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전 카타콤바 라살레뜨의 성모  
  성 바오로 대성당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파티마 대성전  
  시나이산 성계단 성당
아키타 (성모 순례지)  
  베네치아 성마르코 대성당 가파르나움 아일랜드 녹의 성모  
  예수성탄 성당 야곱의 우물 메주고리예 (성모 순례지)  
  갈릴레아 호수
성스테판 성당 기적의 메달 성당  
  나자렛 가나 루르드 대성전  
  에페소 터키 가빠도끼아 성모 설지전 대성당  
  성가정 성당 아빌라 펠부아셍의 성모  
  라테라노 성요한 대성전 성모승천기념 시스틴성당 캅의 성모  
성 십자가 대성당(내부) 노틀담 성당 베타니아의 성모
그레쵸 (구유성지) 주의 무덤 성당 시라꾸사의 성모
  통곡의 벽 성소피아 성당 퐁맹의 성모  
  가르멜산 베들레헴    
  예리고      
  골고타      
  콤포스텔라 성야고버 대성당      
  란치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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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사진
성지 요약 소개
 
 

성 베드로 대성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 베드로 성당은 최초 4세기 경에는 목조 건물로 축조 되었다가, 16세기에 미켈란 젤로와 브라만테에 의해서 현재의 석조 건물로 재건 되었다. 이 곳은 초 세기에 이교도의 공동 묘지로 사용되던 곳을 그 위에 우리 교회의 첫 교황인 베드로 사도의 이름 을 딴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게 되었다. 현재 교황님
께서 손 수 미사를 집전하시는 교황 제대가 이 곳에 있으 며, 지하에는 사도 베드로의 유해와 140 여분의 교황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 성당은 종교 미술 및 우리 교회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리이며, 우리 천주교의 총 본산이고 , 교회의 중심인 교황청이 자리 잡고 있으며,모든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가 보고 싶은
성당일 것이다.
 

라테라노 성요한 대성전
   
 

라떼란 성당은 4세기 경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회에 기증한 성당으로 교황의 첫 번째 개인 재산 으로 소유하 게 되었던 건축물이다. 그 후 1000년 이라는 세월 동안 교황의 칩거로 사용 되어 왔었으나, 화재로 인하여 소실 되었다가, 우르노바 5세,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에 의해 다시 재건되어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교황 제대의 왼쪽에 성체를 모시는 제대가 있는데 그 제대의 웟쪽에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쓰시던 식탁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성 목요일에 교황께서 집전하시는 만찬 미사가 이 곳 라떼란에서 거행 되어지고 있다. 바티칸이 교황좌 성당으로 정해지기 전에 교황좌에 있던 성당으로 성 베드로 성당 다음으로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성당이다.

 

 

카타콤바
   
 

초대 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기에 형성된 대부분의 카타꼼베는 순교의 피로 그리스도를 지키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다. 카타꼼베는 그리스어의 꼬이메떼리온(Koimetreion) 에서 나온 말로 안식처라는 뜻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카타꼼베는 성 갈리스도(san calixtus),성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 , 성 도미틸라 (san domitilla)가 있으며 바티칸의 위임을 받아 각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로마에 있는 카타꼼베는 대부분 신자들의 무덤으로 당시 신자들은 부활의 희망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아마천으로 싸고 무덤 문을 돌로 막는 방법을 원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노예들이 많았기에 개인 무덤을 만들지 못하였고, 땅도 제한되어 땅 깊숙히 5~6층의 통로로 꿇고 장사를 지내는 방법을 택하였다. 성 갈리스도 카타꼼베의 경우 통로의 총 길이가 약 900km 정도나 되며 300년 동안 6백만 명으로 추정 되는 사람들이 묻혔다.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카타꼼베 내부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원했었다.

 

루르드 대성전
   
 
1854 무염시태 교의 선포시 그에 대해서 교황께서는 새로운 교리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공적계시인 복음에 포함된 또 교회 전통으로 항상 믿어왔던 것을 발표할 뿐이라고 하셨다.
교회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교의를 성모 마리아께서 자신이 직접으로 추인(追認)하셨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마리아께서는 그 교의발표 4년후 1858년에 루르드에서 베르나뎃따에게 나타나시어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자기 자신을 밝혔다.
 

파티마 대성전
   
 

파티마의 어린이들에게 동정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것은 세계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여름이었다. 레이리아 교구의 작은 마을 주민들은 대개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또 소농이었기 때문에 매일 같이 들과 가축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도 양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루치아 도스 산토스는 10세였고, 그녀의 나이 어린 사촌 동생 프란치스꼬와 히야친타가 곧 그들이다. 그들은 루치아의 책임 아래 양을 쳤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들판에서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즐겨 바쳤다고 한다. 1916년 여름에는 한 천사가 몇 차례 발현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프란치스코 성당은 엘리아 수사가 설계, 건축했으며 상하 2충 구조로 되어있다.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있다. 이곳에는 성인의 생애를 28개의 장면으로 나눈 지오토(Giotto) 작품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지하에는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작은 지하성당이 마련되어 있다. 아씨시(Assisi)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인구 2만 5천 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로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성인이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돌아가신 곳으로 더 잘 알고 있다.
 

성 바오로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은 4세기 초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도바오로의 무덤 위에 최초로 성당을 세웠으나, 1823년 큰 불로 인하여 이 성당의 대부분이 전소되어, 다시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성당에서는 회랑과 정원이 있으며, 정원 중앙에 는 성인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 칼을 든 사도의 모습은 이단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보호하시는 사도를 상징하며, 참수 순교
를 뜻하기도 한다.
 

성 십자가 대성당(내부)
   
 
십자가 성당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
수난을 당하실 때의 성물들을 가져와 보존하기 위해 건립되어 이 곳에는 예수님께서 골고
타 언덕에서 달리신 십자가와, 예수님 머리에 씌어진 가시관, 못,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
하기 위해 십자가에 써 놓았던 글(I.N.R.I),토마의 손가락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성계단 성당
 
라테란의 성 요한 대 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의 왼쪽의 길 건너에 있는 건물이 성 계단 성당이다 이 성계단 성당은 예로부터 성삼일 금요일에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순례지로 지정되어 있다,이곳에 예수님이 올라가셨던 계단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를 성계단이라 부르며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있던 본시오 빌라도 로마 총독관저에서 옮겨 온 것이다.모두 28개의 대리석계단 위에는 아직도 몇군데에 예수님께서 흘리셨던 핏자국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 입맞춤을 하는 광경을 지금도 볼수있다
 

성모 설지전 대성당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라. 그 장소는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 것이다". 하셨다. 아무리 꿈이며 묵시라고 하지만 둘에게 동시에 나타나신 현상이며, 삼복 더위에 과연 눈이 내렸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으나 날이 새자 즉시 가본 결과 과연 눈이 하얗게 와 있었다. 그것도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내려져 있었다. 이 신비한 일을 교황께 알현을 청해 말씀을 드리니 교황께서도 다른 사제들과 함께 그 곳으로 가시어 8월 중에 내린 백설을 보시고 거룩한 성모님의 순결을 상징함이라 하며 경탄을 하면서 감동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이런 경로로 세워진 성당이라 처음에는 교황의 이름을 딴 티베리오 성당이라 불리워 졌고, 아기 예수께서 누우셨던 말구유가 안치 된 뒤에는 말구유의 성모 성당이라 불리워 졌으나, 로마의 다른 성모 성당과 구별하기 위하여 대 성모 성당이라 하였다. 그런가 하면 삼복 더위에 내린 백설을 기념하기 위해 성모 설지전 성당이라 불리 워 지기도 한다.

 

그레쵸 (구유성지)
 
 

그레쵸는 해발 705미터의 사비나 산 숲에 싸여있고, 이탈리아 라찌오 주,리에띠(Rieti) 시에 속해있다. 그레쵸(Greccio) 혹은 그렛쪠(Grezze)라고 불리는 이 곳은 11세기부터 알려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사라진 성안에 있었던 성 미카엘 대천사 성당의 잔재인 종탑만이 그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레쵸에서 가까운 지역에 그리스도교 역사의 중요 사건 중의 하나가 발생하게 된다. 다름 아닌 구유성지라 불리는 곳으로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가 1223년 12월 성탄날 밤, 살아 있는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실제 실시간 구유재현을 했던 곳이다. 구유성지는 깍아지른 듯한 바위계곡위에 서있으며 빡빡한 떡갈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가파르나움
   
 

가버나움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텔 훔(Tell Hum) 이 그 터로 알려졌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도시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께서는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달리 지역에 있는 호숫가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4,13).
그러니까 가파르나움은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서 서쪽으로 약 4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어촌이었다. 예수는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해치기까지 한 일이 있었던 나자렛을 등지고 가파르나움으로 가, 그곳을 제 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후 가파르나움은 20개월 동안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하였으며, 12제자를 정하였고,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를 비롯하여 많은 설교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읍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6세기에 퇴락하여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시나이산
   
 

시나이 반도에서 특히 시나이 산은 출애굽과 직접 관련되는 곳으로서 하느님의 발현 장소로 출애굽기 도처에서 언급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출애 19-24장). 모세는 그 계약의 중재자로서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고(출애 19,3;24,9) 그곳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말씀 (십계명)을 받아(출애 20,1-24,8),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자 산에서 내려왔다(출애 19,14). 그리고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40주야를 지내기도 했다(출애 24,18).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 보이실 때, 우레와 번개가 치고 산 위에 짙은 구름이 덮였으며, 그리고 큰 나팔 소리가 울러 퍼졌다(출애 19,16). 시나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하느님께서 그 불 가운데서 나타나셨고(출애 19,18), 모세에게 특별한 사명까지 주셨다고 한다(출애3장).

 

통곡의 벽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루살렘에서 가장 신성시하고 있는 장소는 “통곡의 벽”이다.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으로 솔로몬의 성전이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무너진 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제2의 성전”(515 B.C.) 구조물 중에서 로마 사람들의 예루살렘 파괴의 와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다.
최고 14 m 의 길이와 400 t 이나 되는 돌을 비롯하여 평균 1 ~ 3 t 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높이 16 m의 이 성벽은 헤롯 대왕 때의 것으로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 건축이 시작되어 약 60여년 동안이나 걸려 지은 것들이다. 이 헤롯의 성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 지렛대로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뜨렸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 아래 부분은 당시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의 우물
   
 

구약성서에는 이 우물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요한복음 4장 12절에는 야곱이 자기 후손들과 가축들을 위해서 파놓은 것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문헌상으로 이 우물의 깊이는 32미터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G. Dalman, Orte und Wege Jesu, p.228) 최근에는 실제로 측량해본 결과 50미터 가량이나 되었다.
이 우물을 중심으로 하여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 모두 기념 성전을 세웠지만 파괴되어 버렸다.1903년에 희랍 정교회에서는 십자군 시대의 성전 터를 기초로 하여 웅대한 성전을 짓기 시작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경제적인 타격을 받아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우물은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귀중한 성지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곳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고, 동시에 그 사마리아 여인을 위시해서 시카르 마을 주민들이 예수께 신앙을 고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요한 4, 1-42 참조).


 

베네치아 성마르코 대성당
   
 

성 마르코 광장에는 비잔틴 양식의 성 마르코 대성당이 세워져 있다. 82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성인 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로 옮겨졌는데 이 유해를 안치하기 위하여 832년에 건축된 것이 성 마르코 대성당이다. 이후 마르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976년의 화재 후 1063년에 착공하여 1094년에 봉헌된 것이다. 내부는 4기의 기둥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다섯 구획으로 구분하고 5개의 돔을 얹은 그리스 십자가형 설계의 비잔틴 양식의 걸작이다. 대리석과 모자이크의 풍부한 장식이 황금빛 비탕 위에 현란하여 '황금의 교회(Chiesa d'Oro)'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가르멜산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의 경계 지대를 따라 나자렛에서 20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르멜산은 높이 540m, 길이 25.6 km, 폭 6-8km 정도 되며 지명은 “하느님의 정원과 포도나무”라는 뜻의 히브리어 ‘가렘엘’에서 유래되었다. 과거에 포도밭으로 덮혀 있었던 이 땅은 비옥함으로 항상 이름이 나있던 지역이다. 일년내내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매혹적인 곳이며 예로부터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고 예언자들의 은총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 산의 정상에는 예로부터 여러 신들이 모셔졌다. 이곳에서 예언자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이 겨루었는데, 그들의 주문은 실패하고 예언자 엘리야의 기도는 응답을 받아 하늘로부터 야훼의 불이 내려 번제물이 타 버렸던 장소이다. 그리고 해안 쪽에 있는 가르멜산 기슭에는 엘리야가 아합왕의 노여움을 산후 피신했던 동굴이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성스테판 성당
   
 

성 슈테판 성당은 빈 시민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빈의 상징으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건축되었으나,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 봉헌되었다. 이때 건립된 것이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인데 지금도 당시의 모습대로 남아있다. 그 후 합스부르크가의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14세기 초 현재 모습의 고딕 양식으로 개축했다. 그러나 이 성당은 3세기에 걸쳐 부속 건물들이 건축되었기 때문에 현재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의 양식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성당의 수난은 그치지 않아 1945년에 독일군에 의해 많은 예술품과 지붕의 트러스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종전 후 다음날부터 복구가 시작되어 현재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고딕양식의 외부구조를 따르지 않고 고딕 후기의 중부 유럽에서 유행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붕은 금빛과 청색 타일의 모자이크 무늬로 되어 있어, 136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 첨탑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 성당이 그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성 슈테판 성당은 23만개의 벽돌로 지었다는 사실과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137m의 첨탑이다. 3백43개의 계단을 따라 73m까지 오를 수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빈 시가지의 모습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이 성당엔 또 무게 21t의 오스트리아 최대의 종이 있다.

 

예수성탄 성당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쯤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 인구 3만명의 도시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인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묘사된 베들레헴은 그동안 주인과 주민이 뒤바뀌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고 지금은 아랍인의 거주지인 상태이다. 구세주의 탄생지로 인류 역사에 일대 전환점을 이룬 역사의 현장 베들레헴. 이곳에 예수 성탄 성당이 있다. 이 성당 앞 광장(일명 구유의 광장)에서 위로 쳐다보면 적어도 세 종류의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정교회 십자가, 아르메니아 정교회 십자가, 그리고 프란치스코 수도회 십자가이다. 세 개의 수도원 이
성당 건물 정면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 탄생지가 자기 고유의 소유지임을 주장하는 것 같다. 예수 탄생 성당은 외관이 수수하여 마치 중세의 커다란 돌 성채처럼 보인다.

 

예리고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요르단강과 사해(死海)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250m나 낮다. 각종 과실수(특히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로, 예로부터 방향(芳香)의 성읍, 또는 종려나무성이라 불러왔다. 본래 요르단 영토인 예리코는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이 관장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BC 14세기경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예리코성이 함락되었다(여호수아 6장). 신약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시대의 예리코보다 남쪽 6km쯤에 있는 툴룰·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이다. 이 곳은 헤로데스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곳이며,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과 구원(루가 19장)이 이루어진 곳이다. 현재의 예리코는 비잔틴 시대의 터 위에 재건되었으며, 옛 예리코는 텔 에스술탄으로 20세기 초에 발굴되어 BC 5000년경의 집터[住居地] 유적을 볼 수 있다.

 

가나
   
 

가나는 '갈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더 잘 알려진 갈릴래아 지방의 가나는 매우 작은 마을이다. 나사렛에서 북동쪽 8Km에 위치한 이곳 가나 마을에 혼인 잔치가 있어 초대되신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결혼식 장면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는 듯 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이곳은 나타나엘(사도 바르톨로매오)의 고향이기도 하며(요한 21:2), 왕의 신하(고관)가 살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요한 4:46).

 

갈릴레아 호수
   
 

갈릴래아와 골란 고원 사이에 있는 큰 호수로서 구약 성서에서는 키리네트 바다(Yam Kinneret)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부른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갈릴래아 바다라고 한다. 루가는 겐네사렛 호수라고 하는데, 이는 호수 서북부에 있는 기노사르(Ginnosar) 평야에서 따온 명칭이다. 요한 복음에서는 갈릴래아 바다라고도 하고, 티베리아 바다라고도 하는데 후자는 호수 서쪽에 자리 잡은 갈릴래아 지방의 수도 티베리아에서 따온 명칭이다. 히브리어의 [갈]은 '물결'이란 뜻인데, 이 지역은 골짜기와 산지가 물결치는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어서 갈릴래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갈릴래아는 신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스라엘 성지 가운데 갈릴래아 호수는 가장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간직한 곳이다. 또 빼어난 경관 못지않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
.

 

골고타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 위치 했던 곳에 오늘날 기념 대성전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흔적 이 담긴 곳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곳 기념 성전을 '예수의 무덤성전', 또는 '예수 부활기념 성전' 이라고 부르고 있다.
골고타란 말은 '해골' 또는 '머리털이 없는 두개골'을 의미하는 아라메아어 '골골타'나 히브리어 '굴골레트'가 희랍어 식으로 와전된 발음이다. 그러나 라틴어로는 동일한 의미로 갈바리아 라고 말한다. '갈바리아' 또는 '골고타'라고 칭하고 있는 이 곳이 오늘날에는 성벽 안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예수시대에는 성벽 밖의 불모지였고, 주로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터키 가빠도끼아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족으로 280킬로미터쯤 떨어진 네브쉐히르 도시 일대의 광활한 고원 지대를 통칭 가빠도끼아(Cappadocia)라 한다 서기 17년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서기14-37년 재위)는 가빠도기아 왕국을 멸하고 로마제국의 속주로 삼았다. 이 지역은 신약성서에는 딱 2번 나온다(사도 2,9: 1베드1,1). 서기 30년 5월경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사도가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할 때 가빠도기아에서 순례 온 유대인들이 있었다 한다(사도 2,9). 그런가 하면 1세기 말엽에 씌어진 베드로 전서 서두에서 지금의 터키 여러 지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전하는데, 그 가운데 가빠도끼아도 등장한다(1베드 1,1).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 신학과 영성이 약진한 곳은 아시아도, 콘스탄티노플도. 에페소 주변 아시아도 아니고, 놀랍게도 터키 중부의 외진 곳인 가빠도기아 속주였다.
 

나자렛
   
 

나자렛은 예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이다. 베들레헴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주의 천사가 이르는 대로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그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 나자렛이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나사렛을 떠나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나자렛이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크리스챤 이라는 말도 히브리어로는 '노쯔리',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나자렛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아키타 (성모 순례지)
   
 

일본 ‘혼슈(本州)’ 북서부에 있는 아키타(秋田)현은 도쿄에서 약 600㎞ 떨어진 인구 110만명의 광업도시다. 화산이 만든 산악지대,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일본 ‘3대 미림(美林)’ 중 하나로 꼽힌다.
아키타 성체봉사회 수녀원 경당에 모셔 놓은 성모마리아상은 1963년 일본 아키타시의 조각가 와카사 사부로씨의 작품으로 1975년부터 1981년까지 101회의 눈물을 흘렸는데, 이 때의 목격자는 2천여명에 이르고 눈물이 흐르는 모양과 시간, 그리고 양 등은 그 때마다 달랐으며 많은 양의 눈물이 발끝까지 흘러 고이기도 하고, 얼굴 뺨에 물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이 눈물의 일부를 아키타 대학과 기후대학의 법의학 교실에서 분석한 결과 "인간의 체액, 즉 눈물이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메주고리예 (성모 순례지)
   
 

메주고리예는 1992년 3월2일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동쪽에 위치한 치트룩에 속한 여러 마을 중 하나이다. 본당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마을(메주고리예, 비야코비치, 수르만치, 비오니카, 밀레띠나)중 메주고리예가 가장 큰 마을이기 때문에 본당도 이마을 이름을 딴 것이다. 메주고리예는 슬라브어에 기원을 둔 “산과 산사이의 장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은 해발 200m에 위치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곳으로 포도와 담배, 과일을 재배하였다. 이곳에는 약 4,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으며, 헤르체코비나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들에 의하여 사목되어 지고 있다. 1981년 6월24일 성모님의 첫 발현이 있은 후 메주고리예 발현 24년동안 전 세계에서 4천만명의 순례자들과 더불어 각국의 많은 추기경과 주교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순례를 왔었다. 그들은 메주고리예 순례를 하면서 자신들의 거룩한 성소에 희망과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었음을 체험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라살레뜨
   
 

프랑스의 알프스 지방인 라살레뜨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산들과 흰 눈이 쌓여 있는,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조용하고 외롭게 보이는 지역으로 남쪽 프랑스 가르가스 산기슭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라 살레뜨'란 하느님을 멀리하는 세상에서 많은 충격을 받은 어머니 마음을 들어낸다는 뜻이다.
라 살레뜨의 관할 주교는 성모님의 발현과 우물에 의한 병의 치료를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령하였고, 모든 증인과 증거를 검토한 후에 주교는 성모님의 발현이 사실이며 믿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 살레뜨의 성모 선교회'를 세워 "너희들은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 고 하신 성모님의 명령을 이행토록 '교황 비오 9세'는 '라 살레뜨'의 성모 발현을 인정했으며 그의 후계자 '레오 13세'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산 위에 대성당을 건립하였다.
오늘날 " 라 살레뜨"는 성지는 물론이고, 세계 도처에 "작은 라 살레뜨" 성지가 개발되어,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사랑의 눈물로 회개의 길로 들어 서고 있으며, 수많은 순례자들은 마리아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다.

 

스페인 콤포스텔라 성야고버 대성당
   
 

이 도시는 9세기부터 속죄를 위해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의 최종 목적지로서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세계 3대 기독교 성지 중 하나였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루르드, 포르투갈의 파티마와 더불어 세계 3대 가톨릭 순례지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서 그 옛날처럼 걸어서 순례 행로를 일주하며 기도 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속주인 히스파니아에서 포교하다가 별 소득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교한 사도 성 야곱의 무덤을 9세기초 수도승 페라요가 이곳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퍼지자 수 세기 동안 수 백만명의 순례자가 순례 행로를 따라 이 소도시를 물밀듯이 오갔다. 별 하나가 사도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니아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묻힌 장소를 계시했다는 속설에서 ‘별의 들판’, 즉 콤포스텔라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무덤 발견 이후 성 야곱을 봉헌하기 위한 성당이 지어졌으며, 대성당은 1078년 착공돼 1128년경에 완성됐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유서 깊고 아름다운 대성당에는 장인 마테오의 작품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최고 걸작품으로 통하는 ‘영광의 문’이 있다. 이 건물의 주요부는 11∼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이 계속돼 현재는 대체로 바로크 양식이 지배적이다.

 

아빌라
   
 

아빌라(Avila)는 Spain의 수도 마드리드(Madrid)에서 북서쪽으로 약 8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인구 약 2만5천명의 조그마한 도시이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시로 아직도 로마식 성벽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도시를 둘러 싸고 있다. 중세적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빈센트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 그리고 13세기부터 르네상스까지의 조각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궁전이 있다.
성녀 대 데레사의 탄생지인 아빌라시를 '성인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아빌라는 해발 1,131m의 높은 위치로 옛날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높은 성벽이 시가지를 빙 둘러싸고 있음) 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간에 300년 동안이나 공방전을 계속한 곳이며 파괴와 수리를 되풀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된 때가 1099년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400m요, 높이는 12m이다.

 

에페소
   
 

에페소는 스르미나(오늘날 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울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을 타고 흙이 씻겨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에페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희라브이 장군 Lysimachos는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오늘날 발굴되는 에페소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기원전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자, 로마의 실라(Sylla)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서기 14년 치세)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의 에페소는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의 노고로 발굴된 것이다.

 

란치아노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다른 곳들, 즉 볼세나, 시에나, 페라라 등과 더불어 란치아노는 이태리 및 전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성지이다. 란치아노가 속해있는 아브루찌 지방은 지금까지 많은 성인들을 배출했으며 성지들도 많이 위치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그러니까 8세기 중의 어느 날 아침,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한 수사 신부가 미사를 드리면서 예수님께서 성체 성사에 실제로 현존하심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변화를 위한 축성을 끝낸 순간, 그는 갑자기 면병이 살아있는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외양이 살아있는 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놀란 신부는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어서 미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곧 뛰쳐나가서 이 소식을 란치아노 시 전체와 인근 지방들에 알렸다. 이 기적이 일어난 성당은 성 론지누스에게 봉헌된 초라한 시골 성당이었다. 성 론지누스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군의 백부장이었다. 이 곳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의 성체 기적은 성체 성사에서의 예수님의 현존에 대하여 한 수사 신부가 가졌던 의심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셨다.


 

기적의 메달 성당
   
 

성 빈첸시오 바오로와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악 수녀에 의해 세워진 자비 수녀회에 소속된 이 소성당은 파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도 많은 순례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당 내 제대 위편 벽에는 성모의 첫 번째 발현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정면에는 메달과 같은 모양의 성모상이 있다. 우측에는 두 번째 발현 모습을 조각한 성모상이 있으며, 그 밑에는 사망 후 57년이 지나 시복을 위한 시실 발굴 당시(1933)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라부레 수녀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

 

성가정 성당
   
 

성가정 성당은 로렛토의 성 가정 성당은 성모 마리아께 봉헌 되어진 가장 국제적인 성당이며 성모 신심의 심장부이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나자렛(Nazaret)에 있던 성모님의 집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집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지상과 지하로 되어져 있으며, 지하는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 부분으로 지금도 나자렛의 성모영보 성당에 보존되어있다. 지상 부분의 성가 담벽은 로렛토에 옮겨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십자군이 팔레스티나에서 철수하던 1291년에 천사들에 의해 집 전체가 크로아티아(Croatia)의 일리리아(Illiria)로 옮겨 졌다가 1294년 12월 10일 로렛토로 옮겨졌다.

 
 

아일랜드 녹의 성모
   
아일랜드 녹(Knock)의 성모 발현은 많은 발현 가운데 아무런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1879년 8월 21일 화요일 아직도 해거름 밝은 빛이 채 가시기도 전 비오는 저녁 '녹'의 조그만 성당 남쪽 박공지붕 앞에 성모님이 2시간 이상 발현하셨다. 오늘날 '녹' 순례지는 교회의 전적인 인정을 받고 있으며 전세계 대표적 마리아 순례지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것으로 거듭 교회의 인정을 받고 있다. 사실 '녹' 순례지는 바오로 6세를 포함해 최근의 3분 교황으로부터 많은 특전과 특별한 영예를 받고 있다. 1979년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녹' 성모발현 100주년 기념하셨다. "1879년 8월 21일그 은총의 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이 부자유스런 수많은 환자들과 고난 받는 사람들이 천주의 모친께서 우리를 천주 성자께 인도해 주시리라는 신뢰 때문에 치유되었고, 믿음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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