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주의 독서 메모 ] 19권~ 24권

처음의 [ 금주의 독서 메모 /001~010 ]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이전의 [ 금주의 독서 메모/ 011~018 ]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금주의 독서 메모 019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2.07.

[ 님은 바람 속에서 ]

- 발렌타인 L. 수자 지음, 우제열 옮김/ 114p
- 지은이 프로필 : 1946년 인도 다르바 출생, 1968년 봄베이 대학졸업, 예수회 입회,
1974년 선교사로 파견, 1980년 상지대학 신학부 졸업,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 등


[ 책 표지의 글에서 ]
매일매일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마십시오.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하루라는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매일 그것을 기억에 떠올리십시오.
일상적인 삶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1. 사랑과 친절 ]

- 우리가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친절이다. 종교와 종교심은 다르다.
종교심은 인간 누구에게나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동정심과
온유함이다. 이는 곧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지이다.

- 사랑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면 풍요로운 기쁨을 맛보게 된다. 자신을 비우고
조건 없이 사랑하면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는다. 투명한 마음으로 행동할 때 몸은
지쳐도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찰 것이다.

- 의무감으로 하는 행위에서는 사랑을 느낄 수 없다. 그렇지만 친절함과 온유함으로
행하는 사랑은 아름답고 행복을 가져다준다.

-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자. 우리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행동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 친절은 위대한 힘이다. 친절보다 더 큰 힘은 없다. 늘 친절하게 대하면 그 친절은
언젠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존경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나도, 다른 사람도 똑같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시이다.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용서가 있다.

- 행복을 나르는 사람이 되자.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너그러운 사람, 친절한 사람,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자. 그런 사람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때 자신도 행복해지고 언제나 활력이 넘치게 된다.

[ 2. 기도 ]

- 기도에 필요한 것은 말이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심이다.
그러한 신뢰만 있다면 기도는 틀림없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 하루를 시작할 때 기도하는 것처럼,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고요한
시간(15분 정도)을 가지자. 매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 우리는 항상 하느님과 함께 있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하느님의 힘을 받는 것,
우리가 영원을 향하여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빨리 이것을 터득해야 한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잡념을 털어 버리자.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기 위해 평온한 마음을 가지자. 생활이 타성에 흐르지 않도록 하자.

- 마음의 성장을 위하여 무엇을 하면 좋을까? 누구에게나 가능하고 효과 있는
방법, 그것은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을 잊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우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찾고 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지지 않도록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 기도의 효과는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우기까지 시간이
걸리듯 기도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짧게라도
기도로 시작하자.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게 될 것이다.

- 병에 걸렸을지라도 결코 비관하거나 낙담하지 말자. 먼저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초조하게 서두른다 해서 빨리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침착하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부터 시작하자.

-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구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말자. 언젠가 때가 되면
그것이 무엇보다 좋은 체험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해결 방법과
우리의 해결 방법이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는 마음을 비울 필요가 있다.

- 우리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므로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는가?

- 사람은 성장하면서 욕망이나 불안, 두려움으로 순수한 마음과 투명한 마음을
잃어간다. 우리는 항상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크게 빗나간 마음을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면 치유하기가 힘들다.

- 화해의 성사(고해 성사)는 신앙생활을 완성하기 위한 은총의 성사이다.
화해의 성사는 빗나간 일상생활에서 새롭게 돌아오게 하고, 이 새로운 시작은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힘을 준다.

- 하느님의 은총에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우리의 삶은 기도가 되고 그분의 은총은
더욱 충만해진다.

[ 3. 대인 관계 ]

-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평화를 지닌 사람이다. 나를 반대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 하루를 마무리 지을 때 싫었던 일, 실패했던 사건만을 되새기지 말자. 그것은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견딜 수 없게 되고 다른 사람까지도 불쾌하게 한다.

-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비판에 동요하는 사람은 완성의
길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주님과 굳게 결속되어 있다면 비판은 오히려
격려가 될 것이다.

- 다른 사람의 기쁨을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 주는 사람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나누기는 쉬어도 기쁨에 동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사람의 속마음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누구나
알 수 없다. 자신의 내면을 언제나 바르게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사람들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없다.

-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

-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실수가 없도록 하자.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는 육체의 상처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 따뜻한 격려의 말은 사람들을 강인하게 하고 자신감을 준다. 누군가를 인정해
주는 것은 그를 살려 주는 것이며 삶의 윤활유가 된다. 반대로 자만하고 자랑하는
것은 마찰의 요인이 된다.

- 결혼생활도 부르심이다. 주님의 축복을 받은 훌륭한 가정에서 사제, 수도자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처지대로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 가정에 평화가 없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말할 수는 없다. 가정은 작은
사회이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자. 가정에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없으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이것이 가정의 파괴이다. 가정의 평화는 부부가 함께 만들어
가려는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 가정은 휴식처이다. 함께 산다는 의미의 ‘주(住)’는 사람(人)과 주인(主)자가
합쳐서 된 글자이다. 가정이 편안한 휴식처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자. 주님과
더불어 사는 곳은 편안함이 감도는 진정한 휴식처인 것이다.

- 가정은 사회의 출발점이다. 가정이 안정되지 않으면 사회 또한 발전할 수 없다.
부부의 삶이 원만하지 않으면 자녀의 건전한 성장에 방해가 된다. 부모의 권위가
상실될 때 그 가정은 균형을 잃고 무너지고 만다.

- 자녀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기
예수를 봉헌한 마리아와 요셉처럼 나의 자녀도 하느님께 봉헌할 마음을 가져야 겠다.

-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반응에 너무 마음 쓰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상대방에게 좌우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부모는 어두운 가정을 만든다.

[ 4. 매일의 생활 ]

- 우리가 걸어야 할 마음의 여정은 참으로 험난하다. 인생이라는 나그네 길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길을 잃고 만다.

- 인생이란 나그네가 걷는 마음의 여행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 길에서
잠시 머무는 것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하며 굳건히 걸어야 한다.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단순하게 살아가자. 우리의 여행이
어둠이 아닌 밝은 여행이 되어야 하겠다.

- 매일매일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자.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하루라는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매일 그것을 기억에 떠올리자. 일상적인
삶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관대함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나날을 기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활기 찬 모습은 영광스런
하느님의 모습 그 자체이다.

-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가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가 중요하다. 누군가
대단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헛된 것이다.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 작은 일에 충실하자. 진지한 마음으로 산다면 매일이 충만할 것이다.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이웃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불안과 초조함을
더해줄 뿐이다. 남을 꾸짖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일 뿐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전연 도움이 안 된다.

- 빨라 뜨거워지고 쉽게 식는 사람은 마음의 성장이 더디다. 거센 태풍은 하룻밤에
모든 것을 휩쓸어 가지만 잔잔한 미풍은 마음을 평화롭고 기쁘게 한다. 태풍과
같은 삶이 아니라 산들바람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아가자.

- 어려움이 직면하게 될 때 결코 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그 어려움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도 되고 작게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적극적으로 사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

- 평범한 생활에 길들여지면 더 이상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자. 게으른 곳에는 발전이 없다.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기 시작한다.

-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자.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자.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 매일의 삶 속에서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지 끊임없이 살피자. 무엇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가에 따라 흘러가는 사회 속에 파묻히든가 아니면 참된 성장에
마음을 쓰게 된다. 사회 풍조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려서는 안 된다.

- 물질주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부패시킨다. 물질에 중독되면 자기중심적이
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짓밟게 된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결국은 마음을
빈곤하게 만든다.

- 회심이란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낡은 습관에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 변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당신의 인생을 실패로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겠다.

[ 5. 생 명 ]

-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놋그릇처럼 다듬고
매만져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 촛불은 주위를 환하게 밝히면서 소멸되어 간다. 우리의 삶도 아무런 조건 없이
내어주고 받을 기대를 하지 않는 촛불과 같아야 한다.

-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의 가치는 그 무게를 측량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베푼 사랑의 행위는
금전으로 계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학력, 지위, 신분, 재산 등은
이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오늘
하루가 그리고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삶을 습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아침에 눈을 뜬다는 사실은 하나의 기적이다. 오늘 하루의 생명에 대해
감사드리자.

[ 6. 하느님과의 만남 ]

-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별을 보기 위해서는 등불을 꺼야 하는 것과도 같다.

- 십자가는 사람과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즉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종적인 것이라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횡적인 관계임을 보여준다. 하느님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가운데 십자가는 만들어지며, 그때 비로소 사람은
하느님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 하느님과의 만남은 체험한 사람밖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을
만나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변화될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더욱 온유하게 되고
인생은 밝고 즐거워질 것이다. 긴 안목을 가지고 고요한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자.

- 단식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좋은 수단이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감각의 극기를 해야 한다. 몸가짐의 절제와 들음의 절제, 혀의 절제,
그리고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깊이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 인생이란 하느님과 만나는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자기중심적인 생활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이 아니다.

- 하느님은 먼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마음의 방향을 바꾸면 각자의 마음에
하느님을 맞이할 수 있다. ‘회심’에는 지금까지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심,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회심,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관심을 갖는
회심 등 여러 양상이 있다. 어느 것 하나 제외됨 없이 모두 필요하다. 사람과
하느님께 마음을 열도록 하자.

- 개울물은 얕은 곳에서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깊은 곳이 이르면 잔잔해진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볼 때 비로소 하느님도 찾고 싶어진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치 않으면 만날 수가 없다. 사람은 사치스럽게 되면 신비를 잃고 만다.

-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너무 친숙해져서 마음에 머물 수 없다.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워지는 것이다.

[ 7. 신 앙 ]

- 그리스도교는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소박한 신앙이다.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모두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라고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신앙으로 당신은
변화해 가는 것이다. 주님께 간구하며 살아가면 실패하지 않는다.

- 성서는 읽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이다. 하느님의 소리는 당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들려온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에 기울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자.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헛된 신앙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언제나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말씀을 듣고 스스로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신앙은 듣는 사람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상대방이 꼭 들어주리라 신뢰하며
부탁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대해서도 그렇게 소박한 믿음이 필요하다.

- 순수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투명한 마음,
맑은 영에서 나왔기 때문에 힘이 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 돈이라는 것은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돈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다. 돈에 의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살아간다.

-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신앙을 지닌 사람들의 힘이다.

-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는 사람은 매우 관대하게 된다.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하느님을 잃고 하잖은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모래 위에 발자국’이라는 작가 미상의 영시(英詩)가 있다. “.....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다. 하나는 하느님의 것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것이었다. ..... 그리고 뒤돌아보았더니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였다. .....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결코 네 곁을 떠난 적이 없다. 모래 위에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는 것은 네가 몹시 괴로워할 때 내가 너를 품에 안고 갔기 때문이다.”

-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데살 5, 16-18)

[ 8. 은총 ]

-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다.

- 우리 몸의 구조를 보면 누구라도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동이 없다는 것은 무관심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항상 오묘하고 심오한 신비를 주시하면서 살아야 한다.

-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은 은총이다. 그러니 스스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도록 하자. 현재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며 앞으로의 나날 또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할 하느님의 선물이다.

- 시간도 생명도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무상으로 받았으므로 자유롭게, 조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자. 그렇게 할 때만 은총은 꽃필 수 있다. 기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키워가는 것이다.

- 매일 당신이 만나는 사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구하오니 오늘 하루
내가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아침마다 기도하도록 하자.

[ 9. 깨달음 ]

- 사는 길은 남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마음에 새겨진 큰 깨달음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다. 보이는 존재보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훨씬 더 크다.

- 사람을 억지로 묶어놓을 수도 있고 강제로 복종시킬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는 없다. 악한 생각을 없애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 죽음은 두렵지만 결코 무서운 것은 아니다. 하루를 살면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진 것이다. 죽음은 누구나 맞아들여야 할 숙명이므로 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 주님, 제가 당신을 앞질러 가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뒤를 걷지 않게 하시며,
언제나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20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2.14.


[ 영원의 길목에서 ]

- 지은이 김성배 신부/ 127p
- 가톨릭신문 연재 '복음 생각(1999.10.10.~2000.3.5.)' 내용 20편 묶음

[ 머리말에서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과 함께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을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무정하게 흐르는 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더 완전하게 하느님과 함께 산 시간일수록,
더 철저하게 사랑으로 산 인생일수록 영원한 생명을
더 찬란하고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



[ 1. 일생은 혼인준비 ]

- 복음 : 마태오 22,1-4 (혼인잔치의 비유)
- 우리의 세상살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것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일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우리의 일생은
탄생으로 시작하고 죽음으로 끝난다. 이것이 우리에게 살아가라고 주어진 시간이다.
우리에게는 극히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고 세상에서 오직 그 시간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 죽음이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혼인예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일생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혼인을 준비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주어진 모든 시간들, 그 안에서 겪는 모든 사건들, 수행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혼인을 준비하는 것이다.

- 사람을 하느님과 갈라서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죄 뿐이다. 죄는 인간을 하느님과
갈라놓고 사람들 사이도 서로 갈라놓는다. 죄는 본질적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행동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거부하거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죄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계시다.

- 사랑은 주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만족과 불만을 돌아보지 않고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기 된다.

- 사랑으로 산 시간, 사랑으로 한 말, 사랑으로 한 생각, 사랑으로 한 행동만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받아 주시는 가치 있는 예물이 된다. 사랑으로 살지 않은
모든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고 사랑으로 하지 않은 모든 행동은 무가치한 행동이다.

[ 2.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 ]

- 복음 : 마태오 22,15-21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인 자유의지를 하느님께 선물로 받았다. 자유의지는
사람이 하느님께 받은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이 그렇듯이 자유의지도 선물이며 동시에 시험이다. 어떤 선물이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면 유익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사용하면 해롭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기간은 자유의지를 시험받는 기간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따를수록 완전해지고 선해지고 거룩해진다.

-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침략자인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어쩔 수 없이 바치고 있었다. 가장
완고한 죄인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고
답변하신다. 이는 로마황제에게 바쳐야 할 세금보다 하느님께 바쳐야 할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세금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세금은 자유의지라는
하느님의 최상의 선물을 가지고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듦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상실하게 한다. 사람이 하느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하느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 3.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 ]

- 복음 : 마태오 28,16-20(제자들에게 사명 부여)
- 사람은 일생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걸어 인생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께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하느님 없이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도록 인간의 길을 비추시고
인도하신다. 사람이 하느님을 버리면 그 길은 갈 수 없는 길이다.

-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피조물을 통해서 채우려
하게 된다. 즉 명예에 집착하면 할수록 교만을 키우게 되고, 재물에 집착하면 할수록
탐욕을 키우며,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 자극적인 쾌락을 원하게 된다.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노에가 되어서 더 깊이 자신을 타락시키게 되고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허무와 절망의 심연이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성부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을 구원하라고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 성자께서는 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생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을 가르치고
보여 주셨으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으로써 인간이 갈 수 없었던 길을 갈 수 있는
길로 만드셨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기쁜 소식이 인류에게 선포된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은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보다 더 큰 의무가
없고 미신자들에게는 복음을 들어야 할 권리보다 더 큰 권리가 없다. 사람의
운명이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 4. 자신을 알면 겸손해 진다 ]

- 복음 : 마태오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 꾸짖음)
- 우리가 바르게 살면 살수록 우리의 생명은 고귀해 진다. 바르게살기 위한
전제조건은 바르게 아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바르면 우리의 행동도 바르게 된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바르게 알아야 할 대상은 우리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사람이 잘못 살게 되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고, 자신을 모르면 모를수록 교만해진다. 하느님은 지혜는
겸손하고 단순한 영혼들만을 비추어 준다.

-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에겐 은총을 거두신다. 교만은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는
하느님의 빛을 차단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한다. 자기 안에서는
장점만을 보고 남에게서는 허물만을 본다. 모든 공은 자기에게 돌리고 모든 탓은
남에게 돌린다. 교만은 이렇게 사람의 정신을 눈멀게 만듦으로써 진실을 볼 수
없게 한다.

- 우리는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커지고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높아지며,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더 고귀해진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23,12)

[ 5. 죽음을 준비하는 삶 ]

- 복음 : 마태오 25,1-13(열 처녀의 비유)
- 인생을 사는 지혜는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데 있다.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원하는 데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가 놓여 있다.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서 흘러가는 오늘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운명을 더 행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써야 하는 시간이다.

- 사람이 이 세상의 시간에서 내세의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죽음이다. 죽음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죽음은 우리가 산
일생전체가 사실 그대로 낱낱이 드러나고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정의가 일생을 산 결과에 따라 각자에게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 가운데
하나의 운명을 결정해 주시는 순간이다.

- 죽음이 찾아오는 데는 순서가 없다. 젊음도, 건강도, 재산도,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매일을 그 날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최선의 길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라”(25,13). 늘 깨어 있는 사람은 항상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이고, 언제나 죽음에 대비한 준비를 하면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 6. 두 개의 인생 길 ]

- 복음 : 마태오 25,14-30 (탈렌트의 비유)
-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랑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일도 사랑으로 행하면 비범하고 위대한
일이 되고, 비범하고 위대한 일도 사랑 없이 행하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인생의
가치는 오래 살고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있다.

- 세상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은 사람들이 사랑을 버리고 이기적인 삶을 택하는
데 있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자신만을 배타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자기명예만을
추구하고 자기이익만을 돌보며 자기만족만을 구한다. 사랑은 모든 선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고 이기주의는 모든 악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 탤런트의 비유에서 주인에게 받았던 돈을 배로 불려서 되돌려줄 줄 알았던 종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일생을 산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이용해 이익을 만들어 내길 기대하신다.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이익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증가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더 완전한
사랑으로 살게 되며 우리의 인생은 더 크고 더 많은 선을 생산해 냄으로써 풍요로워진다.

- 현세에서 하느님께 받은 시간과 소유일체를 이기적인 자기만족만을 위해 허비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하늘나라의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된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사랑의 나라이다. 자기를 버리고 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얻는다.

[ 7. 심판의 기준은 사랑 ]

- 복음 : 마태오 25,31-46 (최후의 심판)
-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은 돌아 올 수 없는 과거로 사라지면서 끝난다.
이렇게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과거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시간의 한계 안에서는 무의미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영원을 위해 존재한다. 영원 안에서만 비로소 시간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따라서 사랑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본래 창조된 대로 사랑을 가지고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만을 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한 마디로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은 선행이 되고 사랑을 거역하는 행동은 죄가 된다.

- 사랑이 부패하면 이기주의가 된다. 이기주의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으로,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쾌락주의 자로 타락시킨다. 이기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불행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자기의 이기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는 냉혹한
사람이 된다. 인생을 사랑으로 산 사람은 하느님께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고,
인생을 이기주의로 산 사람은 하느님께 영원히 단죄 받게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도모해야 합니다”(고린토1 10,21).

[ 회개로 준비하는 성탄과 대희년 ]

- 복음 : 마르코 13,33-37 (깨어 있어라)
- 예수님의 탄생 2000년을 경축하는 대희년이 다가 왔다. 성탄절 전야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성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여는 것으로 대희년이 시작된다.
성탄의 준비도 대희년의 준비도 핵심은 회개에 있다. 마음의 진정한 회개 없이 맞는
성탄은 의미가 없듯이 진실한 참회의 정신으로 준비하지 않고 맞는 대희년은
의미가 없다. 희년의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기쁨만이 완전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만이 기쁨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다.

- 죄는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버리고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는 기쁨을
주는 악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찰나의 기쁨을 맛본 대가는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영혼의 타락이다. 죄로 인해 잃은 것이 무엇이고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죄보다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길은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죄는 하느님을 버리고 악을
선택하는 것이고, 회개는 죄를 버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시며 용서를 베푸실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 회개를 애타게
기다리신다.

- 주님께서는 “그 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주님의 경고는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다. 대림시기는 이 절박한 호소를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때이다.

[ 9. 생명의길 죽음의 길 ]

- 복음 : 마르코 1,1-8 (세례자요한의 설교)
- 인생의 모든 여정은 오직 한 번 지나가는 길이고, 인생의 모든 순간은 오직
한 번 주어지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걷는 모든 길은 마지막 길이고, 우리가
사는 모든 시간은 마지막 시간이다. 매일 매시간은 우리에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이고, 마지막 기회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게
써야 하는 시간인지를 알 수 있다. 인생에는 결코 잘못된 길에서 방황할 시간이 없다.

- 사람의 인생에는 걸어야 할 길과 걸어서는 안 될 길이 있다. 이 두 개의 길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각자가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선택
하도록 하셨다. 생명은 빛이고 죽음은 어둠이다. 생명은 사랑이고 죽음은 증오이다.
생명은 자유이고 죽음은 예속이다. 생명은 기쁨이고 죽음은 고통이다. 하느님은
생명이시다. 하느님의 생명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하느님의 생명은 빛이고 사랑이고
자유이고 기쁨이다.

- 이기주의자는 이기적인 자기사랑을 위해 하느님을 버리는 사람이다.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결별을 선택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결합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결별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초래한다. 이렇게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거두는 수확은 어둠과 증오와 예속과 고통뿐이다.

-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의 계명에 비추어서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생명의 길인지
죽음의 길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회개로써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는다. 죽음의 길을 버리고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이다.
생명을 주러 오시는 주님은 회개하는 마음으로만 맞을 수 있다.

[ 10. 빛과 어둠 ]

- 복음 : 요한 1,6-8,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 사람이 자신을 알면 생명을 얻고 자신을 모르면 생명을 잃는다. 그러기에 자신을
아는 지혜만큼 사람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지혜도 없다. 자신을 아는 지혜는 사람이
가장 애착하는 자기만족을 버려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죄는 사람의 생각이
접근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감지하는 감각이 살아 있을 때 죄를 식별하는
감각도 살아 있게 된다.

- 마음의 눈이 하느님의 빛으로 밝혀질 때, 사람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빛 속에서 자신을 볼 때는 자기의 비천함을
보기 때문에 교만과 자애심을 버리고 겸손과 자기 이탈의 정신을 얻게 된다. 동시에
하느님을 볼 때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기 때문에 하느님을 더 완전히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된다. 자신을 아는 삶은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 눈은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건강한 눈은 빛을 보는 것이 즐겁지만 병든 눈은
빛을 보는 것이 괴롭다. 그래서 건강한 눈은 빛을 반기지만 병든 눈은 빛을 피한다.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죄다. 죄로 병든 마음의 눈에는 하느님의 빛이
괴로움을 준다. 모든 죄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과 자애심이다.

- 죄인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하느님의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다. 죄의 어둠 속에 잠겨 자기의 모습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볼 수 있는 빛을 주러 오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이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회개하여 생명을 얻고, 이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단죄를 받는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과연 악을 일삼는 자는 자기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요한3,19.20).

[ 11. 하느님의 종과 욕망의 노예 ]

- 복음 :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예고)
- 선행은 감춰 둘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 반면에 드러내서 알리려고 하면 그
아름다움을 잃는 것이 선행이다. 자기 스스로 드러내서 알리는 선행은 선행의 가치를
잃게 된다. 선을 행하는 것 못지않게 선을 행한 후에 그 선행의 가치를 잃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기의 선행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면 선을 행한 다음에 즉시
그 선행을 잊어 버려야 한다.

-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악을 맛본 사람은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종이 될 때는 일체의 욕망을 지배하는 왕이 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오히려 욕망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된다.

- 성모님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완전히 지배하여 하느님의 뜻에 복종시킨
하느님의 완전한 종이다. 완전히 겸손하고 순결하고 가난한 성모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완전한 거처가 되신다. 우리 모두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하여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 드리도록 하자.

[ 12.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사랑 ]

- 복음 ; 루카 2,22-40(성전에서 아기 예수님 봉헌)
-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힘이 있는 강한 사람이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힘이 없는 사람이다. 참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사랑의 송가에서 첫째 특성을 참는 것이라고 말한다. “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코린1 13,14).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조건 없이 내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희생위에만 꽃필 수 있다. 사랑의 크기는 희생의 크기로 측정된다.

- 사랑은 강하다. 사랑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 사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은 모든 포기하고 모든 것을 주게 한다. 한 마디로
사랑의 능력은 무한하다.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무한히 사랑하시는 능력이다.

- 예수님은 지상생애의 대부분을 예수님, 성모님, 성요셉으로 이루어진 성가정에서
보내졌다. 성가정은 완전한 가정생활의 모범이다. 성가정에는 완전한 행복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이었고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더 할 수 없이 완전한 행복이 성가정을
채우고 흘러 넘쳤다. 그 것은 성가정에는 하느님께서 계셨고 따라서 완전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가정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었다. 성가정에는 완전한 부부
사랑과 완전한 부모사랑과 완전한 자녀사랑이 있었다.

[ 13. 버리고 떠나야 하느님을 만난다 ]

- 복음 : 마태오 2,1-12 (동방박사들의 방문)
- 눈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마음의 상태는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마음이
순결하면 눈빛도 순결하고, 마음이 가난하면 눈빛도 가난하고, 마음이 겸손하면
눈빛도 겸손하고, 마음이 온유하면 눈빛도 온유하다.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악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게 된다.

-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남도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교만한 사람은 남도
교만하다고 생각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남도 탐욕스럽다고 생각하고, 불결한
사람은 남도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마음에 비추어서 남을
판단한다. 사람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를 잘 알아본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하고 탐욕스럽고 불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모습을 감추시고
겸손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 동방박사들은 하느님을 뵙는 기쁨과 감격에 떨며 무한한 경의를 가지고
예수님께 합당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한다. 왕을 상징하는 황금과 하느님을 상징하는
유향과 구속을 위한 고통을 상징하는 몰약이 그것이다. 동방박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인생의 여정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지고의 기쁨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랑이라는 황금과 기도의 향과 희생이라는 몰약을 예물로 준비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 일체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

[ 14. 인생은 추억이다 ]


- 복음 : 요한 1,35-42 (첫 제자들)
- 사람의 인생은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온 세월의 추억들이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서
과거로 살아진다.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은 과거로 사라지지만 그 시간을 살아온
삶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는다. 기억은 사람이 자기의 삶을 갈무리하는
창고이다. 사람이 이 기억이라는 창고를 어떤 추억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사람이 기억을 선한 추억으로 채우면 선한 인생을 살게 되고 악한
추억으로 채우면 악한 인생을 살게 된다.

-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받은 은혜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고 상처는 기억하지
말고 잊어야 한다. 그러나 상처는 잊질 못하고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의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은혜를 잊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은혜를 모르는 불의한
사람이 된다. 남에게 받은 상처는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려야 한다. 상처를
기억하고 있으면 증오심을 품게 되고 증오심은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 상처를
기억하지 않고 잊을 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는 마음에서 가장
거룩한 사랑이 솟아난다. 사람이 일체의 모욕과 상처를 잊고 감사할 것만 기억
한다면 마음속에 언제나 선과 사랑과 아름다움만이 있을 것이다.

-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것은 사랑의 시대이다.
이 사랑의 새 시대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처럼 자기를 잊고 자기를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인간의 구원이 있고 자유와 해방이
있고 지복이 있다.

[ 15. 시간과 영원을 위한 사람의 운명 ]

- 복음 : 마르 1,14-20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심)
- 사람은 세상에서 시간으로 계산되는 일생을 산다. 시간은 변화를 계측하는
단위이다. 세상에서는 늘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에서는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시간이 흐르지만 영원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모든 시간이 동시에 끝없이
계속된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의 일생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생을 마칠 때 사람은 일생동안 이룩한 변화를
가지고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이 때 일생동안 자기를 어떻게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 사랑이야 말고 사람이 소유해야 할 진짜 재산이다. 이 사랑이라는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서 사는 인생만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지나가고 사라지지만 사랑과 사랑의
업적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부터 온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랑을 지닐 수도 없고 사랑을
늘릴 수도 없다.

- 사랑을 상실한 사람의 마음은 교만과 탐욕으로 채워져서 거칠고 냉혹하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사람은 시간과 영원에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한다는
지극히 복된 운명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이 축복 받은 운명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는 두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이제까지 갈 수
없는 나라였지만 이제는 갈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교만과 탐욕을 버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들어간다.

[ 16. 말이 갖는 힘 ]

- 복음 : 마르코 1,21-28 (회당에서 악령을 쫓아내심)
-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된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따라서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기 있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의 말은 단순하고 솔직하나 위선적인 사람의 말은 교활하고 가시적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깊이 헤아리고 멀리 내다보나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피상적이고
즉흥적이다. 이기주의자의 말은 거만하고 냉정하나 자기를 비운 사람은 겸허하고
너그럽다.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의 말은 고상하고 신중하나 자제할 줄 모른 사람은
경박하고 수다스럽다. 이렇게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은 말을 통해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 사람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다. 선한 사람의 말은 남을 선하게 하는 힘이 있고
악한 사람은 남을 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람의 말에 진정한 권위와 생명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의 성덕이다. 같은 내용의 말을 하더라도 누가 그 말을 하느냐에 따라
감명 받는 정도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은 같지만 그 말에 담겨 전달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그 사람의 말은 감화시키는
더 큰 권위와 힘을 갖게 된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감복시키는
절대적인 권위와 사람을 성화시키는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음깊이 감복하게 하는 권위를 느꼈던 것은 그 분의
말씀이 그 분이 지닌 완전한 성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었기에 하느님의 완전한 거룩함이 담겨있었고, 그래서 듣는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마음이 악한 사람은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죄를 버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 17. 사랑과 미움 ]

- 복음 : 마르코 1,40-45 (나병환자를 고치심)
-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결점은 이기주의에서 나온다. 이기주의는 사랑의 결핍이다.
그래서 이기주의는 사람이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만든다. 사랑은 내가 손해를 보고 희생되고 괴롭더라도 남을 이롭게 하고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 사랑은 받기를 바라지 않고 주기를 원하며 주기 위해서 기쁘게
자기를 포기한다.

- 이기주의는 사람의 마음에서 사랑을 고갈시키고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같은 사랑에
대립되는 감정을 불어나게 한다. 사랑은 선이고 악은 사랑의 부정이다. 그러기에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이다. 사랑은 남이 행복
해지기를 바라고 남의 행복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미움은 남이 불행해 지기를
바라고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한다.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게하고,
미움은 남을 해롭게 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

- 사람이 의인인지 죄인인지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다. 말은 사랑에서
나올 때는 남을 이롭게 하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되지만 미움에서 나올 때는 남을
해치는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된다. 말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은 의인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말을 절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지만, 이 사람은 자기의 기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이
사실을 널리 알린다. 그래서 예수님은 활동을 못하시고 외딴 곳에 머무셔야 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기쁨만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함으로써 은인
이신 예수님께 피해를 입히고 만다.

[ 18. 육체의 병과 영혼의 병 ]

- 복음 : 마르코 2,1-1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의
생명이 있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이지 생명을 잃고 난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애착 중에 가장 강한 애착이 생명에 대한
애착이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갈망 중에 가장 강한 갈망이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잃는 것보다도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포기한다.

- 사람의 영혼은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욕망의 사슬에 묶여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육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보다 하느님을 상실하게 함으로써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비할 데 없이 더 심각하게 우리의 생명을 해친다. 육체의
죽음은 일시적인 고통을 줄 뿐이지만 영혼의 죽음은 영원한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손상시킨 사람의 생명을 다시 완전한 것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이제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생명이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완전한 것으로 회복된다.

-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환자 한 사람을 치유시켜 주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은 병의 치유를 청하는 이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 것은 육체의 병보다 영혼의 병이 더 비참한 것이고 따라서 병의 치유를 청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회개하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교만과 탐욕과 육욕을 버리고 겸손하고
가난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다.

[ 19. 무가치한 단식과 가치 있는 단식 ]

- 복음 : 마르코 2,18-22 (단시논쟁 – 새것과 헌 것)
- 사람에게 유일하고 참된 행복은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하므로 써 하느님의
영원한 지복을 누리게 되는 데 있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사람도 완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의지와
결합하므로 써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더 완전히 순종할수록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와 더 완전히 결합하게 된다.

-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을 버리고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삼중의 욕망을 따르게
되면 타락하게 된다. 타락한 사람의 의지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고 약해져서
욕망의 노예가 된다. 그러면 사람은 배타적으로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교만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게 만든다. 탐욕에 빠진 사람은
마음이 인색해져서 받기만을 좋아하고 베풀 줄 모른다. 육욕은 요구를 들어주면
줄수록 더 강해지고 그래서 더 자극적인 쾌락을 요구하게 된다.

- 복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실천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제자들이
단식할 때가 아니지만 당신의 수난이후부터는 제자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으로 하는 고행은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결하게
만들지만 사랑이 없이하는 고행은 오히려 교만을 더 키우게 된다. 고행은 속죄와
성화를 위해 필요하지만 고행의 가치는 고행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고행을 하는
사랑의 크기로 결정된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주는 것은 사랑이다.

- 기도도 선행도 고행도 하느님께 받은 특은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
“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희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코린 13,2-3)

[ 20. 기도는 영혼의 휴식 ]

- 복음 : 마르코 2,23-3,6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음,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심)

- 우리 안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나’가 서로 대립하여 싸운다. 하나는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영적인 나’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욕망을 따르려는 ‘육적인 나’이다. ‘영적인 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보고 듣고 알고 맛보고 행하고자 한다. ‘육적인 나’는 자기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만을 보고 듣고 알고 맛보고 행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욕망은 서로 상반되는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욕망을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고,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자기 욕망을 버려야 한다.

- 우리의 인생은 ‘영적인 나’와 ‘육적인 나’ 사이의 투쟁이다. 이 투쟁의 결과에
따라 사람은 죄인이 되기도 하고 성인이 되기도 한다. ‘영적인 나’가 ‘육적인 나’를
이기고 승리하면 사람은 성인이 되고 ‘영적인 나’가 ‘육적인 나’에게 패배 당하면
사람은 죄인이 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사람에게 ‘영적인 나’와 ‘육적인 나’사이의 투쟁은
영원한 운명이 걸린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그리고 동시에 싸움은 하느님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겹고 지루한 싸움이기도 하다.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 기도는 영혼의 휴식이다. 일에 지친 피로한 육체가 휴식으로 다시 힘을 회복해야
하듯이 ‘육적인 나’가 죽기 위해서 필요한 유혹과 시련과 역경과의 투쟁으로 피로해진
영혼을 기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내야 한다. 기도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무한한 빛과 사랑의 바다이신 하느님께 잠겨 드는 것이다. 기도로
사람의 정신은 하느님의 빛으로 밝혀지고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뜨거워진다.
사람이 기도라는 빛과 사랑의 바다에 잠기게 되면 자기를 더 완전히 버리고 비우고
낮추게 된다.

-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굶주린 제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고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치유시켜 주신다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대목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비록 안식일을 지키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는
기도였기에 이 사람들의 기도는 죽은 기도였다. 굶주린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동정할 줄
모른 냉혹한 마음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 볼 수 없다.


- end.

 


[ 독서 메모 소회 ] <독서 001~020>

- 3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취미생활의 일부로 틈틈이 모아 두었던 신심서적
(테이프, CD 포함)들이 거실의 책장에 가득하다. ‘그동안 바쁘다, 시간이 없다’라는
핑계로 정독보다는 필요에 따라 선별적으로 부분적인 내용만을 잠시 읽는 정도였다.
저 많은 책들을 한번쯤은 다 읽어 보아야 할 텐데 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중에
좋아하던 술을 자제하면서 시간이 많아 졌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 온 것 같다. ‘답게’ 살기 위해서 보고 싶었던 책들을 정독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독서중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서 메모(밑줄 긋기)를
하면서 읽도록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책들은 별로 나이티를 안내고 싱싱하다.
그 안의 내용은 시대의 흐름에 용어 등이 조금은 변하기는 했으나 본질적인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 ‘한 주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 것을 목표를 세우고 시작이 반이라 여기면서
한 권의 책을 책장에서 뽑아 2020년 10월초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 달이면 4권,
일 년이면 50권, 10년이면 500권을 읽게 되는 셈이다. 처음으로 다시 읽은 책은
“그대가 성장하는 길”이었다. 마음에 와 닿거나 중요하다는 생각되는 내용은
밑줄을 그어 둔 후에 PC로 워드 작업(hwp)을 하여 저장해 두었다. 이후 도서 선정은
그날 읽고 싶은 것으로 순서 없이 눈과 손이 가는 데로 골라 읽어 갔다.
3개월이 지난 지금 20권의 책을 읽었으니 약간 속도위반을 해버렸다.

- 신심 서적에는 해외에서 저명한 인사들이 저술한 책들이 많은 편이다. 때로는
신학적이고 묵상적인 수준으로 한참 생각하며 읽어야 할 내용들도 있다.
지은이가 외국인인 경우 외국어를 우리말 화하는 옮긴이에 따라 이해하기가
어렵거나 쉬운 면도 있어 보인다. 지은이가 한국인인 경우는 서로 원만한 대화를
하듯이 느끼게 되어 책에 몰입되고 읽는 속도도 빠르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도
했다. 한 권의 책에는 작가 일생의 삶을 통한 경험과 지혜들이 담겨 있는데
독서자는 이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나 지침을
얻는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견문을 넓히듯 책들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의 여행을 하면서 ‘답게’ 사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2021.1.10 wonpetro




 

금주의 독서 메모 021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2.21.


[ 수동의 영성 제3의 인생 ]

- 지은이 이제민/ 257p
- 수도자를 대상으로 피정지도하면서 강의한 내용 엮음
- 지은이 프로필 : 1980년 사제서품, 1986년 독일 뷔리츠부르크 대학 박사학위,
1989~1997년 광주 가톨릭대학 교수, 2002~2005년 독일 함브르크 교포사목 등

[ 표지의 글에서 ]
제1의 인생은 자신의 힘에 의존한 시기이고
제2의 인생은 힘의 한계와 좌절을 체험하는 시기이고,

제3의 인생은 그 힘을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와 내적 충만을
누리는 시기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완전해지고 자비롭게 된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가치가 있고 능동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동적인 인간은 게으르고다고 평가될 뿐만 아니라 발전과
성공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은 능동이 지닌 한계와 좌절을
겪으면서 수동의 영성에 눈을 뜨게 된다. 수동의 영성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일어
나게 한다. 사랑이 일어나게 하고 용서가 일어나게 하고 화해가 일어나게 한다.
이제 우리는 수동의 영성에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 들어가며 ]

-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곳에 감추어져 있는 영성,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영성,
우리는 바로 그 영성에서 태어났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책에서 제3의 인생이라고 표현하였다. 제1의 인생이
능동의 영성에 바탕한 것이라면 제2의 인생은 능동의 영성이 지닌 한계를 체험하는
시기이고, 제3의 인생은 수동의 영성에 바탕을 둔 인생이다. 이 인생의 과정을
성서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살펴보고, 그에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제3의 인생을 제시하고자 한다.

[ 제1장 말하도록 내버려둬라 ]

- 말하는 사람은 종처럼 ‘말하는 법’이 아니라 ‘말하도록 내버려두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때에만 하느님의 말씀이 내 입에서 나올 것이다. 생각과 행동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인이 되어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시도록 나를 내놓아야 한다.

- 천국은 수동의 자세로 임할 때 도달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우도가
함께 천국에 들 수 있었던 까닭은 수동의 자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에
나를 맡기나이다라고 온 실존을 내맡기는 순간 그들은 천국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 ‘오소서, 성령이여’ 기도문에 나오는 동사들을 보면 ‘ 우리 마음을 채우소서’,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소서’, 모두 수동형태이다.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수동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능동적 힘만이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자기 힘으로 기도하려할 때가 많다.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기 위해서이고, 사랑과 평화와
일치도 모두 하느님의 뜻에 맡기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에게 그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다.

- 하느님도 내 힘으로 찾고, 나도 내 힘으로 찾고, 사랑도 내가 하고, 용서도 내가
하고, 수도생활도 내가 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채울 수 있고, 그럴
때에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열정을 낸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쳐서 포기하고
원망하고 실망하고 좌절을 체험하면서도 그 원인을 모른다. 이제 수동의 기도를
바쳐보라. 말하도록 내버려둬 보라.

[ 제2장 세 번째 인생 ]

- 인생은 수동으로 시작하여 수동으로 막을 내린다. 태어나는 것도 수동이요 죽는
것도 수동이다. 수동에 자신을 맡길 때 인생을 가장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배운다는 것은 삶을 수동에 맡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태어남에 맡기고, 고통에 맡기고, 늙음에 맡기고, 죽음에 맡긴다. 그런데 이러한
맡김과 수동의 삶은 세상에 태어나 주의 환경과 만나면서부터 방해를 받기 시작한다.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면서 태어날 때의 자연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인생을 ‘힘에 의존한 인생’ = ‘첫 번째 인생’ 이라 부른다. 그러다가 힘의
한계와 좌절을 체험하면서 이 힘에 대항하는 ‘두 번째 인생’이 펼쳐지는데 이 힘에
대항하는 가운데 인생이 끝날 수도 있고, 그 힘을 극복하면서 ‘세 번째 인생’을 펼칠
수도 있다. 세 번째 인생의 모습은 첫 번째 인생이 펼쳐지기 전의 모습으로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 제1, 제2, 제3의 과정은 인생의 긴 역사에서 순차적이며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매순간 심리적으로 또는 실존적으로 반복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은 매순간 힘과 힘의 좌절, 그 극복을 체험하지만 그것을 자기
삶으로 온전하게 연장시키지 못할 때가 많다. 두 번째 인생을 종식시키는 사건(회심)이
한 사람의 인생의 역사에 크게 획을 긋는 사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획을 긋는
사건도 사실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면 매순간 반복하여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그 힘을 죽일 때 드러나는 곳이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 오로지 몸을 던져 나를 맡길 때, 모든 것이 자기
에게 일어나는 일일 뿐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천국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자신을 내맡길 때
우리는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저 사람들을 용서
하여 주소서” 였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또한 돌 세례를 받고 죽어가면서 “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외쳤다.
인생은 맡기는 데서 완성된다.

[ 제3장 하느님께 귀의한 인생 ]

< 1. 작은 아들 >
- 우리가 자비롭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옳게 판단하고 옳게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돌아온 작은 아들(루카 15,11-32/되찾은 아들의 비유)은 이제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 2. 사랑도 용서도 화해할 능력조차 없는 인간 >
-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수동의 삶을 살 때 서로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상대에게, 상대를 하느님께 맡길 때 비로소 사랑이 이루어지고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있다. 나의 몸에 먼저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때 상대
또한 자기 몸에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용서도 화해도 마찬가지이다.
용서하려 하기보다는 용서를 느끼게 해주어라. 화해하려 하기보다는 화해를 느끼게
해주어라. 나를 보면서 그 사람의 몸에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게 해주어라.
그것은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수동의 삶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신뢰
해야 한다. 자연은 우리를 사랑하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한다. 자연이
내게 사랑을 느끼게 하듯이, 하느님께서 내게 사랑을 느끼게 하듯이, 어머니가 내게
사랑을 느끼게 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남에게 사랑을 느끼게 하는 몸이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그 사랑 안으로 자신을 안내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 인간이 자기 힘으로 용서와 사랑을 찾을 수 없듯이 악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세상의
악을 없애려고 힘써 노력하는 데도 악이 근절되지 않는 까닭은 인간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평화는 세상의 악을 모두 제거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악의
씨앗을 없애지 않으면 세상이 금세 악으로 뒤덮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럽고 악해 보이는 것은 저마다의 잣대로 세상의 악을 판단하고 흑백을 가리려
하는 인간의 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편 저자의 다음 조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 시편 37,1-8 내용

- 인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좌절하고 지옥을 경험하였다. 남을 지배하려는
힘을 바다에 처넣어라. 힘으로 사랑하고 힘으로 하느님을 믿으려는 생각을 바다에
처넣어라. 어린아이가 되어라!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 제4장 제3의 인생을 산 인물 ]

< 1. 모세 >
- 모세의 일생은 40년씩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처음 40년은 파라오와 함께한
이집트에서의 생활이고, 그 다음 40년은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와 시작한 미디안에서의
생활이고, 마지막 40년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과 함께 사막에서 보낸 시기이다.
처음 40년은 힘을 행사하는 모세를 보여주고, 두 번째 40년은 인간의 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체험하는 모세를, 세 번째 40년은 하느님의 힘에
귀의한 모세를 보여준다.

< 2. 기드온 >
- 구약에 나오는 판관 기드온 이야기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해방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막강한 군대의 힘이 아니라 싸울 의지조차 없는 무기력한 군사 삼백 명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다. 기드온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할 때만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폭력으로 이루어 낸 평화는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그래서 폭력까지도 불사하지 않는 현대인이 배워야 할 영성이다. 해방을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교만한 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자기 능력(학력, 재력,
인기, 성공 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인기와 온
세상을 호령할 듯한 권력과 명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부의 우상, 힘의 우상, 명예의 우상, 학력과 인기의 우상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 3. 바오로 >
- 바오로의 경우 첫 번째 인생과 세 번째 인생은 개종으로써 확연히 구분된다.
개종하기 전 바오로는 율법의 힘에 의존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힘은 바오로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었다. 힘에 의존하던 바오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체험하게 된다. 이 기간이 모세처럼 40년은 걸리지 않았지만 눈이 멀어 있는 동안
바오로는 좌절을 겪었다. 얼마 후 바오로는 세례를 받으면서 눈을 뜨게 되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까지 보던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다가
이제 새로운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전에는 율법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았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며 자기 안에서 늘 활동하시는 성령도 함께 느끼게 된다.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이 말에서 우리는 세 번째 인생을 시작한 바오로를 강력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게 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사실은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내가 발견해야 하는
본래의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살고 계시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겼기 때문이다.

< 4. 베드로 >
- 베드로는 힘의 논리에 의해 주님을 따라 다녔다.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그분의 힘을 믿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믿었던 하늘나라의 힘이 세상의 힘에 의해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 힘이 다름 아닌 ‘무능’임을 알았을 때 그들은 실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며 죽음으로 일생을
끝맺으셨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 베드로는 고백하고(첫 번째 인생), 그러다가 배반하고 좌절하고(두 번째 인생),
다시 일어서서 고백한다.(세 번째 인생) 그러나 시간적으로 세 번째 인생이 시작되고
나서 베드로의 인생이 줄곧 세 번째 인생으로 펼쳐진 것은 아니다. 또 좌절하고 또
일어선다. 그러면서 그는 목표로 나아간다. 베드로의 위대성은 힘에 의존한 자신의
삶에 실망하면서 자기 힘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데에 있다.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세 번째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 5. 토마스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 >
-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한다.
이 말을 하는 토마스에게서 강한 ‘인간의 힘’이 느껴진다. 토마스도 베드로처럼
자기의 힘, 이성의 힘, 논리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다. 토마스가 이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한다면 이는 자기 힘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그에게 두 번째 인생이 지나가는 시기였으며 세 번째 인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세 번째 인생은 평화의 삶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째
인생을 열어주시면서 평화를 기원하신다. 그리고 세 번째 인생에는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가 넘쳐흐른다.

-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들도 베드로와 마찬
가지로 주님의 맥없는 죽음을 보고 실망하여 시골로 내려간다. 희망을 걸었던
분에게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에게
‘배반’으로 나타난 것이 그들에겐 ‘떠남’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힘에 근거하여 볼 때
십자가처럼 무력한 것은 또 없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좌절한 이유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골로 향한다. 여기서 그들은 인생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낙향의
시간은 좌절의 시기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새롭게 체험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무력한 그리스도가 인류의 희망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제5장 세 번째 인생 – 성령의 인간 ]

< 1. 마리아 >
- 인간의 힘이 처음부터 작용하지 않는 원초적인 인생을 산 마리아를 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한 여인이라고 칭송한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은총의 여인이다.
그녀에게는 세 번째 인생만이 있을 뿐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총애를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하고 인사한 데서
볼 수 있듯이 마리아는 늘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사는 은총의
여인이었다.

- 마리아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자라도록 ‘내놓아야’한다. 성령의 힘으로
자라도록 ‘내놓아야’한다. 마리아의 ‘내놓는 마음’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는 행위를 통하여 아기의
미래가 자기 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있음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리아의 손을 벗어나 하느님의 아들로 자라야 한다. 마리아의
삶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내맡기는 존재로 표현된다. 이 수동의 삶은 무엇보다도 아들의 운명을 지켜보는
모정에서 극에 이른다.

< 2. 요셉 >
- 모든 것이 남자의 힘으로 결정되고 지배되던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의 힘이나
권위를 한 번도 내세우지 않고 모든 영광과 명예와 찬사를 아들과 마리아에게
넘겨준 요셉의 행위는 성령의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활동이다. 그것은
마리아가 처녀로서 아기를 낳은 것과 같은 성령의 행위이다. 성령에 의해 남자
로서의 힘을 희생시킨 요셉은 ‘예수의 집’이다. 자기의 힘을 다 죽이고 말없이
마리아의 뒷전으로 물러난 요셉의 그 ‘무력함’은 세상을 구원할 성령의 힘이
솟아나는 궁전이다.

- 참된 영성은 사람의 힘, 남자의 힘을 꺾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고
자신을 맡기는 데서 나온다. 무능하고 왜소하고 ‘안 된’ 요셉의 영성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의 ‘숨은’ 영성을 밝혀 주는 빛이다.

[ 제6장 예수의 인생 ]

< 1. 수동의 삶 >
-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넘겨지시기 전과 후의 진술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넘겨지시기 전에는 예수께서 행동의 주체로 나타난다. 그분은
‘선포하시고’, ‘말씀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신다’. (능동태 동사) 그러나 잡히신
후에는 모든 일들이 예수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분은 원수에게 ‘넘겨지고’,
‘배반당하고’, ‘체포되고’, 대사제에게 ‘끌려가고’, 빌라도에게 ‘넘겨지고’,
때리면 ‘맞고’, 못 박으면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한다’.(수동체 동사) 그분의
인생은 이렇게 수동태 동사에서 잘 드러난다.

-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는 십자가상 말씀은 이런 수동적 일생을 종합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씀은 “내가 하고자 한 바를 다 이루어냈다”는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내게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
나게 했다”는 수동적 의미를 지닌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자신의
능동적 행동이 아니라 수동적 행위(수난)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셨다.

- 수난은 인생의 완성이며 목표이다. 우리 인생은 수난의 의미를 깨닫고 동참할
때 완성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믿는 이유도
예수의 인생 마지막에 전개된 수난사 때문이다. 수난을 당하시는 그분의 얼굴에서
우리가 희망해 왔던 것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 2. 어린양 >
- 수동의 인생은 무엇보다도 ‘어린양’의 운명에서 잘 드러난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우리는 세 번씩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하고 외치며,
영성체 직전에 다시 한 번 더 사제가 성체를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하고 외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주신다.

- 요한복음에서 (세례자)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에서 세상의
죄가 씻겨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거기에서 세상이 구원되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 진정한 평화,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인류는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라야 비로소 세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린양처럼 처형당한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위한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저 평화를
원하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이다. 우리가 어린양이 되기를
거부하면 세상에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 제7장 세 번째 인생을 위한 복음 ]

<1. 수동의 복음 >
- 세 번째 인생은 수동의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번째 인생은 예수께서
겨자씨에 비유하여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에서 잘 드러난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그것은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겨자씨가 땅에 뿌려진다.(수동태)
겨자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씨앗이 스스로 뿌려질 곳을 택하여 뿌려지는 법은
없다. 바람에 날리던, 사람이 밭을 갈고 뿌리든 씨앗이 뿌려지는 데는 씨앗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 자연은 더 아름답고, 더 성공하고, 더 인기 있고자 하는 그런 야심을 모른다.
자연은 애써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인위적 노력도 하지 않는다.
자연은 겸손해지려는 하거나 자신을 포기하겠다는 노력도 모른다. 자연은
“아무런 욕심과 야심, 아무런 불안도 없고 기를 쓰고 얻어내고 도달하고 성취하려는
느낌”(드 멜로)이 없다. 찬미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냥 일어
나도록 하는 것, 이러한 ‘수동’적 자세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근본이 된다.

- 수동의 인간, 놔둠의 인간이 될 때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받아들일 때 나는 수동의 인간이 될 수 있고,
내 편에서 스스로 수동의 인간이 될 때 하느님은 내 안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나로서 사시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모든 것이 일어나게 해주소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이 내 안에
일어나게 해주소서. 나를 당신께 맡기게 해주소서.”

< 2. 놔둠의 영성 >
- 인생의 행복은 억지로 만들 수 없다. 그대로 ‘놔두는 영성’을 익힐 수 있어야 한다.
남을 내식으로 재단하려 들지 말고 그가 그일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두는 법을 배워라.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왜 그렇게 떨어졌느냐, 왜 그렇게 굴러다니느냐
묻지 않듯이 인생도 굴러가게 내버려 두어라. 세상을 살다보면 일이 잘 풀릴 때도
있고 잘 안 풀릴 때도 있다. 나는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상대는 고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놔둠’은 남이 하도록 ‘놔두는’데서 무르익는다. 남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않고 가는 것도 막지 않으며, 무엇보다 남이 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 남이 자라도록 해주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한 후 피조물을 억지로
키우려 하지 않고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사과를 따먹는 것조차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차원을 넘어 ‘하느님의 놔둠’에 근원을 두고 있다.

- 놔둠은 신뢰 가운데 나오는 덕중의 덕이다. 우리는 살면서 하느님께서 세상사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그 관심을 보이기
위해 일일이 관심을 보인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인간은 하느님의 무관심
(침묵)에 감사하며 거기에서 들려오는 소리, 인간에게 귀 기울이는 그분의 침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놔둠은 무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행위이다. 놔둠의
영성을 사신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밀과 가라지, 옳고 그름의
구별은 하느님께 맡겨라.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30) 가리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가리는 것을 하느님에게 맡길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뿐 아니라 서로 평화를
나눌 수 있고, 서로 신뢰하고 이해하며, 위로하고 사랑하며 살게 된다.

< 3. 즐김의 영성 >

- ‘놔둠의 영성’을 창조물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창조물을 즐기는 법을 익혀야
한다. “꽃 한 송이, 다른 이의 손, 애완동물, 추운 날 한 잔의 커피, 오렌지 ....
오렌지 까는 법을 익혀라. 오렌지의 색과 모양을 즐기고, 오렌지의 냄새를 즐겨라.
그것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따뜻한 현존을 느끼게 해준다.... ” (멕기니스)
- 현대인은 모든 것을 가만히 놔두고 있는 그대로 즐기는 법을 차츰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자기 나름대로 어떤 목적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느라 그럴 수 있다.
건강이라는 목적을 정해 놓고 등산을 할 때 산을 즐길 수 없다. 산은 즐겨야 한다.
그래야 산에서 만나는 모든 창조물이 우리에게 의미를 줄 것이다. 자신을 맡기는
자만이 자연을 즐길 수 있고 인생을 즐길 수 있다.

[ 제8장 수동의 존재 ]

< 1. 수동의 인생 >
- 인간은 수동에서 시작하여 수동으로 끝이 난다. 생로병사는 우리 삶이 수동임을
알려주는 원초적 현상들이다. 생의 첫 순간을 우리는 기억조차 못한다. 울음도,
기쁨도, 모든 것을 남에게 맡긴 채 세상에 태어났다. 늙음은 어떤가.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것은 인생은 내 힘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왔다가 가는 과정으로 수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늙음은 인생을 종합하여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늙음이 우리의 인생을 완성시켜 주는 것이다.
병은 우리의 삶이 수동으로 이루어졌음을 피부로 실감하게 해준다. 아무리 자의식이
강하고 활동적인 사람이라도 병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자기 몸을 의사와 간병인에게
맡기게 된다. 그리고 죽음은 아직 우리에게 멀리 있는 듯 하지만 사실 우리는 처음
부터 죽음의 상황에 내맡겨진 채 태어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 죽음의 순간,
우리의 숨결은 태어날 때처럼 자신을 영원한 수동에 맡기게 된다.

- 능동에서 수동으로 옮겨가는 영성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도달해야 할 영성이다.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고 매사에 적극적이지 못하면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수동의 영성을 쌓기란 쉽지 않다. 능력에 근거한 실적만을 따지는 각박한
세상에서 자기 삶의 기본이 수동태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생 낙오를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수동으로 태어나고 수동으로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능동의 힘을 죽이고 수동으로 내놓는 데서
완성된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2. 듣는 존재 >

- 수동의 자세는 듣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며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듣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으니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귀를 기우릴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며,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 세상의 모든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생명을 받아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나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하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우리는 고귀한 품성을 일깨워 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잘 듣고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 3.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
- 바오로는 “세상에서 창조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에페 1,4) 바오로에 의하면
우리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께서 뽑아
주신 존재, 하느님의 사랑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존재이다.

- 듣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한다. 자신을 비워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상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금 예언자를 필요로 한다면
저마다 자기 소리만 높이는 자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 인생은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맡기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 4. 보이는 것을 보다 >

- ‘보는’것은 ‘보이는’것을 보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는가. 보이는 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을 보는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본다는 말은
보이는 것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는 사람이 일하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까닭은
그들이 당신과 함께 보고 들으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만이 그분처럼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으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

< 5. 지켜보는 눈을 빼라 >

- 지켜보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아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살피기
위해 지켜볼 수도 있고, 바리사이처럼 트집을 잡기 위해 지켜볼 수도 있다. 내면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지켜볼 뿐이다’. 자유로운 자는 남을 지켜보지
않는다. 남을 지켜보는 자는 상대가 어떤 행위를 하든지 간에 트집 잡기 마련이다.
“윗자리에 앉으면 윗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교만하다. 아랫자리에 앉으면 아랫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위선이다”하면서 트집을 잡을 것이다.

- 지켜보는 눈은 집착의 눈이다. 집착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강한 욕심, 상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강한 소유욕이다. 이런 욕심으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이런 욕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남의 흠만 보이고 자기의 마음 또한
상처를 입게 된다. 지켜보는 눈으로는 자비롭게 세상을 볼 수 없으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께서 과감하게 말씀하신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애꾸눈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7) 지켜보는 눈에서는 자비의 빛이 발하지
않는다.

< 6. 감사하라, 찬양하라 >

- 감사의 마음이 사라질 때 삶은 방향을 잃고, 마음의 평화는 사라져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상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신도들에게 편지를 보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감히 감사해 보라고. 그러면 감히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고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 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

- 미사 때 사제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찬미하고 감사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로
소이다”하면서 모든 신도를 희생과 감사의 삶으로 초대한다. 수동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수동의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 하느님을 찬양할 줄 안다. 가난을
찬양하고, 병을 찬양할 줄 안다. 예수께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신이 하신 그 행위가 실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신 행위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병자를 치유하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이를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당신은 그 일이 곧 아버지의 일임을 아셨다.

[ 제9장 수동의 존재 –하느님 ]

<1. 전능하신 수동의 하느님 >
- 우리에게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분이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저를 당신 손에 맡깁니다”하고 수동적으로 처신할 뿐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당신 기분 내키는 대로 인간을 다루시면서 인간의 청을 들어
주시거나 거부하시는, 그래서 우리의 삶을 당신 마음대로 조종하고 간섭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오해이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놀랍게도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 사람들이 생각하는 관념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을 전능이라 하고, 우리가 제시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하느님은
인간의 조정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일 뿐 실제로는 전능한 존재인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병을 고칠 수 있고, 고통을 제거시켜 줄 수
있기에 전능하신 것이 아니라 하실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전능하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기에 인간이 원하는 것을 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
하느님이 전능하신 것은 전능에 대한 인간의 사고를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수동의 전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느님은 스스로 행하시는 바 없이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다. 하느님의 전능은 인간의 사고와 기도의 지평을 넘어서 있다.

- 하느님의 전능을 인간이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느님처럼 자기를 숨길 수 있을 때,
수동적 자세를 취할 때에 인간은 전능하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폭군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을 수 있는 ‘전능’에 대한 믿음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에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전능에 자기를 완전히 맡긴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 2. 비폭력 >

- 폭력을 힘으로 극복하려 할 때 그곳에는 힘의 악순환이 있을 뿐이다. 오직 비폭력
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다. 비폭력은 수동의 영성을 통해 드러난다. 희생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희생이 수동의 영성에서 나온 행위이기 때문이다. 폭력 앞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 때가 많다. 폭력에 대항하는 칼을 뽑아
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수동의 영성만이 세상의 폭력을 제압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몸소 보여 주셨다.
원수들 손에 넘겨지실 때, 재판을 받으실 때, 십자가에서 처형되실 때, 단 한 번도
그분은 당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평화를 보장해 주셨다.

- 광야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힘(부, 명예, 권력, 인기 등)을 사용하라고 유혹하는
악마를 이기셨다. (마태 4,1-11) 인기와 권력과 재물과 명예 따위는 추구하면 할수록
허무함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숱한 경험과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다. 인간은
쉽게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유혹은 인간의 힘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힘에 자신을
맡길 때 극복할 수 있다. 성령이 예수님을 인도한 곳은 광야였다.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체험하는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힘을 얻게 된다. 유혹에 대한 승리는 무력(無力)과
비폭력의 승리이다.

< 3. 먼저 찾아오시는 하느님 >
-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심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하느님 편에서 우리 인간을 찾으시며
또 인간이 당신을 찾을 수 있도록 놔두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놔둠’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도록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며 평화를 느끼게 하신다.
찾도록 놔두고, 사랑하게 놔두고,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놔둘 때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찾도록 하고 사랑하게 하시는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 하느님은
인간이 수동의 자세로 임할 때만 체험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시편(104,31-34/150)의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제10장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

< 1. 수동의 기도 >
- 하느님은 수동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기에 우리는 수동의 자세로만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수동적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날 때는 기도를 드릴 때이다. 기도는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에는
수동의 의미가 잘 담겨 있다. 루카복음 11장 1-13절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님의 기도 부분(1-4절)과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고무하는 완고한 친구의
비유 부분(5-8절)과 신뢰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강조하는 부분(9-13절)이다.
주님의 기도는 내 힘에 의존하지 않고 아버지의 섭리 아래 살게 해 달라는 청원의
기도이다. 철저히 수동의 존재로서만 바칠 수 있는 기도, 철저히 수동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 바치는 기도이다.

-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마술적 힘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에게로 향하게 하여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 향함은 자신의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
이어지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라는 말씀도 철저한 수동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받는 자세, 열린 자세를 취할 때 참다운 받음, 얻음,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기도하자. 기도하는 자는 이를 안다. 또는 모르기에 기도한다. 이러한
기도를 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내버려두는 법을 익혀야 한다. 놔두기 위해서
기도하고 놔둘 때 참으로 기도할 수 있다. 우리말 미사에서 사제가 신자들을 기도에
초대할 때 “기도합시다”라고 하는데 독일어에서는 “기도하도록 우리를 내버려둡시다
(Lasser uns beten)”라고 한다. 기도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 2. 들음의 기도 >
- 기도는 우리를 수동의 인간이 되게 하며 우리가 수동의 인간이 될 때 진정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기도는 하느님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넘어 하느님을 듣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자세는 ‘들음’에서 나오는 기도이다.

- ‘듣는 존재’이신 하느님께서 “모세야”하고 모세의 이름을 부르신다.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앞에서 모세는 오로지 듣는 자세로 임한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무엘은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앞에서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한다. 천사가 마리아께 나타나서 “마리아야”하고 불렀다. 마리아는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답했다.

- 하느님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으로, 오직 침묵의 말씀을 하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침묵을 들어야 한다. 침묵을 듣지 못하는 자는 기도할 수 없다. 기도하기 위해 말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먼저 들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종종 기도가 잘
안된다고 하는 것은 말로써만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남의 언어나 정형화된 틀에 박힌 기도로는 하느님을 들을 수 없다.

- 하느님을 듣기 위해 자신을 가만히 놔두는 법을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냥 조용
하게,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조차 갖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놔두어 보라. 하느님과 나
사이에 들음의 영역이 형성될 것이다.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기도하겠다는 의지마저
포기하고, 자신을 수동으로 내맡기는 것은 기도의 근본자세이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나를 그대로 놔둘 때 저절로 나온다.

-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로어)
그때 우리의 입에서 저절로 기도가 나올 것이다. 자기 힘을 빼고 수동으로 바치는
기도는 성령에게 맡기는 기도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수동의
자세로 설교하는 것이다.

- 예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예로 들어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루카 18,9-14)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사람이다. 남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만큼 하느님께 기도할 때도
고자세다. 그는 자기가 의롭게 산 것에 감사를 드리지만 사실상 감사해야 할 존재는
자기가 아니라 하느님인 것처럼 기도한다. 바리사이는 자기가 기도하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고, 무엇을 하느님께 청해야 할지도 이미 알고 있다. 세리 역시 자신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멀찍이
서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할 뿐이다. 자신의 무능, 무지, 무력함을 인정할 때 참다운
기도가 나온다.

-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느님께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기도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 뜻을 이루려고 할 때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하나의 도전이 되고 순수성을
잃게 된다.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께 아무
것도 바칠 수 없다. 기도는 자기 내면에 먼저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달라’는 기도를 바칠 수 있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 기도의 근본 자세는 하느님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것, 하느님의 입맞춤에 ‘예’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라는 응답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 대한 경배다.
또한 기도는 그저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것이다.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으리이까?”(시편 42,2-3).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와 있음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세계의 깊은 곳에 와 있음을 보게 된다.

< 3. 찬미와 칭찬과 감사로부터 해방 >

- 하느님을 찾는 참된 기도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이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며 의지로 하는 기도는 아무리 찬미와 감사의 소리를 내도 거짓일
수가 있다. 거짓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하려면 칭찬과
찬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러한 칭찬이나 찬사의 말이 과분한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즐긴다. 이러한 즐김에 가려져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을 잃기도
하고, 칭찬을 던지는 주변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위선의 탈을 쓰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남의 판단을 자기 행동의 기준으로 삼다보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남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볼 수 있을 때 예수님처럼
모든 이를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4. 넉넉한 마음을 가져라 >

- 예수님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12,50)라는 말씀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인자한 어머니요 따뜻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그런 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보호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신다. 이렇게 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푸근하게
가꾸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푸근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우리는 비천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제11장 누군가를 위한 삶 ]

- 우리는 지금 우리보다 먼저 태어나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적인 삶의 축적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누군가 앞서가며 희생으로
닦아 놓은 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그 누군가의 희생과 선행의 덕으로 지금
나는 이 길을 걷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안다면, 아무리
희생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위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 아는 사람을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희생은 ‘그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위에서만 든든하게 지속될 수 있다. ‘그 누군가’인데도 사랑할 수 있고,
‘그 누군가’인데도 잘해줄 수 있고, ‘그 누군가’인데도 꾸어줄 수 있을 때, 되받을
생각 없이 꾸어줄 수 있을 때,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수동의 영성에 도달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행동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의 고통에
비해 자신의 힘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느껴질 때 더욱 그렇겠지만 그럴수록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희생과 자선은 달라면 주고, 가자면 가고, 하자면
하는 수동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 제12장 수동의 영성으로서의 순명 ]

-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순명이다. 윗사람은 명령하고
아랫사람은 따르기만 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체제에서 순명은 어려운 것이
될 수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해라’만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이것 좀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도 일종의 명령이다. 서로 이런
부탁에 응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순명이다.

- 전혀 모르는 사람의 요구도 다 들어주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순명하는 정신
으로 사신 분이다. 순명은 질서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완성을
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순명은 인간 완성을 향한 덕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이런
순명의 덕에서 나왔다. 순명하는 자만이 권위 있게 명령할 수 있으며, 권위 있는
사람은 순명한다. 순명의 영성에 바탕한 사람은 위엄과 권위가 있으며, 그런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성인들이 순명의 길을
통하여 완덕에 이르렀다.

- 복음적 순명은 좋고 안 좋고를 떠나 내게 주어진 일을 기꺼이 하는 것이다. 복음적
으로 살기 위해 순명해야 하고, 복음적일 때 순명할 수 있다. 순명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남이 순명하는데 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순명할 수 없다. 진정 순명하는 사람은
덕스러운 사람이다.

- 사랑할 때 사람들은 순명한다. 사랑할 때 사람들은 서로가 시키는 대로 한다. 가고,
오고, 장보고, 요리하고, 먹고, 자고 하는 것 모두 순명에 따라 움직인다. 순명은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는 순명하면서 서로 사랑을 느낀다. 순명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때 사랑이 식고 행복은 사라진다.

- 교회가 그토록 순명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교회가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존재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나의 순명이 세상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뜻이다.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순명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근원이었듯이 말이다. 순명은 인간의
능력을 십자가에 못 박고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끔직한
십자가의 고통이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피하지 않고 놔두셨다. 놔두는 것은 절대적
순명 행위이다. 순명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의 신비가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놔두지
못한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순명은 ‘우리를 위하여’
가능했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비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위하는’ 마음 없이는 순명할 수 없으며,
순명하는 마음이 없으면 ‘위하여’를 실행할 수 없다.

- 그리스도교의 순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명령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순명에는 직선적인 명령-복종,
권위-복종의 구조가 통하지 않는다. ‘위함’과 ‘놔둠’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적
순명은 대화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순명을 요구하는 자는 순명을 요구하기에
앞서 자신의 권위가 진정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지 검증해야 한다. 이 일치가
검증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순명이 아니라 강요일 뿐이다. 대화 없는
명령은 그리스도교의 일치에 방해가 된다.

[ 제13장 수동의 언어 ]


< 1. 비운 언어 >
- 자기만의 언어에 머물지 않은 상태, 자기만의 언어를 비운 상태를 가난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난은 물질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운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비움은 언어를 비운다는 의미에서 볼 때 침묵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께서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부를
하늘에 쌓으라고 강조하신다. 이는 지상의 언어를 비움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언어를 비운 자는 말하는 것뿐 만아니라 소유에 있어서도 자유롭다. 모든 것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폭력적일 수 있다.

- 놔둠의 언어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놔둠의 영성에 도달한 사람만이 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제
생각대로 ‘예’ 혹은 ‘아니오’하고 말할 때 그것은 상대를 해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 2. 가난 >
- 소유욕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아프더라도 기쁠 수 있고 괴롭더라도 생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1-6)고 하신 까닭은 인간을
소유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이다. 소유욕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가난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고 소유욕으로 멍든 인간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인간은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소유욕에서 치유되어야 한다.
자기를 비운 사람만이 덤을 얹어 줄 수 있다. 자기를 비운 자의 얼굴은 여유롭다.

< 3. 출가 >

- 세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온 우주가 그에게 머물 곳이 된다. 우리는 출가(떠남)의 예를 구약의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다. 신앙의 선조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떠나는 존재의
표본이다. 하느님의 실존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묶어
놓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생활습관이나 행동방식, 그리고 모든 소유와 집착에 갇혀
있을 때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람만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 자신을 떠나지 못하고 자기 안에 머무른 채 하느님을 찾겠다는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홀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명상에 잠겨 하느님을
찾겠다는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떠나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마음이기 때문이다.

- 출가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 생각, 마음을 떠나는 것이다.
세상과 부모와 처자를 자신의 좁은 사고에 묶어두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출가는 세상(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사회/속세)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현실을 도피하고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출가는 수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 나가며 ]


- 이 책에서 의도한 것은 수동의 영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영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영성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강조해온
능동의 힘은 사실 알고 보면 수동의 영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동의
영성과 능동의 영성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능동의 영성은 오로지 수동의
영성에서만 가치가 있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할 때 능동의 영성은 끊임없이 인간
에게 폭력이 될 수 있고 좌절과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

- 사랑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나게 할 때(수동의 영성), 나는 비로소 상대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상대에게 사랑 ‘하는’ 존재로 나타날 수 있다. 사랑
‘함’이 없이 사랑을 느끼게 한다. 상대에게 나는 사랑이 되고, 상대에게 나는 사랑
‘하는’ 존재가 된다. 용서와 화해도 마찬가지이다. 용서를 ‘함’ 없이 용서를 느끼게
하고, 용서하는 존재가 된다.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도 모두 그분이
수동의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분은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수동의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에게 사랑이 일어나게 하셨고, 사람들이 사랑을 느끼게 하셨고,
그리하여 상대에게 사랑하는 존재가 되셨다. 그 사랑의 정점이 바로 자신을 완전히
내놓은 십자가였다.




 

금주의 독서 메모 022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2.28.


[성공과 행복의 열쇠 ]

- 지은이 : R.C 앨른, 옮김이 : 김학성/ 206p
-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길잡이


[ 표지의 글에서 ]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들을 평범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
쉽게 반성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좀더 행복한 삶, 성공적인 삶을 살아 보기 위해 생각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떠한 삶이 성공한 것인가를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이 책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길잡이로서 신앙인이거나
비신앙인이거나 꼭 읽어 볼만한 책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기쁨과 행복과 평화가 찾아 오며,
그것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내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따르며 살아갈 때
우리는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얻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공과 행복의 열쇠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 1. 마음의 촛불을 밝히고 ]

- 성공은 매일 생활의 도전을 이겨 나가 패배를 하지 않는 능력이다. 좁은 의미에서
성공이란, 보통 사람들이 만족하는 것보다 좀 더 진보된 무엇을 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성공은 남을 돕고 기쁘게 하려고 열성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찾아
온다. 성공은 기꺼이 남을 돕고 봉사한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여러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훌륭한 방법으로 봉사할 때 여러분의 보수는 더욱 풍성해진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성공과 찬사는 질병이나 신체적 장애, 주위 환경, 경제적 빈곤
등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 성공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좌절감과 실패,
불평과 근심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다음과 같은 성공의 열쇠와 발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이 성공의 열쇠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이것에 항상 의존한다면 여러분의 생활엔 조화와 질서
그리고 마음의 평화가 충만하게 될 것이다.

- 믿음의 지혜와 신념이 풍성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인류
생활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할 능력을 가진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진실로 열림 마음이란, 여러분이 기꺼이 새로운 지혜를 제공하는
모든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에게 그것을 설명할 기회를 허용하는 마음이다.

- “부유한 인간이란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자이다”.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다른
재물은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마음의 평화는 ‘값비싼 진주’, 최상의 보화이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먼저 이것을 열망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성공의 열쇠는 우리에게 항상 의존할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고 누리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성공의 열쇠는 여러분이
가진 돈의 양에 관계없이 여러분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또
여러분이 더욱 하느님과 가까이 할 수 있게 용기를 붇돋아 준다. 그리고 이것은
더 많은 봉사와 선을 이 세상에 베풀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성공의 열쇠는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창조적 정신과의 끊임없는 접촉이다. 하느님은 곧 성공의
열쇠이다.”

- 1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 헤롤드 러셀(포탄에 두 손을 잃은 공수 부대원),
아네트 켈러먼(소아마비 수영선수), 프랭크린 루즈벨트(소아마비 미국 32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부커 티 워싱톤/앤드류 카네기(비천한 신분 및 장애자), 헬렌 켈러
(세 가지 장애 극복/학사), 알버트.E.위갈(심리학자), 벤자민 프랭클린(미국 초대
정치가, 사상가)...

[ 2. 풀려지는 열쇠 ]

- 모든 지혜와 힘의 근원이 곧 성공의 열쇠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창조주의 도움으로 여러분은 마음의 평화와 부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성공의 열쇠인 창조주는 여러분이 처한 어떤 환경이나 고통
에서도 성공에 도움이 되어 주실 것이다. 창조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크리스토퍼
콜롬부스,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에디슨 그리고 위나폰 브라운 같은 이들에게
그 시대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믿은 일을 행할 능력을 주셨다.

- 일부 사람들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러분의 눈은 실제로
존재하는 많은 사물을 모두 볼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사실상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많은 힘을 갖고 있다. 여러분은 중력을
볼 수 없고 호흡하고 있는 공기도 볼 수 없지만 그것은 존재하고 있다. 중력이 없다면
여러분은 허공에 떠다닐 것이고 산소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여러분은 어둠을 밝혀
주는 전기를 볼 수 없고 마시는 물에서 생명을 주는 물질을 볼 수 없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보이지 않는 전파를 통해서 화면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살결을
검게 그을게 하는 자외선이나 음식의 비타민이나 광물질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눈은 여러분이 믿고 있는 만큼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 여러분의 능력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를 알고 보다 큰 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하느님은 항상 여러분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뿐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성공의 열쇠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하느님께 조용히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은
올바른 대답을 얻었고 고통은 더 쉽게 극복될 수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 여러분의 마음, 나의 마음, 그의 마음, 그녀의 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이해할 때
성공의 열쇠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쉬워진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전선을 통해 불을 밝히는 전등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등은 그것이 전원(電源)과 연결되었을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 여러분이 전기가 사용되는 과정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
하고 인생을 더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의 전등 스위치는 당신 두뇌에 비유될 수 있다. 스위치는 그 자체
만으로써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전등을 켜거나 텔레비전을 보려면 먼저 스위치를 켜서
가정과 실제 전기를 흐르게 하는 발전소와를 연결시켜야만 한다. 여러분이 스위치를
끄면 전류는 흐르지 않을 것이며 어둠을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인간의 근원인 하느님, 여러분의 생활을 풍요하게 하는 창조주께 마음의
문을 닫는다면 광명과 능력은 여러분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
롭게 해준다면, 여러분이 원할 때마다 해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여러분의 마음이 끊임없이 하느님과 접촉하고 있을 때, 여러분의 생각은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일과 좀 더 높은 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채워질 것이고 따라서 긴장감,
근심, 걱정은 사라질 것이다. 여러분보다 더 큰 지혜와 능력을 갖춘 창조주는 여러분
에게 스스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유와 마음의
평화, 그리고 성공적인 인생은 자연스런 결과가 된다.

- 창조주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준다는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고 말씀하셨을 때, 가르치신 성공의 열쇠를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3. 인간의 놀라운 능력 ]

-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필요로 한다. 첫째,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확장하고 좀 더 발전시키려는 강한 열망. 둘째,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끊임없는 노력. 셋째, 하느님의 지혜는 항상 유익하며 여러분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념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성공할 수 있는 계획과 방법에
집중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있다’(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성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모세가 하느님께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출애3,14). 여러분이 “나는 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실제로
“하느님께서 계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된다. “나는 있다”라는 말은 매우 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매일 생활 안에 새로운 일을 창조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잘 있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확신을 갖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일이 잘 되어 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계속 “나는 아프다”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결국은 병이 들 것이다.

- 여러분이 항상 사용하는 말은 여러분을 새롭고 발전된 세계로 이끌 수도 있고
빈곤과 질병, 절망 등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바른
말을 할 때 여러분의 인생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잘 있다. 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나는 영감을 받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사랑에 가득 차 있다.”
이런 말을 매일 여러 번 반복해 보라. “나는 있다”란 말이 곧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말을 뜻함을 기억한다면, 여러분의 생활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활동하는 하느님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이것과 협조하여
여러분은 진정으로 열망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목표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정진하도록
여러분의 두뇌를 작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열의를 갖고 여러분의 인생을 영위하고
다음에 올 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으라. 이것은 젊어지는 비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성공적인 사람은 인생의 목표를 갖고 있다. 그는 도달해야 할 더 큰 목적과
수행해야 할 일을 가졌으며, 또 항존하는 신성한 능력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아
들이기 위해 신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그의 능력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하느님과의 접촉 관계는 라디오의 다이얼을 조정함으로써 자기가 듣고자 원하는
방송의 수신 상태를 조정하는 것과 유사하다.

- 여러분의 신념이 행동으로 뒷받침 될 때 새로운 아이디어는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그것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계속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실천할 수 있고 성공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념은 여러분이 항상
성공하도록 도움이 되는 격려와 안도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향한 끊임없는 노력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올바른 준비와 실천이 여러분을
완전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실천만이 결과를 낳는다. 소망만으로는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진실로 믿을 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이다.

-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란 그분의 지혜를 신뢰하고, 그분께 구원을 청하고,
그리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는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성공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할 일은 오로지 여러분의 진실한 열의를 증진시키고
그것에 의하여 성공의 크기를 확대하는 것뿐이다.

- 3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성공의 인물 例) : 남아프리카 개리 (골프 선수),
아브라함 링컨 (미국 16대 대통령), 에디슨(발명가/사업가), 울워스(뉴욕 초고층
빌딩 건축), 찰스 워드(세계적 큰 회사 사장), 아인슈타인(위대한 과학자),
리나 함멜스타인(디자이너), 조지 이스트맨(상표 ‘코닥’ 고안), 로버트 리
(‘다우 이론’ 저술), S.B 훌러(시카고 흑인 실업가), 찰스 A 린드버그(홀로 태평양
횡단 비행), 월트 데이비스(소아마비 장애 높이뛰기 선수), 아이젠하워(2차 대전시
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G 르 투르노(훌륭한 발명가), 콜럼부스(미 대륙 발견),
워너 폰 브라운(로켓트 발명), 조지 워싱톤(독립전쟁 승리)...

[ 4.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

- 인간이 성공의 열쇠를 저버린 일이 있지만 성공의 열쇠가 인간을 저버린 일은
결코 없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성공의 열쇠가 계속해서 당신을
돕도록 만드는 말이다. 문제가 생기고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잠시 냉정하게
스스로를 판단해 보자. 불행이 다가온 이유 중의 하나는 분명히 자신이 그것을
초래하도록 불러들였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 성공의 열쇠는 올바른 생각과 도덕적 행동을 계속하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일생을
끊임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느님은 부정한 생각과
부당한 행동은 그들을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들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말은 여러분이 가장 의존할 만한 길잡이이다.

- 강장제나 진정제는 여러분에게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없다. 오직 성공의 열쇠와의
밀접한 접촉만이 마음의 평화를 안겨 줄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천국(영원한 평화,
건강, 성공을 가져오는 기쁜 요소인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창조적 정신)은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지도자들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말하는 그 나라는 다른 나라와 더불어 조화와 평화, 상호간 이해 속에 사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지혜는 나이에서 오고 지식은 경험에서 얻으며, 지혜와 지식은 이해에 의하여
풍성해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자기 뜻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더욱 의존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훨씬 젊은 나이에 더 큰 지혜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평화는 여러분의 인생에 닥칠지 모르는 어떠한 곤란과 불행, 또는 생활의
도전이라도 견디어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내적 힘과 도덕적 용기를 여러분께 부여해
준다. 하느님은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이 경건하게 그분을 사랑하기를
열망하고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다면, 하느님은 항상 여러분에게
마음의 평화를 내려 주실 것이다.

- 여러분은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미래에 살 수도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현재를
즐길 수 있다. 성공과 행복을 얻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느님을 믿고 만사가 여러분을
위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열망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협력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도록 하자.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은 더 큰 선(善)으로 축복받고,
완성으로 이르는 은총 속에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길은 확고하고 평화롭고
조화롭기 때문에 더욱 좋은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 4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 본다 반 다이크 (1965년 미스 아메리카), 마르린 몬로 (여배우)

[ 5. 무한한 인간의 잠재력 ]


- 여러분이 열망과 신념과 신앙만 충분하다면, 이룰 수 있는 놀라운 업적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요한 10,10)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더 큰 성공을 하도록 해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고 있다.
여러분이 주의를 하느님께 돌려 구원을 청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실패하는 데서 더 큰
성공을 얻도록 할 수가 있다.

- 여러분의 성공과 실패는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와 생각하고 믿는 방식에 달려
있다. 영원하고 확고한 성공을 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만히 있지 말고 무엇을 실천할 열망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은 계획과 목적을 가져야
하고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목적지에 도달하여야 할 시기는 언제인가를
알아야 한다. 계획이나 목적이 없으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불행하게 되고 만사에 흥미를 잃어 결국 모든 일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열망이 한 방향으로 불타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며 행동을 취할 때, 여러분은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고 열망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

- 어떤 사람들은 왜 그들의 인생이 그렇게 험난한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언어를 분석한다면 그들 대부분의 생각은 부정적이고 그들은
자기들의 난제에 대해 불평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항상
불평거리를 갖고 다닌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인생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생각과 언어에 따라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

- 여러분의 생활에 불쾌감이나 불행한 일을 조성할 수 있는 부정적인 표현으로는
“나는 몸이 아픈 것 같고 피곤하다. 나는 파산했다. 모든 것이 잘 안 된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세상 모든 것이 처량해 보인다” 등이고, 기분이 좋게
느껴질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나는 원기왕성하고 기분이 좋다. 나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든 것은 잘 되어간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세상은 훌륭한
사람으로 가득 찬 놀라운 세상이다. 나는 오늘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있다.” 여러분이 성공을 열망할 때에는 여러분에게 잠재해 있을지도 모르는 부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정신으로 바꾸고 더 많은 시간을 여러분이
원하는 일에 사용하며, 자기 인생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더 좋은 상황과 경험을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 6. 무한하신 마음에 순응하는 길 ]

- 하느님께 순응하고 그분이 제공할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첫째로, 여러분은 신념을 가져야 하고 창조주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완전히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한다. 둘째로, 여러분이 해결할 문제가 있을 때
하느님께 그것을 이해시키려 하지 말고 전능의 지혜인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분도
이미 해답을 알고 있으며, 적기에 해답을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 여러분의 문제를
알리고 평안하게 말하자.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원하자. 끝으로 완전히 성공하기 위해서는 긴장하여 걱정하거나, 의심을 품거나
해서는 안 된다. 지상의 능력과 지혜가 항상 여러분을 모든 면에서 기꺼이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자.

- 긴장을 하거나 혼란을 일으키고, 근심 걱정에 싸여 있을 때 다음과 같이 해 보자.
엄지손가락을 관자놀이(눈과 귀 중간의 관자뼈에 있는 곳)에 대고, 다른 손가락들을
앞이마에 모아 “나는 안정된다”고 말해 보라. 완전히 마음이 가라앉으면 두 손을
가볍게 무릎 위나 가슴에 모은다. 이 방법은 모든 현인들에게 정신력을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법은 정신력을 소생시키고, 하느님과 쉽게 접촉할 수
있도록 내적 힘을 증진시켜 준다. 다음엔 눈을 감고 마음을 내부 세계로 돌린다.
뇌의 중심부에 송과선(내분비선)이라는 것이 있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를 ‘제3의 눈’
또는 ‘모든 것을 보는 눈’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것은 정신요법자에 의하여
창조주로부터 암시를 받는 뇌수로 알려져 있다. 여러분의 사고력을 내부로 돌려
뇌 중심에 있는 송과선에 집중시킬 때 여러분의 소원과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얻는
것은 더욱 쉽게 된다.

- 성공하기 위해서, 최대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여러분은 안정되어야 한다. 더 깊은
안정을 얻을수록 여러분의 결실은 더 커질 것이다. 여러분은 근심, 의혹, 공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안정된 마음의 자세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느님께 구원을 청할 때,
여러분은 그분이 최선의 길이라고 믿는 자세로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유권을 기꺼이 허용해야 한다.

[ 7. 발전의 법 ]

- 하느님은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너무 오랫동안 과거사에 마음을 쓰면 미래의 발전을 놓치게 된다. 어제
일어난 것들은 내일 일어날 수 있는 즐거운 일만큼 중요하지 않다. 모든 생명의
기본 목표는 성장하고, 확장하고 발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공은 여러분의
주의와 재능을 성장, 확대, 발전을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시킬 때 더욱 확고해진다.

- 창조주가 이 세상을 결코 쉬는 장소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진리이다. 이 세상은
실제로 실험적인 세상이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겪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성장하기를 원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여러분이 존재하는 이유며, 목표이다.
여러분이 싸우고 일하려는 생각을 포기한 순간이 바로 여러분이 부패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은 지루하게 되고, 인간으로서의 여러분은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 “세상은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변화는 발전을 초래하는 인류의 길이다”라는
찰스.F 케터링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변화는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다. 성공의 열쇠와 발전의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건설적인 변화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개선하고 완전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때문이다.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의견과 태도도 바뀐다.

-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성공했던 많은 인물들은 처음 대부분은 역경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더 위대한 능력과 지혜가 그들의 성공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그들이 기적을 믿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고,
그들이 놀라운 성공을 믿었기에 그것은 실현되었으며, 행복과 부와 명성이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그들에게 모든 것이 주어졌다. 그들은 더 잘하려는 강한 열망을 가졌었고
실천했으며 성취했다. 그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향상시키고, 현재의 지식을 증진하여
자신의 활동 범위를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발전의 법칙에 순응하였다.

- 달성하고자 하는 열망, 무엇을 하고자 하는 열의는 여러분이 성공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열망은 창조적인 힘이다. 전진하거나 확장하려는 것을 포기할 때
좌절과 불행으로 흔들리게 된다. 여러분 속에 하느님의 놀라운 힘과 지혜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성장할 무한한 능력과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소질이 있다.
그러나 전진하기 위해서, 더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한다. 불평하고 무력함을
느끼는 대신, 여러분은 스스로를 자극시켜 개선하고 전진할 열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을 “나는 할 수 있다”로 대신하는데
있다. 여러분이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이미 마음속에 발전에 대하여
걸림돌을 걸어 놓은 것이다. 이 걸림돌은 발전을 어렵게 한다. 반면 여러분이 “나는
할 수 있다” 고 말할 때 당신을 성공하게 할 확고한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여러분이
끊임없이 “내가 시도만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평탄하게 이끌 확고한 기초를 현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항상 다음과
같은 발전의 법칙과 조화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다. 첫째, 소규모로 시작한다. 둘째,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셋째, 목표를 철저히 세우고 모든
노력을 다한다. 넷째, 매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도록 한다. 다섯째, 어떤
목표가 달성되면, 조금 높은 새로운 목표를 만든다. 여섯째, 여러분이 택한 직업이나
활동 분야에서 스스로를 완전하게 한다. 일곱째, 성공은 여러분이 한 일이 칭찬받을 때
더욱 즐겁게 느껴진다.

- 여러분의 생활 조건을 바꾸고 개선하려면, 당신은 먼저 사고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여러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주기를 원한다면, 발전은 결코 오지 않는다.
여러분 스스로 기꺼이 전진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발전의 법칙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전진과 변화가 빠르면 빠를수록 생활은 더 빨리 발전할 것이다.
여러분의 나이가 어떻든 시야를 넓히자. 끊임없이 배우고 미래를 응시하며 마음을
기대로 가득 채우자.

- 당신이 무엇을 하던 간에 올바른 착상과 정직의 원칙은 성공에 대단히 중요하다.
여러분은 조심해서 친구를 선택해야 하고 스스로 발전해야 하며, 이런 원칙과 생각이
존중되는 환경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좋은 친구는 항상 좋은 생각을
갖도록 도와줄 것이고 격려할 것이지만, 나쁜 친구는 시시한 일과 안일에 빠지게 할
것이다. 또 이들은 여러분을 헐뜯고, 좋은 일을 못하게 할지도 모르며 여러분의 성공을
시기할 것이다.


- 위대한 전진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큰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을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악마에게 권세를 주지 않기 때문에 유해하고 악한 것은
결코 오랫동안 성공할 수 없다. 성령을 증거하는 선은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악을 항상
극복해 낼 것이다. 이것이 노예 제도가 철폐되어야 했던 이유이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전체주의가 근본적으로 그릇되었다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개인에게
자유롭게 성장할 기회를 주는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고, 인간이 조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 7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 벤자민 프랭클린(전기의 원리 발견), 핸리 포드(자동차
생산자금 투자), 데이비드 사르노프(미국 라디오 협회장), 로자릿드 러셀양(유명한
여배우), 아브라함 링컨(미국 16대 대통령), 글렌 밀러(인기 밴드 조직), 허버트 후버
(미국 31대 대통령), 존 글렌(미국 첫 우주 여행자), 마크 웨인(세계적 대작가),
콘라드 힐튼(세계적 호텔 소유 경영), 미키 맨틀(야구계 거부), 에드 켄톨(연예,
방송 인기인), 칼 위크맨(그레이 하운드 버스 회사 시초), 월트 디즈니(디즈니 랜드
공원 조성)

[ 8. 보상의 법 ]

- 여러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보상의 법에 속한다. 이는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그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갈라 6,7)라는 진리에 그 근원을
둔 법이다. 이 법칙에 따라 여러분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은 준 것을 그대로
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표현하는 모든 사고와 다른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준 행동은
같은 형태로 여러분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 여러분의 생각은 여러분이 믿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발생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여러분은 존경, 사랑, 염려에서 나오는 좋은 생각만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여러분의 생각이 건설적이고 친절하다면 여러분은 확실한 결과를 얻을
것이고, 여러분이 일하는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이 부정적이고 염세적이며 불쾌한 것이라면 여러분의 생활을 질병, 불행, 실패로
이끌 수 있는 상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 여러분의 생각이 비평, 증오, 질투, 복수,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마침내
이것들은 여러분에 의해 표현되고 반사적으로 여러분에게 되돌아와서 여러분의
생활은 부조화와 여러 가지 악조건에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이 사랑과
봉사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더 큰 조화와 마음의 평화 그리고 사랑을
누릴 것이다. 세상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 준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 예수께서 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속에 있다”는 말은 여러분이 현재 생활 조건을
개선할 온갖 능력을 여러분 안에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나라란 마음의 평화,
건강, 조화 그리고 걱정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항상 선한
일에 대해 생각할 때 결국 선한 일이 찾아들게 된다. 지옥은 하느님나라의 반대이다.
그릇된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질병, 근심, 고독과 손해를 겪을 수 있다.

-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이 어떤 것이든 간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대한 사랑과
격려, 봉사 등은 그 순간부터 반드시 여러분에게 같은 양이 돌아오는 보상의 법칙이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이 얻은 것은 ‘요행’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을 가치가 있는
‘보상’인 것이다.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선을 행하기를 기대하는 대신 먼저 남에게
선을 베풀고자 할 때, 여러분의 인생은 더욱 행복하게 되고 더 큰 성공을 맞게 될
것이다. 인생은 “되로 주는 자에게 말로 갚아주기” 때문이다.

- 여러분은 한번 보상의 법을 이해하고 준수하면, 행운이 더 쉽게 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여러분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말을 건네 보라. 화내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베풀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대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라. 존재하는 모든 선을 믿고 여러분의 생활이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자. 예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행복하게 되는 길이고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과
더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이다.

- 더 많은 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먼저 더 많이 주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세상에 많은 것을 주어야 한다. 더 많이 벌고자 한다면 먼저
더 많이 배워야 한다. 이것이 보상의 법에 대한 요약이다.

- 8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 핸리 포드 (차를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
센더스 (캔터키 치킨 세계적 보급)

[ 9. 번영의 법 ]


- 오늘날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 중의 대부분은 재정적 곤란이다. 그러나 이것은
번영의 법을 알고 따를 때 쉽게 극복될 수 있다. 하느님은 빈곤이 아닌 부를 여러분을
위해 준비하고 계시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풍요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번영과 풍족함은
하느님의 계획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이 만드는 모든 것에
조화와 균형이 갖추어지기를 원하신다. 조화와 균형이 부족할 때, 무질서와 혼란이
초래되고 번영은 더욱 성취하기 어려워진다. 번영의 법은 중력의 법칙과 같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 번영하고자 한 노력에 대한 올바른 사고방식의 중요성은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
에서 세 하인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주인에게서 5탈렌트를 받은 한 하인은 바로
그것을 투자하여 5탈렌트를 더 벌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일어나 행동하고 전진
하여 성장하라는 진화의 법과, 얻기 전에 먼저 주라는 보상의 법, 성공할 것을 확신하는
번영의 법을 증명했다. 2탈렌트를 받은 다른 하인도 투자하여 2탈렌트를 더 벌었다.
1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그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땅에 파묻어 두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진화의 법, 보상의 법, 번영의 법을 무시했다. 위의 이야기는 돈이란, 농부의 손에
쥐어진 씨앗과 같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돈이 불어날 수 없는 곳에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번영의 법을 따를 때, 여러분의 소득은 항상
증대될 것이다.

- 여러분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여러분이
하느님께 빌린 것이다. 여러분이 착한 종이 되고 그분이 유용하게 만든 사물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그분의 소망이다. 그분은 여러분이 사물을 돌보고 처음 보다 더 좋은
상태로 발전시키기를 원하신다.
- 성공의 열쇠인 하느님은 항상 적극적이시다. 하느님을 동반자로 하여 그분의 지혜를
따를 때, 여러분은 더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나에겐 돈이라곤 조금밖에 없고 돈이 저절로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은 부정적이다.
이것은 강한 것 대신 약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하다. 또 이것은
신념의 부족을 나타낸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배운 그릇된 신념의 결과이다. 여러분이
사고방식과 신념을 제한하는 한, 여러분은 번영의 법이 반드시 제공할 모든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 예수께서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마태 6,26)라고 말하신 사실을 여러분이 믿어 주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번영의 법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여러분에게 더 많은 재산이 돌아 올 것이다. 이 법을
따르려 노력하고, 여러분의 번영이 증대되는 것을 주목하자.

- 9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 르 투르노 (새로운 여러 기계 발명/수입의 90% 희사),
핸리 포드(연간 1백만대 이상 차 생산), 매코믹 조미료 회사(직원들의 아이디어
경영방침 채택), 리셀 콘웰(‘다이아몬드’ 책 저술 작가)

[ 10. 무저항의 법 ]

- “칼로 사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싸울 생각만 하는 사람은
항상 그것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그들의 생활이 그릇된 생각과 행동으로 파멸된다면,
그 책임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성적 해결보다 싸움을 택하고
주는 것보다 얻기를 원하며, 도와주기보다는 외면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불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생활은 항상 험난한 것으로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무저항의 법을 모르고, 성공의 열쇠에 역행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무저항의 법은 성서에서 여러 번 지적되었다. “그대의 적과 곧 화해하라”, “조용히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라”, “당신의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뺨을 내밀라”,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느니, 그들이 이 세상을 이어받을 것이니라” 등이다.

-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조롱하거나 싸우려 들면, 다른 사람도 여러분을 조롱하려
들고, 싸우려 들 것이다. 바람에 휘어지지 않는 나무는 부러지는 법이다. 불화와
알력을 일으키는 상황이 일어날 때 바람에 휘어지는 나무처럼 조금 굽히라. 이것이
무저항의 법에 대한 아주 간단한 설명이고, 성공의 열쇠의 중요한 부분이다.
무저항의 법을 통해서 더 큰 조화를 창조할 수 있고 친구를 얻을 수 있으며, 여러분을
괴롭게 할지도 모를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과 다투지 말고 마음을 가라 앉혀 잠시 그대로
내버려 두고 즉시 사람이 없는 조용한 장소를 택하여 하느님과 접촉하는 것이다.

- 여러분이 이성을 잃고 자제심을 버릴 때, 여러분은 일생을 두고 후회할 말이나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좋은 친구를 잃을 수도 있고 주위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르며, 결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 여러분이 화냈던 사소한 일은 여러분이
처음에 생각했던 만큼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기를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지 못함이다.” 여러분의 자제심을
키우고, 여러분이 매일 휘말려 들어가는 사소한 분개심을 무시할 줄 알게 되면,
그 대가는 참으로 풍성하게 될 것이다. 사랑, 겸손, 동정, 이해는 여러분의 일생을
더 즐겁고 성공하게 할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이것은 무저항의 법의 본질인 것이다.

- 10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 솔로몬(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웰링톤경(나폴레옹과의
워털루전에서 승전), 윌 로저스(미국 정치인/저널리스트, 배우 등), 오고스타 런델,
타리리(인디언 추장)

[ 11. 선택의 기쁨 ]


- 인간의 순간순간마다 여러분은 행운이나 불행, 행복과 고통, 성공과 실패,
사랑이나 증오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선물인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고, 여러분이 거기서
할 일을 결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선택한 방향은 여러분을 성공으로
이끌 수도 있고, 실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의 생활 조건이 나쁜 것이라면
그것을 개선할 수도 있고, 이미 훌륭한 것이라면 그것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이다. 여러분이 절망과 불신을 택한다면, 여러분이 표현하는
부정적인 생각은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기 전에 사라지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영적인 발전의 법을 도외시한다면,
부정적인 조건이 여러분의 생활에 스며들어 불행의 긴 시간으로 안내할 것이다.

-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생각을 해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여러분 자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곧 사라져 버릴 물질의
쾌락 속에서 만족과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있다. 영원한 기쁨의 순간은 하느님과
홀로 접촉하는 시간뿐이다. 예수께서 “보물을 하늘에 쌀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고 가르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러분이 마음 놓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 그곳이다. 사울
(바오로)이라는 사람은 천국에 그의 보물을 쌓는 길을 택함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람의 한 분이 되셨다.

- 성공하기 위해서 실패보다 성공으로 이끌 생각과 행동을 택해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 주위의 일부 사람들이 믿지
않더라도 적극적인 생각으로 확고하게 행동하여 여러분이 성취하기를 바라는 것에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의 하나는, 하느님께
필요한 지혜와 격려를 구하는 것이다.

-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영구한 행복과 부를 창조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을 믿고 -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적극적인 생각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는 하느님의 뜻이 고취된 적극적인 사고의 계속적인 표현만이
영원한 발전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며,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 적극적 사고란 강력한 사고이며, 유익하고 유쾌한 결과를 초래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약하고, 어떤 가치도 창조할 수 없다.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되면 사물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인도하게 된다. “내가 하겠다”, “그렇게 믿어”, “될 수 있다”,
“같이 해 봅시다”, 등 좀 더 적극적인 생각을 선택하자. 이런 말은 여러분이 더
훌륭한 생활을 만들고, 밝은 나날을 보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비극과 불행한 일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공의 열쇠에 대한
이해부족이며, 모든 인간에게 어떤 일이든 완전을 향해 전진하라고 요구한다는
발전의 법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착하고 명랑하게 되어야 하며,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여러분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여러분을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여러분은 선택의 자유라는 경탄할 만한 은혜를
받고 있다. 여러분 자신은 운명의 지배자요, 영혼의 주인인 것이다.

[ 12. 기도의 신비한 힘 ]

- 기도는 여러분의 의식 있는 정신과 최고 의식으로서의 정신사이의 접촉이다.
기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유일한 힘이며, 사랑과 신념으로 결합된 힘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발전시키는데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과 신념으로 결합된
기도는 모든 사람이 실패하더라도 기적을 이룰 수 있다.

- 마음의 평화와 만족을 구하려 할 때, 여러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은 유한한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모든 지혜와 권력의 근원인 성공의
열쇠를 두드리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여러분이 성공의 열쇠로부터 유익한 것을 얻으려면 하느님과 끊임없이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동반자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분이 동반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이 의식 있는 정신과 최고의 의식으로서의
정신은 함께 작용할 것이므로 자연히 이 두 정신은 따로 작용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 여러분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기도할 시간은 항상 있다. 기도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절약하게 한다. 그리고 여러분이 명상과 기도 속에 보낸 시간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분의 생활을 더 풍성하고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 준다. 기도는 여러분이 잘못을 범하려 할 때, 여러분을 올바르게 인도한다.
- 기도가 진지하다면, 그분은 결코 여러분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는 정의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기도는 이기적이지 않아야 하며,
“하느님,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이
나를 도울 것을 믿습니다”라는 말로 항상 끝나야 한다.

- 하느님은 미래에 여러분에게 좀 더 풍요하고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사소한 기원은 거절될 수도 있다.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할 때는 신념을
갖고 그분의 무한한 지혜를 믿어야 한다. 창조주는 알고 있고, 돌보고 있다. 창조주가
여러분을 창조할 만큼 현명하다면, 그분은 여러분을 유지시킬 현명함도 지녔다.
그분의 계획은 여러분에게 최선의 것을 제공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분은 여러분이
받으리라고 믿을 때만 여러분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더 깊을수록
얻는 것도 더 커질 것이다.

-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 불안, 가뭄, 지진, 질병 등은 하느님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개선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방법이다. 피아노 배우는 학생은 선생님이 연습을
강요하고 교습생이 한 과목을 끝내면 조금 더 어려운 과목을 배우게 하여 점점 배워
나가게 된다. 인생도 이와 같다. 우리는 싸우면서 배우고 극복해 나가기 때문에
성장한다. 가뭄 때문에 댐과 관개 시설이 시작되었고, 질병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제거할 약을 발명하는데 힘쓰게 했다.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에 인간은
토질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고 개간할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 하느님은 약자에게 힘을
주고 환자를 격려해 주는, 이해심이 많은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 사람은 누구나 때때로 슬픔과 좌절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비극과 고통이 축복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것은 여러분을 생각하게 하고 또 여러분이 지혜에
보탬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강력하고 가장 효과적인 정신요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오랜 기도 생활 중에
가장 만족할 만한 이익의 하나는, 여러분 주위의 혼란과 소란에 관계없이 몸에 배게
되는 맑음과 고요이다. 기도는 또한 여러분이 겸손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도의
또 하나 은혜로운 결과는 정신적으로 허약하고 육체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을 치료하게
하며 활동성을 강화해 주는 것이다.

- 예수께서는 성공적으로 기도하는 비결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첫째,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6,5). 다시 말해서 밖의 시끄러운
세상을 피하고, 조용한 장소를 택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분주하고 시끄러운 장소에
있다면, 소음에 대하여는 마음의 문을 닫고 마음속의 하느님께 돌아가 평온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둘째,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마태 6,7). 이것은 여러분이
책에서 보거나 남에게서 들은 대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기도는 여러분
자신의 것이어야 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마태 6,8). 여러분은 자신의
문제를 하느님께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 다섯째, 여러분이 하느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자신의
소망이나 기도가 강렬할지라도 그것이 항상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렇게 하여 여러분의
기도가 답을 얻게 될 때, 여러분은 성공에 열쇠에 감사해야 한다.

[ 13. 성공의 지혜를 얻는 길 ]

- 지혜는 하느님이 항상 그분의 계획을 사람을 통하여 실행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이다. 창조주가 여러분에게 준 지혜는 그분이 발전시킬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의 무의식을 통하여 하느님은 그것이 사업의 번영에 관한 계획,
건강 증진 요법, 또는 과학과 예술의 창조적 노력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다.

- 기꺼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기회와 직업을 발견한다. 그래서 크고
작은 회사의 사장들은 새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항상 찾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성공적인 사업가라면, 그의 사업을 확장하고 개량할 아이디어가 계속 생기는 한, 사업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생각하라”는 말은 I.B.M 회사 직원이
일하는 어디에나 붙어 있다. 왁슨 씨가 세계적인 회사를 건설하는 동안 사용한 다른
슬로건은 “읽고, 듣고, 토론하고, 관찰할 것”, “비범하려고 애쓸 것”, “선 봉사후 판매”
등이다.

- 무한한 지혜의 근원과 계속 접촉할 때, 그리고 그것의 인도에 따라 움직일 때 인간의
지혜는 무한해진다. 여러분이 지닌 아이디어가 어떤 사람에게는 어렵거나 전혀 불가능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아이디어가 실제로 작용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실용적이라는
것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더 많은 아이디어를 얻는 한 가지 방법은 여러분의 상상력을
사용하는데 있다. 여러분이 얻은 이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어리석고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디어를 성공적으로 추진시킨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조소했던 사람들의 이름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는다.

- 육감이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정돈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아이디어이다.
천재의 기지는 일상생활에서 여러분에게 유입되는 창조적 정신의 일부인 것이고, 그것은
항상 여러분에게 존재하며 이것을 얻는 쉬운 방법은 6장에서 설명한대로 무한한 지혜에
순응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받은 영감을 성장하게 하고 그 아이디어를 창조하기 위하여
더욱 무한한 지혜와 밀접하게 접촉하도록 해야 한다.

- 이 세상은 끝은 없고 시작만이 있을 뿐이다. 사업가, 교회, 정부 등의 지도자들이
더 많은 개인에게 성공의 열쇠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지혜를
준수하도록 도우며, 발전의 법, 보상의 법, 번영과 무저항의 법 등 영적인 법을 사람들이
준수하도록 할 때, 그리고 증대될 수 있는 결과를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향유하도록
북돋아 줄 때, 지상의 모든 생명은 더욱 풍요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평화와 발전과 번영은 거의 모든 이의 생활에 보편화 될 것이고, 완성을 향한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은 더 빠른 시일 내에 실현될 것이다.

- 13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 토마스 에디슨(발명가), 미카엘 페러디(소형 발전기 발명),
로버트.G. 르 투르노(발명가), 시그 클레이(양복점 경영), 자코브 시크(전기 면도기 발명),
토마스 J.왁슨(IBM 사장), 라이트 형제(비행기), 아서 캔들러(코카콜라 병판매),
말코니 (전파 수신기 발명), 사이로스 매코믹(수확 농기계 발명), 로버트 영(철도운영 개선)


-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23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3.07.


[내 영혼을 깨우리라 ]

- 지은이 : 제임스 마틴, 옮김이 : 신경남/ 162p
- 새롭게 바라보는 가톨릭 신심 생활의 역사와 의미
- 지은이 프로필 : 와튼 경영대학원 졸업후 금융회사 6년간 근무,
자매이카 호스피스, 보스톤 교도소 원목 등 봉사, 1999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예수회),
다양한 신문, 잡지에 기고, 가톨릭 주간지 '아메리카'의 부편집장,
'참된 벗을 찾아서' 등 저술


[ 표지의 글에서 ]
신심 생활은 우리의 기도와 관상에로 나아가게 하고,
고통스럽거나 혼란한 시기에 우리를 위로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돌보도록 고무시키고,
성경을 더욱 완전하게 음미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또한 신심 생활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제자직의 모델을 제공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재촉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시는 분이신
예수그리스도께로 우리를 더 가까이 이끌어 준다.



[ 서문 ]


- ‘가톨릭 백과사전’은 신심행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정서적인 (그리고
때때로 개인주의적인) 신앙 자세를 촉진시키는 비전례적 기도 형태들. 또한 전례적인
기도보다 개인적 종교적 요구에 대해 더 효과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 신학 사전’은 신심 행위에 대해 “신심 행위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감정
적인 측면이다”. 바티칸 문헌은 신심 행위들을 “다양한 외적인 의식들(기도, 성가,
준수사항, 배지, 메달, 의복, 관습 등)”로 정의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신심 수련’,
‘대중 신심’ 그리고 ‘대중 종교성’과는 구분한다. 이 책에는 가톨릭 전통 안에 있는
모든 신심 행위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신심 생활은 우리의 기도와 관상에로 나아가게 하고, 고통스럽거나 혼란한 시기에
우리를 위로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돌보도록 고무시키고, 성경을 더욱 완전
하게 음미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또한 신심 생활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제자직의
모델을 제공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재촉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시는 분이신 예수그리스도께로 우리를
더 가까이 이끌어 준다.

[ 기 도 ]

< 삼종기도>
- 삼종기도는 예수님의 강생을 기념하는 오래된 기도이다. 이 기도는 하루에 세 번
반복해서 바치는 기도로, 종소리에 맞추어 바쳐질 때 더 없이 좋다. 네 개의 계응,
세 번의 성모송 그리고 마침기도가 있다. 서는 자세가 요구되는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 원래 삼종기도는 무릎을 끓고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그 규정은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바쳐지고
있다. 아침, 정오 그리고 저녁. 따라서 이 기도는 하루의 리듬의 한 부분이 된다.
삼종기도를 바치는 사람에게는 대사(大赦)가 주어진다. 1724년 9월14일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삼종기도를 바칠 때마다 매달 한 번의 전대사(全大赦)와 함께
백일간의 대사가 주어진다고 선포했다.

< 묵주 기도 >
- 묵주기도는 모든 가톨릭 신심들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중적인이며 15세기
이래 교회가 가장 장려해온 신심이다. 묵주는 자신들이 바친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의 수를 세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중세기 초부터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럽의 성모신심이 절정에 달한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작은 원형 고리를 ‘마리아의 꽃’이라 이름 붙여 영적인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묵주기도’라 부르게 되었다.

- 16세기경에 각 신비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열다섯 가지(환희5, 고통5,
영광5 신비) 로 표준화되고 최소화되었다. 그러나 200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묵주기도에 대한 회칙을 발표하면서 그 앞부분에 네 번째 신비인 ‘빛의 신비’를
덧붙였다. 이 신비는 주로 교회의 성사들과 관련된 그리스도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묵주기도는 기계적으로 암송되거나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끌어 주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정기적인 기도회와 모임들 그리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위험, 걱정,
혹은 슬픔에 잠긴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여전히 광범위하게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 호칭기도 >
- 대 그레고리오(604년 사망) 시대에 최초의 위대한 라틴어 호칭기도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이었다. 최고의 제의와 그에 따린 모든 것. 카파(긴 망토)와
장백의, 자수와 무늬, 향로 복사들. 분명히 성인 호칭기도는 성직자들을 위한
기도였다. 그들은 성가대와 더불어 번갈아가며 노래했고, 뒷부분에서는 역시
회중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바쳤다. 그런 식으로 성직자가 인도했다. 성가대나
회중은 거리나 교회를 돌면서 이루어지는 행렬의 뒤를 따랐다.

- 그 후로 성인호칭기도가 어떤 수도공동체에서는 사적인 신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호칭기도는 혼자 또는 몇몇 사람들과 더불어 바칠 수 있다. 호칭기도
기원의 대상들은 높은 단계에서부터 낮은 단계로 이어진다. 삼위일체로부터
마리아, 천사들, 사도들, 복음사가들, 제자들, 교회 박사들, 교황들, 증거자들,
수도회 창립자들, 4세기 광야의 열성적인 수도자들과 각계각층의 여인들에 까지
이른다.

< 구일기도 >
- 구일기도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이 장사를 지내기
위해 지켰던 일반적인 기간은 9일이었고, 마지막에는 축제를 지냈다. 그 전통의
이교적인 특성은 그리스도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과 비신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상을 치르는 기간을 7일로 단축시켰다. 중세기
한때 마리아께서 아홉 달 동안 잉태하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바치는 성탄 구일기도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전례적 구일기도는 성령강림 대축일
전에 바쳐졌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구일 동안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제자들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 17세기에 구일기도의 성격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호칭으로
마리아를 공경하는 구일기도가 유럽 전역에서 생겨났다. 어떤 수도 공동체들은
그들의 주보성인을 공경하는 구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다른 공동체들은 구일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주요 전례 축일들을 준비하는 관습을 발전시켰다. 19세기에
교회는 특정한 구일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베풀기 시작했다. 구일기도는
절박하고 긴급한 필요에 대해 숙고하고 성찰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 성무일도 >
- 성무일도의 아침, 저녁기도에는 몇 개의 시편, 성인, 신학자, 혹은 영성 저술가들이
쓴 짧은 독서, 응답 시편, 즈가리야 혹은 마리아의 노래, 청원기도 그리고 그날을
시작하거나 마치면서 바치는 짧은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성무일도는 고대 유다교
의식들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후일 이를 받아들였다.
성무일도는 적응성과 융통성을 통합시키기 위해 수도원 전통과 주교좌 전통의 융성에
의해 발전되었다. 주교좌 전통은 평신도를 위해 발전되었다. 이 전통은 신자들이
아침과 저녁에 공동체로서 기도를 바치도록 요청했으며 보다 짧게 묵상하고 적은
수의 시편을 바쳤다. 주교좌 전통은 노동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편의를 제공했다.

- 12세기부터 수도원 밖에서는 성무일도가 주로 사적이거나 성직자들을 위한 신심이
되었다. 평신도들은 사적으로 혹은 교회 공동체내에서 행해지던 묵주기도와 같이
보다 짧은 기도와 신심들에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오늘날 사제들과 부제들은
여전히 성무일도를 바쳐야 할 의무가 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무일도 신심이
본당 생활 안에 통합되기를 요청했다.

[ 예수 그리스도 ]

< 예수 성심 >
-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님의 인성과 그분의 순난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면서
중세기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성모 방문 수녀회에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분의 마음에 관한 네 개의 연속적인 계시를 받았다.
오늘날과 같은 예수 성신 신심의 형태가 완성된 것은 바로 이곳이었다. 1. 예수
성심께 대한 개인적인 봉헌 2. 게쎄마니에서의 그리스도 고통에 동참하는 길로서
목요일 밤 11시와 자정사이에 한시간 동안 기도하기 3. 예수님께 냉담하고 감사
하지 않는 이들로 인해 상처 입은 성체성사의 존엄성을 기워 갚기 위해 매달 첫
금요일에 영성체하기 4. 아홉 달 연속해서 첫 금요일에 영성체를 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 예수성심 신심은 훗날 프랑스 혁명, 공산주의 그리고 가정생활에 대한 모든
위협들에 대항하면서 다시 나타났다. 교황 비오 9세는 1856년 전 교회가 이 축일을
지내도록 했고, 레오 13세는 1899년 예수 성심께 전 세계를 봉헌했다. 예수 성심
신심은 1956년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열절한 사랑을 강조한 비오 12세의 회칙
‘물을 길으리라’에서 교도권의 절정에 도달했다.

< 첫 금요일 신심 >
- 프랑스 성모방문수녀회의 수녀 성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1673년에
시작된 일련의 발현에서 예수님께서 인류에 대한 당신의 사랑 그리고 당신께 대한
엄청난 냉대와 배은망덕으로 당신이 받으신 상처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여러 가지 약속과 다음과 같은 마지막 약속을 통해 당신의 성심에
대한 열심한 신심을 가지도록 요청하셨다고 말했다. “내 성심의 넘치는 자비로
나는 너에게 약속한다. 전능한 내 사랑은 아홉 달 동안 첫 금요일에 성체를 영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 회개의 은총을 허락할 것이다. 그들은 나의 노여움 속에서
죽어가거나 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내 성심은 그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 아홉 번의 첫 금요일 신심이 계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첫째, 그 모든
것이 참된 것일 수 있다. 둘째, 흥미로워 보인다. 셋째, 이 신심이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의 사순절과 성금요일의 이미지와 아홉 달이라는 잉태와 출산의
대림절 이미지를 결합시키므로써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행위를 위한 생기 넘치는
은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 십자가의 길 >

-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께서는 첫 번째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여느 슬픔에
잠긴 어머니와 같이 그분께서는 아드님을 보셨던 그 마지막 장소들로 돌아가셔서
아드님을 기억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시작하신 곳, 넘어지신 곳,
육신에 못이 박히셨던 곳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께서 돌아가신 곳, 그 모든 길을
따라가고 멈추시면서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슬픔을 쏟아내셨고 그분 생애의 놀라운
기적을 묵상하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모범을 따랐다.

- 갈바리아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세기를 지나면서
점점 커지자 힘들여 예루살렘까지 순례를 오지 않고서도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비슷한 장소와 모형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주님의 수난을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고 존경 드릴 수 있었다. 14라는 숫자는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자들이 아니라 유럽의 신심 작가들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확정되었다.

< 성체 공경 >
- 성체 조배는 전례적 성체 공경을 위해 의도된 공간에서 일정한 시간 조용히
드리는 기도(닫혀진 감실에 모셔져 있거나 성광에 현시된 성체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
이다. 성체 공경 신심을 위한 새로운 공식 지침은 이제 성체 공경 예식이 관상,
성가, 회중에 대한 성체 강복뿐 아니라 독서와 강론 그리고 다양한 기도들로
이루어질 수 있다.

- 성체 공경은 미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의 핵심(우리가 빵과 포도주의
성사적 표징과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성사적 말씀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시선의 계속적인 대상이 되고, 우리를 성찬의 식사에
더 깊이, 더 의식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기회가 된다. 성체 앞의 기도는 언제나
신비와의 만남이다.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 주님이 거기에 계시고, 작은 방 안에
고요히 머물지만 바로 교회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 성모 마리아 ]

<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
- 사도들, 수도회 설립자들 그리고 ‘프랑스 학파’로 알려진 모든 지도자들로부터
통찰력을 얻은 이 신심은 17세기에 유럽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 영성의 주요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유년기, 수난 그리고 죽음으로 상징되는 자기 비움과 사랑의
신비로 들어난 강생하신 말씀이었다. 마리아께서는 그 말씀의 완벽한 거울이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과 더불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기념하는 날이 예수 성심 축일 다음 토요일로 이동되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1917년 포루투칼의 파티마에서 성모님의 발현으로 인해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께 주어진 중요성을 쉽게 회상할 수 있다. 마리아께서는 그곳에서 세 명의
어린 목격 증인들에게 나타나시어 “온 세상이 나의 티 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기적의 메달 >
- 1830년 7월 17일 밤, 파리의 ‘뤼 뒤 박’의 어느 경당에서 성 빈첸시오의 애덕
수녀회 소속의 스물네 살의 수련자 ‘카타리나 라부레’는 동정녀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다. 두 사람은 두 시간 가량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와 11월 27일의
두 번째 발현에서 마리아께서는 가타리나에게 이중의 사명을 주셨다. 그분을 공경
하기 위해 메달을 주조하라는 것과 메달을 착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젊은이 모임을 결성하라는 것이었다. 가타리나의 생애 동안 1억 개의 이상의 메달이
만들어 졌고, 이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전해졌다.

- 이 메달은 마리아께서 뱀의 머리를 발로 짓밟으시고 지구 위에 서 계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리아의 손에서는 은총의 빛이 나오고 있다. 악을 정복한 묵시록의
여인을 상기시키는 열두 개의 별이 그분의 머리를 둘러싸고 있다. 메달의 전면 가장
자리에는 “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애원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메달의 뒷면에는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이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가시로 둘러 싸여 있는 예수성심과 창에 찔린 성모성심. 이 두 성심은
복음서의 중심을 이루는 고통 받는 사랑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신비에 마리아
께서 참여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M자로 연결된 이 두 성심위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다.

< 마리아 >
- 교회 역사의 초기에 마리아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가 등장한다. 첫 번째 이미지는
성경의 유년기 사화 안에서 나타나시는데 이는 마리아가 동정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두 번째 이미지는 인간의 필요와 하느님의 옥좌사이
에서 중재하고 간청하는 마리아의 역할로서 4세기 혹은 3세기부터 나타났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정의 내림으로써 신학적으로 합법성을
부여했다. 에페소 공의회가 선언한 바와 같이 예수가 하느님이면서 인간이라면,
마리아 역시 테오토코스(Theotokos), 즉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 루르드, 과달루페, 파티마 그리고 20세기 말의 메주고리예와 같은 가장 유명한
성모 발현지들이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마리아 단체들과 5월 신심이 모든 곳에서
대중화되었다. 마리아 공경을 위한 아홉 번의 첫 토요일 신심은 아홉 번의 첫 금요일
신심과 더불어 특전과 대사를 받을 수 있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854년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1950년의 성모 승천은 마리아가 영적으로 중요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여러 세기에 걸친 마리아 신심에
영예의 관을 씌어 주었다.

< 과달루페 성모님 >
- 1531년 겨울 아침, 멕시코의 후안 디에고 ‘쿠아우랏진’이라는 57세의 가난한
아스텍인 홀아비가 미사 참례를 위해 1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테페약 언덕을 향해
눈이 쌓인 길을 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처럼 검고, 뱃속에 아기를 가졌다는
표시인 검은 허리띠와 함께 전통적인 아스텍 복장을 하고 있는 젊은 인디언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은 마리아이며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 백성들의 울음과 슬픔을 듣고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테페약에서 마리아께서는 다만 당신에게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귀를 기울이겠다는
약속만 하셨다. 그분은 다만 함께 하고, 연민을 느끼며 위로를 주실 뿐이었다.
이 단순한 선물, 세월과 함께 수백만의 목소리로 불려졌던 성스러운 연민의 지상 노래는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울려 퍼졌다. 두 번째 선물은 그분이 우리(멕시코 아스텍인)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언어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선물은 진정한
권리에 대한 것이다. .... 테페약에는 억압받는 사람,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한 여인이 서 있다. 그분은 사랑의 힘,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사랑, 오직 희망으로 가득차서 외치고, 희망을 갈망하는 그 사랑을 가르쳐준다.

[ 성인들 ]

< 성요셉 >
- 성 요셉은 성경에서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 외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꿈을
꾸는 사람,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계획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 –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마태오와 루카가 전한 기록된 족보를 통해 요셉은
나자렛 마을 출신의 목수였거나 목재 혹은 석수공이었고, 위대한 다윗 가문의 자손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나자렛 고을의 한 젊은 처녀와 약혼한 요셉은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그녀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파혼할 방도를 궁리한다. 그런 후에 그는 꿈을
꾸게 되고, 꿈에 천사를 통해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것과,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아이의 아버지이시며 이 아이는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것 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천사가 그에게 명한 대로
그 젊은 여인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 3월19일 가톨릭 신자들은 성 요셉 축일을 지낸다. 달력에서 성요셉과 관련된 또
다른 주요 축일은 노동자들의 주보성인으로 경축되는 5월 1일 노동절이다. 일찍이
멕시코, 캐나다, 보헤미아 그리고 벨기에와 같은 나라들이 요셉 성인을 주보로 모셨던
것의 절정으로서 19세기 중반 레오 13세는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성인들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생활의 정점이라 부르는 교회 공식기도의 맥락
안에서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미
교회 그 자체의 한 부분으로 살다간 또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찬 기도의 한 부분은
성모마리아, 성 요셉, 사도들,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온 교회와 일치하여..”라고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구름처럼 둘러
싸고 있는 많은 증인들’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성인들과 함께 서 있다. 그 ‘증인들의
무리’가 분명히 교회인 것이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순교자들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성인 공경의 전통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긴 묵상이다.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의 모든 가족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 중에 그들을 기억하며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지는 못할지라도 죽는 그 순간 그들과 함께 될 것이라는
소망을 지니고 있다.

< 성인 유해 공경 >
- 성인들의 유해가 가장 큰 공경을 받던 시절(5~16세기) 성인들의 유해는 단순히
세상을 떠난 성인들을 기억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성인의 육신의 변화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겪었던 시련들을 모방한 것이다. 성인들의 유해를 통해 드러난 은총은
성인의 거룩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들의 공덕을 공유하기 위해서 성인들의 유해는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전해지기 위해 부서지고
쪼개져야 했다. 성인들의 유해는 널리 퍼져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 집단들과 한 성인의
공덕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기운을 불어 넣는 수단이었다. 중세기 후반
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관련된 신심이 보다 더 쉽고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는
성인들의 성화에 대한 신심으로 그 자리를 옮겼다.

[ 그 밖의 신심들 ]

< 거룩한 독서 (렉시오 디비나) >
-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는 ‘영적 독서’에 해당하는 라틴어이다. 이것은 ‘성경’과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그리고 ‘준주성범’과 같은 고전적인 영적 서적을 읽고 기도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수도 생활의 역사 속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거룩한
독서에는 기본적인 네 단계가 있다. 독서,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 혹은 실천이다.
본문 읽기는 그 문맥, 단어와 이미지들, 등장인물들, 문학 형식과 구조를 살펴보는
기본적인 문학적 분석이 포함된다. 묵상은 본문의 내용과 읽는 사람의 현재 마음의
상태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도는 본문에 대한 읽기와 묵상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거나 신앙의 선물과 예수님의 지혜에 대하여
하느님께 찬미드릴 수 있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인 관상 혹은 실천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거룩한 독서는 무척 단순하면서 융통성이 있다.

- 거룩한 독서를 시작해 보려는 개인이나 모임들은 단순히 네 단계를 기계적으로 하기
보다는 그 큰 윤곽을 따라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거룩한 독서의 포인트는 성경
말씀에 잠기도록 하는데 있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물음들이 자연스럽게 각 단계마다
떠오르게 된다. 교회 교부들은 거룩한 독서를 처음 시작했고, 예로니모는 특별히
그 구조를 만들었다. 베네딕토는 그것을 그의 수도원 회칙에 통합시켰고, 12세기
귀고2세는 ‘수사들의 사다리’라는 제목으로 거룩한 독서에 대한 중요한 편지를 썼다.

< 성수 >
-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는 것은 침묵 속에 행해지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이 행위가
특별히 가톨릭적이거나 그리스도교적으로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성화시키고 정화하기
위해 물을 사용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의식이다. 성당에 들어가면서
물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 행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속과 성스러운 공간이
구분됨을 인식하게 된다.

- 성수로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는 그 기원이 어떻든 지간에 우리를 놀랍도록 강하게
만들고 회복시켜 준다. 마치 당신이 정말 목이 마를 때 한 잔의 물이 다른 어떤 사람
뿐만 아니라 갈증난 당신의 몸을 상쾌하게 하듯이 말이다. 나 자신을 위해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성지 순례 >
- 인간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찾는다. 결과적으로 하느님 구원의 현존을 기억
하면서 순례하는 것은 이 깊은 열망의 보편적인 표현이었다. 성경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믿음으로 약속의 땅으로 향할 때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과의 만남들을 기념했다는 사실을 구약성경에서
읽는다. 시나이 산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위한
목적지가 되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할 때 계약의 궤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의무적인
순례 대상이 되었다.

- 신약성경 또한 수많은 순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순례
중에 어린 예수와 헤어졌다. 예수께서는 전례축일들을 지내기 위해 자주 예루살렘
순례길에 오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순례의 기간 중에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묻히
셨으며 부활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모양을 갖추게 하신 성령께서는 모여 있던 순례자들
위에 내리셨다. 순례야 말로 은총을 얻기 위한 좋은 기회이다.


end.



 

금주의 독서 메모 024 (본문 중에서 부분 발췌)/ 2021.03.14.


[가톨릭 교회사 ]

- 지은이 : 알란 슈레크, 옮긴이 : 박정수/ 227p
- 사도들과 교부들의 시대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의 가톨릭 교회 역사 안내서
- 지은이 프로필 : 미국 프란치스코 대학의 신학 조교수, 성미카엘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가톨릭과 그리스도교인' 등 저술


[ 표지의 글에서 ]
'가톨릭 교회사'는 오랜 세월을 거쳐온 우리 교회의 모습을 생동감 있고 재미있게
그려낸 안내서와 같다. 이 책에서는 교회의 역사를 각각의 세기별로 주제와 문제들로
나누어 설명할 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으로 전개되었던 여러 가지 정치 문제나
부끄러운 일은 물론 이단 사상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구약의 백성들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의도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의한 새로운 교회의 창설,
그리고 20세기 가톨릭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려 힘차게 활동하시는 성령에 이르기까지,
이 편리한 안내서는 일반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가르치고 깨우치는 데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 제1장 교회의 가톨릭적인 이해 ]

< 하느님의 계획-백성 이루기 >

-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실존하는 현실이다.
그리스도교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한 사람)와 하느님이 땅에
이룩하신 당신의 백성(한 백성)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주신 그 삶 자체
(삶의 한 방법)를 뜻하는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행하시고 계시하신
바를 영감으로 받아 기록한 것이다.

- 구약성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불러일으키시고, 아담과 하와가 반역(원죄)을
저지른 이후 당신과 친교를 회복하도록 가르치신 당신 백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느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으며, 그 계약은 당신과 당신
백성을 맺어 주는 관계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아브라함과 히브리
(유다) 사람들 사이에 맺은 이 계약을 ‘묵은 계약’이라고 한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새 계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아, 즉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당신
사업을 완성시킬 새 계약을 맺을 메시아 파견을 준비하고 계셨다. 신약성서 역시
하느님 백성에 관한 이야기의 연속이기는 하나, 이 백성은 새 계약의 백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거룩한 삼위 중 두 번째
위격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 그 속에서 사시게 될
나자렛 예수 바로 그분이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시다. 즉, 하느님
께서 친히, 묵은 계약을 완성시키고 새로운 백성, 새 계약의 백성을 이루시려고
보내신 구세주이시다.

-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흘린 예수의 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맺어 주는 새 계약이 체결되고 시작되었다. 십자가상에서 흘린 예수의 피로
인류의 모든 죄는 용서받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써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즉 새 계약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 백성은 예수가 하느님이 보내신 진정한 구세주라는
것을 믿었고, 또한 이것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예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되었다.

< 하느님의 새로운 계약의 백성 : 교회 >

- 교회는 새 계약으로 맺어져 있는 하느님 백성 그 자체이다. 이들은 예수가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이시고, 죽음에서 일어서게 하신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새 백성을 신약성서에서는 ‘성도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 ‘그리스도인들’, ‘길을 따르는 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새 계약을
맺은 하느님 백성의 가장 보편적인 이름으로 여러 세기에 걸쳐 지녀 왔던 이름은
‘교회’이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
(‘지옥의 문’)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 할 것이다”(마태 16,18). 예수께서는
교회를‘내 교회’라 하셨다. 당신이 교회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 교회는 하나이다 >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4, 4-6). 요한복음에서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요한 17,21).
- 일치의 근본은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당신 백성 즉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데 있어 그 원천이 되는 것이다. 거룩한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자의 일치를
이루는 연결 고리가 성령이신 것과도 같다. 가톨릭교회는 예수께서 정신적으로 그리고
외적인 형태로 일치된 교회를 지향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 교회는 가톨릭(보편성을 갖는 교회)이다 >

-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원래부터 단 하나였다. ‘가톨릭’이란 용어는 초대 교회의
순교자인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가톨릭교회’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전체 교회’ 혹은 ‘만민 공통의 교회’라는 뜻으로 전 세계에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전체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리하여 ‘가톨릭’이란 말은
‘정통’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일체의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포괄하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톨릭’임이 사실이다. 그것은 만인 공통의
것이며 모든 백성과 민족, 그리고 문화를 품어 안은 것이다. 새 계약을 맺은 하느님의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는 데 믿음으로
응답한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백성이다.

< 교회는 거룩하다 >


- 교회는 그 자체의 완전성이나 공로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따로
갈라놓으시고, 당신의 자비를 받도록 선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써 주어진 것으로,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이 거룩한 나라 즉 교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은 특권을 받게 된 것에 감사
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
하고 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

< 사도로부터 전해 오는 교회 >

- 사도로부터 전해 오는 교회는 사도들의 사명을 계승해 간다. 그리스도교인 각자는
모두 선교사이자 복음 전도사이다. ‘사도로부터 전해 오는’이란 말은 사도들에
의한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을 위시한 주교들이
교회의 전 역사를 통틀어 사도들의 지도력과 권위를 계승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는 사도들의 지도력과 권위가 그들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의 성무를 통하여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교로 부름을 받는다는 가톨릭적 의미는, 현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거슬러 이어지는 끊임없는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들처럼 현재의 주교들도
전 세계에 걸쳐 새로운 지방 ‘교회’들을 세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넓혀
나가는 끊임없는 노력을 행하게 된다.

[ 2장. 사도들과 교부들의 교회(50-600년) ]

- 사도들의 교회 시대(1세기)라 함은, 초대의 위대한 그리스도교 지도자와 신학자의
시대를 말한다. 이들은 통상 ‘교회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교회의 이 시기는
보통 ‘교부’시대로 불려지고 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인물, 사건 및 운동을 살펴보면
7세기에 이르기 까지 가톨릭교회의 발전 형태를 알 수 있다.

< 1세기 : 기초 쌓기 >

- 1세기 중에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이야기는 신약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 교회가 예루살렘의 본거지에서부터 로마 제국 각지의
이교 지역과 로마에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 전도 사업은 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담당하였다. 1세기는 비교적 태평스러운 시대였고 여기에다
로마 제국이 건설해 둔 훌륭한 육로와 안전한 해상 교통망 덕분에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확산이 가능하였다. 공통의 문화와 언어 또한 급속한 확산을 촉진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 1~2세기에 개종자들은 대부분 로마 사회에서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여자, 평민,
노예)이었다. 처음에 로마 제국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였다. 64년 로마의
네로 황제 시기에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가 순교하였다.
초기 박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들을 카타콤바(지하 동굴 무덤)에 묻거나
거기에 숨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주일에 모여 기도하고, 히브리 경전을 읽고,
예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나 사도들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면서 예수께서 명하신대로 성체를 영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1세기 말에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를 하였다. 그리스도교 주교들은 사도들의 사후에
그들을 계승한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하느님 백성을 위한 신앙의 모범이 되어 계속
활동하였다. 사도 베드로를 이은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교황 등 1세기가 끝날
무렵, 로마 제국 안에는 그리스도인 대략 5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 2세기 : 교회 확장과 신앙 수호 >

-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순교를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로 여기고, 순교자들을 지극히
존경하였다. 2세기 시작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모범적인 주교
폴리카르포, 이냐시오를 들 수 있다. 영웅적인 여인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성녀 페르페투아, 펠리치타가 있다. 2세기에 들어와서 교회의 지도층 구조가
확실한 형태를 갖추게 되고 그 형태는 오늘날의 가톨릭교회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주교가 성무를 집행함에 있어 그 아래 ‘장로들’(뒤에 ‘사제’라
칭함)이 있어, 해당 지방에서 성체성사와 다른 여러 가지 성사를 집행하게 하였다.
주교는 ‘부제’들의 보좌를 받게 되었는데, 이들은 각 지방 교회를 운영하는데 있어
실무적으로 필요한 업무(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봉사)를 담당하였다.
교회의 공통적인 가르침들(각종 기도문, 교리 교재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교회
전례라고 불리는 계시된 문서들의 공식 목록을 작성 (신약성서 문서 선별 등)하기
시작했다.

- 신앙의 수호자인 리용의 이레네오 주교는 그릇된(오류) 가르침들에 대해 대응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앙을 논리와 철학을 통하여 설명하거나 수호할 수 있는 위대한
지성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동 지중해의 유스티노, 리용의 이레네오, 아테네의
아테나고라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등이 있다. 2세기 중에는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박해는 빈번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더욱 널리 전파될 수 이었고
로마 사회의 상류층 사람들의 개종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2세기가 끝나 갈 즈음, 로마
제국에는 그리스도교인이 2백만에 이르게 되었다.

< 3세기 : 박해와 신학적인 발전 >

- 3세기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팽창과 더불어 그 조직과 신학적인 면에서 발전을
이룩한 세계였다. 200년에서 250년에 걸친 이 시기는 비교적 평화스러웠기 때문에
교회로서는 복음 전파와 조직 강화에, 또 신학자들에게는 사색과 집필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비교적 태평스러운 이 시기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점점 안위와
나태에 빠져들었다. 250년, 데치우스 황제가 점점 늘어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수에
위협을 느끼고 전국적인 박해를 시작하자, 교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집정관의 면전에서
제물 바칠 것을 거부한 교인들은 모두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 이렇게 순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죽음을 앞두고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앙을
버렸다. 다음해인 251년에 이 박해는 멈추었으나, 박해 중에 신앙을 버린 사람들은
다시 교회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격심한 논쟁이 일어났다. 로마의 코르넬리오 주교와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주교는, 비록 배교라는 중죄를 저질렀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
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가르쳤으나, 배교자들에 대한 보속은 길고도 가혹한 것이었다.
로마의 장로였던 노바시아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신앙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그들만의 교회를 따로 만들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하느님
께서 죄짓지 않은 사람뿐만 아니라,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까지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 이 문제는 303년에서 311년에 걸쳐 일어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한 박해 때
다시 불거져 나왔다. 이때 주교들과 사제들은 성서를 정부에 이관하고 다른 모든 종교
서적을 불태우라는 강제 명령을 받았다. 박해가 끝나자, 북아프리카의 한 교도 단체는,
박해 중에 도망을 갔거나 교회 서적들을 넘겨 준 주교나 사제의 권위는 비록 그들이
속죄했다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주교 중 한 사람인 도나투스의
이름을 따 도나투스교라는 자체의 교회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교회서적을 넘겨주지
않은 지도자들의 권위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환난 중에’ 실수를 저지른
이들 지도자들에게도 그리스도 친히 주신 권위가 있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 가톨릭 세계에서 적용되는 중요한 원칙은 다음의 사실에 근거를 둔다. 교회에서
성사를 행하고 가르치고 지도하는 권위는 서품 받은 사제의 개인적인 가치나 성스러움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제에게 주어진 권한과 성사의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3세기 중에 이룩된 가장 좋은 교회의 모습은
성 치프리아노가 제시한 모습, 즉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방주 또는 배로서, 그 안에서
죄인들과 성인들 그리고 순교자들까지 모두 품어 안은 곳이다.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찬
이교도의 세계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것이다.

< 4세기 : 그리스도교 제국과 아리우스파 위기 >

- 데치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같은 로마 제국 황제들의 지독한 박해 속에서도
300년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5백만에 이르게 된다. 당시 이 제국 전체의
인구가 5천만이었으니 이는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311년에 접어들면서, 갈레리우스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나긴 박해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다음해에 일어난
한 사건 때문에 가톨릭교회와 서양 문화 전체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
(서부 지중해 지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비전과 종교적인 경험에 입각하여, 무엇이든
정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로마 근교의 밀미안 다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
었는데, 이 승리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해인 313년에 드디어 동로마의 황제인 리치니우스의 동의를 얻어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고 전 로마 제국에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그제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 324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가 유일 황제가 되자 그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고, 이를 로마 제국을 단합시켜 주는 힘으로 여겨, 지금까지의 로마 제신들을
그리스도교로 대체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짓고, 주일과 성탄 대축일 등 여러
그리스도교 축일들을 지키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 공표하고,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을
보호하였다. 그는 313년부터 줄곧 자기가 그리스도교인이란 것을 고백하고 337년
임종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것이 진정하고도 티 없는 축복이 아니란
사실을 교회는 알게 되었다. 4세기의 역사에서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수많은 긴장을
야기하게 되었다.

- 그 한 예가 아리우스파 위기이다. 이는 그때까지 교회가 직면했던 그 어느 것보다도
아니 가톨릭교회 전 역사를 통하여서도 가장 큰 도전이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리우스란 이름을 가진 한 사제가 ‘하느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은 하느님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의 가장 고귀한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여러 성서 구절(요한 14,28 ; 마르 13,32/15, 34, 마태 27,46)을
인용하면서 특히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다. 놀랍게도 많은 가톨릭 주교들까지도
아리우스가 옳다고 여기게 될 정도였다. 주교들이 이러한 사상에 관하여 토론하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이 제국의 단합을 해치는 행위로 보고 이에 개입하였다.
325년에 그는 전 주교들을 터키의 니체아에 소집하여 최초의 공의회인 세계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주교들은 아리우스가 틀렸다는 것과 아울러 교회의 신앙을
확실히 하는 신경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 니체아 신경에 의하면, 예수는 성부와 ‘동질’
또는 ‘한 존재’ 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성부가 하느님이라면 성자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성자가 하느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렇게 하여
단죄가 된 것이다.

- 이런 논란은 이쯤에서 끝내어야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아리우스파들은 몇몇
주교를 더 끌어 들여 태도를 바꾸게 하고 새 황제에게 이를 확신시키려 했다. 여기서
부터 교회가 로마 정부에 관여하는 불행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친 아리우스파
주교들이 새 황제와 그 후계자들을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기울여 놓자, 이 황제들은
니체아 신경을 지지하는 주교들에게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실상, 많은
친 니체아 주교들을 강제로 교구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 이 위기가 지속되는 동안, 니체아 공의회 이념은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였다.
361년에 성 예로니모의 글(“전세계가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는 모두가 아리우스파가
된 것을 보고 탄식하게 되었다”)을 남긴 이후 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아타나시오의 노력에 힘입어 니체아 신경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아시아로부터 세 사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곧 (체사레아의) 바실이오, (나사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였다. 그들의 글과 영향력은 그때까지 중립을 지키거나 니체아
신경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던 주교들을 납득시키게 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라는 것과 성령도 카파도치아의
교부들이 주장한 대로 완전한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주일 미사 때마다 외고 있는 니체아 신경은 일찍이 381년의
이 공의회에서 주교들이 확인한 신앙 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리우스파
사상은 이미 로마 제국 주변의 여러 부족들 사이로 전파되어 있었고, 훗날 이들이 로마
제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5세기부터 가톨릭교회와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데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이 그들이다.

-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끝나자, 순교가 신앙의 척도가 되던 시대도
끝나게 되었다. 4세기에 들어,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의 영웅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집트의 안토니오(사막생활, 훌륭한 영성가), 성 아타나시오(수도와 고행 전파),
파코미오(사막에서 고행공동체 조직), 카파도치아의 교부들 바실리오(수도자들의
규칙, 생활규범 제정)와 그레고리오(주교), 콘스탄티노플 주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황금의 입’), 투르의 성 마르티노(프랑스 수도원 창설), 서방 교회의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고백록, 신국론 등 저술)와 성 예로니모(성서 학자) 등이다.

- 4세기는 가톨릭교회로서는 위기의 시대이면서 한편으로는 위대한 시대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주교는 새로 개종하는 이들을 위한 교육 제도(교리 문답서)를
정비하였다. 343년에는 사르디카 교회 회의에서 모든 서방 교회에 대하여 로마
주교인 교황이 전권을 행사하도록 권한을 부여하였다. 교황 다마소(재위 366-384)는
교황의 권위는 베드로에게 전권을 위임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성 암브로시오는 교황의 이러한 권위를 지지하였다. 교황과 주교들의 용기와 권위는
다음 5세기에 이르러 신학적 불화와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격심한 시련에 부딪치게 된다.

< 5세기 : 신앙의 문제와 새로운 정치 구조 >

- 5세기는 희랍어를 사용하는 동방 제국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제국이 결정적으로
분열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방은 410년, 알라릭 지배하의 서고트족에 의한
로마 침략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반달족이나 훈족과 같은 다른 부족들이
서방 제국을 정복해 들어오더니 결국 476년에 이르러 이들 부족들이 로마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로마의 정치권력이 분해됨에 따라, 교황과 주교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실질적으로 또 영성적으로 지도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가장 용기가 있었던 교황은 레오 1세(재위 440-461)였다. 그는 훈족인 아틸라가
로마를 침공하지 않도록 설득했으며, 반달족인 가이세릭으로 하여금 로마를 침공하더라도
도시를 파괴하지 말 것을 설득하였다. 6, 7세기에 접어들면서, 가톨릭신자들이 수많은
아리우스파 신자들을 정통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켰다. 교회는 종종 개종이란 방식으로
‘정복자를 정복’ 하였다. 서방 가톨릭교회를 가장 괴롭힌 신학적인 도전은 펠라지우스
이단이었다. 그는 영국인 수도자로, 그는 인간 본성이 원죄에 의하여 부패되었다는
것을 부정한 사람이었다. 사람은 죄를 피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훌륭한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아우구스티노가 펠라지우스
주의를 반대함에 있어 너무 극단적으로 가버리자 529년 오량쥬 회의에서는 그의 견해에
대한 수정 교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즉, 여하한 선행이라도 그것은 하느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의 협력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 동방 제국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 주교들이나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학적
문제에 몰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안티오키아
학파)는 성모 마리아를 ‘신의 잉태자’ 내지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기를 거부했다.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기에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존재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하느님과 인간을 혼동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교 치릴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데 있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이렇게 부름으로써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일치를 옹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문제는 431년에 열린 에페소 공의회에서 해결되었다. 마리아는
인성을 취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사람의 모습을 띤 하느님의 어머니이지, 신성을 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으로, 마리아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며, 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둘러싸고 5세기 중반에 또 다른 하나의 논쟁거리가 불거져
나왔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사이의 정치적 적대 관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예수가 단지 하나의 본성 즉 신성만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신성과
인성 두 개의 명확한 본성을 같이 보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심각한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다. 최종적인 결의는 451년에 열린 칼체돈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다. 이 공의회
에서는 예수가 신성과 인성 두 본성으로 존재하며 이 둘 사이에는 혼동이나 변동이
있을 수 없고, 서로 나뉘지 않음을, 즉 육신을 취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나이며 나뉘지
않는’ 사람으로 형성된 예수 그리스도를 선언하였다. 동방 교회의 일부는 칼체돈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의 본성, 즉 신성만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계속 견지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단성론자라 이름 붙이고, 그들만의 교회를
제국의 동쪽에 세웠는데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 동방 교회는 5, 6세기 중에 신학 사상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비잔틴 신학이라
일컬어지는 이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포함하는 그리스 철학 사상으로 보강
되었다. 비잔틴 신학은 성서는 물론이고 그리스 교부들로부터 알렉산드리아 치릴로
주교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권위있는 자료로 받아들였다. 동방(비잔틴) 그리스도교인들은
대단히 화려하고 의미 깊은 예식을 발전시켰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유지
되고 있다. 이들은 신앙의 신비로움과 거룩함을 강조하였고 그들의 전례는 대단히
극적이며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전례 같은 것을 발전시켜
서방 전례와는 점점 차별시켜 나갔다. 동방 교회 역시 마리아와 성인 및 유해 등에 대한
공경은 강조하고 있다.

< 6세기 : 한 시대의 종언과 새 시대의 전개 >

- ‘교부들의 시대’로 불리었던 위대한 신학적 영성적 교화의 시대는 6세기로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서방 교회는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부족들의 침입
으로부터 살아남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비교적 안정을 구가하고 있던 동방 제국이
이슬람의 침략 위협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완전히 정복당하고 말았다. 서방 제국에서는
아리우스파의 통치를 받으면서 이들 아리우스파 부족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고, 그들 제국이 하나 둘씩 붕괴(532년 부르군트족, 533년 반달족, 553년
서고트족)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프랑크 제국의 왕인 클로비스는 496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교회의 위대한 지지자가 되었다.

- 529년에 성 베네딕토는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에 수도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한 곳에 정착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일하고 기도하는’ 분별 있는 정책 덕분에,
성 베네딕토의 여러 수도원들은 로마와 서방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곳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치하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은 거대한
선교 세력이 되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의 업적은 세 가지 상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십자가(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령사들), 책(서방 문화의 개척자이며 보존자),
그리고 쟁기(문명과 새로운 정착지의 발굴자들)이다.

- 성 베네딕도 전에도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파하고(461년) 이집트의
성 파코미오의 초기 수도원을 방불케 하는 엄격한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아일랜드인
수도자 성 골롬바노는 563년에 스코트랜드의 이오나에 수도원을 세웠다. 영국에서의
개종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교회의 중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제3장. 중세의 가톨릭교회(600년-1300년) ]

- 그리스도교 역사 상 중세의 700년은 새로운 사람들과 부족들의 개종을 그 특징
으로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와 전쟁의 시기였고 가톨릭교회로서는
정부와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려는 투쟁의 시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서방에서는
이런 노력의 결과로 교회와 정부가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교 국가’의 등장을 가져
왔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훌륭한 성과를 많이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교황과 황제들
사이, 국가와 다른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그칠 날이 없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의 갈등도 일어났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중대한 이단이나 왜곡 사상도 나타났다.

- 한편, 중세 동안 그리스도교에서는 엄청난 진보를 이룩하였다. 위대한 성인들과
학자들이 출현하였고 그리스도교 문화는 예술, 문학, 건축 및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하였다. 새로운 종교 질서가 꽃을 피워 교회에 새 생명을 불어
넣었고, 오래 전부터 전해 오던 수도회 질서도 쇄신되었다. 이 시기 동안 때때로
교회가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간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으나 하느님은 교회로
하여금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과 승리를 이룩하도록 축복해 주셨다. 이 시기에
유럽 전체를 그리스도교 대륙이 되도록 하였으며 동방에서도 이슬람교의 팽창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 7세기 >

- 옛 로마 제국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성 그레고리오 교황(재위 590-604)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중세 동안 서유럽에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를 다졌다. 세속의
통치자들이 하지 못할 때에는, 교황이 친히 중부 이탈리아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부터 로마를 구한 것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사절들을
서방의 각 교회로 파견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교황에 대한 충성을 견고케 하였다.
그의 신학적 영성적 저서들은 중세 교회 사상의 뼈대를 형성하였다.

- 베네딕토회 수도자인 아우구스티노를 영국에 파견하여 앵글로 색슨족들을
개종시키고, 켄트의 애덜바트 왕은 세례를 받았으며, 아우구스티노는 캔터베리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인 성 베다가 쓴 ‘영국 교회와 백성의 역사’란
책에서 영국의 개종과 그리스도교 전파의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곧이어, 영국이
베네딕토회의 윌브러드 같은 이들을 유럽에 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고, 훗날
그는 ‘네델란드의 사도’란 칭호를 얻음과 함께 그 나라의 주교가 되었다.

- 한편, 동방 교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3차 공의회(680-681)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주교들은 예수가 신성 의지 하나만을 가진다는 소위 단일 의지론이라
불리는 이단 사상을 단죄하였다.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모두 띄는 한, 인성 및
신성 의지를 다 가져야만 옳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모하메드가 632년에 죽은 후
그의 도제들이 군사력을 키워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이 두 차례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방 그리스도교 군대에 의하여 패배하고, 732년 투르 전투에서 칼 마르텔에게
패배당하고 나서야 유럽 대륙은 가까스로 이슬람 정복을 면하게 되었다.

< 8세기 >

- 유럽 대륙에서의 개종은 영국 베네딕토회 수도자 윈프리드의 지도 아래 계속되었다.
그는 복음화 사업을 전개(723-739)하여 ‘독일의 사도’가 된 성 보니파시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교황의 지시를 받고 유럽에서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다 죽어 간
베네딕토 수도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며 보니파시오도 그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은 보니파시오의 도움을 받아 피핀으로부터 시작하여 갈리아의 프랑크
(지금의 프랑스) 왕들과 동맹을 체결하였다. 754년에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피핀
왕을 성유 축성하고, ‘로마인의 귀족’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이로써 교황과
프랑크 왕들 간의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게 되었고, 800년에 피핀의 아들, 칼 대제가
로마에서 즉위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 칼 대제는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거부하고, 비잔틴
황제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한 땅을 빼앗기 위해 싸움을 벌였으며, 동방 교회로 하여금
니체아 신경에 ‘filioque’라는 새로운 말을 삽입하도록 강요하는 등 양교회의 관계
개선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니체아 신경에는 본래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온다
(요한 15,26)는 구절이 있는데, 칼 대제가 지지한 서방 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filioque)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칼 대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수호자이자 육성자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지배하면서 신학적인 결정까지도 자기가 내리려 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 칼 대제의 선교 방식은, 어떤 영토를 정복하고는 거기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받든지 아니면 ‘피로’ 세례를 받든지의 선택을 강요하는 그런 식이었다. 당시의
대중들은 대체로 문맹이었다. 그들은 통치자의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가혹한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앙은 종교 이상으로 발전하였고,
여기서 사람들은 교리 교육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무더기’로 세례부터 받게 되었다.
교회로서는 사람들이 이교 사상으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문명을 보존하고
신앙에 무지한 사람들을 지도하기 위해 수도원이 나서게 되었다. 칼 대제도 자기
궁전에 학자들을 소집시켜 교리 공부를 시키도록 하였고, 모든 주교들로 하여금
교구에다 학교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칼 대제가 죽고 왕조가 분할되면서
점차 식어 갔으며, 수도원을 제외하고 유럽은 지적 영성적 암흑시대로 빠져 들어 갔다.

- 동방 그리스도교 역시 이슬람 군대와 싸우면서 신학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730년에 비잔틴 황제인 레오 3세가 이콘에 대한 공경례를 금지시키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림에 대한 숭배’는 성서에서 금지되어 있다고 여겨, 모든 이콘의 파괴를
명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와 수많은 동방 그리스도인교들이 이에 항의하였고,
이레네 여왕이 787년에 제2차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콘에 대한 공경례를
다시 승인하고서야 겨우 환원되었다. 이콘에 대한 ‘공경’은 하느님이나 성인들의
성상에 대한 것으로,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차별을 짓게 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항상 이를 지지하였고, 신자들로 하여금 신아의 진리를 깨닫고 배우도록
그림,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이나 벽화들을 끊임없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는 “그림이야말로 평신도들의 책이다”라고 표현했다.

< 9세기 >

- 9세기는 서방 가톨릭교회에게 희망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칼 대제가
북부와 중부 유럽에 걸쳐 자기의 신하들에게 그리스도교를 강요하였고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서, 이교 사상에 물들었던 과거를 부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교황의 영향력 또한 점점 강대해져 갔으며, 칼 대제의 사후 그의
후계자 루이 성왕은, 왕위 권위는 교황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루이 성왕의 아들, 로다르는 823년에 로마에서 즉위하였고, 그 이후로도 신성
로마제국의 모든 통치자들은 로마에서 즉위하게 되었다. 이 세기중 가장 강력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1세(재위 858-867)는, 황제들의 사명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는 것이지 교회를 통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 불행하게도 황제의 세력은 내부적인 어려움과 북쪽 바이킹족의 침략 그리고
동쪽과 남쪽으로부터의 훈족과 모슬렘, 사라센족의 침략으로 약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칼 대제가 이룩해 놓았던 대제국의 단합과 평화는 점점 무너지기 시작
하였고 급기야 유럽 대륙은 봉건 제후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서방 제국의
멸망은 동시에 서방 교회의 쇠퇴를 동반하게 되었다. 니콜라오 1세 이후,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잘 이끌어 갈 만한 교황이 나타나지 못했다. 한때는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일시적인 분열의 시대까지 있었다.

- 9세기가 끝나면서 이슬람이 동방 교회를 억압하게 되었고, 서방 교회는 정치적인
불안정과 허약한 교황들 때문에 질식할 정도였다. 사제는 세속의 통치자들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었고 그들의 독신주의는 점차 불충실해져 갔다. 심지어는 수도원들마저
열의를 잃고 세속화되거나 부패되어 갔다. 서방교회와 사회는 나란히 쇠퇴해 갔다.
9세기가 끝나갈 무렵, 두 사람의 수도자, 즉 메토디오와 치릴 로가 동부 유럽의
카자흐와 슬라브 사람들에게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새로운 백성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불어넣어 주었을 뿐 아니라, 특히 치릴로는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슬라브
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언어와 문명을 이룩하도록 도와주었다.

< 10세기 >

- 때때로 그리스도 교회의 영성이 당시 사회의 영성보다 나을 바 없는 시기가
있었던 것은, 불행이지만 사실이었다. 10세기가 그랬다. 처음 60년 동안 교황청은
로마의 귀족들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그 중 요한 12세(재위 955-964)는 어찌나
부패했던지, 하느님께서는 세속의 통지자인 오토 1세의 손을 빌어 그에게서 가톨릭
교회를 거두셨다.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최초의 독일인 황제이다. 오토와 그
후계자들은 제국의 질서를 바로 잡는데 있어 가톨릭교회를 도구로 사용할 생각을
하였다. 평신도에 의한 서품 수여 제도, 즉 황제들에 의하여 주교와 교황까지도
선임하는 이 제도가 그들이 교회를 통제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였다.

- 다행히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이 시기에 독일인 황제들이 지명한 교황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교황 실베스테르 2세(재위 999-1003)가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서방 교회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교회 쇄신의
관건은 수도 생활의 쇄신이었는데, 910년 프랑스에서 클뤼니회라는 새로운 수도원을
시작으로 그러한 쇄신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수도원은 베네딕토회였는데 특정 수도자
들을 따로 떼어내어 전적으로 기도만 하게하고, 또 모든 수도자들에게는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 외에는 침묵을 요구하는 제도를 채택했다. 이 수도회는 크게 번성하여
1100년에 이르러서는 그 분원의 수가 1,500여 개로 늘어났다. 클뤼니회를 시작으로
다른 수도원의 개혁도 뒤따르게 되었으며 아울러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도 늘어났다.
성 로무알도에 의한 카말돌리회와 성 브르노가 창설한 카르투스회가 그런 것들이다.

- 이런 거룩한 불씨는 11세기에 이르러서는 여러 수도원에서 많은 수도자들이 배출
되어 개혁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교구의 주교가 되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불러오게 되었다. 뒤 이은 두 세기 동안 나타난 위대한 교황들,
그레고리오 7세, 우르바노 2세 및 파스칼 2세 교황들이 모두 클뤼니회 출신 수도자들
이었음이 이를 말해 준다.

< 11세기 >

- 오토 제국의 독일인 황제들은 11세기에 들어서도 서방 교회를 계속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유능한 교황을 지명하고 또 교회를 지원하게 됨으로써 생각지도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황제나 세속 통치자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교황과 주교를 선임하는 것은 교회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자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황제까지도 가톨릭교회의 위계가 갖는 영성적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교황도 실제로 이것을 행동으로 옮길
만큼 용감하고 강력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073년에 와서, 힐데브란트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불같은 성격에다 구약성서의
한 예언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그레고리오 교황은 저 유명한 교황 훈령(1075년)을
통하여,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내려 주신 지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교황은 교회 안에서 만유의 권위를 갖고 있으며 황제도 해임할 수 있는
권리와 하느님의 법이나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여하한 법률도 개정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하였다.

- 그레고리오 교황은 자기의 권위를 동원하여 가톨릭교회 각층에 이르기까지 개혁을
단행하였고 가톨릭교회가 교황을 통하여 쇄신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우선
사제들로 하여금 독신 서약을 성실히 지킬 것과 성무에 대한 금품 받기 등 모든 형태의
금품 수수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교황의 위력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가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지 않게 되자 그를
파문한 것이었다. 이는 반대로 독일 왕자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레고리오 자신이 유배되어 1085년에 죽었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치적은, 수도원의 도움을 받아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을 크게 일으키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하려는 세속 통치자들의 지배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킨
것이다. 다만 그는 가톨릭교회가 수세기 동안 믿어 온 교황의 지도력을 실제화 시키고
강화시킨 것이다.

- 10세기의 교황들에 뒤이어, 교황 우르바노 2세(재위 1088-1099)와 파스칼
2세(재위 1099-1118)도 강력하고 거룩하게 쇄신과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방에서 모슬렘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고 십자군 창설을 요구하게 될 정도로 교황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강화하였다.

- 11세기는 교회의 역사상 가장 슬픈 사건이 일어난 세기로 특징된다. 1054년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이는 분명 한 백성 한 교회를 이루시려고
예수를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교황을
지상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가톨릭교회와, 총대주교가 이끄는 정교회로 쪼개어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동서의 분열이 성직제도(교황의 수위권에 관한)와
신학적 문제(‘filioque’에 관한)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데 있어 해결되지 않은 두 가지 커다란 장벽이다. 교황의 수위권에
관하여, 문제는 교황이 전체 교회에서 전부를 지배하고 교도하는 권위를 가지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서방 교회는 교황이 그것을 가진다고 믿고 있는
반면, 동방 교회는 모든 총대주교는 동일한 권한을 가지며 로마의 주교도 그 중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1054년 서방 가톨릭교회 교황이 보낸 사절단과 동방 교회 총대주교가 보낸 사절단이
쌍방 간에 파문되었다. 그 후 줄곧 풀리지 않았다가, 1965년에 와서야 교황 비오 6세와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가 서로 만나 따뜻하게 포옹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도움으로, 동방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시 통합하는 일이 지금은 한창
진행 중이다. 교회의 여러 가지 잘못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계속 전파
되어 나갔다. 11세기에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스웨덴이 그
뒤를 이었다. 러시아는 동. 서방 양쪽의 선교사를 모두 받아들였으나, 후에 러시아
왕자가 비잔틴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어, 이것이 모스크바에 교구를 둔 러시아
정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 12세기 >

( 1. 서방에서의 교회 – 국가 관계 )

-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주교나 수도원장을 선임하는 권한을 놓고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러다가 1122년 ‘웜스의 정교 협약’의 체결로 양자 간에 타협을 이루게
되었다. 이 조약은 주교나 수도원장은 교회법에 의하여 선출되나 민간 통치자가 필요
하다고 생각하면 민간 기구를 이용하여 그들을 조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12, 13세기의
교황들은, 교황령의 자유를 수호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여,
그들 나라 중 어느 하나의 통치자가 교회를 지배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각각의
통치자들이나 나라들과 어깨를 겨누어 가느라 평온할 날이 없었다.

-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기 위하여 1159년에 로마를
점령 하자,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도피하게 되었다. 그 후로 알렉산데르 교황은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동맹과 연합하여 1170년에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레가노에서
격파하고, 프리드리히와 화해하게 되었다. 교회와 화해한 프리드리히는 1187년
예루살렘의 함락 후 제3차 십자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 영국에서는 캔터베리의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가 교회의 권위와 자유를 위해 분기하여
투쟁하다가 노르만인 왕인 헨리 2세에게 밀려 6년간이나 프랑스로 도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대주교가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 왕은 그의 귀국을 허용하였으나
토마스가 계속해서 교황을 지지하자 살해하였고, 이에 교황은 헨리를 파문하였다.
나중에야 헨리는 스스로 속죄하고 교회에 대한 적대 행위를 철회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그의 무덤에서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이 인정되어 1173년 성인품에 올랐다.

( 2. 십자군 )
- 교황들은 모든 정치적인 투쟁을 세속 통치자들의 음모와 지배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황이 유지하고 있던 군대나 군사 동맹은 교황의
영토를 방위하고 교회를 자유롭게 통치하려는 일종의 자위 수단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경우는 이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십자군은 모슬렘 지배에 놓여 있는 성지를 회복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호와 아울러 그리스도교인들의 순례를 보호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조직한 원정군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정당한 전쟁’이라는 사상을 주창하였고,
교회는 십자군이야말로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실제로 십자군에 참가한
모든 사람은 그들이 범한 일체의 죄에 대해 사면 받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 이론적으로는 십자군이 정당화될 수 있었으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이들이
일으킨 전쟁의 결과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제1차 십자군은 군사적으로는 성공
이었으나 안티오키아의 그리스 총대주교를 축출함으로써 로마와 동방교회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수많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1146년, 덕망 높은 베르나르도가 제2차 십자군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지지하는 설교를 하였지만, 이번에는 군사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189년의 제3차
십자군은 터키의 살라딘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나
여기서 얻은 것은 고작 성지로 순례하는 그리스도교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을
체결한 것뿐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그 목적한 바에는 상당히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고,
나중에는 십자군의 지도자들이 거룩하지 않은 동기로 자주 군대를 일으킴으로써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교의 관계만 악화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 3. 교회 개혁과 초기 이단 사상 )
-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은 11세기에 시작하여 12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베르토는
1098년, 시토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시토회의 창시가 되었다. 시토회는 오래지
않아 클뤼니회를 능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회가 되어 나중에는 산하에 600개가
넘는 분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교회의 쇄신 활동이 활발해지자 수도원을 포함하여
가톨릭교회 전체가 풍요로워 졌다. 또 정치적인 영향력이 점점 커져 감에 따라 더 참되고
급진적인 복음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선언하는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는 알비파 단체가 나타났다. 또 다른 단체인 발두스파와 휴밀리아티는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처음에는 교회의 개혁과 청빈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점점 가톨릭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 결국 이단으로 선고 받기도 했다. 이들 단체는 즉각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그것도 교황이나 주교의 권위까지도 무시하면서 이루기를 희망하였다.

( 4. 신학과 문화 )

- 수도원과 수도원 학교는 여러 가지 면으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다주었다.
사원들은 네모난 로마네스크식 건축이 사라지고 치솟는 첨탑식 고딕 건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왕에 초전을 맞추었던 초기의 작품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상으로 대체되었다. 사람들의 신앙심은 더욱 사적(私的)내지 개인주의적이
되어 갔으며, 성인들과 성모 마리아에게 귀의하는 신심이 두터워져 갔다. ‘실체변화’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며, 이것은 빵과 포도주가 각각 성체와 성혈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 12세기는 스콜라 신학의 등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것은 학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앙의 신비와 신학을 이해하는데 이성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신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한다고 믿었다. 이 세기 중의
위대한 신학자들을 이끌고 간 분이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1033-1109)로, 그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었다. 롬바르드의 ‘판단의 서(書)’는 대단히 짜임새 있는 저서로
13세기 대부분을 풍미한 신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다시피 했다. 카말돌리회 수도자
그레티아누스가 저술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법은 12세기 새로운 전례 규칙의
모체가 되었다. 교황들은 정치적 투쟁을 일삼고 십자군의 결과도 뒤죽박죽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12세기 교회에서도 분명히 역사하고 계셨다.

< 13세기 >
- 13세기야말로 중세의 꽃이요 그리스도 왕국 최고의 시절이었다. 삶의 구석구석에
교회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문화와 지식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물론 어두운 시기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십자군과, 이단자들에 대한
종교 재판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성취의 빛이
어두움을 없애고, 가톨릭교회를 오늘날까지도 비추어 주고 있는 것이다.

( 1. 교황과 공의회 )
- 13세기는 가장 영향력이 큰 교황들을 탄생시켰고 가장 성공적인 공의회도 여러 번
열린 세기였다.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는 인노첸시오 3세로 그는 모든 세속 통치자들을
교회에 복종시켰다. 이에는 설득이나 파문, 성사 수여 금지 등의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다만 그가 교회를 개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완전하게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1215년에 그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여기에는 400명 이상의 주교와 800명이 넘는 수도원장과 종교
단체 장상들 그리고 세속 통치자 대표들까지 참석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발표한 개혁
회칙은 가톨릭 신자는 고백성사를 받아야 하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부활 시기 동안에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하는 등의 의무 사항들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 공의회에서 ‘실체
변화’라는 말과 아울러 이단자들을 억압할 수 있는 조치 즉 종교재판도 승인하였다.

-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최초로 그리스도의 대리자 칭호를 얻은 분으로, 교회의 청빈
운동이나 탁발 제도를 활성화시켰다. 1209년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리고
1215년에 도미니코 구즈만이 각각 창설한 가난한 사람들의 탁발 수도회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예전에 가톨릭교회를 떠났던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임’
이나 ‘가난한 가톨릭인들의 모임’등을 다시 데려 왔다. 그는 교회의 개혁과 강화를
위하여 남긴 업적이 중세 어느 교황보다 많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 13세기 중에 있었던 교회의 개혁에 기여한 두 공의회는 리용의 제1차(1245), 제2차
(1274) 가 있다. 이 두 공의회가 프랑스에서 열린 이유는 로마에 있는 교황이 정치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교황에게 충성하였고 동시에 루이 9세 같은
어진 군주에게도 충성하면서 교회를 돕고 보호하였다. 13세기의 마지막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동시대의 여러 교황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업적을 이룬
분이다. 그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높였으며, 유명한
교서인 ‘Unam Sanctum’을 발표하고, 교황이 교회와 전체 그리스도교 사회 질서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1300년에 반포한 희년은 최초의 것으로, 100만
명 이상의 로마 순례자를 모을 정도로 대성공을 이루었다. 교황의 권위가 절정에 이른
것은 인노첸시오 3세 때와 보니파시오 8세 때였다.

( 2. 십자군과 종교 재판 )
- 이 세기 중에 어두운 면이 생겨난 데는, 동방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토를 보존하고
이단을 힘으로 몰아내려던 교회의 억지 노력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제4차 십자군은
1202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일으켰지만 그의 허락도 없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서방에 우호적인 황제를 임명했다. 1204년,
병사들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마구 짓밟고 약탈을 일삼았다. 동방의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쓰라림을 안겨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해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제5차 십자군 원정(1218-1221)은 그런 대로 성공적
이기는 했으나,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제6차 십자군 원정(1228-1229)
중에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전쟁만 15년이나 끌게
되고 말았다. 결국 성지는 십자군이 1291년 아크레에서 패배하는 것을 끝으로 영영
서방 교회의 지배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 후로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영토든, 설령 그것이 성지라 할지라도 그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국가 간의 싸움도 용납하지 않았다.

- 가톨릭교회는 이 13세기 중에 또 다른 전쟁을 하고 있었다. 교회가 가진 부와 그로
인한 부패 때문에, 카타르파와 발두스파와 같은 특정 단체는 유럽의 교회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내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정하고 성사를 거부하며 사제의 영성적인 권위 또한
부정하도록 가르쳤다.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교회에서는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의
의혹이 있는 사람들을 심문하기 위한 사법 절차와 재판 제도를 설립하게 되었으니,
이를 가리켜 ‘종교 재판’이라 일컫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이 종교 재판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이단자들로 하여금 속죄하고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며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 3. 청빈 운동과 탁발 수도회 )

- 이탈리아의 아시시 출신인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성 다미아노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내 교회를 다시 세워라” 라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때 그 교회는 쓰러져 가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에 프란치스코는 교회
건물을 수리하려 들었으나, 주님께서는 가난한 그리스도를 닮아 절대적인 청빈
속에서 복음적인 삶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라고 하셨다. 프란치스코는 11명의 동료
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그들이 만든 단순한 생활 규칙을 허가해 줄 것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프란치스코의 친구인 성녀 클라라가 프란치스코회의
한 분원으로 ‘가난한 클라라회’를 창설하였고 이 수도회 역시 번성하였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이 이루어진 효시이다. 프란치스코의 작은 공동체
에서 시작한 이 수도회는 중세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이 큰 종교 단체로
성장해 갔다. 프란치스코의 증거자들은 특히 교회가 부유해지고 사제들 일부가 부패
하였던 그 시대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 구즈만은 사제로 서품 받은 후 알비파 이단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회두시키는 일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는데, 그들을 회두시키는
데는 지적 훈련을 쌓은 토대 위에 강력한 설교와 이에 곁들여 가난하고 단순한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표양을 보이는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제자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채택하고 교황 호노리노 3세로부터 1216년에 ‘설교 수도회’의
결성을 허가받았다. 도미니코회도 교회의 쇄신, 이단들의 회두, 지적 오류의 수정 등의
업적을 이루는데 있어 13세기의 위대한 본산이었다. 다른 종교 단체들 특히 새로
창설된 가르멜회와 아우구스티노회 같은 수도회들도 이 위대한 쇄신의 세기에 동참하였다.

( 4. 신지식, 신학 및 문학 )
- 13세기는 또한 중세의 사상과 문화의 정점이었다. 1170년, 지식의 새로운 중심지인
대학이 탄생했다. 대학은 처음에 학자들의 연합 내지 조합의 형식으로 출발하였다.
여기에 사제들이 모여 들게 되고 교회가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파리와 볼로냐에 각각
신학과 법학을 전공하는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고, 곧이어 옥스퍼드(1200), 캠브리지
(1209), 나폴리(1224), 살라망카(1220) 등에도 잇달아 설립되었다. 의학 및 법학
및 신학이 고급 연구 분야들이었고 특히 이들 중에서도 신학이 학문의 여왕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문헌들을 아라비아어로부터 라틴어로
번역하게 됨에 따라 신학 연구에 대한 새롭고도 논리적인 접근이 시작되었다.

- 역사 상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도 이 시대에 배출되었는데, 보나벤투라(1217-1274),
알베르토(1200-1280), 토마스 데 아퀴노(1225-1274)가 그들이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걸작 ‘신학 대전’은 천재성과 명료성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다. 스코트랜드의 프란치스코회
철학자인 존 둔스 스코투스(1266-1308)는 토마스 데 아퀴노보다 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위대한 저술가인 단테(1265-1321)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그의 작품
‘신곡’은 지옥, 연옥, 천당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걸작으로,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프란치스코회의 로저 베이컨(1214-1292)은 실험 과학의 선구자이다.
고딕식 사원이 하늘을 치솟고, 미술가들은 걸작들을 내놓았다. 13세기는 정녕 중세의
교회와 서방 문화의 절정기였음에 틀림없다.

# 이하 4장부터는 메모해야 할 내용들이 많아 본문의 ‘요약’에서 발췌함 #

[ 4장. 중세 말기,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1300-1650) ]

- 1300-1500년 사이의 중세 말기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대단한 시련의 시기였다.
교황들이 70년간(1305-1376)을 이탈리아의 정치적인 압력을 피하여 프랑스 아비뇽에서
살았던 것이다. 스웨덴의 성녀 브리지트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개혁을 촉구했고 교황의 로마 복귀를 종용했다. 그러나 더 커다란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1378-1417년 사이에, 처음에는 두 사람이다가 나중에는 세 사람
까지 서로 자기가 합법적인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대분열의 시대가 온 것이다.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다 영국사람 존 위클리프와 체코의
존 허스는 교회의 가르침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영성적인 각성의 표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톨릭 신비주의가 네덜란드,
독일, 영국에서 번창하였고, ‘준주 성범’ 같은 영성의 고전 작품들이 쓰여지게 되었다.
또한 잔 다르크의 환상이 프랑스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동방에서는 ‘마음의 기도’가
새로운 영성 생활의 시대를 열었다.

- 그러나 16세기 동안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일어 날 수 있는 원인 요소가
수없이 잠재하고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형편이었다. 교회는 재정이 궁핍해지자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성직을 부자나 세속 통치자들에게 팔아먹는 일이 생겨났고,
자연히 이들 부자나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야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제 일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독신 서약도 지키지 않았다. 성직 매매행위가
도처에 행행하였다. 교황들은 돈을 모아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문예 부흥 운동의 선두에
나서려 하였고, 성직 매매 행위와 정치적인 간여들에 정신이 팔려 교회가 직면한 영성적
위기를 돌볼 여지가 없었다. 1512년에 교황 율리오 2세가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거기서 결정된 개혁 칙령들은 이행된 것이 거의 없었다. 세속 통치자들이나
그 뒤의 교황들은 개혁에 대한 열성이 전혀 없었다.

- 이런 중대한 문제들 때문에,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성서를 강의하고 있던 교수이자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면죄부에 대한 95개조를 내다 건
것을 효시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를
떠날 생각이 없었으나, 독일의 귀족과 평민들이 일제히 루터를 지지하여 그들의
‘루터 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성서만이 자기들을 인도하는 교리임을
인정하고, 신앙만이 정당화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루터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많은
분야에서 가톨릭 신앙과 관습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나온 스위스 제네바의
칼빈, 취리히의 츠빙글리나 재세례론자들은 더 급진적으로 가톨릭 전통과 유산을 거부
하게 되었다.

- 16세기에 가톨릭교회는 이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스스로 개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루터가 나타나기 전에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가톨릭 인문주의
학자들이 개혁을 호소하고 있었다. 가톨릭 개혁의 선봉은 단연 스페인 사람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였다. 새로운 수도원이나 수녀원이 나타났고 기존의 수도원들도
개혁의 길을 걸었다. 가톨릭의 정체성은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강화되었다.
여기서 가톨릭 교리를 정리하고 기강을 강화하였으며 훌륭한 사제들을 양성할 신학교
제도를 확립시켰다. 교황이나 주교들은 예외 없이 개혁의 선두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성인들이 배출되었다. 예수회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극동 지방),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이사악 조그(북아메리카 대륙), 스페인 신비주의자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가르멜회), 예수회 신학자인 성 베드로 가니시오와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성 가롤로 보로메오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그리고
가난한자의 수호자 성 빈첸시오 드 폴이 그들이다. 15세기 말부터 불어 닥친 수많은
문제점의 심연에서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 번 바른 기강, 봉헌 그리고
명확한 교리로 무장한 강력하고 덕성스러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벌인 종교 개혁의 효과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이 개혁은 세 가지(3D)에 역점을 둔 것이었다.
즉 ‘Devotion(봉헌)’으로 경배의 새로운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Discipline(수련)’으로
잘못을 바로 잡고 정화된 삶을 사는 것, 그리고 ‘Doctrine(교리)’로 신앙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역사가 토마스 보켄코더는 이러한 개혁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 “1563년 트렌트 공의회가 끝나갈 즈음, 프로테스탄트는 이미 그들의 세력을 유럽의
절반 이상으로 확대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는 세기 후반에 와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트렌트 공의회 회칙이 발표되고 특히 예수회가 보여준 빛나는 활동과 재생된
교황권으로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활력이 솟아남에 따라, 잃었던 영토의 커다란 부분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폴란드가 가톨릭으로 돌아오고 독일의 대부분 지역, 프랑스 그리고
남부 네덜란드 등이 이런 모양으로 교황청과의 친교를 회복하였다. 이에 반하여 프로테스탄트는
1563년 이래 별다른 확산이 없었다. 이 밖에도 가톨릭교회는 해외 선교 활동으로, 유럽에서
입었던 손실을 보상받게 되었다.”

* 17세기 초반에 가톨릭의 해외 선교 활동으로 복음이 지구의 끝까지 전파되고 있는 사이,
유럽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국가 사이에 격렬한 종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종교 전쟁의 마지막 싸움은 독일에서 치러졌다. 삼십 년 전쟁(1618-1648)은 웨스트팔리아 조약(1648)의 체결로 종식되었고, 독일에서는 가톨릭, 루터교 및 칼빈교가 법률 앞에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각 나라의 특정 지역은 그들 나름대로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갖고
있으면서 다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기 일쑤였다. 비록 휴전이 성립되어
직접적인 교전 상태는 종식되었지만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회는 싸움판이 계속되었고 언제나
그 중심에는 종교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한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형태로든 하나의 ‘합리적인 종교’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하간 이런 어지러운 속에서도, 분열된 교회의 구석구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환하게 타오르는 곳이 여럿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유럽에서의
기반을 강화하고, 나아가 전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의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데 있어
충실한 자세를 잊지 않았다. 가톨릭교회는 끊임없이 커다란 시련에 봉착하였으나 그때마다
새로운 활력을 찾아 이들을 극복하여 왔다.

[ 5장. 현대의 가톨릭교회(1650-1900) ]

- 1650년부터 현재까지를 우리는 현대라 부른다.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이 출현하고
근본적으로 이성에 입각한 새로운 철학이 대두된 시기이다. 나중에는 인간 경험의 폭넓은
범위를 포함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이 통치하기 위하여 신권에 의존하는 사상은 철폐되고,
종교는 사회에서 점점 더 따돌림을 당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 이 현대의 초기 단계를, 과학과 이성에만 의존하는 철학의 대두로 종종 계몽주의 시대라
한다. 종교는 인류에게 분열을 가져오고, 이성은 단합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프랑스의
수학자 파스칼, 영국 성공회 주교 조셉 버틀러, 기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재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가톨릭교회가 갈릴레이를 단죄한 것이 현대 과학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가톨릭 신앙은 과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 프랑스는 1650-1800년 사이에 유럽의 가톨릭교회 위기의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루이 16세와 같은 절대주의 통치자나 일반 대중의 감정은 교회를 일상에서 분리시키려
했고 심지어는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가 교회의 설립을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가톨릭의 가르침이나 영성은 혼돈을 일으켜 엄격한 얀센주의 운동이나 피동적이고 정신적인
정적주의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하는 사람들이 예수회
수도자들이었다. 그러자 교황은 이 예수회를 억압하라는 정치적인 압력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그리고 1773년에는 전 세계에 걸쳐(러시아만 제외) 억압을 받게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허약한 상태는 프랑스 혁명(1789)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혁명은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그 대신 이성의 종교를 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때 생긴
‘지고의 존재 흠숭교파’가 바로 그것이었다. 서방사회는 이런 사태의 진전에 충격을 받았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시작했다.

- 19세기는 프랑스 혁명의 과잉 열기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각국에 의한 언론,
출판, 양심 및 종교의 자유 운동은 꾸준히 성장하여 갔다. 정치적인 자유주의 물결에
편승하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역사적 문학적 비평 기법을 성서에 적용
하고 가톨릭 신학 전반에 대한 새로운 점검을 해보려는 욕구가 일어나게 되었다.

- 가톨릭교회는 이런 움직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논거는, 다만 진정한
신앙만이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며 성서와 교회의 권위가 일반 생활에서 손상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런 현대적인 경향을 ‘오류에 대한 교서
요목(1684)’으로 단죄하였고, 뒤이어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신앙이
이성보다 우의에 있음을 확인하면서 어떤 정의된 사례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의 무류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 비오9세는 또한 1854년에 성모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를 확립하였다. 비록
교황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19세기 중 교황의 영성적인 권위는 크게 높아
졌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와 같은 강력한 지도력을 계속 발휘해 갔지만 한편으로
현대사회와의 대화도 증진시켜 나갔다. 그는 위대한 최초의 가톨릭 경제 사회 교서인
‘새로운 사태(1891)’을 발표하였다.

[ 6장. 20세기의 가톨릭교회(1900-1963) ]

- 20세기는 격변하는 시대이고 특히 가학과 기술이 가져다준 변화의 시대이다.
이 방면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분명히 지혜와 도덕성에서는 성장하지 못했다.
이 시대에는 그 어는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세계는 핵의 대재앙에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신의를 시샘하고 세계를 갈라놓았다. 파시즘과
나치즘 대 민주주의,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가난한 나라대 부자 나라, 이렇게 세계는
어지럽게 분열되었다. 서방에서는 세속적인 인도주의와 물질주의가 그리스도교의 힘을
삼켜 버렸고 동방에서는 대부분의 국가가 신앙을 억압하는 공산주의 치하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로마5,20). 교황 성 비오
10세는 1903년에서 1913년 사이에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는 예배와 가르침을
강화하였고 교회를 현대적인 오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교회
법전의 정비를 시작하여 1917년에 완성하였다. 그의 근대주의(현대적인 역사 및 성서
연구 기법을 사용하여 신앙의 어떤 부분을 부정)에 대한 단죄는 대단히 가혹한 것이었으나,
프로테스탄트를 진보와 근본주의자로 양분시킨 것과 똑같은 분열이 가톨릭교회에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교황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와 전 세계는
여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절대적인 중립을 유지하면서, 전쟁 당사자 간의
화해를 이끌어 내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통치가
시작되고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있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회개와 기도를, 특히 러시아의 개종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 교황 비오 11세(재위 1922-1939)는 1937년에 공산주의를 격렬히 단죄했으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에 의한 전체주의의 점증하는 위협에 대하여도
맞설 수밖에 없었다. 비오 11세는 가톨릭 신자들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하여 이들 정권과
정교 협약을 체결하였으나, 1937년에 이르러서는 이들 파시즘과 나치즘을 단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25년에 그가 설정한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전 세계를 향한 그리스도
왕권을 선언하였으며, 나아가 1931년에는 이와 관련한 사회 경제적 의미를 천명한 교서
‘사십 주년’을 발표하였다. 또 가톨릭 액션 운동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는 또 다른 세계대전을 겪게 되자 막후에서
수십만의 유대인들을 살려내는 활동을 지치지 않고 전개하였다. 교황은 또한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성서 비평과 연구 방법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교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도입하도록 개방하였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이라 하였고,
현대 사회를 반대하는 철옹성 같은 가톨릭교회라는 이미지를 부수어 버렸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만인 공통성을 강조하면서 비 이탈리아인인 추기경 수를 늘렸다. 또
공산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청하도록
권고하였다. 1950년 그는 성모 승천에 대한 교리를 설정했다.

[ 7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가톨릭교회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여기 서 교회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정의하고 현대 사회와의 관계를
설정하였다. 교황 23세(재위 1958-1963)는 과거의 계승과 영원한 진리를 유지
하면서도 교회를 쇄신하고 첨단화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의 역할을 강조한 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 신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의 역할을 정의함으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성시킨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이 그 기조 문서가 되며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회복하는데 있어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으로 가톨릭의 참여를 개방하였다. ‘비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에서는 가톨릭과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모든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는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에서 확인되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른 주요 문서들은 ‘계시 헌장’과 공의회 문서중 가장 분량이
큰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이 있다. 이 교소에서는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가톨릭의
일반적인 태도를 천명하고 오늘날 특정 부문별로 접근하는데 필요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전례 헌장은 가톨릭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준 문서이다.
여러 가지 전례상의 개혁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미사를 자국어로 드리게 한 것이
두드러진 조치이다. 전체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엄청난 긍정적 충격을 가져
왔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새로운 성령 강림’을 기도한 교황 요한23세의 기도가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 그는 누구인가? 그는 자애스러운
일흔 여섯 살의 추기경으로서, 타협의 결과로 선출된 과도기적인 교황으로 생각된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것을 성령의 격려 덕으로 돌린다. 또 그는 오래된
형식의 교리 반복을 허용하지 않고 현대 세계를 위한 새로운 가톨릭 전통을 정의하라고
요구하셨다. 그리고 사회 질서에 관한 교서 ‘어머니와 스승’과 세계 평화에 관한 교서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여 현대의 신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은 이 교황은 첫 번째 회기를 마치고 갑자기 서거하였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종료시키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 가톨릭교회를
가르치는 지극히 어려운 작업을 떠맡은 분이 바로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내놓은 혁명적인 작업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한편
으로는 이들의 점진적인 실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중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가장 불안한 시대를 지나가게 되었다. 진정한 쇄신의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그에 수반되어 무책임한 실험도 여기저기서 자행되었다. 어떤
가톨릭 신자는 공의회를 왜곡된 방향으로 이해하였으며, 많은 신부와 수도자들은 기강이
느슨해지고 세속과 접촉을 재촉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그들의 직분을 떠나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룩한 긍정적인 측면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만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교회가 현대 세계에 개방되지 않았더라면 전체적인
교회의 모습은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인도하셨다.

- 교황 바오로 1세는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지 33일 만에 서거했다. 그 뒤를 이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첫 번째 폴란드인 교황이자, 17세기 이후 최초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실천에 헌신하였다.
그의 교서들은 그리스도의 수위권과 하느님의 자비 그리고 노동자의 권위와 권리를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인간 개인의 권위와 정통 가톨릭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이 그의
교황 직분의 주제를 이루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탁월한 존재이며 아울러 교회 일치 관계를 이룩하는데 있어 능력을
발휘한 분이다. 그는 역대 교황보다도 많은 국가를 방문하였고, 자신의 생명을 노린 암살
기도까지 이겨낸 분이다.

[ 8장.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성모 마리아의 역할 ]

-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성령의 힘으로 부단하게 쇄신을 거듭해 온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투쟁과 쇠퇴의 기간에도 세상 끝날 까지 교회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는 예수의 약속은, 역경을 이겨내고 꾸준히 솟아나는 쇄신과 개혁의 물결로
증명되었다. 비록 교회는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역사 속에 수많은 성인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때로는 생명을 바쳐 가면서 용감하게 증언한 영웅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 교회의 어머니요 전형이며,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전령사로서의 성모마리아의
역할도 살펴보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 규정한 대로,
성모 마리아는 교회를 위한 강력한 중재자로 계속하여 교회를 돌보고 계신다.
또 성모는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당신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추종자
이며 모범적인 제자임을 보여 주셨다. 비록 가톨릭 신자들이 꼭 믿어야 될 것은
아니지만,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역사상 여러 번 하느님의 말씀이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구약 시대에 하느님의 전령사였던
천사들에 비교될 수 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메시지는 1917년
파티마의 성모께서 주신 속죄와 개종 그리고 기도의 메시지이다. 그 이후로도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여러 번 있었는데, 모두 파티마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복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end.

다음의 [ 금주의 독서 메모/ 025~030 ]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처음의 [ 금주의 독서 메모/ 011~018 ]는 여기를 클릭하세요.