당엔 아무런 연장도 없이 다만 사시사철 꽃이 만발했다.
빨강, 분홍, 주황, 노랑, 파랑, 보라.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기도 하고 번갈아 피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집을 환쟁이(화가)네라고 불렀다. 환쟁이의 아내는 중매쟁이였다.

- 환쟁이는 온종일 그림을 그린다. 빨강 물감으로 빨간 꽃을, 노랑 물감으로 노란 꽃을
그린다. 환쟁이가 허구한 날 그린 꽃들의 수효는 아마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그린 꽃을 자기가 기른 꽃보다 더 사랑한다. 밤하늘의 별보다 더 높이
우러러본다. 아내는 남편이 쉬지 않고 꽃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꽃을 가꾸어야만
했다.
- 어느 날 환쟁이는 아내의 말대로 실로 오랜만에 꽃에 대한 집착을 잠시 거두고,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하고 하늘을 보았다. 마침 저녁나절이었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꽃말고도 그런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환쟁이에겐 너무도 큰 놀라움이었다.
놀라움인 동시에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환쟁이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흥분을
맛보았다. 그 장엄한 저녁노을이 사라진 후에도 환쟁이는 스스로의 흥분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환쟁이는 마음의 평화를 잃었다. 그 장엄한 저녁노을과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어떡하든 그것을 자기의 화폭에 잡아넣으려고 했다.

- 이 세상에 있는 빨간 꽃이란 꽃은 다 모아들여 그 마지막 꽃에서 짜낸 꽃물에 붓을
담그는 환쟁이의 눈엔 광기마저 번득였다. 드디어 환쟁이가 환성을 질렀다. 마침내 원하는
색을 얻은 것이다. “당신 덕이요” 환쟁이는 우선 아내를 위로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곧 환쟁이는 그림에 몰두했다. 이제까지 그렸던 작은 화폭은 하늘을 담기엔 너무
협소했던지, 이 집에서 제일 넓은 벽을 통째로 화폭으로 삼아 버렸다. 환쟁이는 넓은
화폭을 물들이기에 침식을 잃고 있는 터라 아내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내가 몰래몰래 물감 속에 그녀의 선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 마침내 장엄한 벽화는 완성되었다. 그림의 완성과 동시에 아내는 아름다운 납 인형처럼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둔 아내의 모습을 보고서야 이 미련하디 미련한 환쟁이는
비로소 아내가 그의 그림을 위해 스스로 선혈을 한 방울까지 짜냈다는 것을 알았다.
환쟁이는 통곡하고 뉘우치는 대신 아내의 손을 잡고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환쟁이 역시
그의 마지막 대작을 위해 그의 생명을 모조리 짜냈기 때문이다. 두 아름다운 죽음을 보고
하늘에서 가까운 이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야말로 천생연분이었다고 울먹이며 칭송했다.


< 굴비 한 번 쳐다보고 > p65

- 옛날 옛적 시골에 한 구두쇠가 살고 있었다. 이웃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지독한
구두쇠여서 사람들은 그를 고린재비라고 불렀다. 고린재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한창 자랄 나이의 몸 튼튼한 아이들은 먹어도 허기져 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앞에
놓고 고린재비는 궁리를 했다. 밥 안 먹으면 굶어 죽지만 반찬 안 먹는다고 죽진
않을 텐데, 반찬엔 돈을 들이는 건 틀려먹은 짓이다라며 어떡하면 이를 바로잡나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고린재비는 어느 날 드디어 틀린 것을 바로잡을 방법을
발견하고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 고린재비는 장에 가서 짜게 절여서 소금버캐가 허옇게 내솟은 굴비를 한 마리 사왔다.
그리고 그것을 천정에 매달아 밥상 한 가운데로 늘어지게 했다. 밥 한 숟갈 먹고, 굴비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숟갈 먹고, 굴비 한 번 또 쳐다보고. 고린재비는 끼니마다 아이들에게
밥 한 그릇씩 주고 이렇게 구호를 외쳤다. 밥 한 숟갈 먹고 굴비 두 번 쳐다보는 놈이 있으면
떼기놈 비싼 굴비 닳을라 꾸중을 해가며, 굴비 한 점만 꼭 한 점만 맛보았으면 하고 침을
흘리는 놈 있으면 참아야 하느니라, 부자가 될 때까지는 참아야 하느니라 살살 달래가며,
밥 한 숟갈 먹고 굴비 한 번 쳐다보고....

- 밥을 잘 먹었기에 아이들은 탈 없이 어른으로 자라고 고린재비는 늙어서 죽었다.
고린재비는 반찬값을 아낀 덕에 좋은 논과 좋은 밭을 아들들에게 남겼다. 이제 아들들은
먹고 싶은 걸 뭐든지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으나 먹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저희끼리 구호를 외쳐 가며 밥만 먹고 살았다. 큰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 놓았어도 팔리지가 않았다. 이 마을에 가장 나이
지긋한 노인이 이런 소문을 듣더니 부엉이처럼 지혜로운 얼굴로 말했다. “고린재비가
뒷간에서 나오는 뒷거름은 싱거울 테니 농사가 그렇게 싱겁게 될 수밖에....”

- 형의 농사짓기를 거들던 둘째는 남들이 사 가지 않는 농사에 싫증을 내고 시골을 떠났다.
대처에 나가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였다. 둘째의 소리는 목청도 좋고, 사설이나 가락도
정확했지만 어딘지 텅 빈 소리였다. 그건 기쁨과 슬픔, 노여움과 즐거움을 갖춘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텅 빈 병의 주둥이에 입김을 불어서 나는 소리에 가까웠다. 둘째는 소리꾼
노릇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셋째도 형의 농사를 돕는 데 싫증을 느끼고 집을 떠났다.
셋째의 소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 그림 공부를 해서 환쟁이가 되는 것이었다. 셋째는
그림이 능숙한데도 뭔가 빠져 있었다. 꽃은 영락없이 꽃처럼 그렸다. 꽃술에 꽃가루까지
빼놓지 않고 그렸으나 꽃의 얼을 빼고 그렸기 때문에 그 꽃은 마치 가짜처럼 진짜하고
똑같았다. 새는 영락없이 새처럼 그렸다. 새털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그렸으나 새의 얼을
빼먹고 그렸기 때문에 그 새는 죽어 있었다. 스승은 제자인 셋째를 내쫓았다. 셋째도 고향
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오랜만에 삼형제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패해서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남보다 어디가 모자라서 이렇게 실패한 것일까 열심히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이 모르는 것을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고 지혜로운 노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노인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자네들은 남보다 모자라는 거야 뻔하지
않은가. 그건 자네들이 남들 다 아는 맛을 모른다는 걸세. 지금도 늦지는 않았을걸세. 그걸
배우게나. 좀 힘이 들겠지만....”그들이 때늦게 배우는 모습이 우습고도 눈물겨웠다.
“아이고 뜨거워, 아이고 뜨거워‘하면서 매운맛을 본다. ”아이고 쓰라려, 아이고 쓰라려“
하면서 짠맛을 본다. ”아이고 저려, 아이고 저려“하면서 신맛을 본다. 맛을 배울 때 까지
그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다이아몬드 > p81

- 이 세상의 돌 중에서 가장 비싼 돌, 가장 아름다운 돌, 아무리 써도 닳거나 흠나지 않는
것,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단단한 것, 그래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센 것의
정(精)만을 모아 지구의 깊은 주름살 갈피에 숨겨 놓았음직한 신비의 결정체, 아무에게도
정복되어 본 적이 없는 오만불손한 것, 어떤 물질도 그에게 흠집을 입힐 수 없을 뿐더러
아무리 긴긴 세월도 그를 늙거나 시들게 할 수 없어 영원히 청춘을 구가할 수 있는 돌.
이 돌의 이름은 다이아몬드이다.

- 제아무리 다이아몬드라 해도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갈고 닦지
않고 빛나는 것을 있을 수가 없다. 불타는 듯한 루비의 매혹적인 붉음도, 애수의 순결을 같이
갖춘 사파이어의 투명한 청색도, 사람의 혼백까지 삼켜 버릴 듯한 에메랄드의 심연처럼 깊은
녹색도, 모두 우수한 연마사의 뛰어난 솜씨를 거친 후에 비로소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게
된 것이다.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연마를 거쳤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찬란한
보석의 왕이 된 것이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갈고 닦을 수가
있겠는가.

- (15세기경 베니스의 한 젊은 금속공의 아름다운 소녀와의 사랑 이야기 중에서) 어느 날,
사나이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다. 지극히 평범한, 지극히 금속공다운 진리였다. 즉 철을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철은 강철에 의하여 비로소
절단되지 않는가. 그러면 강철은 무엇인가? 강철 또한 철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쉬운 이치를 찾아,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고심참담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 이치에 따라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에 의해서만 갈고 닦여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시 침식을 잃고 연구한 끝에 다이몬드끼리의 마찰에서 생긴 미세한 다이아몬드의
분말로 다이아몬드를 연마할 수 있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은 저희끼리의
마찰에 의해서만 비로소 미세하나마 분말을 떨어뜨리고, 그 미세한 분말에 의해서만 연마될
수가 있다. 연마된 다이아몬드는 눈부신 빛살을 발했다.

- 사람이 고생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도 아름다운 소녀도 아니다. 열심히
고생해야 기껏 아주 작은 이치를 얻어내는데 불과하다. 사나이는 다이아몬드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란 이치를 얻어냈다. 그만하면 아무도 사나이의 삶이 허망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에 저항할 수 있는 건 다이아몬드
뿐이라는 사실이다.


<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 > p101

- 봄뫼네 마을에서 20리쯤 떨어진 읍내를 지나는 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날은 정말 굉장했다.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고 태극기를 들고 고개 넘고 내를 건너
엉덩춤을 추면서 읍내로 달려갔다. 기름을 칠해 놓은 것처럼 번들번들 윤기가 흐르는 넓은
길이 산과 들을 사정없이 동강내면서 어디까지나 곧게 뻗어 있었다. ... 멀리서 까만 자동차가
한 대 나타나더니 이어서 많은 자동차가 따라 오고 버스도 있었다. 호루라기를 불던 낯선
사내가 깃발을 높이 흔들자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깃발을 흔들며 뜻 모를 아우성을 쳤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마을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자 마을 사람들도 목이
터져라 아우성을 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 사람들이 고속도로 개통 잔치에 갔다 온 지 몇 달이 지나도 마을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발전이라는 것을 은근히 기다리는 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예년에 없었던 일이 있었다. 오십 명도 넘는 도시 사람들이 봄뫼네 마을
둘러싼 산 중에서 제일 높은 선녀봉에 등산을 온 것이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커다란 배낭을 맨 남자 여자가 마을 지날 때 아이들은 구경을 했다. 어느 문필가에 의해
도시의 신문과 잡지에 선녀봉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대대적으로 소개하였다. 그때부터
선녀봉에는 등산객이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듬해 봄에는 도청 소재지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오기도 했다. 오래전에 멸종한 줄 알았던 희귀한 어족을 선녀담에서 발견했다고
선전하자, 낚시꾼만 아니라 어류학자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래서 농사짓기보다는 그런 구경꾼들
시중을 드는 돈벌이에 더 재미를 붙인 마을 사람까지 생겨났다.

- 문필가가 다시 찾았다. 그는 철쭉 꽃잎이 어지럽게 낙화한 선녀담을 꿈꾸며 다시 그곳을
찾았건만, 그가 선녀담에서 본 것은 함부로 떠다니는 깡통과 라면봉지와 은박지 나부랭이였다고
개탄을 했다. 선녀봉에서는 두 차례나 산불이 났다. 그 의젓하고 아름답던 선녀봉이 기계총
먹은 대가리처럼 보기 싫게 되었다. 선녀봉의 자연과 선녀담의 물고기를 보호하자는 운동이
그곳과 가까운 크고 작은 도시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 마을 사람들은 산이나 물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산이나 물이 사람을 보호해 주면 주었지, 사람이 감히 산이나 물을 보호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었다. 즉, 산이나 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이 뜸해 지려니 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지나는
읍내로부터 마을까지의 길이 크게 넓혀지면서 트럭은 철근과 시멘트를 실어 날랐다.
선녀담 근처에 산장을 짓는다고 한다. 그러고는 대문짝만 한 아크릴을 수없이 실어 날랐다.
숲속에 설치할 ‘산을 사랑하자’, ‘나무를 사랑하자’는 내용의 아크릴 큰 팻말이었다. 도대체
누구더러 사랑하자는 말인지 모르겠다.

- 여학생들은 단체로 ‘나무를 사랑하자’, ‘산을 사랑하자’라는 띠를 두르고 와서 마을 사람들
에게 같은 내용의 삐라를 나눠 주고, 등산객들은 읽지도 않고 버렸기 때문에 산은 온통 삐라
투성이었다. 다음 날은 남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삐라를 줍고, 유리병이나 비닐봉지도 줍고,
주운 것을 모아 함께 태우다가 또 산불을 일으켰다. 도시 사람들의 산과 나무 사랑하기 운동은
점점 더 극성스러워졌다. 페인트 깡통까지 들고 와 나무와 바위에다 ‘산을 사랑하자’, ‘나무를
사랑하자’라고 써 놓고 가는 단체도 있다. 쓰고 난 작은 깡통은 재떨이로 쓰면 산불을 막는
데 도움이 될거라면서 등산로 가에 있는 나무에다 매달아 놓고 가는 학생들도 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와서는 한 사람 앞에 백 개도 넘는 빨간 비닐 조각(‘산을 사랑하자’,
‘나무를 사랑하자’)을 가지고 선녀봉 골짜기건 등성이건 자유자재로 다니면서 나뭇가지에다
그 비닐 조각들을 철사로 엮어 달았다.

-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선녀봉 단풍이 산악인들이 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올해의
단풍으로 뽑혔다고 한다. 올해의 단풍으로 뽑힌 산에서는 그해의 단풍축제가 대대적으로 벌어
진다. 전국에서 산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축제는 사흘 동안 계속됐고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를 둘러싼 산악인들의 노랫소리는 산의 뿌리를 흔들 것처럼 우렁찼다. 마을사람
들도 덩달아 마음이 들떠서 사흘 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축제의 마지막 밤, 소음이
가라앉고도 한참을 뒤척이다가 봄뫼는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기척에 잠이 깼다.

- 봄뫼는 그 소리가 산이 앓는 소리라는 한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단풍축제가 끝났기
때문이다. 떠나가면서도 그 사람들은 비단폭을 두른 것처럼 아름다운 선녀봉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그 많은 사람이 마지막 필름의 셔터를 누르고야 발길을 돌렸다. 오늘 선녀봉의 단풍을
보았으므로 내일 죽어도 한이 없노라는 문필가의 말대로 사람들은 저마다 최고의 찬사를
선녀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선녀봉의 단풍은 여전히 고았지만 속으로 깊은 병색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봄뫼와 한뫼는 단박에 알아봤다. 앓는 소리를 귀보다 마음으로 들은 것처럼
병색도 눈보다 마음으로 알아봤는지 모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었다. 도시 사람들은 잘
몰라서 그렇지 선녀봉은 일 년 중에서 겨울이 가장 아름답다. 한뫼는 특히 겨울나무를 좋아
한다. 잎이 가렸을 때보다 잎을 떨어뜨린 후의 나무는 제각기 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 한뫼의 말이다. “전 지난 가을 밤, 산이 앓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또 아무도 못 보는
산의 병색을 본 적이 있어요. 전 겁나요. 자연이 죽으면 어쩌나 하고요. 그땐 사람이 다 죽는
날이다 싶어요”. 선생님의 말이다. “바로 그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이지,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연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결국은 자연과 공동 운명체라는 것이. 그러니까
대결은 하되 자연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게 해야지. 자연의 마음이란 알고 보면 단순해. 정직
하고 당당한 것을 좋아하고 비겁한 속임수를 싫어하니까 그것만 피하면 되는 거야. 이를테면
사람들이 정정당당하게 자연과 부딪쳐 개펄을 막아 바다에 둑을 쌓거나, 땅을 깊게 파서
그 밑의 지하수를 끌어올리거나 흐르는 강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거나 하는 일에는 대체로
너그러운 것이 자연이지. 그렇지만 자연이 목숨 가진 것들에게 마음껏 퍼마셔도 좋다고 약속한
공기나 강물에 사람이 몰래 독을 타는 짓 같은 것은 절대로 용서 안 할걸. 그건 자연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이런 자연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연과 싸우는 법을 먼저 배워서
써먹는다는 것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니.”


< 아빠의 선생님이 오시는 날 >
p131

- 오늘이 바로 이상국 선생님이 오시기로 한 날이다. 아빠가 어떤 모임에서 삼십여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이상국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한 것이 바로 일주일 전이다. 일주일 동안에
온 집안이 반짝반짝해졌다.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고 유리창을 닦고 커튼을 빨고 식탁 위의
전구도 밝은 걸로 갈아 끼었다. 오늘 아침엔 엄마가 일찍 꽃시장에 각서 향기 짙은 프리지어랑
천사의 입술처럼 순결한 분홍 장미도 한 아름씩 사다가 집 안 여기저기를 장식했다.

- 우리 집에 아빠의 초등학교 적 훌륭한 선생님이 오신다니, 어떡하면 최고의 대접을 할 수
있을까 엄마가 바짝 긴장을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같이 걱정해야 할 아빠는 태평하다.
이상국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비빔밥인데, 그걸 워낙 좋아하셔서 그 밖의 것은
준비해 봤댔자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는 거였다. 드디어 이상국 선생님이 도착하였다.
얼굴에 주름과 미소가 가득한 작은 노인이다.

- 따뜻한 녹차를 대접하는 동안 아빠는 엄마를 제쳐놓고 부엌에 들어가더니 비빔밥을 만들어
그릇에 담았다. 과연 아빠의 즉석 비빔밥은 진미였다. 이상국 선생님도 한 대접을 거뜬히
비우셨다. 후식으로 과일을 들면서 아빠가 말했다. “선생님 식성은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십니다.”“내 식성을 기억해 줘서 고맙네, 그러나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난
비빔밥도 좋아하지만 갈비찜이나 불고기도 좋아하고 비프스테이크 같은 서양 음식도 좋아
한다네.” “아이구, 선생님 죄송합니다. 전 그동안 선생님 식성이 변한 것도 모르고 ...”

- “이 사람아, 식성이 변한 게 아니라네. 자네는 내가 정말로 비빔밥을 좋아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에 큰 양푼하고 참기름을 가지고 가서 아이들 도시락을 다 걷어다가 반찬이랑 김치랑
한데 넣고 비벼서 다시 나눠 먹은 줄 아나. 그때만 해도 우리 반엔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가
서너 명은 됐다네. 다들 어려운 때였지. 그 애들에게 자존심 상하지 않게 점심을 먹이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네. 비빔밥 먹는 날은 내 도시락을 서너 사람은 먹게 넉넉히 싸고 소고기도
좀 볶아 가지고 가서 슬쩍 같이 넣고 비비면 우리 반이 다 같이 배부르게 먹을 수가 있었지.”
말씀이 끝난 후에도 우리 식구는 다 같이 깊이 머리를 조아리고 들지를 못했다.


<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 > p145

- 골목 속의 작은 집 젊은 새댁이 아기를 뱄다. 처음으로 엄마가 되는 것이다. 첫아이 맞을
준비가 대단하다. 엄마는 아기를 갖고 나서 빛깔 곱고 향기로운 과일도, 신선한 채소도,
물 좋은 생선도, 맛 좋은 고기도 다 엄마의 몫이다. 엄마는 사양하지 않고 이런 것들을 골고루
먹는다. 엄마는 또 엄마의 몸뿐 아이라 엄마의 마음도 뱃속의 아이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넉넉한 마음을 갖도록 한다. 마음이 넉넉해지니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까지도 넉넉해진다. 엄마의 배가 반달만큼 부르자 동네 사람들은 물론 친구나
친척들도 엄마의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 같이 즐거워했다. 이때부터 아기 마중을
위한 엄마의 일은 더욱 바빠진다. 아기는 이 세상에 벌거벗고 태어나기 때문에 미리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 많기도 하다. 엄마의 마음은 날로 가득해진다. 뱃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서도 아기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 아빠의 마음도 분주하다. 아빠는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놀랍고 아름다운 일을
엄마와 함께 경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아빠가 된 선배와 친구들에게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물어 보았다가 웃음거리만 된다. 그런 어려운 일은 여자들이 다 알아서 할
일이고, 남자들이 할 일은 아주 쉬운 일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믿음직스러운 아빠가
되는 길이란다. 아빠는 믿음직스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믿음직스러운 것과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구별해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기는 이 세상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려 하고 있건만, 이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것 천지이다. 만일
아기가 자라면서 그러한 것을 알게 된다면, 아기는 이 세상에 괜히 태어났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모든 것은 만드는 방법이 다른 것처럼 고치는 방법도 달랐다. 그러나 고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우리 아기가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우리 아기가 마음에 드는 것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아기에 대한 사랑 말이다. 그래서 아빠는 생각한다.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믿고 살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아빠가 아기를 마음 놓고 마중하고, 마음 놓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랑하는 마음들에 대해 새롭게 눈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놀랍고
아름다운 발견이었다. 마침내 아빠는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놀랍고 아름다운 일을
엄마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 아기가 태어날 골목 속의 작은 집에는 엄마와 아빠 말고 할머니도 계신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셨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 태어나고 죽어 감을 수없이 보아 오시는 사이에
눈빛은 흐려지고 살갗은 고목나무의 껍질처럼 찌들고 깊게 주름졌다. 할머니는 벌써부터
아기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그 선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돈 주고 살 수도
없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선물이 돈 주고 산 어떤 선물보다 아기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속으로 흐뭇해하는 마음이 대단하다. 할머니가 몰래몰래 마련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으뜸가는 선물은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할머니의 할머니 적부터
들은 수없는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이야기는 더러는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더
많이 보태지고 새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부피는 어마어마하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어린이와 만나지 못해서 죽어 버린 이야기를 살려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천천히
조심조심 죽어 버린 이야기들을 건드려도 보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도 본다.

-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는 동안에 터득한 지혜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아무리 보잘
것없는 사물이라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밀은 비밀답게 각기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사물 속에 감춰져 있다. 어떤 비밀은 겹겹의 두꺼운 껍질 속에 숨어 있기도
하고, 어떤 비밀은 마치 허드레 물건처럼 밖에 나와 있기도 하다. 사물의 비밀과 만나는
일이야 말로 세상을 사는 참맛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하고 있다. 밤의 비밀은 따끔따끔한
밤송이와 두껍고 빤들빤들한 겉껍질과 떫은 속껍질 속에 숨어 있는 달콤하고 고소하고
오돌오돌한 밤맛이다. 할머니는 아기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작정이다. 아기에게 꿈을
줄 작정이다. 아기는 커가면서 꿈을 열쇠삼아 사람과 사물의 비밀을 하나하나 열 수 있을
것이다. 참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아기 오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할머니의 나날은 저녁
노을처럼 찬란해진다.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 잠깐이나마 노을이 있다는 것은 참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49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9.05.


[ 오상을 받은 우리 시대의 형제 ]


- 지은이 : H.바익셀브라운, 옮긴이 : 최옥식, 펴낸곳 : 성바오로/ 213p
-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 이야기

[ 표지의 글에서 ]

"비오 신부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종합하자면 그것은 바로 기도와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요청되고 있습니다"(요한 바오로2세)
"비오 신부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빛나는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겸손한 피에트렐치나의 카푸친 형제가 살아온 십자가의 영성은 참으로 시의 적절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희망을 향해 마음을 열기 위하여 십자가의 가치를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2세, 2002.6.16.시성식 강론중에서)



< 머리말 >

-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비오 신부는 그의 삶과 고통과 영적 사업으로, 수백만 사람들에게
도움과 치유를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1968년 타계한 오상(五傷)의 사제에 관한 이 책은
구세주와 그분이 간택하신 사람을 통하여 작용한 은총을 증거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비오 신부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는 오늘날에도 무수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내적으로 뒤흔들어 놓고 있다. 비오 신부는
50년 동안 기도하면서 지구상 곳곳에서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들을 축복하고 치유하는 데
자신을 바친 고해소의 순교자였다.

-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불이 옮겨 붙을 수 있는 횃불과 같은 사제들의 본보기이다. 생명의
은총 지위에 살고 일하는 신자들만이 미래의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삶을 마감할 때가 되면 가을의 수목들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비오 신부에 관한 작지만 진솔한 이 책자가 모든 독자의 마음을 구세주께 활짝
열어 드리고,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이 언제나 구세주를 향해 열려 있기를 바란다.
- 1983년 상트 안드래에서 오토 찌슈킨 신부


[ 서론 ] p6

- 오늘날 기적을 이해하려면 모든 세상사를 떠나 오직 영적으로만 보는 눈이 필요하다.
도대체 기적이란 것이 있기는 한가? 물론 있다. 정직한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면 사실상
많은 기적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르드를 보라. 그곳은 교회가 인정한 것만 4천
건 이상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4천 명이 넘는 불치의 환자들이 저마다 한 순간에 현세의
병고에서 해방되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멈췄으며,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가. 교회가
루르드와 파티마를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인정하고 있는데, 굳이 기적을 의심할 무슨 이유
라도 있는가. 성 바오로 사도 역시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회개하지 않았던가. 예수님과
마리아님의 사업을 건성으로 보아 넘기면서 어떻게 그분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까.
복음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 지식이 말을 하지 못하는 곳, 거기서부터 믿음이 시작된다. 세상의 지식이란 하느님
앞에서는 바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내막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오히려 기적을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이 기적을 부정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삶을 바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기적을
인정하려면 우선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곧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는 사람
에게는 기적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적을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 1. 성장기 ] p13

-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에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프란치스코 포르조네이다. 어릴 적부터 그는 비상한 은총을 받아 파티마의 아이들처럼
스스로 보속에 몰입하곤 했다. 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했고 성격은 매우 경건했으며,
그의 가장 큰 열망은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13세 때 벌써 장차
찾아 올 모든 영혼들을 보았거나 어느 부인의 상처를 치유케 하는 비범함을 드러내 보였다.

- 15세가 되던 해에 그는 산토반니 로톤도의 카푸친회에 입회(수도명은 비오)했다.
어느 날 그는 40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여 사경을 헤매던 중 연락을 받고 달려 온 아버지가
주신 레몬주스 한잔을 마시자 회복되기도 하였다. 그는 1910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15년 9월 20일 그리스도의 오상을 보이지 않게, 그리고 꼭 3년 뒤인 1918년 9월
20일에는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받았다.


[ 2. 오상을 받은 경위 ] p18

- 비오 신부가 오상을 받은 경위는 자신이 영적 지도신부에게 쓴 편지를 통해 명확히
알려져 있다. “존경하는 신부님! 저는 미사를 마친 뒤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려고 성가대
위쪽에 혼자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떤 절박한 느낌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 느낌이 하도 처절한 나머지 더 심하면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이어서 깊은 평화의 느낌이 왔습니다. 제가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았는데, 거기서 다섯 가닥의 불같은 빛이 나와서 나를 덮치더니 저의 두 손과
두 발과 그리고 옆구리에 구멍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 비오 신부의 오상은 처음부터 출혈을 멈추지 않았으며, 50년이 지나서도 전혀 달라
지지 않았다. 이 오상을 가까이에서 보면, 두 손과 두 발에 2cm 크기로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가슴의 상처는 7cm 길이에 5cm 폭의 거꾸로 선 십자가 모형이고,
근육 조직은 심장까지 모두 뭉개져 있다. 유명한 의사 페스타 박사가 오랜 기간에 걸친
검진 끝에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 은총 받은 사제의 상처는 우리 구세주의 처참한
상처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자연 법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상입니다. 어떤 상처라 하더라도 낫던가 아니면 곪든가 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비오 신부님의 경우는 과학을 다 동원해서 검사해 봤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붕대를 풀면 피는 기분 좋은 향기와 더불어 불같이 흘러나옵니다. ..... 오상의 상처는
출혈을 멈출 줄 모릅니다.”

- 비오 신부에게 오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게 오상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큰 훈장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그 오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율할 경고요,
우리 주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는 표지이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잊은 것을 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종 비오 신부를 통해서 당신을 나타내심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얼마나 비싼 대가가 치러지는지를 알게 해주신 것이다. 비오 신부야말로 성바오로
사도의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 비오 신부는 자기의 고통을 통하여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죄인들이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그는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비오 신부는 성모님을 한없이 공경했다. 그리고 날마다 수없이 많은 은총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서 얻어냈다. 그 자신은 아주 겸손하고 검소하고 단순한 가운데
이목을 끌만한 일은 무엇이건 모두 회피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걱정이 있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특히 병들었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기로에 선 사람들이 비오 신부를 한번 방문
하기를 그토록 바랐다는 사실은 그에게 의탁하려는 순례자들이 날이 갈수록 증가한 데서
드러났다. 그는 인간적인 고통을 잘 알았다. 그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전구했다.


[ 3. 비오 신부에 관한 예언 ] p25

- 산조반니 로톤도의 주민이자 비오 신부의 영적 딸이며 제3회 회원으로서 많은 은총을
받은 착한 루치에타 피오렌티노에게 구세주께서 말씀하셨다. “1906년에 네가 아팠을 때
내가 네게 말한 것을 기억하느냐?” 루치에타가 대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멀리서 상징적으로 커다란 나무에 비유되는 한 사제가 올 것이다. 나는 이곳 이
수도원에 나무를 심어 그 가지와 잎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할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로 찾아들 것이며, 그 훌륭한 과실로 나무가 풍성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니,
그들의 영혼은 구원을 받아 안전해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모범으로 따르는 모든 사람은 구원의 길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를 통해 작용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그가 모든 전제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와 하나가
되었다. 그는 충직한 사람들 안에 숨어 산다. 나의 종 비오 신부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이다. .... 그는 영적 선물을 가득히 쥐고 있다. 그는 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성체이다. 하늘(나라)에서 너희는 비오 신부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 4. 비오 신부의 미사 ]
p28
- 비오 신부는 대개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1시부터 나와 기도하며
성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은 하룻밤 잠을 설치는 고생도 마다
하지 않고 비오 신부의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고 야단이었다. 비오 신부는
미사를 위해 매일 3시간씩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의 희생 또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일 4시 45분에 고통으로 비틀거리며 제의실에 들어오곤 하는 그는 매일 올리브 산의
고통을 겪었다. 비오 신부에게는 일생동안 편한 날이 없었다. 지체 높은 사람들뿐 아니라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소망을 가지고 그를 고대하며 찾아왔기 때문이다.

- 5시 정각,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힘겹게 제대로 나아간다. 그의 걸음걸이,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고통스럽게 보인다. 비오 신부는 미사를 중앙제대에서
드렸는데, 세 방향에서 모두 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경건하게
미사를 시작한다. 오래 서있는 고통과 오상의 고통이 어우러져 큰 고역을 겪고 있음이
역력하다. 가끔 가시관을 벗기라도 하려는 듯이 손을 이마에 대곤 한다. 이윽고 제대에
올라가 제대에 입을 맞추려 하지만, 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지적하는 무서운 죄를 고통으로 짊어지고 속죄하는 중이었다.

- 그는 대영광송과 사도신경을 들으며 곧잘 황홀경에 빠지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마치 그 내용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비오 신부의 기도는 모두
그 표정으로 나타났다. 대개는 슬픈 표정이었고, 기쁜 표정을 짓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사람들은 비오 신부가 제대 중안으로 가서 몸을 숙여 기도하는 것을 보며,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제대에는 따로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는
깊은 신앙과 사랑으로 복을 말씀을 읽었다. 성찬식에 들어가면 그는 성반을 든 채 자주
황홀경에 빠져들곤 했다. 그는 서면으로든 구두로든 그에게 맡겨진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성작을 들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오 신부가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려 팔을 들어 올리면, 꿰뚫려서 피로 물든 상처가 뚜렷이 나타났다. 상처의 고통과 오래
서 있는 데서 오는 고통은 점점 더 커져 갔다. 타는 듯이 찌르고 꿰뚫는 아픔이었다. 그의
표정은 바로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숨을 거두시는 구세주의 모습과 같았다.

- 성변화의 기도를 바치는 동안에 비오 신부의 몸은 거센 소나기를 맞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진저리나는 고통과의 싸움이었으며, 그 순간 양손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비오 신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그 죽음을 몸으로
겪은 것이다. 사람들은 비오 신부가 행여 죽기라도 할까 싶어 흐느껴 소리쳤다.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의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지면, 이것이 사람들을
큰 감동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순례자들 가운데는 감격에 겨워 큰소리로 “저는 믿습
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 이어서 비오 신부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 그 자신이 성체를
영하기에 앞서 가슴을 치면서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 할 때는 목이 메곤 했다. 그리고 나서 성체를 영했다. 이때 그는 또 황홀경에 빠져
들곤 했다. 그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 사람에게나 가능할 천상의 기쁨과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미리 겪은 모든 고통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맡겨진 매일의 중책을 감당해내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는 이 상태에 머물러 있곤 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젖어 마침기도를 하고 미사를
마친다.

- 비오 신부의 미사는 가장 값진 순간이었고, 그가 당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람
들이 그를 통해서 받는 은총도 많았다. 그의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생을 통틀어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미사 도중에 각자의 소원을 비오 신부에게 조용히
부탁드릴 수가 있었다.


[ 5. 고해성사 ] p35

-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비오 신부는 고해소의 순교자가
되었다. 교회의 큰 축일을 앞두고 매일 18시간씩 고백을 들어야 할 정도였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토록 혹사한다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오 신부는 아주 드문 경우였다. 한 편지의 내용에서 비오 신부는 이렇게 썼다.
“제 건강은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밤낮으로 수백 명의 고백을 듣느라고 바쁩니다. 제게
자유시간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 힘차게 저를 받쳐주는 그리스도
께서는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비오 신부는 고해자들을 각기 다르게 다루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팔을 펴서 사랑스러운 인사로 맞이했다. 비오 신부에게는 사회적 명망 같은
것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빛으로 그 영혼만을 보았다. 정직하고 성실한 영혼을
대하면 비오 신부는 따뜻한 말로 감싸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 사람들은 고해소에서 비오 신부가 거의 언제나 깨우쳐 주는 자리에 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전지 능력에 그를 동참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어떤 고해자는 잘못된 부끄러움에서 죄를 숨기거나 축소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비오
신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 은총 받은 신부는 영혼의 어떠한 장막도 꿰뚫어 보며
고해자를 엄하게 가르쳤다. 주일 미사를 빼먹는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습관적인
죄, 과다한 음주, 줄담배, 외도 등의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이들을 비오 신부는 매우 엄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그는 쉽사리 죄를 용서하는 일이 없었고, 우선 개선하라고 진지하게
경고하고는 시험기간을 주어 꼭 행실을 고치게 했다. 따라서 고해자가 방탕한 생활을
고치겠다는 올바른 통회의 결심이 없으면 비오 신부에게서 사죄를 바랄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 고해성사와 관련한 몇 가지 사례들이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비오 신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해자들이 자진해서 자기들의 놀라운 내적 변화를 말하는
가운데 알려진 것들이다. (여러 가지의 사례중 몇 가지만 메모함)

* 미사 중에 절실하게 기도하고 있던 한 부인이 “아! 주님께서 통회한 우도에게 하신
말씀을 내가 죽을 때도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닷새 후 그녀는 고해소에서 비오 신부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다 지킨다면, 당신이 닷새 전에 소원한 대로,
주님께서는 언젠가 당신이 죽을 때, 통회한 우도에게 하셨던 말씀을 해주실 것이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요.” * 고해소에서
통회하며 자기의 죄를 고한 어떤 사람에게 고백하지 않은 훔친 지갑에 대해 대신 이야기
해주면서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두고두고 좋은 일에 쓰라고 명했으나 거절하자
“그렇다면 나도 당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소”라고 잘라서 말했다. 며칠 뒤 그는 뉘우
치며 돌아와서 자기가 손해를 끼친 것을 변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사죄를 받았다.

* 고해성사를 보다가 말을 잇지 못하는 한 여인에게 비오 신부가 명했다. “저 아래
연못에 가보고 곧 돌아오시오!” 그 연못 안에서 그녀는 19년 전에 자기 손으로 죽여
물속에 던졌던 자기 아이를 보았다. 기겁을 한 여인은 비로소 자기의 대죄를 고백했다.

* 한 살인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견디지 못하다가 어느 날 비오 신부의 고해소에
들어 왔다. 그는 살아오면서 범한 여러 가지 잘못을 고백했으나, 아무리 해도 대죄인
살인에 대해서는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살인자는 침묵했고, 비오 신부도 침묵
했다. 두 사람 다 중죄를 알고 있었다. 침묵이 흐른 뒤 비오 신부가 고해자와 함께
고해소를 나와 그가 죽인 사람이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통해 눈에 보이도록 비오
신부가 은총을 빌었다. 비오 신부는 그를 다시 고해소로 데리고 갔다. 자기 소행을
똑똑히 본 그는 비로소 자기의 대죄를 통회하며 고백할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 6. 영성체 ] p56

- 비오 신부는 미사 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첫영성체 어린이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연중 내내 전세계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9시 30분에는 대제대 앞에서
일반인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성체 분배 때 비오 신부의 얼굴이 빛나곤
했다고 말했다.

- 하느님에 대한 비오 신부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그가 성체를 손에 쥐고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라고 기도할 때 그의 표정은 하느님을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환하고 밝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오, 구세주께서 이렇게
보이지 않는 면병 안에 감추어져 계신다는 것은 전율할 만큼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분은 언젠가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권세와 영광 중에 오셔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 비오 신부는 성체 분배 때 영혼의 상태가 바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를 건너뛰었다.


[ 7. 비오 신부의 성체 강복 ] p59

- 비오 신부는 대개 오후 4시 30분에 성체강복을 거행했다. 제대를 향해 나오는 비오
신부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예수님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에는 눔물이 어리고 얼굴에는 탄원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기도문을 읽을 때, 특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그는 목멘 소리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훌쩍이거나 때로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비오 신부가 성모님께 자비를
구할때면, 신자들 역시 똑같은 경험을 했다.

- 그가 성광을 들고 강복하는 시간은 거의 1분이나 걸렸다. 그는 대단히 엄숙하게, 또
천천히 강복을 했다. 이토록 오래 걸리는 강복은 다른데서는 보기 힘들다. 그는 강복
뒤에 마침기도를 주도했다. 그러고도 제대를 떠나기가 아쉬워 또다시 주님을 되돌아 보곤
했는데, 그때 그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 비오 신부의 성체 강복에 한 번이라도 참석한
본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 8. 저승을 보는 비오 신부 ]
p62

- 비오 신부는 산 사람의 영혼뿐 아니라 저승의 영혼도 보았다. 많은 사례가 그것을
증거한다. 한번 고해소에서 비오 신부에게 전사한 나의 형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줄 수
없겠느냐고 겸손하게 물어 본 일이 있다 그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는 저 위의 주님
곁에 있소”라고 대답했다. ( 여러 가지의 사례중 몇 가지만 메모함)

* 한 변호사가 고해성사 끝에 4년 전에 죽은 그의 조부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비오 신부는 “예, 당신의 조부님은 의사였지요. 생시에 의사로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한
공로로 그는 이미 하느님 지척에 가 있소.”라고 말했다. * 한 남자가 아내와 두 아이를
버리고 몇 년 전부터 다른 여자와 동거했다. 그러다가 암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병자성사를 받았다. 부인이 고해소에서 그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당신 남편은 영벌을 받고 있소. 그는 병자성사를 받으면서
통회나 정개도 없이 많은 죄를 감추어, 하느님의 자비에 역행하는 죄를 지었소.”라고
말했다.

* 한 젊은이가 군대에서 경건하게 생활 한 것이 남들의 비웃음을 사자, 경솔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친척들이 와서 그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비오 신부는 “부모의 간절한 기도와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그는 구원은 되었소. 하지만
연혹의 깊디깊은 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소.”라고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 9. 수호 천사 ]
p69

-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수호천사를 존경함과 아울러 그들을 념하는 고유축일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오 신부는 거룩한 천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미카엘 대천사를 열렬히 존경했다. 비오 신부는 자신의 수호천사를 눈으로 보았고,
마찬가지로 다른 천사들도 보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에게 보내어 그들의 소원을 전했다고 한다. 비오 신부가 한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미사에 갈 수 없을 때 미사 지향을 자기의 수호천사에게 기탁하여 하느님께
사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앙과 사랑이 더 굳건해진다는 것이다.
(몇 가지의 사례중 세 가지만 메모함)

* 어떤 사람이 몇 년 전부터 소경이 되었는데, 비오 신부에게 기도를 청했다. 친절하게
그를 맞이한 비오 신부는 “지금부터는 비틀거리거나 넘어지지 않을 거요. 주님께서
당신에게 수호천사 한 분을 더 붙여 주라고 내게 허락하셨소. 이제 수호천사 두 분이
당신을 이끌고 도우실거요.”라고 말했다.

* 한 남자가 제의실을 지나는 비오 신부를 보자 기쁨에 찬 목소리로 “비오 신부님,
여기서 신부님을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쁨니다.” 라고 말하자 비오 신부는 “나는 당신을
벌써 다섯 달 전부터 알고 있었는 걸.”이라고 대답했다. 그 남자는 산조바니 로톤도에
처음 온 길이었으므로 이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비오 신부는 졸음으로 운전하고
있었던 그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구체적으로 정확히 말했다. 그리고는 “나의
수호천사가 당신을 대신하여 차를 몰았지. 수호 천사는 투덜거렸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요.”


[ 10. 치유와 회개 ] p77

- 남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비오 신부의 은사는 벌써 많은 작용으로 나타났다. 그 많은
회개는 모두 그 은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여러 가지의 사례중 몇 가지만 메모함)

* 토리노에 다섯 아이를 둔 부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사고를 당해 죽었다. 그 얼마 뒤
의사들은 그 부인이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녀는 산조반니 로톤도에 사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비오 신부의 전구를 부탁드려 달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비오
신부는 “그녀를 위해 주님께 말씀드리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딱하게도 그녀는 점점
상태가 나빠져 결국 입원하게 되었다. 이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다시 비오 신부에게 자기의 다섯 아이를 봐서라도 동정해 주시기를 간청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침
병실로 들어오던 간호사는 기쁨에 찬 그녀의 환호성을 목격했다. “나는 나았어!” 의사
들은 이 치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쁨과 감사에 넘쳐 그녀는 다섯 아이에게
돌아 갔고, 그 후에 미국에 있는 언니와 함께 비오 신부를 찾아가 고해소에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언니도 오래전부터 발에 상처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비오 신부
에게 청을 드렸다. 며칠 후 그 언니의 발은 완전히 나았고, 두 사람은 기쁘게 귀로에
올랐다.
* 남미에 세 자녀를 둔 교우 가정이 있었다. 어머니는 몇 년 전부터 폐결핵을 앓았고,
남편이 실직중이라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가족은 오직 하느님의 도움에 희망을 걸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꿈에 부인이 한 카푸친회 신부를 보았는데, 그가
말했다. “여러분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소. 이제 당신은 각혈을 멈추고 건강해
질 것이오. 당신의 남편도 일자리를 얻고, 아이들은 얼마 있다가 좋은 학교에 가게 될
것이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다. ... 이하 생략
* 어떤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에다 마비까지 겹쳐서 누워 지내는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비오 신부에게 청했다. 그러자 비오 신부가 대답했다. “뭐라고요?, 집에 가면
아들이 건강하게 뛰어나와 인사할 것이요. 헌데 당신도 아프군요.” 놀란 아버지는 얼마
전에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말하자 비오 신부가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소? 당신은 영혼의 중증이란 말이요. 당신은 31년 동안 한 번도 고해성사를 보지
않았소.”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여 총고해성사를 보았다. 집에 가자 아들이 뛰어나와
그를 마중했다.

[ 11. 동시에 두 장소에 현존하다 ] p104

- 비오 신부는 착하고 훌륭한 사제로서 언제 어디서고 기꺼이 남을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그에게 동시에 두 장소에 현존하는 은사를 주셨다. 이러한 은사를
받은 성인은 많았다. 성 알퐁소, 성 안토니오, 성 돈보스코, 성 비오10세 교황 등이
그러했다. 그런데 다른 성인들에게는 이런 일이 단 한 번 일어났을 뿐이지만, 비오
신부의 경우에는 거의 매일 일어났다. 프랑스의 한 학자가 비오 신부에게 동시에 두
장소에 현존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질문은 정말 현명하지 못하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지 사람의 뜻이 아니란
것을 모르시오?”

- (여러 가지의 사례 중 몇 가지만 메모함)
* 중병을 앓고 있는 한 주교가 고해소에 들어왔다. 고해성사를 마친 그가 비오 신부에게
청했다. “비오 신부님, 내 건강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을
때 와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잠시 뒤 기쁜 대답이 나왔다. “주교님이
선종하실 때 내가 지켜보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넉 달 뒤에 이 주교는 선종했고,
비오 신부는 약속대로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 두 자녀를 둔 비엔나의 한 가족이 비오 신부에게 갔다가 큰 감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
왔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한 아이를 데리고 복잡한 교차로를 건너려 했는데,
정차해 있는 차들로 시야가 가려졌다. 아이가 앞으로 나가자고 어머니를 끌었다. 그때
지나가던 차가 이 다섯 살배기 아이를 들이 받았고, 아이는 공중에서 세 바퀴 맴돌았다.
깜짝 놀란 어머니의 입에서는 “비오 신부님, 도와주세요. 비오 신부님,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가 튀어 나왔다. 그 순간 비오 신부가 어느새 인도 가장자리에서 공중에 떴다가 떨어
지는 아이를 받아 안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최악의 사태를 우려했다. 경찰이
와서 아이를 병원에 싣고 가게 했다. 진찰 결과 아이는 전혀 이상이 없었고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았다.

*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 100주년 기념행사 때, 비오 신부는 한 번도 산조반니 로톤도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루르드에서 그를 보았다. 주교들도 성체행렬을 하면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 비오 신부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생각하며 극진히 사랑하던 80세 가량의
한 노인이 암에 걸려 고생했다. 그는 참을성 있게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하루는 병상에
누워있는데, 비오 신부가 닫혀 있는 문을 통해 방에 들어 왔다. 신부는 웃으며 다가와서
그를 축복하며 말했다. “그토록 참을성 있으시니 그 고통을 내가 몇 주간 짊어지지요.”
그 순간 진저리나던 고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가 3주 뒤에 도졌다. 죽음이 가까워
오자 비오 신부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 전쟁 때 비엔나의 한 가족이 그들의 집을 비오 신부의 비호에 맡겼다. 공습 때 그 구역
전체가 폭탄 세례로 쑥밭이 되었는데, 오직 그 집 한 채만은 무사했다. 호기심으로 방공
호에 들어가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던 한 부인이 그 집 앞에 어떤 카프친회 신부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은 이 사실을 그 가족에게 이야기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비오
신부가 실제로 도왔다는 것을 알았다.

* 블로냐에서 한 사람이 냉담 중인 채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잘 아는 사람
하나를 모셔왔다. 그는 비오 신부의 오상의 피로 얼룩진 손수건을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죽어 가던 사람이 고해성사를 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 날 그는
“신부님이 여기에 다녀가셨어”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 12. 모두 다 낫지는 않았다 ] p129

- 루르드와 파티마, 그리고 그 외의 큰 순례지에서도 병자가 모두 치유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그리스도 역시 당신이 지상에 계실 때 모든
병자를 다 고쳐 주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육체의 병을 고쳐 줘 봐야 이전
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영혼이 영원히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마지막 곤혹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하느님을 찾아 절규한다.
이것이 인간 삶의 마지막 진실이다. (여러 가지의 사례 중 몇 가지만 메모함)

* 몇 년 전에 소경이 된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비오 신부에게 데리고 와서는 고쳐달라고
청했다. 비오 신부는 그를 진지하게 살피더니 말했다. “여기 지상에서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러면 저승에서는 불행해질 것이네. 스스로 선택하게.” 이 말은 들은 소경은 한동안
고민했다. 얼마 후 그는 결심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비오 신부님, 그곳 저승에서
행복했으면 합니다!” 비오 신부는 그를 위로하고 쓰다듬었다. 후에 행복한 소경이 된
그는 비오 신부의 전구로, 이 은총받은 카프친회 신부 곁에서 살았다.

* 여러 해 동안 간질병을 앓아 종종 무서운 발작에 시달리는 한 남자 역시 병을 고치지
못했다. 주목할 것은 이 병자를 두고 한 비오 신부의 말이다. “내가 빌기만 하면 하느님
께서는 당신에게 은총, 즉 치유를 주실 것이오. 하지만 나는 주님께 빌 수가 없소.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신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때문에 당신 영혼이 썩어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 자동차 사고를 당한 뒤 한 젊은이가 갑자기 불구가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비오
신부는 그에게 말했다. “이 사고가 자네에겐 천만다행이야. 사고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살인자가 되어 오늘쯤은 감옥에 있을 걸세.”

- 우리는 언제나 “주님, 제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제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고통을 인내와 사랑으로 감내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께 드릴 더 좋은 선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면 많은 영혼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혼도 구할 수 있다.


[ 13. 그밖의 놀라운 사건들 ] p133

- (여러 가지의 사례 중 몇 가지만 메모함)
* 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었다. 미국의 전폭기 편대가 산조반니 로톤도를 폭격하려 했는데,
조종사들은 한 신부가 수도원 상공을 떠돌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을 투하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그 신부가 누구인지 알고 그를 찾아갔다. 산조바니 로톤도에 새
병원이 들어서게 된 데에는 이 미군들의 낸 기부금이 큰 몫을 했다.

* 50세 된 어느 체코슬라바키아 부인이 큰 병을 앓아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 의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글을 몇 줄 읽고 나면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비오 신부에 관한 책을 손에 넣은 그녀는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습해야 할
눈의 이상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3시간 동안 그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눈이 나았다.
비오 신부는 이렇게도 작용을 했다.

* 비오 신부는 기부금으로 받은 돈 가운데 약 120억 원을 들여 수도원 옆에 병원을 하나
지었는데, 이 병원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병원으로 꼽힌다. 병상이 1,000여 개 규모
이고, 환자는 신앙과는 관계없이 누구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 1956년 5월 5일 이 병원이
봉헌되었을 때, 전 세계에서 손님들이 엄청나게 몰려 왔다. 유명한 의사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자만 해도 300명이 넘게 찾아 왔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는 엿새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병원을 축복할 때 비가 그치기를 바랐으며, 비오
신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새벽 5시에도
비는 억수같이 퍼부었다. 아침 7시에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8시가 다 되어 비오 신부가
병원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구름이 걷히고 금빛 햇살이 하늘에서 비로 신부를 비추기 시작
했다. 엿새 동안의 비가 그친 것이다.


[ 14. 비오 신부의 영적 자녀 ] p155

- 모든 사제에게는 그들을 찾는 고해자가 있듯이, 비오 신부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에게 갈 수 없는 경우, 가령 이탈리아어를 모르거나 도무지
산조반니 토론도에 갈 수 없을 때는, 아무라도 비오 신부에게 영적 자녀로 받아 주기를
편지 또는 인편의 구두로 청할 수 있었다. 영적 자녀들에 대하여 비오 신부는 매우 감동
적인 말을 했다. “ 나는 멀리 있는 영적 자녀들을 내 곁에 있는 이들보다 더 사랑하고 있소.
왜냐하면 멀리 있으면, 여기에 손님ㅇ로 와 있는 사람들보다 내 보호를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오,” 비오 신부는 동시에 두 장소에 현존하는 은사로 영적 자녀들에게 모습을 드러
내어 좋은 일을 권하거나 주의를 주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비오 신부의 이 은사를 감당
하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는 그들에게 놀라운 향기를 보냈는데, 사람에
따라서 장미, 제비꽃, 카네이션, 백합, 유향 등 여러 가지 향기로 인지되었다. 이러한 향기는
대체로 경고나 호출을 의미하는 가지고 있었다. 비오 신부가 보낸 향기는 세계 어느 곳에
서도, 때로는 비오 신부를 전혀 알지 못한 사람에게서도 인지되었다.

- (여러 가지의 사례 중 몇 가지만 메모함)
* 한번은 비오 신부의 영적 아들이 물었다. “비오 신부님, 저를 위해 기도하세요?”
“그걸 또 물어요?” “믿기는 합니다. 비오 신부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도
모든 사람과 저를 싸잡아 한목에 기도하신다는 뜻이 아니신지요?” 비오 신부가 설명했다.
“이것을 알아야 해요.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를 보고 있어요.”

* 미사 때 비오 신부의 한 영적 딸이 부활의 표징을 가시적으로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당을 나오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비오 신부에게
말했다. “그렇게 옹졸하실 줄 몰랐는데요.” 그 순간에 그녀가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을 향해
눈을 돌려는데, 거기에 부활하신 구세주의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 보였다. 당황한
그녀는 가라앉듯이 무릎을 꿇었다.

- 영적 자녀들은 아버지를 영적으로 닮아가야 한다. 아버지를 닮아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인내심으로 감당하여 고통 받으며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오 주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온 세상에 퍼져
있는 비오 신부의 영적 자녀들은 태양의 햇살 같은 사람들로서 고통과 기도와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따른 봉헌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주었다. 비오 신부는 그 태양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있었고, 우리는 언제나 그의 빛을 받고 있었다.


[ 15. 충격적인 여러 사건들 ] p166

- 누구에게나, 물론 비오 신부에게도 친구와 적이 있었다. 비오 신부가 무슨 나쁜 일을
해서 적이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구세주께서도 무슨 나쁜 일을 하셨다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미움과 박해를 받으신 끝에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
셨는가? 비오 신부는 세상을 축복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바르게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통렬히 질책한 그 역시 미움과 박해를 받아야 했다.

- (여러 가지의 사례 중 몇 가지만 메모함)
* 자동차 한 대가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언덕 위로 신부가 사는 수도원이며 병원과
다른 건물들이 훤히 잘보이는 길이었다. 승객 한 사람이 운전사에게 물었다. “위에 있는
저 큰 건물이 무언가요?” “예, 저건 비오 신부님이 계시는 수도원입니다.” 하느님을
미워하는 그 승객은 흥분해서 말했다. “카푸친회엔 그렇게 돈이 많은가요?” 운전사가
설명했다. “저 위에는 십자가의 우리 주님의 오상을 받은 비오 신부님이 살고 있소이다.
사람들은 그를 성인이라고 알고 있지요. 그분의 전구로 저 성당에서는, 그리고 온 세상
에서는 크고 작은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요. 비오 신부님은 매우 헌신적이고,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는 분입니다. 그분은 공짜로 받아서 꽁짜로 나누어 주시는 분이에요. ...
순례자들이 낸 기부금을 비오 신부님은 저 새 병원을 짓는 데 썼어요. 이런 식으로 기부
금을 비오 신부님은 일반인들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지요. 그분은 한 푼도 사사로이 쓰지
않아요. 그분은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에 빠져 이 세상에서 가장 고립되어 계시는
분이에요.” 이런 좋은 말을 듣고도 그 승객은 격분한 목소리로 비오 신부를 저주하고
비방했다. 얼마 뒤 그들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 승객은 운전사에게 비웃으며 말했다.
“며칠 안에 여기서 잔치가 벌어질 거요. 비오 신부의 장례식 말이오. 그럼 끝나는 거지, 뭘!”
그 고약한 사람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었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 또는 성인같은 사람을 결코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주는 저주한 사람에게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 교회를 미워하던 어떤 사람이 수도원 앞에 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비오 신부,
꺼져, 죽어 버려!” 그 순간 그는 쓰러져서 전신마비가 되었다. 뒤에 그는 하느님의 은총
으로 회개했다.

- 비오 신부를 적대시 했던 사람들 가운데 이미 죽은 사람들의 죽음은 참 비참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하느님은 비오 신부 편이셨다. 하느님은 비오 신부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 이러한 많은 사례는 비오 신부에 관한 여러 책에 소개되어 있다.


[ 16. 열매를 보고 그를 안다 ]
p171

- (여러 가지의 사례 중 몇 가지만 메모함)
* 산조반니에 병원을 세울 때의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아침 미사를 마치면 비오 신부의
축복을 청해 받고 편안한 마음으로 일터로 갔다. 하루는 비오 신부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을
보고 말했다. “요한네스, 용기와 신뢰를 가져요!” 그날, 현장에서 갑자기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오른쪽 눈알이 완전히 빠져나갔고,
왼쪽 눈은 중상이었으며 전신에 부상을 입었다. 3주일 뒤에 최종 진단이 나왔다. 그는
두 눈을 다 실명했다. 그는 슬픔에 젖어 병상에 누워 있었다. 성금요일에 비오 신부가
갑자기 그의 병실에 와서 웃으며 그의 오른뺨을 살짝 때려주고는 사라졌다. 그 노동자는
볼 수는 없었으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성토요일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 눈이 새로 생긴 것이다. 그의 기쁨과 의사들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비오 신부에게 갔다. “비오 신부님, 감사합니다. 뺨을 만져 주셔서요.
” “한 번 더 만져 줄까요?” 하면서 그의 왼쪽 뺨을 만져주며 말했다. “목숨을 건진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부활절 월요일에는 그의 왼쪽 눈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 거의 20년 동안 목발에 의지해 지내던 한 여인이 성당에 왔다. 그녀를 본 비오 신부가
그녀를 가리키며 명했다. “감실 안에 계시는 당신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여인이
변명했다. “어머, 비오 신부님, 전 할 수 없어요. 목발을 짚고 다닌 지가 언제인데요.”
“뭐, 할 수 없다고요? 할 생각이 없는 거지! 한번 해 보시오!” 그녀는 목발을 집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에 그녀는 나았다.

* 로마에서 온 사람이 비오 신부의 미사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비오 신부는 가시관을
썼다는데, 아무것도 안보이잖아.” 이런 생각을 이내 잊어버리고는 그는 12일 뒤에
고해소에 들어갔다. 고해성사를 마친 뒤에 비오 신부가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는 작은
소리로 아프다고 외치며 자기 이마에 손을 댔다. 손가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비오 신부가
겸손하게 말했다. “봤지, 내가 가시관을 썼다는 걸.”

* 이 이야기(보고)는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고, 비오 신부님에게 감사하며, 신앙을
확인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밝히는 필자 자신의 체험이다. 시베리아에서
오랜 포로수용소 생활을 한 필자는 그때 얻은 지병 때문에 1953년에 죽음의 늪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악성 폐수축증과 섬유종 상태에서 가끔 폐출혈(각혈)을 하곤 했는데, 의사의
말에 따르면, 성상가상으로 중증의 심근 손상까지 있었다. 그밖에 양쪽의 신장, 간장, 비장,
쓸개 및 전반적인 내외 분비선 모두가 형편없이 쇠약해져 있었다. 각혈을 한번 심하게 한
뒤로는 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다. 나는 곧 죽는다고 병자성사를 받았다. 꿈에 비오 신부를
보았는데, 그는 내가 그에게로 와야 한다고 했다. ...중략 ... 나는 성인 같은 이 사람을
죽기 전에 한 번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아주 중태였지만, 기적같이 일이 이루어져
여행길에 올랐다. 나로서는 비엔나에서 죽으나 이탈리아 어디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도착하여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라는 충고에 따랐다.
고해성사 뒤에 비오 신부가 매우 비통하게 말했다. “당신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소. 전혀
가망이 없소.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소.” 그러면서 그는 잘 새겨들으라는 듯이 내 환부를
모두 짚었다. 놀랍게도 비오 신부는 어디가 아픈지를 다 알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죽지
않을 거요!” 그는 나를 손으로 다시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고통을 내가 짊어지겠소.
당신은 건강해질 것이오.” 비오 신부는 일어나 고해소를 나갔다. 내가 마지막 고해자였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두 젊은이가 비오신부가 누운 들것을 들고 내 앞을 지나갔다.
그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 한없이 착한 마음으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한번 보시오! 죽음의 이 극심한 고통을 천천히 당신으로
부터 받아야 하오. 이제 마지막이오.” 그때부터 나는 다시 건강해졌다.


[ 17. 마귀 들린 사람들 ] p194

- (여러 가지의 사례 중 몇 가지만 메모함)
* 한번은 어떤 부모가 아홉 살 난 딸을 비오 신부에게 데리고 왔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그 소녀는 중증의 신경병 환자였다. 그 아이는 미쳐서 날뛰는 조광증에 걸려 부모를 윽박
지르며 욕설을 퍼붓곤 했다. 아무 약도 소용없었다. 수도원 화랑에서 부모의 부탁을 받은
비오 신부가 아이에게 다가가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너 여기서 뭘 해?
어서 나가지 못해?” 정신을 잃었다가 잠시 후에 깨어난 아이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비오 신부가 몰아내어 준 것이다.

* 세 아들이 마귀 들린 어머니를 데리고 산조반니 로톤도의 성당에 왔다. 그녀는 미친 듯이
날뛰고 소리쳤다. 비오 신부는 그때 성체를 분배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성당 밖으로 데려가라고
명했다. 아들들이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있자 어머니는 더 크게 소란을 피웠다. 잠시 후
비오 신부가 성체를 높이 들고 아주 세차게 말했다.“그만 해, 넌 그녀를 너무 괴롭혔어!”
그 순간 마귀는 가련한 어머니로부터 빠져나갔다.


[ 18. 산조반니 로톤도 ] p202

- 이탈리아 반도의 뒤꿈치에 해당하는 지역은 해발 1,000미터를 오르내리는 산악지대이다.
벌거숭이 민둥산에 많은 동굴들이 산재해 있는 이 지역은 일찍부터 성 미카엘 대천사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곳 해발 600미터의 산간에 산조반니 로톤도가 자리잡고 있다. 아몬드,
올리브, 키 큰 선인장 등 몇몇 종류의 나무와 관목이 드문드문 서 있는 이곳은 2만여 명의
인구가 주로 소규모의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은 전에는
루르드나 파티마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벽지였다.

- 이 작은 도시의 도심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언덕에 낡고 허름한 카프친회 수도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조그마한 ‘은총의 성모 마리아’ 순례성당이 있다. 이 성당의 입구에는 ‘하느님의
이 집은 은총의 마리아님께 봉헌되고 1629년에 개수되었음’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성당의 중앙제대는 ‘마돈나 델라 그라치아(은총의 성모님)’라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 비오 신부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이 조그마한 성당은 마침내 대단한 명소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 비오 신부는 밀려드는 순례자
들을 위해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는 야외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지금은 수도원 주위에
많은 호텔, 여관, 상점들이며 빌라와 단독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순례자들은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낡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 온 예전의 작은 성당 옆에는
대리석으로 빛나는 마리아 성당이 새로 지어졌고, 수도원 오른 편에는 오늘날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대적인 병원이 세워졌다. 그것은 비오 신부의 필생의 숙원이 가시적으로
이루어진 성과이다.


[ 19. 비오 신부의 선종 ] p205

- 비오 신부는 겸손과 순명, 기도와 보속,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고통 안에서
그에게는 사랑의 불꽃이었던 거룩한 오상을 지니고 전 생애를 혹사하다시피 살다가 갔다.
그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사랑했고, 이미 생시에 자주 눈으로 뵈었던 주님께서는 영생에
대한 그의 불타는 향수를 받아들이시어 뜻밖에도 1968년 9월 23일 월요일에 그를 천국
으로 데려가셨다. 그의 유해는 1968년 9월 26일에 성직자, 수도자, 순례자 등 6만 여
명의 배웅을 받으며 산조반니 토론도의 새 수도원 성당의 안치소에 모셔졌다.
(그는 1999년 5월에 시복되었으며, 2002년 6월 16일에 시성되었다.)

- 그는 50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미사 때마다 바친 매일의 순교를 한없는 희생정신
으로 감내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가 세상을 거쳐 간 모든 성인을 능가하는 천상 성인들의
태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하느님 가까이
에서 우리를 전구하기 위해 앞서 갓을 뿐이다. 우리도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입증하고, 언제든 죽으면 그와 하나 되어, 그와 함께 영원히 하느님을 찬미하고
흠숭하며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충실한 종 성 비오 신부님,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 후기 ] p208

-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충실하고 겸손한 종 비오 신부를 통해 50여 년에
걸쳐 얼마나 절묘하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비오 신부는
고통과 그로 인한 삶의 깊은 의미를 일깨움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으로 짊어지는 모든 고통이
하늘로부터 오는 값진 선물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비오 신부를 보내시어 50년이나 오상을 지니고 살게 해주신
것을 마음을 다하여 감사드려야 한다.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위해 우리에게 찬미와 감사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그늘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은총을 계속해서 받아 왔다.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정선된 도구였다. 우리는
이 천상 선물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경악과 깊은 감동으로 읽은 그분의 놀라운 사업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분 앞에서 세상은 머리 숙여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계시는 그분의
구원경륜을 보며 경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50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9.12.


[ 성령의 열매, 9가지 이야기 ]


- 지은이 : 보비 리드, 옮긴이 : 정찬모, 박정민, 펴낸곳 : 바오로딸/ 160p
-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 사례 이야기

[ 표지의 글에서 ]

실제 인물들의 체험담을 통해 독자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 안에서 어떻게
체험될 수 있는지,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 이 선물들을 어떻게 가꿔 나가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 서론 >




- 독서 메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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